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데, 그쪽은 누구세요?”원철수는 답답했는지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평소의 온화하고 우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저, 저는 주 부인이에요. 전에 한번 뵌 적이 있었는데!”전화기 너머에서 전해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억울함이 묻어있었다. 그러면서도 원철수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하지만 원철수는 주 부인이 누군지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주부인? 어느 주 부인? 난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그는 집안의 친척과 학교 동기를 제외하고는 아는 여자가 거의 없었다. 누구의 부인, 어느 집안의 부인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 부인이라고 말했을 때 원철수는 단번에 모른다고 대답했다.부인이라 자칭한다는 건 유부녀라는 말인데 자기가 결혼한 여자와 알고 지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다만, 한소은은 예외였다.전화기 너머의 주 부인은 원철수가 전화를 끊으려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황급히 말했다.“원 선생님, 저는 주 부인이에요. 전에 한의약 세미나에서 만났었잖아요. 그때 서로 인사도 주고받고 얘기도 나눴는데. 그날 원 선생님이…….”주 부인은 그날 한소은이 원철수에게 음료수를 뿌린 말을 하려다 이 말을 하면 원철수가 바로 전화를 끊어버릴까 겁나 급히 말을 다시 삼켰다.“그날 원 선생님이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이다 보니 잊으셨나 보네요. 허허……”주 부인은 바로 말을 돌렸다. 행여나 원철수가 기분이 상해 전화를 끊을까 걱정이었다.그녀가 입가까지 나온 말을 급히 삼켰지만 원철수는 앞의 말만 듣고 그녀가 하려던 말을 알아차렸다.다만,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난 것이 아니라 그날 한소은이 자기에게 음료수를 뿌린 것이 생각이 났다. 그날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했었다.‘그래 이 빚도 있었지! 한소은, 두고 보자고!’“원 선생님, 제가 누군지 생각나셨나요?”주 부인은 전화기에서 원철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그날 그렇게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이것저것 물었는데 원철수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주 부인을 기억할 리가
이어 전화를 탁 끊고 주 부인의 번호를 차단했다.‘이런 이상한 사람이 어디서 내 번호를 알게 된 거야?’원철수는 차에 시동을 걸어 액셀을 밟고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렸다. 그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으로 마음속의 짜증을 날려버리고 싶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에서 주 부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말도 안 끝났는데 왜 멍하니 서 있는 거야?”옆에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 섞여 있었다.주 부인인 핸드폰을 들고 우물쭈물하다 대답했다.“원 선생님이 전화를 끊었어요.”“끊었다고?”남자는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윽고 크게 웃었다.“그래, 그래! 당신이 한 일좀봐! 무슨 사람을 어떻게 부탁했길래 전화 한 통도 제대로 못 해?”“그 사람이 무슨 신의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면서 가연이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더니, 결국에는! 그쪽에서 상대하려 하지도 않잖아! 전화마저도 끊어버리다니!”남자는 화가 많이 난 듯 주 부인에게 불만을 표출했다.주 부인은 억울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이렇게 모셔 오기 힘든지 나도 몰랐다고요! 어렵게 얻은 전화번호인데. 내가 이렇게 까느냐고 하는 게 다 누구 때문인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말도 몇 번 해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런 비난을 받는 게 기분 좋은 줄 알아요?”주 부인은 말하면 말할수록 억울해져 소파에 털썩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울, 울긴 왜 울어!”남자는 주 부인이 울자, 당황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한숨을 내쉬었다.“이틀 뒤면 가연이의 생일이잖아. 가연이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기로 했는데 이젠 다 물 건너갔어. 당신이 말한 것처럼 대단한 의사를 찾아와 가연이의 병을 치료해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전화 한 번 더 해보는 건 어때?”주 부인은 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 부인의 얼굴이 다시 울상이 되었다.“내 번호를……차단한 거 같아요.”