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데, 그 세 번째는 사람을 중간 상황에 이르게 하는 것 인가요?” 김서진이 추측을 하듯 말하자, 한소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했을 걸요, 세 번째는 독약입니다.” “독......” 장난을 치려던 김서진은 그만 멈추고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프로젝트는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나요? 환자의 고통을 감소하고 한약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것이 프로젝트의 초심이 아니었냐고요?” “맞는 말이지만, 그들은 독하고 약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어요.” “허튼 소리!”김서진는 좀 화가 났다. 한소은은 가볍게 웃었다. “허튼소리 아닙니다. 한약에서 일부 약재는 확실히 독성이 있습니다. 옛말에 독으로 독을 물리친다고 하잖아요. 독을 잘 쓰면 약이 되기도 하고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할 수도 있지만 독성이 이렇게 강한 약재를 향주머니에 넣고 그 냄새를 완전히 감추어 사용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하는 건 위험한 일이죠.” “정상인이라면 다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것은 좋은데, 만약 사람을 해치는 거라면 남 몰래 살해하는 것과 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이전에 한소은이 항상 연구소 프로젝트에 문제가 있다며, 중단하려고 했을 때, 김서진은 그냥 이상하다고만 느꼈을 뿐이며, 프로젝트의 진실이 이런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김서진은 한약에 대해 잘 모르지만 듣기만 해도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안 됩니다, 프로젝트는 반드시 중단해야 되요, 저는 곧 투자를 철회겁니다!!” 김서진이 투자한 프로젝트이기에 투자를 철회하면 그 사람들은 계속 진행하고 싶어도 어려울 것이다. “설사 서진 씨가 투자를 철회한다 해도 그 사람들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투자자를 끌어들이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할 거예요. 또 이 프로젝트는 최초의 이
김서진은 그녀를 너무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임신중인 몸은 원래 허약하고,신경을 많이 쓰면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그녀는 똑똑해서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거라고’김서진은 생각했다 “임상언의 일은 내가 상황을 알아볼게. 너무 생각하지 마. 이 프로젝트가 이런 거면 아예 중단시키자. 내가 투자를 철회하면 넌 빠져. 그들이 어떻게 계속하는지 보고 싶네! ”“그런데……”“그런데라고 하지 마!”김서진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에 걸쳤다.김서진은 처음으로 한소은이 하는 일을 진지하게 막을려고 하고 있었다.예전에는 한소은이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고 싶든, 김서진은 다 무조건 지지했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계속 지지할 수 없어.“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넌 이 실험이 분명히 위험한 일이고 얼마 나쁜지를 상상하지 못하고 있어.네가 항상 탐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는데,이번 일은 달라,내 말 들어, 하 지마!”한소은은 김서진의 확고하고 간절한 눈빛을 쳐다보았고, 이번은 연애 이후로 처음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단호하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그래, 빠질게!”한소은이 말성이면서 말했다.한소은의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김서진은 심각한 얼굴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소은을 꼭 품에 안고, 한소은의 희고 부드러운 귀에 얼굴을 대고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좋아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게 아냐, 단지 너의 안전과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걸 알아야 돼!”한소은은 김서진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흔쾌히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렇다고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런데 내가 빠지고 네가 자금을 빼도 그들이 꼭 멈출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이 이 실험을 하는 게 도대체 멀 하고 싶은 거야? ”한소은이 고개를 돌려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네가 떠난 지 한 달 정도 넘었는데 그들의 실험 진도가 나가지 않은 것을 보면 너
