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보 같은 놈아, 네 머리에는 물이 들었구나!”진정기의 온화한 얼굴이 갑자기 변하더니, 닥치는 대로 가장자리에 있는 베개를 집어 들어 주현철을 향해 내리쳤다.“매형!”주현철은 깜짝 놀라 몸을 비켜 베개를 피하며 전전긍긍하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진정기가 베개를 던지는 힘이 얼마나 큰 것도 아니었다. 오랜 잠에서 이제 겨우 깨어나다 보니 사실 조금의 힘도 없었다. 베개를 힘껏 내던져도 침대를 겨우 벗어났을 정도였다. 그런 힘으로 주현철이 피하지 않는다 해도 그를 맞힐 수는 없었다.그러나 진정기가 눈을 뜨고 주현철을 바라본다는 사실 자체가 위엄이 있었고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주현철은 줄곧 진정기에게 눌려 살았기 때문에 주현철은 그를 두려워했다.진정기가 깨어나기 몇 분 전에 자신이 소란을 피우기도 했고, 또 그의 딸을 욕하기도 했다. 지금 진정기에게 이렇게 욕하고 얻어맞으니 순간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뜨끔했다.“이 멍청한 놈아! 내가 며칠 동안 잠이 들었을 뿐인데 여기서 이런 일들을 저질러? 그동안 내가 화도 안 내고 잘해주니까 내가 만만하다 생각하는 거야? 밖에서 네가 한 짓들! 내가 모르는 줄 알아? 지금 당장, 이 방에서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꺼져!”진정기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걸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현철의 체면을 깎아내리며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다.주현철은 자기가 데려온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조금도 남지 않았지만, 아무런 대꾸도 감히 할 수 없었다. 마치 예전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속으로 조금 불복할 뿐이었다.“매형이 잠든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난 다 매형을 위해서…… 이 사람한테 넘어가지 말아야 해요.”주현철은 진정기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돌리며 우물쭈물했다.“꺼져!”진정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힘껏 호통을 쳤다. 이어서 또 한마디 덧붙였다.“만약 네 손에 쥐고 있는 프로젝트를 지키고 싶다면 당장 꺼지란 말이야!”이 말을 듣고, 주현철은 더 이상 변명을 늘어놓지 못하고 곧장
방 안에 진정기와 김서진 두 사람만 남자 분위기가 순간 느슨해졌다.진정기를 마주한 김서진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랫동안 못 본 두 친구처럼 닥치는 대로 의자를 잡아당겨 앉았다.“지금 기분이 어때요?”김서진이 담담하게 진정기에게 물었다.“가슴이 좀 답답하고 머리도 좀 혼란스럽지만, 많이 나아졌어요.”진정기는 한 손으로 자기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두어 번 기침을 가볍게 하고 김서진의 물음에 대답했다.이번 기침 소리는 이전과 달리 약간 억눌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침 소리도 크지 않았다. 진정기는 기침을 두어 번 하고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정신은 방금보다 훨씬 맑아 보였다.“그건 정상이에요. 오랫동안 잠에 들어 있었으니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어요. 게다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그 정도 잠에 들어있었다면 머리가 멍할 거예요.”김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다가 김서진은 말끝을 돌렸다.“하지만, 잠에 깊게 들어 밖의 상황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진정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눈빛이 침울하게 김서진을 바라보았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믿어요.”김서진은 잠시 멈칫하다 한마디 덧붙였다.진정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그동안 몸이 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정신은 밖의 일들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에요. 분명히 내 몸인데 내 말을 듣지 않는 느낌은 정말 이상하더군요.”진정기는 팔을 들어 올리며 자기의 손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몸이 자기의 몸인데 자기의 몸이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그의 눈빛은 조금 흐리멍덩했다. 이런 눈빛은, 결코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었다.“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그런 느낌인가요?”김서진은 잠시 생각했지만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진정기가 말한 그런 느낌을 정확한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진정기의 설명을 들으면서 묘하긴 했다. 분명 자기의 몸인데 통제할 수 없고 자기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두 알 수
진정기는 분명히 주현철의 가족에게 경계심이 있었고, 분명히 주효영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방법을 쓸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김서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나도 몰라요. 주효영이 당신에게 사용한 독, 혹은 이 조직에서 연구하고 있는 독은 모두 신종 바이러스에요. 게다가 아마 오랫동안 연구해 왔을 거예요. 그래서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신종 바이러스가 터져 나온 거죠.”사실 진정기는 자기가 주효영에게 통제당하기 전,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내부에서 높은 직위를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비밀적인 것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염병을 대처하면서 그 조직의 사람들을 체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다만 생각지도 못한 것은, 주효영도 그중 하나였고 자기가 조심하지 않아 그들의 술수에 넘어갔다는 것이다.“이제 백신 프로젝트는 그들의 손에 넘어갔어요!”진정기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사실 이건 그가 가장 걱정하는 일이다.주효영에게 통제 당하던 때, 진정기는 자신이 어떻게 조작하여 이 백신 프로젝트를 회수하고 다시 프로젝트를 주현철의 손에 넘겨졌는지 똑똑히 두 눈으로 보고 있었다.자신이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고 그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막을 힘이 없었다.지금 간신히 정신을 차렸으니,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백신 개발을 막아야 했다.