그녀의 말에 주현철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주 부인이 일어서서 말했다.“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 봐야겠어요.”주현철은 놀란 표정으로 자기의 아내를 바라보았다.“당신 전화도 받지 않는데 당신이 찾아간다고 해서 만나주기라도 할까? 설령 만났다 해도 당신의 부탁을 들어 준다는 보장도 없잖아.”“전화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잖아요. 직접 만나서 매달리면 도망가지도 못할 거예요. 요즘 무슨 연구소의 실험실에서 실험을 돕는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거기 가서 기다리면 분명 마주칠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이렇게 두둑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걸 보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거로 생각하지 않아요!”주 부인은 주먹을 꼭 쥐고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돈부터 줄 생각을 하는 거야? 내 돈이 무슨 바람에 날려온 건지 알아?”주 부인이 돈으로 원철수를 매수하겠다는 생각을 밝히자, 주현철은 못마땅했다.최근 들어 회사의 이익이 좋지 않아 매형에게 사정을 좀 봐달라 하려 했지만, 그의 매형은 조금도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힘들게 사람을 부탁해 가면서 진가연의 병을 치료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다만…….이 일이 정말 잘 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원철수라는 사람이 사기꾼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 설령 사기꾼이 아니라 하더라도 진가연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병에 시달렸고 많은 의사에게 치료받아도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소문 속의 “신의”에게 치료받았다 해서 100% 완치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만약 완치되지 않는다면 이 돈은 허무하게 날린 거나 마찬가지다.사실 주현철은 원철수가 진가연의 병을 완벽하게 치료하고 나서 돈을 줄 생각이었다. 정말 완치가 되면 돈을 더 많이 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주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돈을 쓰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치료하겠다 하겠어요? 그분은 신의예요. 아무 데서나 찾아볼 수 있는 그런 흔한 의사가 아니라고요! 밑천을 꺼내지 않으면 더 큰 것을 얻을 수 없다
차에서 내린 한소은은 고개를 들어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진씨 가문의 본가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진 부장의 신분으로 너무 과장되지 않게 평범한 독채의 작은 별장이었다. 2층짜리 별장은 크지 않았고 고풍스럽고 아담한 느낌이 있었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일하는 아주머니가 바로 차와 과일을 내왔다.“아가씨께서 바로 내려오실 겁니다.”한소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일하는 아주머니가 물러서며 그녀가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피했다.진가연의 집안에는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커 보였다. 가전제품이 많지 않았기에 보기에 더욱 넓어 보였다.큰 거실에서 둘러보면 한눈에 모든 걸 볼 수 있을 정도였고 특별하게 값진 물건은 없었다. 정말 김서진이 말한 것처럼 진 부장은 자기가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게 얼마나 힘겹게 옳은지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선을 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거실에는 장식도 매우 적었다. 몇 개의 화분으로 가볍게 장식해 두었고 화분도 극히 소박한 것들이었다.그녀가 거실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을 때 위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느리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진가연이 그녀의 시선 속으로 걸어들어왔다.그녀는 한 손으로 계단의 손잡이를 잡으며 급하지 않게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어쩌다 한번 기침을 하는 모습은 마치 양반집 규수의 모습이었다.“한소은 씨, 오래 기다리셨죠?”진가연이 작게 말했다. 오늘의 그녀는 전에 카페에서 봤던 날카로움이 완전히 없어진 모습이었다. 얕은 미소를 짓는 모습은 한결 부드러웠다.“아니, 온 지 얼마 안 되었어.”소파에 앉았던 한소은은 진가연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주고받았다.“미안, 갑자기 찾아와서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그녀의 말에 진가연은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방해는 무슨, 난 집에서 매일 할 일 없이 먹고 자고 노는걸요.”그녀의 말투 사이사이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집에서 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부드러웠던