집에 들어서자마자 물씬 풍기는 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대문에서 주택까지 가는 길에 각종 진기한 풀을 심어 차가 들어가기 어려웠다. 길을 따라 자갈길을 깔았는데 하인이 장 보러 나가려 해도 한참 걸어야 했다. 대문에 가까운 곳에는 주차장이 있었다.물론 평소에도 찾아오는 사람은 드물었다.처음에는 병을 보고 약을 받아 가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원 어르신이 일절 만나지 않고 모두 거절했다.문전박대가 이어지자 사람들은 차츰 이 규칙을 알게 되었다. 듣자니 원 어르신은 성격이 이상하다고 한다. 그가 받은 그 몇 명의 제자를 제외하면 집안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만날 수 없었다.오랜 세월이 흐르자 더 이상 그렇게 많은 사람이 방문하지 않았고 문 앞은 쓸쓸하기만 했다.어르신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거의 외출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곳은 더욱 한적해졌다.그런데 오늘, 대문 앞에 차 두 대가 세워졌으니 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원철수는 차를 멈추고 문 앞에 있는 빨간색 스포츠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최근 몇 년 동안 거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자신이 몇 번 왔는데, 아무도 만난 적이 없었다. 오늘 이것은... 누가 왔다는 말인가?사실 차가 있는 것도 희한한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쉽게 단념하지 못하는 사람이 찾아와 병을 봐달라고 부탁하거나 기술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가끔 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노인네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문을 굳게 닫고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늘 차도 볼 수 있고 사람도 볼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 빨간 차만 세워져 있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아마 문을 두드리러 찾아간 거라 생각하며 틀림없이 문전박대당할 거라 생각했다.원철수는 어르신의 그 거만하고 고상한 모습을 생각하고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씩올렸다. 어차피 늘 있는 일이다.주차하고 차에서 내리자 하인이 마중을 나왔다.“조카 도련님은 지금 들어갈 수 없습니다.”“왜?”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놀랐다. 어르신은 늘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사람을
뒤뜰에는 새가 지저귀고 꽃이 향기롭고 햇빛이 맑고 아름다웠다.노인은 등나무 의자에 누워 유유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손에는 작고 귀여운 자사 주전자를 들고, 때때로 주전자 입구에 입을 갖다대고 한 모금 오므리면서 차를 마셨다.그는 순백의 셔츠를 입고 짚 슬리퍼를 신었지만 한쪽 발만 멀쩡하게 신었고, 다른 한쪽 발은 두 발가락에 걸고 있었는데, 다리를 꼬고 흔들거려 언제든지 떨어질 것 같았다.도무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이 노인이 바로 많은 사람이 한번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원 어르신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그는 실눈을 뜨고 즐기는 듯했는데 수시로 눈을 뜨고 오른쪽을 힐끔거렸다.무심한 듯하면서도 조마조마한 모습이다.그의 오른쪽에는 넓은 약초지가 있는데 그 속에는 모두 그가 아끼는 것들이었다. 평소에 그 자신과 원예사 외 누구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그리고 그 순간, 면 셔츠와 긴 바지를 입은 여자가 그 속을 누비고 있었다.그녀는 안에 있는 진기한 풀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눈썹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세히 살펴 보고 있었다.목표를 찾았는지 푸른 잎이 돋아나고 노란색 작은 꽃술이 있는 식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노인의 놀란 소리가 들려왔다.“아이고 내 보배단지!”벌떡 일어난 그는 슬리퍼가 한 짝 벗겨진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절뚝거리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마!”이 소리를 듣고 한소은은 동작을 멈추고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건드리면 안 돼요?”“손대면 안 돼! 절대 안 돼!”두 손을 연신 흔들며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느릿느릿 손을 거둔 한소은도 정말 건드릴 생각은 없다. 노인은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그녀의 앞에 선 채 머리를 내밀고 조심스럽게 그 약초를 살폈다. 손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한소은의 손가락이 깨끗한 것을 보고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사부님, 나이에 비해 장사시네요!”한소은
