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네 탓이야!”맹호군이 독하게 말했다.“네가 아니면 아이는 이렇게 크게 다치지 않을 거고 목숨이 위태롭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도 넌 아직도 소란을 피우고 있잖아!”“소란 피우는 거 아니에요. 아이의 맥을 짚어야 하니 비켜요!”그러자 한소은이 차갑게 말했다.“그만해! 말끝마다 맥을 짚는다고! 도대체 뭘 짚는 거야! 고작 손가락 몇 개가 전문적인 기기보다 더 쓸모가 있단 말이야?”“정말 뻔뻔하다니까! 한의학은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말했지!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변명할 것이 있어?”그는 노발대발하며 욕설을 퍼부었다.그 순간 자리에 있던 한의사들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누가 뻔뻔스럽다는 거예요? 한의학이 왜 믿음직스럽지 못해요?”“사실이에요!”“서양 의학이야말로 기기를 떠나면 쓸모없는 사람이잖아요. 수술하는 것외에 죽음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더 있어요?”“서양 의학이야말로…….”양측의 거센 다툼이 일어났다. 한의사들도 소은이 너무 젊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같은 분야이니 힘을 합쳐 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아주 시끌벅적해졌다.지금은 시간이 생명과 같으니 소은은 말다툼할 여력이 없었고 그녀는 빨리 아이의 맥을 짚어 현재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하지만 호군은 그녀의 옆에 서있다가 그녀가 손을 내밀던 순간 재빨리 뿌리쳤다.“쓸모없는 짓하지 마. 이제는 우리가 아이를 살릴 거야. 넌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지 마!”“주임님,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녀가 책임진다고 했어요. 모두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주임님은 이런 사사로운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아이가 살아있는데 맥을 짚지 못하게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속셈이에요? 내가 책임진다고 했어요. 지금 아이는 살아있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예요?”그가 자꾸 방해하니 소은도 너무 화가 나 분노하며 말했다.호군은 할 말을 잃었다.“아직도 변명을 늘어놓다니…….”“그만 해요!”고지호 교수은 버럭 소리 지르더니 들고 있던 두꺼운 서류를 바닥에 내치면서 둔
잠시 후 한소은은 일어나서 고지호 교수을 바라보았다.“할 말이 있어요.”“아이의 상태는 어때요?”그녀가 눈살을 찌푸리자 고지호 교수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잠시는 안정됐어요.”그녀는 진지하게 말하더니 허리를 숙이고 한 손을 아이의 뺨에 댄 채 다른 한 손으로 입에 무언가를 넣었다.그 행동이 너무 빠르고 갑작스러워 사람들은 순간 멍때리더니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뭘 먹인 거예요?”“고지호 교수님, 따로 할 말이 있어요.”소은은 몸을 돌려 그를 덤덤하게 바라보며 말했다.고지호 교수이 대답하기도 전에 맹호군이 차갑게 말했다.“여기서 말하면 안 돼? 꼭 따로 말해야 해? 우리는 동료잖아?”“방금 고지호 교수님도 말했어.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라고. 설마 우리가 들으면 안 되는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고지호 교수님, 방금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럼 사적인 얘기나 다른 사람이 들었다가 문제될 거는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가 들으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요?”그가 말하고 주변을 힐끔 보자 눈치를 챈 다른 의사가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아이의 병에 대한 얘기라면 저희도 꼭 들어야 해요. 만약 아니라면…… 한소은 의사는 지금 병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고지호 교수도 어쩔 수 없었다.“맞아요! 한소은 씨, 다른 건 말하지 말아요. 아이의 병은 어떻게 됐어요?”그는 어떤 예외도 없기를 바란다.비록 그는 한의학 전문가도 아니고 잘하지도 못하지만 공부한 적 있고 연구한 적 있다. 게다가 그는 직접 원씨 어르신의 실력을 본 적 있다.가끔은 서의학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고질병을 한의학의 불가사의한 수단으로 치유할 수 있다.결국 한의학의 놀라운 치료 수단을 감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은은 너무나 어리다. 비록 그가 소은을 믿고 그녀가 원씨 어르신이 제일 믿는 제자라고 할지라도 실수하지 않을 수 있을까?많은 사람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소은은 주위를 한 번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날카롭게 맞서 어느 쪽도 상대를 설득할 수 없었다. 