“그 입 닥쳐!”한소은이 차갑게 말했다.“네가 악독하다는 거 알아. 넌 죽어서 자기가 지옥에 떨어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네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덕을 쌓아야 하지 않겠어?”주효영은 얼굴을 움켜쥔 채 한소은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감히 반박하지는 못했다.자신이 정말 한소은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주효영은 차갑고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너는 네 아이를 위해 덕을 쌓으려고 이런 실험에 참여하는 거야? 너도 나와 다르지 않아.”“누가 먼저 업보를 받게 될지 두고 보자고!”주효영의 말을 들은 한소은이 문득 뭔가 떠올라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원철수의 몸에 있는 그거, 네가 한 짓이지?”그녀의 말에 주효영은 흠칫 놀라는 듯했지만, 이윽고 다시 음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왜, 벌써 발작을 일으킨 거야?”이 말을 듣고 한소은은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고독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 고독은 주효영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그냥 고독일 뿐이야. 발작한다고 해서 뭐 어떻다는 거지?”대수롭지 않게 여긴 한소은은 일부러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로 말했다.“이런 방면에서 나와 내 사부가 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가?”그러나 주효영은 자신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가볍게 웃었다.“그냥 고독일 뿐이라고? 그건 보통 고독이 아니야! 하지만, 그게 고독이라는 걸 알아차렸다는 건 내가 예상하지 못했어.”주효영이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 주변 사람이 벌써 감염된 건가? 너도 알겠지만, 일반 고독은 전염성이 거의 없어. 그러니 원철수 몸에 있는 건 일반 고독이 아니라는 거지.”그녀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한소은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하려고 했지만 방금 맞은 자기의 뺨을 생각하니 다시 약간 뒤로 물러났다.주효영은 한소은을 경계하며 바라보았지만 입은 여전히 한소은을 비아냥거렸다.“한소은, 그렇게 잘난 체하더니. 여기에 들어온다고 해서 뭐라도 바꿀 수
한소은의 담담한 얼굴을 보고 주효영은 잠시 동안 그녀가 한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주효영, 너무 잘난 체하지 마.”한소은은 얼굴의 웃음기를 거두고 무거운 한마디를 주효영에게 던졌다.그녀는 주효영이 정신을 차렸으면 했다.“너나 잘난 척하지 마!”그러나 주효영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한소은, 딱 기다려. 네가 망하는 걸 두고 볼 거야.”말을 마치고 주효영은 돌아서서 실험실을 나갔다.그녀의 모습이 문밖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한소은의 눈동자는 방금보다 한층 더 차가워졌다.사실 주효영이 말한 것도 틀림없었다. 방금 한 말들은 확실히 그녀를 속이려 한 말이다.김서진이 전화로 알려준 것만으로는 원철수의 몸에 무슨 고독이 있는지, 어떻게 전파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고독을 어떻게 풀지는 말할 것도 없다.그러나, 주효영은 분명 그 고독이 무슨 고독인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방금 그녀가 무심코 흘린 말에서 분석하면 이 고독은 아마 그들이 생각했던 쪽이 아니라 해외의 다른 종류일 것이다.고의서에서 그것을 찾는 것도 물론 맞지만 해외의 자료도 결합해야 할 것이다.한소은은 가능한 한 빨리 이 사실을 원청현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지금 원청현의 상태가 어떤지 한소은은 알 수 없었다. 김서진은 그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 영감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한소은은 더 잘 알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이를 악물며 괜찮다고 할 것이다.지금은 실험실의 일로 너무 바빠 그 쪽을 돌보기 어려웠다. 그저 이쪽의 일을 빨리 끝내고 원청현에게 가 고독의 확산을 막고 싶었다.주효영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임상언이 왔다.들어와서 먼저 한소은의 실험대를 살펴보며 공식적인 물음을 물었다.“진도는 어떻게 돼가요?”한소은은 덤덤하게 대답했다.“테스트하고 있는 거 안 보여요?”그녀는 턱으로 실험대를 가리키며 말했다.“데이터 결과를 기다려야 알 수 있어요.”두 사람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임상언은 고