“넌 알면서도 만지려는 거야, 너...”눈을 끔벅이던 어르신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사부님, 제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에요. 저는 이 뇌공등도 예외가 있어 그렇게 강한 독성이 없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예요. 재배 중 개량되었지 누가 알아요?”그녀 한 손으로 뺨을 받치고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은 그 초목을 넘어 곧장 그 옅은 노란색의 작은 꽃술을 바라보았다.약초는 보기에는 매우 평범해서 다른 식물과 다를 것이 없다. 심지어 연한 녹색 싹은 찻잎과 약간 비슷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명성이 자자한 ‘뇌공등’ 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뇌공등이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 이는 매우 유명한 풀인 단장초과에 속한다!신화와 전설에 의하면, 그 당시 신농이 백초를 맛보았고, 마지막에 이 뇌공등을 맛보았는데 구할 방도가 없어 생명을 날려 보냈다고 한다.전설은 비록 전설이지만 뇌공등은 확실히 맹독이 있다. 만약 그의 새싹이나 잎, 줄기를 잘못 먹으면 메스꺼움과 구토, 설사를 하게 되며 심혈관과 신경계 등에 직접적인 손상을 초래하게 된다.약초 중의 맹독의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육성 개량?”어르신은 이 표현이 매우 신선하다고 생각했다.“해봤어?”“아니요.”고개를 저으며 그녀는 여전히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이런 가능성이 있는지 알고 싶어요.”“이론적으로, 인정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어. 결국 세상사에 절대적인 것은 없지만, 내가 이 일에 종사한 다년간의 경험과 경력에 비추어 보면, 불가능해!”어르신은 그럴듯하게 수염을 비틀려 했다. 하지만 지난번 한소은이 김준을 데리고 왔을 때, 김준이 그의 수염을 잔뜩 뽑는 바람에 아예 전부 깎았다는 걸 깜박했다.지금 턱은 이미 반들반들하지만, 여전히 수염을 꼬는 습관을 고칠 수 없다.“그렇구나, 연구소가 이미 독성을 해소하는 뇌공등을 배양한 줄 알았네.”그는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자갈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뭐라고?
“이럴 수가! 그 사람들, 대체 뭘 하려는 거지?!”노인은 매우 놀랐고 또 화가 나기도 했다.이 나이 먹고 또 그렇게 많은 일들을 겪었으니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을 만도 했다. 하지만 연구의 진짜 목적을 추측하니 한편으로는 매우 놀라면서 화가 났다.“저도 그들이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인류를 위한 것이라거나 한의약을 더욱 발전시키려는 목적은 아니에요!”한소은은 말하면서 찻잔의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향긋한 차향은 금세 입안에 퍼졌다.노인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찻잎들은 모두 값이 싸지 않은 좋은 차들이다. 약초든 찻잎이든 모두 대자연이 준 선물이다. 선조들은 지혜로웠다. 오래전부터 각종 약초를 분별하여 사람을 살리고 병을 치료하는 데에 사영했다.하지만, 이것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약과 독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이 두 가지는 항상 서로를 의지하고 조화를 이루어 간다.어떤 약초는 잘 사용하면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독이 된다.한소은은 이것을 잘 알기에 약초를 사용함에 있어서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다만, 연구소의 사람들은 그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그 연구를 하는 게 아니다.때론, 독보다 더 독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네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노인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는 손가락을 서로 비비며 멈칫하다 한소은에게 물었다.하지만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은 자기의 생각을 부정했다.“아니지, 오랜 시간 내 밑에서 배우던 너인데 이런 문제에서 잘못 생각했을 리가 없구나. 그렇다는 건, 그 사람들이 확실히 문제가 있다는 건데…….”“그들이 이 연구를 왜 하는지는 모르는 거야?”노인은 몸을 한소은 쪽으로 살짝 기울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중요한 것은 애당초 노인이 한소은을 이 연구에 끌어들인 것이다.연구소의 그 노땅들이
