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철은 유해나의 눈을 보며 순간 말문이 막혔다.유해나가 한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마치 이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자기 자신을 설득한 것 같지만,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엊그저께만 해도 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는데, 벌써 받아들이게 되었다고?아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주현철은 바삐 말했다.“당신이 받아들였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왜 갑자기 받아들인 거지?”“나도 몰라요. 어쩌면 하늘이 내가 너무 슬프지 않길 바란 거겠죠!”유해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천장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갑자기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아, 왜 그렇게 질문이 많아요! 내가 받아들인 건 좋은 일이잖아요! 내가 우리 효영이를 따라 죽어야 좋겠어요?!”갑자기 난데없는 꾸지람을 들은 주현철은 어이가 없었지만, 오히려 옛날 느낌을 조금 되찾았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그는 이렇게 떠들어댔지만, 마음속의 불안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됐어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 할래요. 이제 쇼핑하러 가야겠어요.”유해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나서 문밖으로 걸어갔다.이번에 주현철은 그녀를 막지 않았고, 문 앞까지 따라가서 그녀가 운전사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타는 것을 배웅했다.얼굴은 평온하고 담담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의심을 놓지 않았다.차에 탄 유해나는 얼굴에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머리를 숙이고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집에서 나왔어. 곧 도착할 거야.상대방은 “OK”라는 이모티콘으로 답장을 보냈다.단지 평범한 이모티콘일 뿐이지만, 유해나는 보물을 얻은 것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유해나는 휴대폰을 가슴에 단단히 붙이고, 마치 무슨 보물을 감추는 것처럼 웃다가 다시 기사에게 말했다.“장 기사님, 좀 더 빨리 가주세요.”차가 계속 속도를 내다가 어느 카페에 도착해서야 멈췄다.기사가 위치를 한 번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유해나에게 물었다.“사모님, 여기가 맞습니까?”유해나는 밖을 내다보더니, 또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유해나는 문손잡이를 돌려서 아주 쉽게 문을 열었다.방문을 활짝 연 순간 유해나의 흥분된 마음은 찬물을 끼얹은 듯 식어버렸다.방 안이 텅 비어서 한 사람도 없었다.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밀실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닌지 확인했다.그러다 다급하게 핸드폰을 켜 메시지를 보냈다.[도착했어. 어디 있는 거야?]상대방의 답장은 아주 빨랐다.[상 위에 가방이 하나 있어. 열어봐.]유해나는 고개를 돌려 가방을 찾아보았다. 과연 구석에 있는 옆 탁자 위에 검은색 가방 하나가 보였다.다가가 열어보니 안에는 밀봉된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봉투 안에 작은 병 두 개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용도인지 모르고 열어보려는데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유해나는 손에 들었던 물건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확인했다.[안의 물건을 열지 마. 집에 가져가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숨겨 둬.]미심쩍은 마음에 가방 안의 물건을 한 번 보았다. 다행히 문자가 빨리 와서 열어 보지는 못했지만,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느꼈다.유해나가 망설이는 사이 핸드폰의 새로운 문자가 다시 도착했다.[호기심에 열어보지 마!! 내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주효영은 언제나 유해나에게 인내심이 없었다. 항상 그녀에게 차가운 말투로 말했었지만, 지금은 유해나가 그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었다.유해나는 곧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가방의 물건을 뒤지지 않고 핸드폰을 들고 질문을 던졌다.[효영아, 너 맞지?]계속 답장이 빨랐던 그쪽에서는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그녀는 조급해하며 다시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너 아직 살아 있지? 엄마를 만나러 오면 안 되는 거야?]유해나는 잠시 멈추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제발!]이 단어가 나오자 유해나의 눈물은 참지 못하고 흘러내려 핸드폰 화면에 방울방울 떨어졌다.그럼에도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질까 두려운 것처럼 작은 휴대폰을 쥐고 눈을 깜빡이지 못했다.딸이 떠난 후로 그녀는 자신의 세상이 무너져 내려 살고
