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할아버지…….”그가 막 입을 열려고 하자 할아버지가 약을 건네며 말했다.“마셔!”거친 한마디지만, 지금의 원철수에게 이 약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약이다. 그는 무슨 약인지도 묻지 않고 받아 들고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약이 뜨거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단숨에 다 마신 뒤에야 그는 입맛을 다시며 한마디 했다.“달아요!”할아버지는 그를 노려보았다.“약에 황련을 두 배로 넣었는데 달다니! 차에 치여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니야?”할아버지가 핀잔을 주었지만 철수는 아무렇지 않았다.“둘째 할아버지,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아까 말했잖아, 난 그럴 여유가 없다고 말이야. 이따가 네 아버지가 데리러 올 테니 꾸물거리지 말고 따라가. 나한테 들러붙을 생각도 하지 말고, 보기만 해도 짜증 나!”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아 맞다, 이 침대랑 이불, 네가 자던 거 다 버려야겠어. 네 아버지한테 새걸로 바꿔 달라고 해!”“꼭, 꼭, 꼭 제일 좋은 걸 사서 둘째 할아버지께 드릴게요!”철수는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가슴이 따끔한 느낌이 들어 그는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기침을 했다.“왜 그래?”할아버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보더니 물었다.겉으로는 싫은 척하지만 눈빛으로 보이는 관심은 감추지 못한다.“괜찮아요. 아까 어디 부딪쳤나 봐요. 좀 쉬면 돼요.”힘껏 기침하고 나니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몸은 피곤하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그는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둘째 할아버지……. 혹시 맥을 짚어본 적이 있나요?”“내가 맥을 짚어 줄 게 뭐 있어, 너 곧 죽어?”그는 매우 불쾌한 듯 말했다. 무심한 척 말하고 난 그는 한마디 보탰다.“됐어, 안 죽을 거야!”“그럼…… 내 안에 있는 독은 무슨 독이래요?”잠시 생각하던 철수가 물었다.솔직히 둘째 할아버지를 봤을 때, 그는 매우 기뻤고 마음이 놓였다. 어쨌든 그곳에서 주효영이 그에게 독을 주입했지만, 도대체 무슨 독인지 자신은 아직 모른다.이번에
“옷 벗어!”할아버지 말했다.“원철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속 시원히 윗도리를 벗었다. 할아버지는 그를 앞뒤로 훑어보더니 이어서 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바지도 벗어!”철수는 할 말을 잃었다.“둘째 할아버지…….”“무슨 헛소리야! 굳이 내 손으로 벗겨야 하는 건 아니겠지?”할아버지가 불쾌하게 말했다.철수는 어쩔 수 없이 바지도 벗어야 했다. 팬티는 아직 입고 있었지만 이렇게 할아버지 앞에서 발가벗는 것도 민망했다.쭈그리고 앉아 그의 종아리를 들여다보고, 다시 그의 다리를 톡톡 치던 할아버지는 천천히 일어나 다시 뒤로 물러섰다. 한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실눈을 뜨고, 뭔가를 보는 듯하기도 하고, 생각에 감긴 듯하기도 했다.“둘째 할아버지…….”철수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진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서 있는 것은 정말 어색했다. 다 되었으면 적어도 옷부터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할아버지…….”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하게 할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 때문에 철수는 순간 환각을 일으킨 줄 알았다.“둘째 할아버지?”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정상이었고 그렇게 앳된 목소리가 아니었다.“할아버지…….”또 부드럽고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수는 이번에 정말 똑똑히 들었다. 이 목소리는 그가 낸 것이 아니라…… 뒤에서 들려온다?몸을 돌리자 남자아이가 문 앞에 서서 한 손으로 문을 열었는데 반쯤 열린 문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눈을 깜박이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아이는 철수를 보는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크게 벌렸다.“와…….”원철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숙이고 벌거벗은 자신을 본 그는 바지를 쓱 올리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어린아이이고, 그것도 남자아이지만 언제나 체면을 중요시하는 철수에게는 궁색하기만 했다.“아이고, 우리 꼬맹이,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어. 조용히 놀고 있으라고 했잖아!”할아버지는 순식간에 표정이 변하더니 한걸음에 달려가 아이를