“사실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에요.”김서진은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진정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서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대응책이 있다는 것이다.“현재 백신 프로젝트는 주현철의 손에 있어요. 그 조직은 백신 기지를 거점으로 각종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있어요. 백신이라는 허울을 빌려 돈을 쓸어 모으면서 자연스럽게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려 하고 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피해가 매우 크지만 적어도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명확해 졌죠.”김서진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진가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아빠.”진정기는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들어와.”진가연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그 안에는 죽 한 그릇과 약간의 반찬이 놓여 있었다. 작은 접시에 몇 개 나누어 담는 것이 매우 정교해 보였다.“아빠, 아주머니에게 쌀죽을 좀 끓여 달라고 했고 반찬도 좀 가져왔어요. 어서 드세요.”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아빠가 방금 잠에서 깨어났으니 너무 기름진 것을 먹으면 안 되니까 조금 담백하게 만들게 했어요.”“그래.”쌀죽의 냄새를 맡자 배가 고팠던 진정기는 허기가 솟구쳤다. 진가연이 침대 위에 작은 상을 차려 놓고 죽과 반찬을 올려놓자 진정기가 몸을 바로 앉고 느릿하게 죽을 한술 떴다.김서진은 진가연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간 후 전화를 받았다.“아빠, 좀 어때요?”진가연은 침대 옆에 앉아서 진정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진정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많이 좋아졌어. 우리 딸 그동안 고생 많았다.”“아니요, 고생은 무슨!”진가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진정기가 잠들어 있는 동안 피곤하고 항상 걱정이 한가득이었지만, 아버지가 자기를 홀로 키워온 세월이 쉽지 않다는 것을 더욱 실감했다.진정기는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 진가연보다 더 많은 어려움과 많은 일을 겪어야 했다. 밖에서 돈을 벌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린 진가연을 돌봐야 했고, 여러 가지 문제들에 직면해야 했다.그러나 진가연은 한 번도 진정기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진가연이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진정기는 항상 인내심이 가득했다. 하루가 달리 뚱뚱해지는 몸과 점점 더 괴상해진 성격에 진정기는 모두 포용했다.그러나 진가연은 결코 그의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이전에는 그저 그를 탓을 할 뿐이었다. 그가 자신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함께 해준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만 탓할 뿐이었다.이번에 잠든 아버지를 돌보고 입장을 바꾸어서야 진정기가 얼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진정기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에요.”“꼭 죽는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여러 가지 표현이 있을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거나, 체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거나, 이런 것들이 가장 먼저 표현되겠죠. 가장 두려운 것은 장기에 대한 손상이에요. 그리고 뇌에 손상이 올 수 있어요.”이런 증상들은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시간을 두고 관찰할 수밖에 없다.가장 좋은 방법은 한소은이 여기에서 지내면서 매일 진정기의 맥을 짚으며 증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한소은은 지금 백신 연구 기지에서 나올 수 없었다.“당분간 죽지 않으면 괜찮아요.”진정기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얼굴색도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는 숱한 풍랑을 겪었던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총알이 빗발치는 곳까지 지나왔는데 고작 이런 게 겁나진 않았다.더구나 그는 지금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너무 많다. 이 일들을 다 하고 나면 다른 후유증이 있더라도 직위에서 물러나 잘 치료하면 그만이다.“아빠…….”진가연은 걱정이 가득해 그의 손을 꽉 움켜잡았지만, 진정기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자신은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현재로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여기 알약이 두 개 더 있어요. 내가 말한 대로 잘 챙겨 드세요. 다른 것들은 시간을 두고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진가연의 걱정을 두 눈으로 지켜보던 김서진이 말했다.진정기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알겠어요!”“그럼, 우리 아빠가 위험하지 않을까요?”이 두 사람은 모두 후유증을 개의치 않는 것 같지만, 진가연의 마음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행여나 자기의 아버지에게 무슨 나쁜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두 사람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진가연은 그 말들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어떤 후유증이 있을지 걱정돼 죽을 것 같은데 정작 그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다.“괜찮아.”진정기가 먼저 입을 열어 진가연을 안심시켰다.“아빠는