‘주효영’이 이 일을 주현철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 유해나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 유해나는 ‘딸’ 이 시키는 대로 다 했다. 그저 딸이 자기 곁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었다.문자를 보낸 사람의 안내에 따라 유해나는 여기에 도착했다. 원래 유해나는 밤낮으로 생각하던 딸을 볼 줄 알았는데, 결국 여기엔 아무도 없었고 오직 가방만 있을 뿐이었다.유해나가 슬퍼하면서 혹시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닌지 의심할 때, 마침내 핸드폰이 울리고 문자가 왔다.-물건을 잘 챙기고 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짧은 문구였지만, 이 말은 마치 그녀에게 무한한 힘을 주는 것 같았다.‘내가 집에 갈 때까지 기다려, 내가 집에 갈 때까지 기다려!’‘이건 우리 효영이야! 틀림없어!’유해나의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곧 튀어나올 것 같았고, 핸드폰을 꼭 쥐고 그것을 자기 가슴에 꼭 붙였다.마치 가장 중요한 보물을 품에 안은 것 같았다.이때 문자가 연달아 왔다.[방을 4시간 예약했으니, 잠시 쉬었다가 가.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게.][물건은 돌아가서 잘 숨기고, 문자는 꼭 깨끗이 지워야 해.]유해나는 문자를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바쁘게 답장하였다[그럼 언제 널 만날 수 있니?]한참 동안 기다렸는데 다시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풍선처럼 부풀었던 유해나의 마음은 마치 돌이 된 듯 바다에 다시 잠겼다.원래는 다시 물어보려고 했는데, 편집을 반쯤 하고 또 삭제했다.유해나는 주효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설명할 일을 다 설명했으니, 절대 한 글자도, 한마디도 더 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주효영을 보지도 못하고 목소리를 듣지도 못해 조금 아쉬웠지만, 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으니 살아갈 희망이 생겼다.주효영이 아직 살아 있는 한, 다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주효영이 무엇을 시키든 유해나는 다 할 것이다. 죽으라고 해도 아마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면서 검은 가방의 지퍼를 채워 가지고 왔던 가방에 넣고 조심스럽게
“네가 신선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여기에 왔으니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그렇지 않으면 내 가족으로 나를 위협할 거야?”한소은은 가볍게 웃었다.“아니, 당신들은 이 정도 수단 외에 다른 것은 없어? 당신들이 밖에서 어떻게 날뛰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중국이고 당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그러나 남자는 한소은보다 더 하찮게 웃으며, 일어나서 넓은 창가로 가서 발밑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았다.“중국이라 해서 뭐 어때, 모든 것은 역시 나의 통제 속에 있잖아! 이 빌딩, 여기의 모든 것은 내 말을 들어야 하고, 곧 모든 사람은 나에게 신복해야 할 것이야!”남자가 두 팔을 벌리고 서서 폭소를 터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소은은 한순간 발을 날려 그를 유리창 밖으로 걷어차버리고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어 했다.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반드시 핵심 포인트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R10은 지금까지 한소은의 손에 넘겨지지 않았다. 아마 매우 중요한 것일 것이다.숨을 크게 들이쉬어 자신의 감정을 안정시키고 한소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실험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인데. 만약 나조차도 성공할 수 없다면 당신들은 헛수고한 거 아니야?”“당신이 나를 죽이고 내 가족과 친구를 죽이고 모든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뭐 어쩌겠어. 결국은 일패도지할 거 아니야!”하지만 남자는 한소은의 말에 화나지 않고 경멸적으로 웃으며 말했다.“시간을 끌어서 실험을 성공하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내가 방법이 없을 줄 알아?”“내가 말하는데 만약 실험이 성공한다면, 내 발밑에 신복하는 사람들은 모두 살길이 남아 있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것이야! 그런데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잠시 멈추자, 남자는 천천히 말했다.“나는 이 세상을 파괴할 것이야!”“당신이 만약 그런 능력이 있다면, 나를 찾았겠어?”한소은은 믿지 않고 남자를 자극했다.남자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눈가로