앞서 김서진의 전화기가 있었기에 임상언은 그녀가 무엇을 물었는지 바로 알아들었다.“아니요! 절대 아니에요!”“김서진과 당신이 이미 내게 신뢰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절대 모르는 일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게다가 여기서 보았듯이 나는 사실 아무런 권력도 없어요. 보스는 나를 그렇게 신뢰하지 않아요. 나에게 이런 것을 알려줄 리가 없죠.”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매우 언짢아하며 말했다.“나는 단지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게다가 원철수는 여기서 확실히 고생을 많이 했었어요.”“그때 그런 기회가 있어서 그가 도망갈 수 있게 도와준 것뿐이에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들의 계획 속에 있었고, 그들이 나를 위해 파놓은 함정이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네요. 나도……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간 거라고요!”김서진의 전화를 받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임성언은 아주 괴로워했다.그렇게 경계했는데 다른 사람의 계략에 넘어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러나 돌이켜보면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임상언은 자기가 원철수를 도와준 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그들의 감시하에 있었다.임상언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앞뒤 좌우를 보았다.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그들이 들을까 봐 두려워했다.한소은은 오히려 매우 침착하게 두 손에 주머니에 넣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임상언에게 말했다.“둘러서 볼 필요 없어요. 여기서 그들의 감시를 피할 수 없어요. 사실 당신과 나의 모든 교류는 그들도 틀림없이 다 봤을 거예요.”“그럼……!!!”임상언은 크게 놀라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그가 멈추자 한소은도 함께 멈추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임상언을 바라보았는데, 마치 활에 놀란 한 마리의 새와 같은 모습이었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치켜 올리며 말했다.“이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사실 이 곳에 그들이 그렇게 많은 감시와 도청 장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간단하지 않다. 이 간교한 사람들을 상대할 때 한소은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할 수밖에 없다.임상언도 그 도리를 잘 알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 마요. 내가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주효영에게서 단서를 찾아낼게요.”임상언이 잠시 멈칫하다 확신이 서지 않는지 물었다.“그런데…… 어떻게 주효영이 한 거라는 걸 확신해요?”“분명 주효영이 한 짓이에요.”한소은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에 한의약을 아는 고수가 더 있지 않은 이상 주효영일 수밖에 없어요.”임상언은 곧 고개를 저었다.“주효영과 당신을 제외하면 없을 거예요. 나머지는 거의 해외에서 데려온 사람이거든요.”이 점은 확신할 수 있다. 이곳의 인원 명단은 모두 임상언의 손을 거쳤다.물론, 그가 모르는 것이 더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다.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혹시 태국인도 있나요?”임상언은 어리둥절했다.“없는 것 같은데요.”“확실해요?”한소은이 계속 추궁하다가 임상언도 망설여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가 다시 한번 찾아볼게요. 하지만 있을 가능성이 작아요. 왜요? 혹시 태국 쪽을 의심하고 있는 거예요?”“꼭 그렇지는 않아요.”한소은은 담담하게 말했다.“아니면 주효영이 태국에 가본 적이 있는지 알아봐 줘요.”“네. 꼭 알아볼게요!”한소은이 믿지 않은 얼굴을 하자 임상언은 더욱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김서진이 남이의 행방을 찾아냈어요. 내게 남이를 구해주겠다고 약속도 했고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도울게요. 사실 당신들을 돕는 것도 나를 돕는 거죠.”“남이의 행방을 찾았다고요?”이 말을 들은 한소은은 깜짝 놀랐다.어쨌든 아이는 이 일과는 상관이 없다.그녀는 계속 임남이 어떻게 되지 않았나 걱정하고 있었다. 김서진이 사람을 보내 여기저기 단서를 찾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임남을 찾아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찾았대요!”임상언은 미소를 지으며