각자의 주장이 모두 타당해 보여서, 옆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소은 선생, 그럼 당신이 보기에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여태껏 침묵하고 있던 모범이 말문을 열었다. 그는 누구의 말이 맞다고 하지 않았고 누구의 책임이라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맞아요. 옳고 그름을 따질 때가 아니에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구하는 거예요.”다른 사람도 머리를 끄덕였다.“소은 선생, 방금 아이에게 뭘 먹인 거예요? 함부로 약을 먹이면 안 돼요.”“심장을 지키는 거예요.”한소은이 대답했다.“아이를 저에게 맡겼으니 저는 반드시 끝까지 책임질 거예요. 저는 제가 한 말은 지켜요.”모범이 눈살을 찌푸렸다.“지금은 책임지고 약속을 지키고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의 목숨이 달렸으니 절대 함부로 행동하면 안 돼요!”“알아요!”그녀는 모범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녀는 비록 세상을 구제할 마음은 없지만,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하물며 그녀는 되도록 많은 환자들의 병을 치료하고 싶어 한다.모범은 침묵했고 다른 사람들도 침묵했다.“고지호 교수님, 결정해요.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죠?”그때 맹호군이 갑자기 고지호 교수을 바라보며 이 문제를 그에게 넘겼다.“지금 이런 상황에서 구해야 하나요, 구하지 말아야 하나요?”그는 말하면서 병상 쪽을 힐끔 보았다.다른 사람들도 모두 병상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아직 아이이니 몸집이 아주 작았다. 아이가 있는 의사들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살려요! 목숨인데 어떻게 살리지 않을 수가 있어요!”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아이를 시험품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맞아요, 아이를 시험품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그때 고지호 교수이 머뭇거리며 말했다.“정상적인 절차에 따르면 수액을 맞아야 하고 치료해야 해요. 그리고 소은
“가서 준비해요. 두 분이 밤새 지켜야 하니 고생이 많을 겁니다.”고지호 교수이 병실을 지키는 두 간호사에게 말했다.“준비가 끝나면 들어와요. 저는 다시 환자를 살펴야 해요.”“네.”간호사는 대답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고지호 교수은 청진기를 들고 아이의 심박수를 들으며 다시 검사한 후 아이의 손목과 손바닥을 보는 소은을 힐끔 보았다.아이의 손바닥은 아주 부드러웠지만 가운데 부분에 보면 노란 부분이 보였는데 얼핏 보면 굳은살 같았다.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라 힘든 일을 한 적도 없고,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한 적도 없고, 게다가 요즘은 계속 병실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말이다.손가락으로 만져봤더니 그건 굳은살이 아니었다. 피부에서 새어 나오는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인 노란색이었다.손을 떼고 다시 이불 속에서 조그마한 발을 꺼내 발바닥을 들여다보았더니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그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모범은 처음에는 단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어…… 어떻게 이럴 수 있죠?”고지호 교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소은을 바라보았다.“중독된 거예요.”그녀는 고개를 들어 방 주위를 둘러보고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로 얘기했다.환자의 변화를 수시로 관찰해야 하기에 모든 방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물론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야 하기에 사각지대도 있다.“중…….”모범은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그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바이러스?”상대적으로 고지호 교수은 침착했다. 그는 소은을 조용히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그녀는 방금 그와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설마 이것 때문일까?“아니에요.”소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아서서 카메라 사각지대로 몇 걸음 걸어갔다.고지호 교수은 그녀를 지그시 보더니 그녀를 따라갔고 모범도 그 뒤를 따랐다.“박소희는 중독된 거예요.”두 사람이 다가오자 소은이 말문을 열었다.두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그때 모범이 물었다.“