한소은의 말에 따라 남자의 눈동자는 점점 더 빨리 움직였다. 좌우를 훑어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가슴의 기복은 심해졌고 그 작은 몸뚱어리와 정반대로 매우 우스꽝스러워 보였다.“맞아. 나는 성공하고 싶어. 그래서 그전에 절대 자신을 죽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만약 너희들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다면, 모두 함께 죽을 거야!”남자는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움켜쥔 것처럼 흉악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의자에 올라앉아 다리를 꼬고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임상언이 너한테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 그런데 나는 너희들한테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라고 충고해. 너희들이 우리를 이길 수 없어.”“당신들?”한소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놀랐어? 너희들은 우리가 조직이고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잖아.”어깨를 으쓱거리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한소은, 나에게 말해봐, 너의 진전이…… 어떻게 됐어?”남자는 두 손을 턱에 괴고 몸을 앞으로 숙이어 팔꿈치를 책상에 댔다. 원래는 탐구하는 눈빛이었는데, 이 모습은 정말 이상했다.“진전이 없어.”한소은은 아주 직접적으로 말했다.“당신이 나한테 준 것은 궁극적인 목표물이 전혀 아니야. 나더러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당신 말대로 시간이 촉박하고 임무가 막중하니 그럼 바로 궁극적인 목표물을 나한테 넘겨줘야 하지 않아? 그런데 당신은 쓸모없는 프로젝트를 하게 하는 것이 무슨 뜻이야? 당신 스스로 시간을 끄는 것이잖아.”한소은은 당당했다. 그러자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검지를 내밀어 흔들었다.“No! No! No! 여기서 쓸모없는 프로젝트는 하나도 없어. 사람마다 다른 역할을 하고 있는 거야. 예를 들면…….”“예를 들면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키고, 스스로 통제하는 의식을 잃게 하는 것? 예를 들면 바이러스가 지각 없이 인간의 몸에 침투하여 자신의 면역 세포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
맑은 하이힐 소리에 아무렇게나 걷어올린 곱슬머리, 그리고 그 정교한 메이크업의 매혹적인 아이라인은 정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주효영.”한소은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역시 너였구나!”그날 실험실에서 한소은은 이 몸매와 말투, 일하는 방식이 모두 주효영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원래 한소은은 주효영이 죽지 않았다고 의심했지만 지금 보니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검증한 셈이다.임상언은 미간을 찌푸리고 시선은 주효영에게 단단히 고정시킨 채 생각에 잠겼다.“당연히 나지.”주효영은 가면을 쓴 남자의 옆으로 걸어가 굳게 서있었고 이전처럼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나와 사장님의 목표는 일치하거든. 실험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죽을 수 있겠어?”“그래서 그 시체는…….”“희생양을 찾아서 DNA검사 결과를 고치는 작은 동작을 하는 것은 우리 직업에 있어서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주효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말투는 가벼워 마치 자신의 속임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인 것 같았고 심지어 약간의 교만과 자부심도 안에 있었다.“넌 경찰을 빙빙 돌려 놀렸다고 해서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주효영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득의양양함을 보면서 한소은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나 주효영은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웃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주효영은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성취의 기쁨이 얼굴 전체에 써져 있었다.지금 밖에서는 주효영이 이미 죽은 줄 알고 심지어 한소은 자신까지도 이전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어쨌든 법의학 결과는 그렇게 쉽게 조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다!예를 들어, 이전에 그렇게 엄격한 X 부서까지도 이미 그들의 사람을 배치했으니 아직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그리고 이 조직의 세력이 방대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들의 약물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임상언과 같이 협박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한소은은 임상
