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진정기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에요.”“꼭 죽는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여러 가지 표현이 있을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거나, 체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거나, 이런 것들이 가장 먼저 표현되겠죠. 가장 두려운 것은 장기에 대한 손상이에요. 그리고 뇌에 손상이 올 수 있어요.”이런 증상들은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시간을 두고 관찰할 수밖에 없다.가장 좋은 방법은 한소은이 여기에서 지내면서 매일 진정기의 맥을 짚으며 증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한소은은 지금 백신 연구 기지에서 나올 수 없었다.“당분간 죽지 않으면 괜찮아요.”진정기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얼굴색도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는 숱한 풍랑을 겪었던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총알이 빗발치는 곳까지 지나왔는데 고작 이런 게 겁나진 않았다.더구나 그는 지금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너무 많다. 이 일들을 다 하고 나면 다른 후유증이 있더라도 직위에서 물러나 잘 치료하면 그만이다.“아빠…….”진가연은 걱정이 가득해 그의 손을 꽉 움켜잡았지만, 진정기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자신은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현재로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여기 알약이 두 개 더 있어요. 내가 말한 대로 잘 챙겨 드세요. 다른 것들은 시간을 두고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진가연의 걱정을 두 눈으로 지켜보던 김서진이 말했다.진정기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알겠어요!”“그럼, 우리 아빠가 위험하지 않을까요?”이 두 사람은 모두 후유증을 개의치 않는 것 같지만, 진가연의 마음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행여나 자기의 아버지에게 무슨 나쁜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두 사람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진가연은 그 말들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어떤 후유증이 있을지 걱정돼 죽을 것 같은데 정작 그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다.“괜찮아.”진정기가 먼저 입을 열어 진가연을 안심시켰다.“아빠는
점심, 햇빛은 살이 타들어 갈듯 뜨거웠다.한소은은 방호복을 입고 실험 건물 안을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는 매우 바빠 보였다.복도에는 누구도 없이 조용했는데, 이것도 그녀가 예상했던 일이었다.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작업 장소는 낮에는 바쁘고 밤에는 조용했다. 그녀가 이틀 동안 관찰한 바로는 이곳은 완전히 반대였다. 심야에는 사람이 가장 많고, 또한 가장 바쁜 시간 때이며, 낮에는 오히려 고요했다.사실 이곳은 그들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얻어낸 장소이기 때문에 완전히 정상적인 작업패턴으로 되돌아와도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들이 몰래 작업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지, 아니면 이런 실험은 반드시 밤에만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이곳의 작업패턴은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다.그렇기에 한소은이 무슨 일을 하려면 낮에 해야 했다. 그것은 오히려 그녀를 훨씬 더 편하게 해 주었다.늦게까지 밤을 새울 필요도 없고, 많은 준비를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정상대로 하면 된다.실험실에서 일하는 극소수의 사람 외에, 점심시간에 누워 있는 사람도 몇 명 있었는데 복도에는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한소은은 한숨을 내쉬며 빠른 걸음으로 실험센터의 가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전에 임상언이 그녀를 데리고 들어간 적이 있어 그녀의 홍채와 지문 입력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 이 실험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기밀을 찾고 싶었다.그날 그 사람이 자기에게 준 자료를 뒤져보면 자료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조직은 적극적으로 그녀를 이용하려 했지만, 항상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다.그날 그 거대한 변종 뇌공등은 봤을 때 침착한 척했지만, 마음속은 충격적이었다.이전에 TV에서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 종말의 위기는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했었다. 환경오염이나 화학 연구는 결국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언젠가 이런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고, 그것이 자기의 눈앞에서 일어났다.그 거대한 돌연변이 뇌공등 말고도 그들이 다른
한소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츠렸고 깜짝 놀라 심장이 벌렁거렸다.방금 그 느낌이 마치 뭐에 홀린 것 같았다. 그녀가 이런 것을 연구하면서 뇌공등의 독성을 모를 수가 없었다.하물며 이렇게 변이된 것은 더더욱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만지고 싶어지는 것이 마치 뇌공등에게 통제된 것 같다.이런 느낌은, 너무 기괴했다.정신을 차리고 한소은은 소리를 내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떤 남자였고 방호복을 입고 있는 터라 두 눈만 확인할 수 있었다.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낯설고 서로 알지 못하지만, 이 남자는 놀랍게도 어딘가 친숙했다.“누구세요?”한소은이 경계하며 물었다.“내가 누구인지 알 필요 없어요. 다만, 충고하는데 빨리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좋아요.”남자는 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문밖으로 걸어갔다.한소은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자신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인가?한소은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이미 문을 나서서 모퉁이를 돌아 입구로 사라져 버렸다.바삐 그 사람의 뒤를 쫓아 나갔지만, 뒷모습 하나가 황급히 지나가는 것만 볼 수 있었다.비록 두꺼운 방호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뒷모습도 낯이 익었다.한소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하지만 방을 나와 다시 모퉁이를 돌아가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양쪽 옆으로 갈라진 길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도 없을 정도였다. 마치 그 사람이 나타난 적 없었던 것 같았다. 방금 모든 것이 그녀의 환각이었던 것 같았다.‘말도 안 돼!’그 사람은 분명 실존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내공으로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방금 뇌공등에 홀렸다 하더라도 금방 쫓아 나왔는데 그 사람의 기척을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자기가 꿈을 꾼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의 내공이 자기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이런 조직에서 어떤 능력자가 존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위