“검사해 봐야겠어요.”고지호 교수이 말했다.“그런데 중독된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그는 질문을 하고는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한의학에서는 맥만 짚고도 겉으로 알아차리기 힘든 문제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럼 누가 독을 주입한 것 같아요?”고지호 교수이 다시 물었다.그러자 소은이 고개를 저었다.“그건 단정할 수도 없고, 함부로 결론을 내려서도 안 돼요. 하지만 아주 심각한 문제예요.”“누가 독을 주입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목적이 뭘까요? 무슨 속셈일까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 건 너무 위험해요.”“맞아요!”고지호 교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범에게 물었다.“모 선생은 어떻게 생각해요?”“소은 선생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든 반드시 잡아내야 합니다! 이곳에 그런 사람이 숨어있을 줄은 몰랐네요, 너무 끔찍해요!”고지호 교수은 순간 생각에 잠겼다.“소희는 괜찮을 거예요. 해독제를 먹였으니 독성이 곧 풀릴 거예요.”소은이 설명했다.“해독제? 청심환이 아니고요?”모범은 어안이 벙벙한 채 물었다.소은이 싱긋 웃자 그제야 모범은 이해했다.“눈속임한 거예요?”“말 안 하는 게 맞아요! 지금 상황이 이러니 그 사람을 찾아내기 전에는 말하면 안 돼요.”고지호 교수도 소은의 결정에 동의하며 그녀의 임기응변 능력에 감탄했다.“하지만 현재 아이의 상황은 그다지 안 좋아요.”“해독이 되면 문제없어요. 만약 중독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미 나았을 거예요. 소희의 맥은 아주 차분하고 힘이 있어요. 아이의 면역력이 좋은 걸 느낄 수 있어요. 바이러스는 이미 이겨냈지만 중독이 되어 건강에 영향이 간 거예요.”그때 소은이 멈칫했다.“소희가 괜찮아질 때까지 여기 있고 싶습니다.”“소은 선생이?”고지호 교수은 깜짝 놀라더니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안 돼요!”“소은 선생은 이미 너무 무리했어요. 몸이 견디지 못할 거예요.”그가 말했다.“여기는 내가 사람을 배치할 테니 소은 선생은 걱정하지 말고 빨리
원철수는 어렴풋이 눈을 떴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다시 천천히 감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떠보니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 초조할 만큼 하얀 천장이 아닌 나무 천장이라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옷장, 책상과 의자,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 이불…….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이전의 차갑고 딱딱한 것들이 아니었다.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뺨을 한 대 후려쳤다.“짝!”‘아, 아파!’하지만 이런 아픔이 그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이건 꿈이 아니다, 절대 꿈이 아니다! 결국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했다. 더는 그곳에서 밤낮으로 고생할 필요가 없다.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지만, 이불을 들치자마자 발이 땅에 닿았으나 힘이 없어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한 손으로 간신히 지탱했다.“뭐 하는 거야, 죽고 싶어?”익숙한 목소리지만 너무나 낯설게 들려왔다. 그는 오랫동안 이 소리를 듣지 못하다가 다시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서서히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천천히, 그 얼굴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주름투성이, 짜증투성이, 그러나 더없이 자상하고 온화한 얼굴이었다. 철수의 눈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시야를 흘렸다. 그는 더없이 흥분했다.“둘째 할아버지…….”떨리는 목소리로 한 번 부르고 난 그는 거의 울 뻔했다.“울긴 왜 울어!”할아버지는 오히려 퉁명스럽게 내뱉었다.“나이가 몇 살인데, 입만 벌리면 우는 거야, 부끄럽지도 않아!”그의 말에 철수는 황급히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안 울어요, 안 울어요……. 둘째 할아버지가 울지 말라고 하면 안 울 거예요! 나, 안 울어요…….”하지만 입으로만 이렇게 말하며, 손은 눈물을 닦고 있었다. 눈물을 닦으면 닦을수록 더 심하게 떨어졌다.뚝뚝 떨어지던 눈물은 점점 더 많이 흘렀다.“바보 같은 자식!”할아버지가 욕을 한마디 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고 가서 휴지 한 봉지를 집어 그에게 던졌다.“할아버지의