“준아, 이곳은 재미가 없어. 할아버지랑 나가서 재미있게 놀자.”할아버지는 김준을 안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한쪽에 뻘쭘하게 서 있던 원철수는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둘째 할아버지, 저의 독은…….”“독은 무슨 독이야, 중독이 아니라니까!”퉁명스럽게 한마디 뱉은 할아버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셨다.철수는 그곳에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방 안의 화장실로 들어갔다.넓은 거울 앞에 서서 거의 벌거벗은 자신을 바라보았다.그는 팬티 한 벌만 입고 있었다. 방금 벗으라고 해서 벗었는데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게 되었다.오랫동안 이렇게 자신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살이 쭉 빠졌는데 미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볼은 깊이 움푹 패 있었고 한 쌍의 검고 커다란 눈동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다.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마른 장작이 아니라 오히려 몸의 근육이 단단하고 결이 뚜렷했다. 그는 두 팔을 들어 주먹을 불끈 쥐어봤다.지금 그의 몸은 사람들에게 분명 그가 튼튼하고 운동을 자주 하는 건장한 사내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철수는 잘 알고 있다. 그는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5km를 달려도 숨이 차다. 일 년 내내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는 그는 뇌가 매우 활동적이지만 몸은 매우 허약했다.지금 이 순간, 뜬금없이 이런 몸이 생겼지만, 그의 뼛속은 여전히 허약하다. 몸의 허약함은 거짓이 아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자신을 보고 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와 허공에서 자신의 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둘째 할아버지는 중독되지 않았다고 하셨고, 그는 할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엑스레이도 감별할 수 없는 작은 종양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중독된 것이 이렇게 명백한 것이라면, 그가 못 만질 리가 없다.하지만 지난 며칠
손을 내려놓고 그녀도 숨을 내쉬었다.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와 옆방에 이르렀을 때, 김서진은 아직 잠들기 전이었다. 그는 이미 일어나 방안을 거닐 수 있었는데 움직임이 보통 사람과 다름없어 보였다.“한소은 선생, 또 순찰하는 거예요?”그는 농담 반으로 말했지만, 협조적으로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소은은 그를 흘겨보았다.“안색이 좋은 걸 보니 내일이면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그래요? 하지만 저는 아직 안 될 것 같아요.”미간을 찌푸린 채 김서진은 그녀가 자신의 맥을 짚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번이든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진지한 모습이었다.일부러 잠시 더 머무른 후에야 소은은 손을 내려놓았다. 긴장하던 표정이 한껏 풀린 그녀의 눈에는 안도감이 생겨났다.“완전히 회복되었네요. 맥박이 안정되었어요. 모든 것이 정상이에요. 내일 정말 나갈 수 있겠어요.”서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가볍게 앞으로 당겼다.소은은 재빨리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그러지 말아요…….”“하지만, 난 아쉬운데 어쩌죠?”서진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지친 눈에 뽀뽀하고 싶었다.소은이 말하지 않지만, 서진은 요즘 그녀의 고생을 모두 눈여겨 보고 있었다. 매일 이렇게 바쁜데, 그녀의 몸이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나도 아쉬워요. 하지만 이제 이 치료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으니 이때가 가장 중요해요. 우리 모두 잘 버텨야 해요.”그녀는 한숨을 쉬며 속삭였다.“나는 가끔, 소은 씨의 책임감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요!”한숨을 쉬고 서진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소은은 입을 삐죽하며 대꾸했다.“나도 때로는 싫지만 정말 어쩔 수 없어요.”“그 아가씨는 무슨 일이에요?”오늘 그는 바깥의 동정을 들었다. 다만 이곳은 상황이 특수해 가서 보지 못하고 다툼이 있었다고 단지 조금 들었을 뿐이다…….“병이 좀 재발했지만, 지금은 통제되고 있어요.”소은은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그렇게 간단해요