“물론이지.”한소은은 진가연이 기운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말하는 것도 기운 없이 느릿느릿하고 전에 봤던 것보다 더욱 피곤해 보였다.“요즘 잠이 많지?”쿠션을 베고 기댄 진가연이 눈꺼풀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뚱뚱한 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하니 쉽게 피곤해져요.”“게으르다고?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한소은은 거실에 놓인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건 다 네가 돌보는 화분이지? 이렇게 정성스럽게 잘 가꾸는 사람이 게으를 리가!”그녀의 말을 듣던 진가연이 고개를 돌려 화분을 쳐다보았다. 파릇파릇하게 잘 가꿔진 화분은 확실히 정성을 들여 가꾼 티가 났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거실에 놓인 화분 모두 만화 캐릭터를 모티브로 잘 다듬어졌다는 것이다.“내가 한 건지 어떻게 확신해요?”진가연이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한소은에게 물었다.“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가꾼 것일 수도 있잖아요.”그녀의 말에 한소은은 고개를 저었다.“아주머니가 가꾸었다면 이렇게 정성 들여 만화 캐릭터로 다듬지 않았을 거야.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동심을 잘 간직한 사람이거든.”“동심이라…….”진가연은 작게 중얼거리며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난 벌써 21살이에요. 동심은 무슨, 게다가 정말 동심을 잘 간직한 사람은 나 같은 모습으로 살지 않았겠죠.”진가연은 말하면서 자기의 배를 툭툭 치며 자기의 모습이 가증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한소은은 진가연이 과도 비만한 자기의 몸매에 대해 고민하고 초조해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창 꾸밀 나이인 여자아이가 이렇게 살이 쪘으니 초조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하지만 한소은은 그녀에게 동심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좋은 집에서 태어나 한창 예쁠 나이에 마음껏 꾸미지 못하는 진가연에게 그런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그녀도 예뻐 보이고 싶고 눈치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 눈앞에 나가길 원할 것이다.“어려서부터 이렇게 살이 찐 거야?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살이 찌기
예전에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과 다른 것은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진가연이 자기의 일들을 말할 때마다 한소은의 눈을 관찰했다. 그녀의 눈에는 조금의 비웃음도 없었고 누군가의 가십거리를 듣는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 한소은의 모습은 마치 환자의 상태를 곰곰이 체크하는 의사 같았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귀 기울여 들으며 병을 진단하는 것 같았다.순간 진가연은 한소은이 정말로 자기의 고민거리를 해결해 주려고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한소은 씨, 치료도 할 줄 아세요?”진가연이 느닷없이 물었다.그러자 한소은이 당황해하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난 그저 조향사일 뿐이야. 의사가 아니라고.”“그래요.”그녀의 대답에 진가연은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난 당신이 의사여서 날 구해주러 온 줄 알았어요.”“내가 그런 재주가 있을 리가…….”한소은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병은 의사에게 치료받는 게 맞아.”“전문적이든 어중이떠중이 의사든 내가 본 의사만 해도 수백은 될 거예요. 하라는 대로 다 하고 먹으라는 약도 다 먹었는데……. 어쩌면 내가 너무 게을러서 다 실패한 것일지도 몰라요. 운동만 했다 하면 구역질을 했어요. 그렇다 보니 헬스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내가……의지가 나약해서 안 되나 봐요.”진가연은 한숨을 푹 쉬며 테이블에 놓인 간식과 과일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멈칫하더니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당신이 저번에 알려준 방법은 효과가 조금 있었어요.”“응?”한소은이 흠칫 놀라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 블루베리 케이크 말이에요.”그녀가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자 진가연이 귀띔해 주었다.“그거 알아요? 그날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서 살았어요. 