“둘째 할아버지…….”그가 막 입을 열려고 하자 할아버지가 약을 건네며 말했다.“마셔!”거친 한마디지만, 지금의 원철수에게 이 약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약이다. 그는 무슨 약인지도 묻지 않고 받아 들고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약이 뜨거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단숨에 다 마신 뒤에야 그는 입맛을 다시며 한마디 했다.“달아요!”할아버지는 그를 노려보았다.“약에 황련을 두 배로 넣었는데 달다니! 차에 치여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니야?”할아버지가 핀잔을 주었지만 철수는 아무렇지 않았다.“둘째 할아버지,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아까 말했잖아, 난 그럴 여유가 없다고 말이야. 이따가 네 아버지가 데리러 올 테니 꾸물거리지 말고 따라가. 나한테 들러붙을 생각도 하지 말고, 보기만 해도 짜증 나!”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아 맞다, 이 침대랑 이불, 네가 자던 거 다 버려야겠어. 네 아버지한테 새걸로 바꿔 달라고 해!”“꼭, 꼭, 꼭 제일 좋은 걸 사서 둘째 할아버지께 드릴게요!”철수는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가슴이 따끔한 느낌이 들어 그는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기침을 했다.“왜 그래?”할아버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보더니 물었다.겉으로는 싫은 척하지만 눈빛으로 보이는 관심은 감추지 못한다.“괜찮아요. 아까 어디 부딪쳤나 봐요. 좀 쉬면 돼요.”힘껏 기침하고 나니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몸은 피곤하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그는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둘째 할아버지……. 혹시 맥을 짚어본 적이 있나요?”“내가 맥을 짚어 줄 게 뭐 있어, 너 곧 죽어?”그는 매우 불쾌한 듯 말했다. 무심한 척 말하고 난 그는 한마디 보탰다.“됐어, 안 죽을 거야!”“그럼…… 내 안에 있는 독은 무슨 독이래요?”잠시 생각하던 철수가 물었다.솔직히 둘째 할아버지를 봤을 때, 그는 매우 기뻤고 마음이 놓였다. 어쨌든 그곳에서 주효영이 그에게 독을 주입했지만, 도대체 무슨 독인지 자신은 아직 모른다.이번에
“옷 벗어!”할아버지 말했다.“원철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속 시원히 윗도리를 벗었다. 할아버지는 그를 앞뒤로 훑어보더니 이어서 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바지도 벗어!”철수는 할 말을 잃었다.“둘째 할아버지…….”“무슨 헛소리야! 굳이 내 손으로 벗겨야 하는 건 아니겠지?”할아버지가 불쾌하게 말했다.철수는 어쩔 수 없이 바지도 벗어야 했다. 팬티는 아직 입고 있었지만 이렇게 할아버지 앞에서 발가벗는 것도 민망했다.쭈그리고 앉아 그의 종아리를 들여다보고, 다시 그의 다리를 톡톡 치던 할아버지는 천천히 일어나 다시 뒤로 물러섰다. 한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실눈을 뜨고, 뭔가를 보는 듯하기도 하고, 생각에 감긴 듯하기도 했다.“둘째 할아버지…….”철수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진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서 있는 것은 정말 어색했다. 다 되었으면 적어도 옷부터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할아버지…….”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하게 할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 때문에 철수는 순간 환각을 일으킨 줄 알았다.“둘째 할아버지?”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정상이었고 그렇게 앳된 목소리가 아니었다.“할아버지…….”또 부드럽고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수는 이번에 정말 똑똑히 들었다. 이 목소리는 그가 낸 것이 아니라…… 뒤에서 들려온다?몸을 돌리자 남자아이가 문 앞에 서서 한 손으로 문을 열었는데 반쯤 열린 문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눈을 깜박이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아이는 철수를 보는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크게 벌렸다.“와…….”원철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숙이고 벌거벗은 자신을 본 그는 바지를 쓱 올리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어린아이이고, 그것도 남자아이지만 언제나 체면을 중요시하는 철수에게는 궁색하기만 했다.“아이고, 우리 꼬맹이,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어. 조용히 놀고 있으라고 했잖아!”할아버지는 순식간에 표정이 변하더니 한걸음에 달려가 아이를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