날이 밝았을 때, 김서진은 상황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원청현이 혼수상태에 빠졌다.아침 일찍 원철수가 죽을 끓여 원청현에게 가져갔다. 그러나 위층에 올라가서는 원청현의 얼굴색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붉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깊은 잠에 빠졌는지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도 못했다. 원철수가 그의 이마를 만져보니 불덩이처럼 뜨거웠다.체온은 39도까지 올라갔지만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아 해열제도 쉽게 먹이지 못했다.해열제가 그 고독을 자극해 더 큰 반응을 일으킬지 알 수 없었다. 물리적으로 온도를 낮추는 방법으로 원청현의 몸을 몇 번이고 닦아줄 수밖에 없었다.한 번으로 체온이 조금 떨어졌지만, 원청현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김서진도 와서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원철수는 이러다가 큰일이 날 것 같아 개인 병원에 모셔가거나 홈닥터를 불러와 보게 하는 건 어떨지 물어보려 했지만, 고독에 대해서 의사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다시 삼켰다.점심때가 되어서 진정기가 김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정기가 지금 어디냐고 물었을 때 김서진은 한참 침묵하더니 대답했다.“아마 당분간은 거기에 갈 수 없을 거 같아요.”이쪽의 상황을 대충 말했고 진정기에게 숨기지 않았다.진정기의 신분이 남다르다 보니 접할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이 신비한 조직에 대해서 그도 조금 알고 있었다. 다만, 주효영도 여기에 관여한 줄은 몰랐다.게다가 자기가 중독된 일 등등으로 이 조직이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걸 몸소 느꼈다.진정기는 인내심 있게 김서진의 말을 다 듣고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알았어요. 내가 도울 건 없나요?”“일단은 없어요.”김서진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가능하면 최근 시내의 상황을 주의 깊게 봐줬으면 해요. 바이러스가 확산하지 않게 조심히 해줘요. 물론, 지금 있는 바이러스 말고도 그들이 연구하는 바이러스는 수도 없이 많으니 다르게 나타나는지도 확인해야 해요.”진정기는 곧장 대
진정기가 경계한다는 걸 눈치챈 김서진이 말했다.“당신도 아는 사람이에요.”이렇게 말하고 뭔가 떠오른 김서진이 진정기에게 말했다.“먼저 끊을게요. 일이 있으면 다시 전화할게요.”“그럼 의사는…….”“일단 필요 없을 거 같아요.”김서진이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전화를 끊고 원 철수에게 다가가 물었다.“왜 필요 없다는 거지?”“외부의 의사들은 소용이 없어. 이건 평범한 병이 아니라는 알잖아!”원철수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김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게다가 내가 의사란 걸 잊지 마.”그러다 원철수가 갑자기 말했다.그의 말에 김서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난 원래 의사야. 명의였다는 거 너도 알잖아.”원철수는 재차 자기가 의사였고 그것도 이름이 자자한 의사였다는 걸 강조했다.다만, 그가 이 말을 할 때의 말투는 평소와 달랐다.이전에는 이렇게 말할 때마다 그는 교만하고 자신만만하고 심지어는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올곧았고 차분했다.그는 또박또박하고 확고하게 자신이 의사라고 말했다.“요즘 너무 퇴폐적이었어. 그 마굴에서 나온 이후 나는 겁쟁이처럼 도피하고만 있었어. 둘째 할아버지가 나에게 잘해주셨고 모두가 나에게 베푸는 관심을 즐기고 있었던 거야. 둘째 할아버지와 모든 사람들이 쓰러진 이후 나는 혼란스러웠어. 내가 의사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을 정도로.”“나는 스스로를 의심하고, 스스로를 부정했어. 나는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병을 치료 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다 예전에 둘째 할아버지가 말했던 것을 잊어버렸지. 비록 의사라 할지라도 치료하면서 배운다는 그 한마디를 말이야.”원철수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마치 예전에 원청현이 그에게 한 말이 생각이 난 듯 감개무량하게 말했다.그런 것들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원청현이 그에게 얼버무리는 말을 했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고독에 대해서 잘 모르