실험 구역에 도착한 한소은은 이미 거기에 멍하니 서있는 모범을 보았다.“모 선생?”“한 선생, 이것 좀 보세요…….”고개를 돌려 한소은을 본 모범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그는 손을 들어 실험 케이스 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한소은은 그제야 실험 케이스에 있는 쥐들이 다 죽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이게 뭐야!”깜짝 놀란 한소은은 얼른 다가가서 하나씩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생쥐는 이미 숨져 있고, 몇 마리만 살아 있지만 정신 상태도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모두 기죽어 있었다.“나 아무도 만지지 않았어요.”한소은의 눈길을 알아보고 모범은 두 손을 들어 무고함을 표시하였다.“제가 와보니 이미 이런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한 선생이 왔고요.”한소은은 그를 깊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곧 고지호 교수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고지호 교수도 이 상황을 보고도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이 생쥐에게 동등한 바이러스를 주입하고 한소은이 끓인 탕약을 먹였으니 탕약 때문이라면 환자가 마신 후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 어렵다.“여기서 소리가 들려서 왔는데 실험용 생쥐들이 다 뒤집혀 있었어요.”모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상황은 이렇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한 선생은 할 말 있나요?”고지호 교수이 한소은을 보고 물었다.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곧 실험실 직원 대부분이 이곳에 모였고, 해독제를 개발하는 모든 관련자들도 이곳에 왔다.급하게 오느라 많은 사람들이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 실험 케이스에서 다 쓰러진 생쥐들을 보고 다들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그중 몸이 굳어진 생쥐도 있었다. “이거…… 다 죽은 겁니까?”“이건 탕약 먹은 쥐들 아닌가요?”“그래서, 탕약이 아무 쓸모 없다는 건가요?”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고지호 교수과 한소은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다니 큰 소리로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마음속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아…….”사람들이 의아한 소리를 냈다.실험에 죽는 경우도 있지만 다 죽고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게다가 멀쩡한데 갑자기 죽은 것이 의문스러웠다.“다들 알겠지만 이 쥐들은 제가 끓여낸 탕약만 마셨기 때문에 책임은 제가 져야 합니다.”한소은은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옆에 있던 맹호군이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래서, 지금 끓인 탕약에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요?”“아뇨, 반대로 제가 끓인 탕약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돌아서면서 한소은은 긍정적으로 말했다.맹호군이 웃었다.“지금 이 상황 다들 보셨죠, 사망률 100%인데 탕약에 문제가 없다고요? 설마 문제가 있는 건 이 생쥐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죠.”그러나 한소은은 웃었다.“네, 문제 있는 건 이 생쥐들입니다.”“뭐라고요?!”다른 사람들도 어이없는 표정을 보였다.“이 생쥐들은 누군가 건드려 죽은 겁니다.”실험용 생쥐를 둘러보았다. 예외 없이 지금 다 죽어버렸다.“지금 너무 웃기는 걸 알아요.”냉소하며 맹호군은 앞으로 걸어갔다. 고지호 교수은 그를 막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말을 계속 했다.“그건 모르죠, 실험용 생쥐는 모두 통일로 나눠주는 건데 한 선생 것만 문제가 있다고요?”그리고 나서 시치미를 떼며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다들 생쥐 상태 어떠세요, 죽었나요?”두 손을 벌려 한소은이 어떻게 답하는지 기다렸다. “네, 제 것만 달라요.”한소은은 조금도 피하지 않고 단오히 말했다.“한 선생, 그게 무슨 말이예요?!”모범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에게 조용히 주의를 주었다.‘한 선생 미쳤나봐! 똑 같이 나눠준 생쥐들인데 문제가 생기니까 지금 책임을 회피하겠다? 이런 사람이었어?’“주임님을 말하는 거 같은데요!”고개를 돌려 맹호군은 고지호 교수을 바라보았다.“여기 생쥐들은 모두 주임님이 나눠준 거잖아요. 한 선생이 지금 다르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한 선생 계속 하세요.”고지호