위험할 뻔한 순간이 생기다 보니, 한소은은 마음을 다잡았다.여기서 진상을 알아내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실험을 계속하기 시작했다.사실, 이 실험은 거의 반 정도 진행되었다. 향과 약 성분의 융합에 있어서 한계점에 달았고, 그 다음에는 비례를 조절하는 것만 남았다.그들이 준 과거 자료에서, 한소은은 이 사람들, 또는 이 실험을 했던 사람들이, 자신이 전에 알려주었던 비율로, 즉 이전에 자기가 실험실에서 성공했던 사례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 데이터를 보고 나서 한소은은 전의 사람이 향을 몰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확히 말하면 향과 약초의 약 성분의 융합을 전혀 몰랐고 할 수 있다.이전 성공 사례의 데이터는 정확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다른 약초에 같은 데이터를 대입할 수는 없다. 모든 분량과 비율이 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안에 첨가해야 할 융합제도 모두 달랐다.왜 이 조직에서 계속 자기를 끌어들이려 했는지 한소은은 이해가 갔다. 어쩌면 이 일에 있어서 자기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사람을 찾아낼 시간이 없다.이 연구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연구하고, 익숙해져야 했다. 게다가 이 실험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한소은이 아니면 안 된다.모든 데이터를 확인하고 나서 한소은은 아예 자료를 던져 버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었다.한소은은 자신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비율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수많은 샘플을 만들어 냈다.이렇게 하면 가장 먼저 여러 가지 실험 결과를 발견할 수 있고, 그 다음 피드백에 따라 다시 양을 조절할 수 있으며, 여러 번 진행하다 보면 성공할 수 있다.한소은이 한 실험이 비록 독극물은 하지만, 뇌공등 덩굴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가 가장 흥미로워하는 거대한 변종 독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실험을 하루 종일 바삐 진행하다 보니 허리가 시큰거리고 등이 아파
“당신 보스가 물어보라고 했나요?”한소은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임상언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아직도 날 경계하는 건가요?”“네.”조금도 피하지 않고 한소은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그동안 그가 숨기고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자신을 완전히 경계심을 내려놓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람의 신뢰가 한번 무너지면 다시 쌓는 것은 그렇게 한두 마디 말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다만,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니라 할 수 있다.“이 실험실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나요?”한소은이 난데없이 물었다.임상언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자세히 생각한 후에야 그녀에게 대답했다.“전에 당신이 그 실험실에 있을 때 당신과 일했던 몇 사람이 이곳에 합류했어요. 왜요, 그 사람들을 알아봤나요?”“그들이 아니에요.”한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전에 그녀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 사람들을 다 기억하지 못했다.지극히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면,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 해도 말하는 기회는 많지 않고, 그렇게 밀접하게 왕래하지 않기 때문에 알고 지내는 상황이 드물었다. 더군다나 그들에 대한 인상이 깊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뒷모습은 눈에 너무 익었다.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은 틀림없이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고, 심지어는 관계가 비교적 밀접한 사람이라는 것이다.다만 그 순간 생각나지도 않았고 알고 있는 사람과 맞추어 보아도 뒷모습이 맞지 않았다.한소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말했다.“돌아서 봐요.”임상언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한소은의 끈질긴 시선을 보고 느릿느릿 돌아섰다.한소은은 그의 뒷모습을 자세히 보고, 다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각도를 조절하면서 확인했지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이 아니야!’사실 한소은은 처음부터 임상언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일부러 그의 뒷모습을 다시 보았다. 결론은 확실했다.‘그럼 임상언이 아니라면 누구였을까?’“왜 그래요? 누굴 만났는데요
“하지만 당신이 전에 ‘보스'는 배후의 사람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내세운 사람이라면서요.”한소은이 임상언에게 말했다.“그의 배후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그렇게 생각해도 틀리지 않아요. 하지만 그의 손에는 중요한 자료와 비밀이 있을 거예요.”임상언은 유한성이 다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자기의 손에 목숨을 지킬 만한 물건을 쥐고 있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비록 미친 사람이지만, 자신의 집념이 있었다. 이 계획과 실험은 바로 유한성의 집념이다. 그가 이것을 끝내기 전에 자기가 쉽게 죽게 내버려둘 리가 없다.“그래서, 그 뜻은…….”한소은이 잠시 생각하다 임상언을 쳐다보며 물었다.“우리는 함께 이 비밀을 찾아내야 해요.”그는 한소은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 유한성을 위해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렇게 오랫동안 그는 통제에서 벗어나고 조직에서 벗어나 아들을 구할 방법을 강구해 왔다. 다만 아들에 관한 단서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이제 한소은이 이곳에 온 이상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물론, 이것은 위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아들을 위해서 임상언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어떻게 할 생각이에요?”한소은이 물었다.“보스는 매일 점심에 휴식을 취해요. 대충 12시에서 2시경,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예요. 내가 지금까지 관찰해 온 바로는, 그때가 보스의 몸이 가장 약했던 때인 것 같아요. 그 시간대에는 아무도 부른 적 없거든요. 다른 시간대에는 그의 옆에 사람이 있었어요.”심지어 어떤 때는 한밤중에 사람을 불러서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임상언이 세심하게 통계를 하고 나서 확인한 바로는 그 시점에만 한 번도 사람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즉, 유한성은 그 시간대에 모든 사람을 피하고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고 있든, 정말 쉬고 있든, 다른 이유가 있든, 그 시점이 가장 안전하고 그들이 유한성에게 손대기 좋은 때이다.