점심, 햇빛은 살이 타들어 갈듯 뜨거웠다.한소은은 방호복을 입고 실험 건물 안을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는 매우 바빠 보였다.복도에는 누구도 없이 조용했는데, 이것도 그녀가 예상했던 일이었다.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작업 장소는 낮에는 바쁘고 밤에는 조용했다. 그녀가 이틀 동안 관찰한 바로는 이곳은 완전히 반대였다. 심야에는 사람이 가장 많고, 또한 가장 바쁜 시간 때이며, 낮에는 오히려 고요했다.사실 이곳은 그들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얻어낸 장소이기 때문에 완전히 정상적인 작업패턴으로 되돌아와도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들이 몰래 작업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지, 아니면 이런 실험은 반드시 밤에만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이곳의 작업패턴은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다.그렇기에 한소은이 무슨 일을 하려면 낮에 해야 했다. 그것은 오히려 그녀를 훨씬 더 편하게 해 주었다.늦게까지 밤을 새울 필요도 없고, 많은 준비를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정상대로 하면 된다.실험실에서 일하는 극소수의 사람 외에, 점심시간에 누워 있는 사람도 몇 명 있었는데 복도에는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한소은은 한숨을 내쉬며 빠른 걸음으로 실험센터의 가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전에 임상언이 그녀를 데리고 들어간 적이 있어 그녀의 홍채와 지문 입력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 이 실험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기밀을 찾고 싶었다.그날 그 사람이 자기에게 준 자료를 뒤져보면 자료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조직은 적극적으로 그녀를 이용하려 했지만, 항상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다.그날 그 거대한 변종 뇌공등은 봤을 때 침착한 척했지만, 마음속은 충격적이었다.이전에 TV에서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 종말의 위기는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했었다. 환경오염이나 화학 연구는 결국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언젠가 이런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고, 그것이 자기의 눈앞에서 일어났다.그 거대한 돌연변이 뇌공등 말고도 그들이 다른
한소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츠렸고 깜짝 놀라 심장이 벌렁거렸다.방금 그 느낌이 마치 뭐에 홀린 것 같았다. 그녀가 이런 것을 연구하면서 뇌공등의 독성을 모를 수가 없었다.하물며 이렇게 변이된 것은 더더욱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만지고 싶어지는 것이 마치 뇌공등에게 통제된 것 같다.이런 느낌은, 너무 기괴했다.정신을 차리고 한소은은 소리를 내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떤 남자였고 방호복을 입고 있는 터라 두 눈만 확인할 수 있었다.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낯설고 서로 알지 못하지만, 이 남자는 놀랍게도 어딘가 친숙했다.“누구세요?”한소은이 경계하며 물었다.“내가 누구인지 알 필요 없어요. 다만, 충고하는데 빨리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좋아요.”남자는 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문밖으로 걸어갔다.한소은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자신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인가?한소은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이미 문을 나서서 모퉁이를 돌아 입구로 사라져 버렸다.바삐 그 사람의 뒤를 쫓아 나갔지만, 뒷모습 하나가 황급히 지나가는 것만 볼 수 있었다.비록 두꺼운 방호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뒷모습도 낯이 익었다.한소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하지만 방을 나와 다시 모퉁이를 돌아가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양쪽 옆으로 갈라진 길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도 없을 정도였다. 마치 그 사람이 나타난 적 없었던 것 같았다. 방금 모든 것이 그녀의 환각이었던 것 같았다.‘말도 안 돼!’그 사람은 분명 실존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내공으로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방금 뇌공등에 홀렸다 하더라도 금방 쫓아 나왔는데 그 사람의 기척을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자기가 꿈을 꾼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의 내공이 자기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이런 조직에서 어떤 능력자가 존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위
위험할 뻔한 순간이 생기다 보니, 한소은은 마음을 다잡았다.여기서 진상을 알아내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실험을 계속하기 시작했다.사실, 이 실험은 거의 반 정도 진행되었다. 향과 약 성분의 융합에 있어서 한계점에 달았고, 그 다음에는 비례를 조절하는 것만 남았다.그들이 준 과거 자료에서, 한소은은 이 사람들, 또는 이 실험을 했던 사람들이, 자신이 전에 알려주었던 비율로, 즉 이전에 자기가 실험실에서 성공했던 사례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 데이터를 보고 나서 한소은은 전의 사람이 향을 몰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확히 말하면 향과 약초의 약 성분의 융합을 전혀 몰랐고 할 수 있다.이전 성공 사례의 데이터는 정확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다른 약초에 같은 데이터를 대입할 수는 없다. 모든 분량과 비율이 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안에 첨가해야 할 융합제도 모두 달랐다.왜 이 조직에서 계속 자기를 끌어들이려 했는지 한소은은 이해가 갔다. 어쩌면 이 일에 있어서 자기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사람을 찾아낼 시간이 없다.이 연구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연구하고, 익숙해져야 했다. 게다가 이 실험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한소은이 아니면 안 된다.모든 데이터를 확인하고 나서 한소은은 아예 자료를 던져 버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었다.한소은은 자신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비율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수많은 샘플을 만들어 냈다.이렇게 하면 가장 먼저 여러 가지 실험 결과를 발견할 수 있고, 그 다음 피드백에 따라 다시 양을 조절할 수 있으며, 여러 번 진행하다 보면 성공할 수 있다.한소은이 한 실험이 비록 독극물은 하지만, 뇌공등 덩굴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가 가장 흥미로워하는 거대한 변종 독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실험을 하루 종일 바삐 진행하다 보니 허리가 시큰거리고 등이 아파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