한소은은 직설적이고, 사람들의 시선의 압력에 맹호군은 참지 못하고 얼굴표정이 차가워졌다.“한 선생 그게 무슨 뜻이죠! 말 똑똑히 하세요!”“나름대로 똑똑히 얘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해 못하겠나요?”한소은의 그를 보고 말했다.“이 생쥐들이 왜 다 죽었는지, 나보다 맹 선생이 더 잘 알 건데요.”“내가 당신 생쥐한테 독이라도 먹였단 말인가요?”맹호군이 냉소했다.“이거 정말 웃기는 장르네! 여긴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나 평소 여기에 잘 안 와요, 독은 더 말도 안되는 소리구요, 게다가 여긴 잠겨져 있는데 나 어떻게 들어와요?!”“실험실 구역에 잠겨 있지 않은 데가 있나요? 근데 다 들어갈 수 있잖아요.”한소은이 반박했다.“한 선생은 못 들어오잖아요?!”“모든 도어락은 다 연결되어 있어요, 근데 한 선생 건 다르잖아요.”말을 꺼내고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멈추었다.한소은이 웃었다.“여기가 다르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열어봤나요?”“그, 그냥 들은 거예요…….”어색함이 맹호군이 얼굴에 스쳐지나갔다.“당신 책임을 왜 나한테 떠넘겨요, 난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요! 탕약에 문제잖아요!”“질문 피하지 마세요, 지금 묻는 건 왜 도어락이 다른 것을 맹 선생이 아는지 물었습니다. 여기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텐데.”사람들은 너도나도 쳐다보며 어리둥절했다. 확실히 모르는 사실이다.이곳 모든 실험실 출입은 자동으로 잠기지만 모든 직원은 지문과 홍채를 기록하여 한소은 실험실을 제외한 기타 실험실은 모두 자동 출입이 가능하다.이곳만 특별한 것은 한소은이 애초 고지호 교수과 상의한 조건이다.의심이 많다고도 할 수 있지만 과거의 교훈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실험실은 그녀 개인의 지문이나 홍채, 그리고 고지호 교수만 들어갈 수 있다.“내가 우연히 발견한 건데 왜요! 이것 때문에 내가 손 댄 거라구요?”맹호군은 불복하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좋아요! 그럼 묻죠, 아까 다르다고 했는데 만약 나라면 어떻게 들어왔나요
영상속 화면은 분명히 실험실인데 속도를 배로 하고 보니 곧 누군가가 비밀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방호복에 큼직한 모자를 쓴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안심이 됐는지 어느 생쥐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한소은은 영상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모두 그 영상을 보았다.누군가가 실험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모두 눈을 크게 떴고 맹호군도 굳은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하지만 그는 들어온 사람이 보호복에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을 보고 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영상은 그 모습이 실험실을 나가는 그 시각에 멈췄다. 그는 몸을 곧게 세우고 콧방귀를 뀌었다.“이게 다예요?!”“영상 속 사람은 얼굴이 아예 안 보여요! 이 동영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 왜 나라고 생각하죠?”행오군이 코웃음을 했다.“이런 밑도 끝도 없는 동영상을 아무렇게나 만들어서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거예요, 한 선생, 내가 보기에 당신 학문은 별로지만 이건 것에는 재능이 있나 봐요.”“주임님, 지금 이 상황을 보고서도 제 말이 틀린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전에 말한 것도 다 우리 프로젝트를 위해서였는데, 한소은은 지금 실험에 실패하고 저한테 누명을 쓰게 했어요! 오늘 반드시 끝장 볼 거예요, 아니면 나도 여기서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없어요!”맹호군이 곁을 힐끗 쳐다보자 그와 친한 동료 몇 명도 입을 열었다.“맞아요! 어디를 봐서 맹 선생인가요? 한 선생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게다가 이 동영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가 증명할 수 있죠?”맹호군이 겁먹지 않는 모습을 보고 한소은이 웃었다.“내가 정말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세요?”“있으면 내놓던가!”맹호군이 헛웃음을 지었다.“근데 만약 또 이런 걸 보이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맹호군이 눈을 부릅떴다.한소은이 손가락이 움직이더니 또 동영상 하나를 끄집어냈다. 이번에는 영상 속 사람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