“불편한 게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아서 그래요.”생각하다 결심을 굳힌 듯 임상언은 그제야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실험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보셨을 거예요. 사실 동시에 진행해 온 프로젝트가 여러 개 있는데, 모두 같은 한계에 부딪혔어요. 당신이 해결해야 할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는 거죠.”“하지만 보스가 시간이 정말 안 될 경우 R10을 먼저 해결하라고 말씀하셨어요.”마침내 가장 중요한 말이 나오자, 한소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R10?”“그래요! 여기 있는 프로젝트들은 숫자 순으로 코드명이 붙여져 있어요. 자료를 볼 때도 보셨겠지만 R10이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예요.”“R10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건가요?”한소은은 잠시 생각하다 임상언에게 물었다.“아니요.”임상언은 고개를 저었다.“소은 씨가 지금 하는 것은 R13이에요!”그의 말에 한소은은 더욱 놀람을 금치 못했다.“R13이라고요? 그래서 이건 순서대로 진행하는 게 아닌가요? R10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고, R13까지 왔잖아요!”임상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한소은의 반응과 같았다.“내가 알기론 R16, R17, R18, 게다가 R20까지 있는 거 같아요. 다만, 실패한 게 많다는 거죠.”“실패한 게 대부분이라는 건 성공한 것도 있다는 말인가요?”예리하게 중점을 잡아낸 한소은이 물었다.“네! 하지만 당신이 했던 실험과는 달라요.”잠시 후 임상언은 손목을 치켜들고 시간을 한번 보았다.“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요.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시 알려 줄게요. 여기서는 밖이 오히려 안전해요. 모든 건물에는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거든요.”“나도 알아요.” 한소은은 가볍게 말했다.“감시카메라의 위치도 알고 있어요.”한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한소은도 김서진처럼 이런 방면에서는 전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는 듯 한마디 당부했다.“설령 감시 카메라의 위치를 다 알더라도 눈치채지 못한
“당신…….”주현철은 화를 내려고 했지만, 유해나의 얼굴빛을 보고 참고 또 참았다.주효영이 잘못되고 지금까지, 오늘은 유해나의 안색이 가장 좋은 날이라 할 수 있었다.“내 말을 듣고 있기나 해?”주현철은 성질을 억누른 채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네. 진정기가 깨어났다고요.”유해나는 그릇과 젓가락을 놓고 입을 닦으며 눈을 들어 주현철을 바라보았다.“그게 왜요?”“이제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니까!”응답을 받은 주현철은 앉아서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 머리가 아픈 듯 말했다.“만약 그가 번복해서 다시 프로젝트를 걷어간다면, 우리는 완전히 끝장이겠지!”예전 같았으면 이 소식을 들은 유해나는 벌써 울고불고했을 텐데, 지금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하고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겠다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아내의 말에 주현철은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고, 의아해하며 물었다.“당신 정말 멍청한 거예요? 프로젝트는 애들끼리 소꿉놀이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회수하고 싶다고 해서 회수하고, 프로젝트를 남에게 주고 싶다고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이 프로젝트는 당신이 이미 인수했고, 시작했어요. 벌써 절반까지 진행했는데, 지금 거두는 게 말이 돼요? 이전에도 충분히 구설에 올랐는데 다시 그러지 못하겠죠.”유해나는 볼썽사나운 얼굴로 일어나 자기 가방을 들었다.“어디 가?”그녀가 집을 나서려는 모습을 보고 주현철은 일어나서 따져 물었다.“쇼핑 하러요.”유해나는 차갑게 말을 내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주현철은 완전히 멍 해져 자리에 서 있었다.전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유해나의 태도가 너무 비정상적이었다.반응이 이상했다. 이건 정상적인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오늘은 도대체 무슨 날이야. 진정기가 이상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 여편네도 이렇게 이상해지 다니!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아니면 내가 문제가 있는 건가?’“쇼핑은 무슨!? 이 시국에 쇼핑하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