“네, 안 그래도 손 떼기로 했어요. 서진 씨 쪽에서도 투자를 철회하겠다고 했고요. 다만, 이 연구가 오랫동안 진행된 만큼 그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 같아요. 내가 손을 떼면 아마 다른 사람을 찾아 날 대신하겠죠.”한소은은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다른 사람을 찾건 말건 그건 그 사람들 일이야. 너와 상관이 없으면 다른 건 신경 쓰이지 않아!”노인은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으로서 많은 일들에 대해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지 않게 되었다.아무리 의술이 뛰어나도 세상 사람 모두를 살릴 수는 없으니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겠다고 노인은 항상 생각했다.말을 마치고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가 심혈을 들여 가꾼 약 밭으로 향했다.“이 세상에는 의술을 배우는 사람이 있고 독술을 배우는 사람이 있단다. 사람의 마음은 천백 가지여서 쉽게 알아차릴 수 없지. 이 약초보다 훨씬 복잡하게 사람 마음이야!”한소은 몸을 움직여 노인의 흔들의자에 가서 누웠다.‘역시 눕는 건 언제나 편한 자세야!’그녀는 의자를 가볍게 흔들며 느릿느릿하게 노인에게 말했다.“그러게요! 사람의 마음은 천백 가지예요. 누구는 알려지기 싫어서 이런 외진 곳에 살면서 잘 나가려 하지 않는데 누구는 떠벌리다 못해 사부님의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사기를 치고 있어요.”그녀의 말을 들은 노인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한소은을 바라보았다.“누가 그런단 말이야?”“모르셨어요?”그녀의 스승님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다. 바깥의 일은 항상 그가 심어둔 눈과 귀가 전해준다.“스승님 본가의 어떤 젊은 사람이 스승님의 마지막 제자라 자칭하면서 여기저기 사기를 치고 있던데…….”“내 본가의…… 젊은 사람?”노인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설마 철수 그놈 말하는 거야?”그의 말에 한소은은 눈을 살짝 뜨면서 노인을 바라보았다.‘역시 알고 계셨어!’“에잇!”한소은의 반응을 보고 알아차린 노인은 무릎을
“허허…….”노인은 헛웃음을 두 번 삼켰다.그는 자기의 이 제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넌 이런 헛된 명성에 관심 없었잖아? 그런데 오늘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 이유가 뭐야? 철수 그 자식이 네 성질을 긁은 거야?”한소은에게 묻던 노인의 얼굴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마치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지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는 거 같았다.“그 정도는 아니에요.”흥미 가득한 노인에게 찬물을 끼얹듯이 한소은은 극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 연구소에 들어갔어요.”“뭐?”노인은 한소은의 말에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입을 떡 벌렸다.“그놈이 거길 왜 갔대? 그 어중이떠중이 실력으로 연구하겠다고? 내가 다 창피스러워서 못 봐주겠네.”매정한 스승님의 말에 한소은은 침묵했다.“그럼, 너희 둘 만난 거야? 네가 내 제자라는 사실은…….”“아직 몰라요.”한소은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몸을 반쯤 일으키며 경고하듯 한마디 덧붙였다.“알릴 생각하지도 마요!”“알았어, 알았어!”노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의 제자가 누구인지 해명하는 일에 대해 노인은 항상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노인이 제자를 받을 때는 항상 제자가 마음에 들고 자기의 기분이 좋을 때 제자를 받는다. 가르쳐 줘야 하는 것을 모두 가르쳐 주고 나서 제자가 계속 의학의 길을 걸을지, 자기의 신분을 밝힐지는 모두 제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이에 대해 노인은 언제나 담담했다.한평생 동안 그가 살린 사람은 부지기수였고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나쁜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세상의 생사에 익숙해져서 기괴한 병증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이 봐왔다.어떤 사람은 성심성의껏 치려고 해 줘서 고맙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살려줘도 자기의 예상만큼 회복이 되지 않았다고 뒤통수를 쳤다.젊은 시절, 패기가 넘쳤을 때 불의를 당하면 화나갔었는데 나이가 들고나서 점점 그런 것들을 내려놓게 되었다. 매 사람의 생과 사는 다 정해져 있다. 의술로 몇 년 더 살게 해주는 게 좋은 일만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