그날 먹었던 블루베리 케이크는 몇 년 동안 내가 먹었던 음식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어요.”한소은은 자기가 무심코 한 말이 그녀에게 그렇게 큰 감명을 가져다줄지는 생각지 못했다.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정말이야. 사람은 자기 몸과 맞설 필요가 없어. 자기 몸과 타협하고 잘 지낼 줄 알아야 해.”한소은의 목소리는 마치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진가연은 몸을 일으켜 바로 앉고는 시선을 테이블 위의 간식에 고정했다. 먹음직스러운 간식을 보며 침을 꼴깍 삼키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간식이 간절해 보였다.“먹어볼래?”한소은은 그녀가 간식을 먹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물어보았다.그러자 진가연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가장 작은 간식을 살짝 집어 들었다.그러고는 코끝에 가져가 간식의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코로 간식의 향기를 맡고 있지만 그녀의 눈에는 얼른 간식을 맛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쉽게 간식을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진가연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하나 먹어봐. 괜찮아.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어봐.”한소은이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진가연은 살짝 입을 벌렸다. 그녀는 지금 매우 신중하게 간식을 대하고 있었다. 마치 무슨 보물을 보는 듯 간식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속으로 가져갔다.간식이 입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낮고도 큰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한소은은 깜짝 놀랐고 진가연은 겁에 질리다 못해 손에 들고 있던 간식을 떨어뜨렸다.잘 만들어진 간식이 바닥에 떨어져 여기저기 부스러기가 널려졌다. 떨어진 간식을 보자, 진가연의 예쁜 두 눈에는 순간 실망과 아쉬움으로 가득했다.그러고는 금세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으며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한소은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양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검은 얼굴빛을 하고 성큼성큼 그들에게도 다가왔다.그의 눈빛은 마치 천벌을 받을 잘못을 저지른 죄인을 보는 것 같았다.진 부장은 한소은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째려보고 진가연에게 물었다.“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고 물었어!”
한소은이 집에 도착했을 때 김서진은 벌써 도착해 있었다. 그는 거실에서 아들과 놀아주고 있었지만, 옷차림은 다시 나가려는 차림이었다.“오늘 약속 있어요?”한소은은 요즘 정신 없이 지내다 보니 자기가 무엇을 잊고 있는지 기억하지도 못했다.“아니요. 그냥 단순하게 가족 외식이나 할까 해서요.”김서진이 대답했다,“시간 없어요?”“아뇨. 시간은 많아요. 근데 오늘은 왜 일찍 오라고 전화하지 않았어요?”한소은은 시계를 한번 확인했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생각보다 늦지 않았다.“급한 것도 아니잖아요. 당신 요즘 바쁜 거 아니까 조금 기다린 거죠.”김준은 비틀거리며 그녀를 향해 달려가 작은 손을 벌리고 안아달라고 했다. 작은 손가락이 그녀의 옷을 만지려고 할 때 김서진이 크게 기침했고 그러자 김준이 갑자기 멈추었다.조그마한 녀석은 알아들은 듯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한 번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였다.“엄마…… 뽀뽀…….”김준은 안아달라는 대신 입을 삐죽 내밀려 엄마에게 뽀뽀해달라며 칭얼댔다.그 모습에 한소은이 웃으며 허리를 굽혀 그의 작은 얼굴에 힘껏 뽀뽀했다.“우리 아들 착하지!”엄마의 칭찬을 받은 어린 녀석은 작은 얼굴을 들고는 교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자기의 아빠를 바라보았다.그러자 김서진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질투 나는 마음은 좀처럼 숨길 수 없었다.이 두 남자를 바라보던 한소은은 어이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진 부장과 진가연의 모습이 떠올랐다.‘아이에게 아빠란 존재의 영향력은 정말 너무 커.’“이제 밥 먹으러 가요!”김서진이 아들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한소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오늘의 메뉴는 스테이크다. 아직 어린 김준에게는 어린이 세트 메뉴를 주문해 주었고 두 사람은 각자 스테이크를 주문했다.레스토랑에 들어와서 부터 한소은은 말이 없었다.김서진이 작게 그릇을 툭 건드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한소은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자기를 걱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