시계의 바늘이 조금씩 움직이고, 시간은 1분 1초가 지나간다.초침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방안은 조용했다.한소은은 침대 옆에 앉아 한 손으로는 자기 아랫배를 쓰다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드폰의 화면을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다.긴장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자신이 이렇게 커서 지금처럼 긴장하는 것은 처음이었다.이전에는 어떤 어려움에 부딪혀도 그녀는 모두 극복할 수 있었고, 모두 직면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번에 그녀가 직면한 것은 단순한 성공과 실패가 아니며 그녀가 직면한 것은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것들이다.방 안에는 한소은만 있었다. 시간이 되면 임상언과 사무실 아래층서 만나기로 했다.비록 모든 것이 그들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지만 어쨌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정오, 바로 “보스”가 가장 허약하고 방비가 가장 느슨한 때이다. “보스” 곁에 항상 붙어있는 경호원은 임상언이 방법을 대서 끌어낼 것이다.남은 몇 명의 똘마니들은 한소은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지금 고민해야 하는 건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한소은 역시 확신이 서지 않아 내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여기서 그녀는 핸드폰 소리를 끄고 진동 모드로 전환했다. 손바닥에서 윙윙거리며 핸드폰이 손이 저릴 정도로 진동했다.김서진에게 무슨 안 좋은 소식이 있을까 싶어 순간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실험실의 일로 바빠서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쪽의 상황을 궁금해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한소은은 핸드폰을 쓱 보았다. 뜻밖에도 오이연의 전화였다.김서진이 아니어서 한숨 돌렸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오이연 쪽도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닐 거 같아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한소은은 약간 피곤함을 느꼈다.“소은 언니, 그게…….”오이연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한소은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다시 멈추고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한소은은 정말 시간이 없다. 매일 이곳에 갇혀 있으니, 마치 우리에 갇혀 사는 것 같았다.그리고 어느 날 이곳을 떠난다 해도 바깥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이 일을 참가한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물러날 수 있을까?그래서, 향수 든 사업이든 모두 일단 제쳐 두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한소은의 말을 잘 듣던 오이연은 이 일에서 조금 주저했다.“그런데…… 상대는 Y 국 왕실 쪽 사람들이고 여기에 온다고 했어.”“곧 제경에 도착할 거야. 나는 언니가 그들과 다 말한 줄 알았지.”“내가 언제? 난…….”막 오이연의 말을 반박하려던 한소은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나서 말을 멈추었다.그러고는 감았던 눈을 뜨고 오이연에게 물었다.“방금 그들이 어디 사람이라고?”“Y 국.”“Y 국 어디?”한소은은 급하게 이어서 물었다.오이연은 그녀가 이런 걸 왜 묻는지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왕…… 왕실! 내가 전에 말했잖아.”“비록 우리가 사업을 하는 범위가 넓고, 고위층과 상류층의 주문을 받아본 적 없는 건 아니지만 왕실 사람들은 아무래도 다르지. 만약 우리가 그들의 미움을 산다면 우리의 작업실 뿐만 아니라 김서진 씨의 사업에도 영향을 끼칠까 봐 두려워.”상인은 절대 정치인에게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상대가 왕실 사람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정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일만 보 물러서서 말하자면, 설사 김씨 그룹의 사업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이런 일로 상대방에게 미움을 사는 건 멍청한 짓이다.그들은 단지 자기만의 향수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 것일 뿐, 어떤 지나친 요구도 아니었다.비록 이 대목에서는 확실히 그들의 주문을 완성하기 힘들 긴 하지만 한소은의 능력으로 너무 무리인 일도 아니다.“알아, 나도 알아.”한소은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언제 만나자고 했지?”“그건…… 나도 모르겠어. 최근 언니에게 보낸 메일은 답장이 없고, 전화도 모두 끊겼다고 하더라고. 그쪽에서 좀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