임상언은 물론 심리적 불균형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줄곧 사장님이 누구를 믿지 않고 누구든지 의심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효영에게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려주다니?금고 안에서 약간 노란빛이 도는 크라프트지 봉투를 꺼내어 주효영이 몸을 돌린 순간, 한소은은 그 안에 작은 깡통이 하나 더 있는 것을 언뜻 보았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고 단지 한 귀퉁이만 언뜻 보았는데 금고의 문은 다시 닫혔다.문을 닫은 후 딸깍 소리가 나더니 저절로 잠겼다. 주효영은 크라프트지 봉투를 안고 돌아와 두 사람을 한 번 보고 웃으며 말했다.“너희들은 비밀번호를 훔쳐보지 않았지?”주효영은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지만 진지하게 묻는 듯했다. 그러자 임상언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네가 이렇게 전문적이고 빈틈없이 숨겼는데 누가 볼 수 있겠어.”잠시 멈추었다가 또 한마디 덧붙였다.“그리고 실험실의 비밀번호는 매일 바뀌는데 이 금고의 비밀번호도 매번 바뀔지도 모르지.”임상언은 뒤의 이 말을 할 때 “사장님”을 보면서 표정을 관찰했다. 그러자 주효영이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너의 이 말이 맞았어! 매번 바뀌지. 그러니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지금 우리는 한배에 탄 사람이야. 실험을 성공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영광이야!”주효영은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그 크라프트지 봉투를 건네지 않았다. 한소은은 주효영을 보고 먼저 손을 내밀어 받으려 하지 않고 얼굴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여자가 내 조력자라고?”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옳다는 표시를 했다.“나는 왜 내가 이 여자의 조력자라는 생각이 들지?”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한소은은 비꼬는 듯 말했다.“나의 실험이 일단 시작되면 도대체 누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거야?”“당연히 네 말을 들어야지!”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리곤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받치고 약간 비틀린 턱을 괴고, 목소리는 비록 잠잠하고 듣기 거북했지만 매우 확고했다.“이왕 이렇게 된 이상…….”
“그런데!”한소은은 잠시 멈추었다.“나는 요구가 하나 있어!”“말해.”남자는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고 전혀 마음에 놓지 않았다.“5일 후에 나는 당신한테 성과를 주고 이곳을 떠날 거야.”한소은이 조용히 말했다.“안전하게.”“안 돼!”생각도 하지 않고 남자는 바로 거절했으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네가 나한테 준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성공했는지 안 했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모든 것은 일이 성사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한소은은 곧 물었다.“무슨 일이 성사된다는 거야? 어떻게 해야 일이 성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남자의 반응도 빨랐다. 곧 한소은이 자신의 말을 떠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순간 침묵했다. 몇 초 동안 침묵한 후에 남자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한소은, 너는 참으로 약삭빠르구나. 하마터면 너의 도에 넘어갈 뻔했네. 왜, 내 말을 떠보고 싶은 거야?”“걱정 마. 네가 알고 싶은 것은 분명 다 알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알아야 할 때가 아니야.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 나를 포함해서 모두 자신만의 분업이 있어!”남자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러니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망상하지 말고, 자신의 본분을 잘해. 조직은 조직에 기여한 사람한테 절대 푸대접하지 않을 거야! 물론 조직을 배신한 사람은 가만두지 않을 거야!”남자는 차갑게 말한 후 천천히 일어나 의자 위에 섰다.남자는 비록 그곳에 서 있어도 사실 별로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압박감은 김서진이 주는 것과는 달랐다.김서진은 사람으로 하여금 왕의 강인함을 느끼게 했다. 하여 김서진의 결정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람을 설득력 있게 했고 자신도 모르게 복종하게 하고 말을 따르도록 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마음속으로부터 공포를 느끼게 했다.남자의 자체, 눈빛, 심지어 모든 것까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람은 비뚤어진 사람, 변태적인 사람이고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