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소리야?”한숨을 쉰 우해민이 화가 나서 묻자 눈을 깜박거리던 김승엽이 갑자기 히히 웃기 시작했다.“너 해민이네! 우리 해민이야! 해민이는 착해서 욕할 줄도 몰라, 그러니까 너는 해민이야! 히히히…….”멍청하게 웃는 그의 얼굴은 술 때문에 빨개져서 눈빛마저 취해 멍청하고 어리석게 웃고 있었다.그러나 그 모습을 보면서도 우해민은 기뻤다. 그가 자신을 알아봤다. 이렇게 취했는데도 자신이 우해영이 아니라 우해민이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자신을 이해하고 알아볼 수 있다.“바보, 웃지 마!”감동받은 우해민이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받치고 눈을 마주치며 진지하게 물었다.“질문 하나 할게. 그럼 네가 좋아하는 건 우해영이야, 우해민이야?”그녀는 계속 그가 마음속으로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다. 만약 좋아한다면 그녀가 우해영을 닮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해민이기 때문일까?이건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다.술기운이 오른 김승엽은 얼굴을 그녀의 손에 올리고 약간 어질어질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생각하다가 그녀의 손을 툭 치며 말했다.“우해영!”“…….”그녀가 막 화를 내려고 할 때, 그가 우렁차게 트림을 했다. 그 소리가 끝나고 나서야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그 계집애가 뭐가 좋아! 사납고, 포악하고, 야만적이고, 이기적인데!”“그래도 우리 해민이가 좋아, 히히히, 해민이가 좋아!”그 말을 마친 그는 몸이 비뚤어지며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쓰러져 히히거렸다.마음속에서 떠오른 불이 한순간에 꺼진 우해민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아무 말이나 하는 버릇 좀 고칠래?”“해민아, 너만 나한테 잘해줘. 너 알지?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정말 모질어. 나한테 아무것도 안 준다고 했어. 내 모든 걸 다 가져가겠다고! 너도 알지? 엄마는 날 원하지 않아! 흑흑…….”말을 하던 그는 울기 시작했다. 화가 나고 무서워서 마음속으로 억울함을 가득 참고 있다가 마침내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되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콧끝은 그의 술냄새로 가득 찼지만 우해민은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아주 특별하다고 느꼈다.여전히 술에 잔뜩 취한 김승엽은 몽롱한 눈빛으로 우해민의 얼굴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민아, 가지 마. 날 버리지 마. 난 너밖에 없어…”그러면서 김승엽은 고개를 숙여 우해민의 입술에 힘껏 키스했다.심장의 떨림에 우해민은 김승엽을 밀어내지 않고 순순히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키스를 이어갔다.김승엽은 술기운 때문인지 거칠면서도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다가도 또 다시 평온함을 되찾고 행여 우해민을 아프게 한 건 아닌지 안절부절해했다.이런 일을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우해민은 그저 김승엽에게 몸을 맡겼다. 김승엽은 스킨십 방면에서 우해민에게 멘토같은 존재였다. 처음 손을 잡았을 때부터 첫 입맞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이 다음 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해민은 여기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마음속으로는 김승엽과 끝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온도는 금세 후끈 달아올랐고, 주위에서는 빈 맥주 캔이 이따금씩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해민은 김승엽이 술에 만취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전혀 깨우려 하지 않았다. 깊은 밤, 우해민은 김승엽과 함께 어둠 속으로 영원히 빠져들고 싶었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 꿈에서 깨어난 우해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뻐근하고 아프긴 했지만 마음만은 즐거웠다. 이건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한 선택이었다. 그녀의 몸, 그녀가 선택한 남자, 모두 그녀가 원한 것이었다.우해민은 잠들어 있는 김승엽을 바라보며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 우해민은 속으로 이제 자신이 바라고 바라던, 아름다운 미래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잠시 후, 우해민은 몸을 일으켜 쓰레기봉투에 쓸데없는 물건들을 전부 치우고 김승엽을 다시 침대로 옮기려고 했지만 그가 너
그들은 대표의 지시대로 김승엽에게 먼저 경고했다. 김승엽이 고분고분 그들의 뜻대로 그들과 함께 간다면 모든 것은 원만히 해결되겠지만 만약 김승엽이 반항한다면 그들은 사양하지 않고 바로 그를 끌고 갈 수 있다.“…”이 말에 수많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김승엽은 흐트러진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그는 자신이 쏘아올린 불길과,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벌써 여기까지 찾아와 그를 끌고 가서 시비를 가리려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김승엽의 얼굴빛은 한순간에 굳어졌다. 그가 생각정리를 끝내기도 전에 우해민은 이미 문을 열어버리고 말았다.그러자 그 남자는 초인종을 누르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해민은 품이 넓은 셔츠 하나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녀는 반들반들하고 긴 두 다리를 드러내고 태연하게 서 있었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우해민은 한 손으로 문틀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에게 문을 완전히 열어줄 생각은 없어보였다.“…”남자는 문을 여는 사람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어안이 벙벙해있었다. 게다가 이런 섹시한 옷차림의 여성이라니… 다시 고개를 돌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마룻바닥에 상의 탈의를 하고 앉아있는 김승엽이 눈에 들어왔다.“…”아찔한 상상을 자극하는 장면이었다.“뭘 봐? 또 이렇게 자꾸 초인종을 누르면 그땐 주택 칩입죄로 신고해 버릴꺼야. 그러니까 빨리 썩 꺼져.”우해민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문을 콱 닫으려고 했다.하지만 상대방은 손으로 문을 닫지 못하게 꽉 막았다.“도련님,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무슨 일이 있든지 먼저 집에 가서 천천히 얘기하자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피하셔도 평생 피하고 사실 수는 없잖아요.”“평생 피하고 살면 안된다고 누가 그래?”우해문은 턱을 치켜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이 말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같았는지 바로 말을 바꾸었다.“누가 이 사람이 평생 회피할 거라고 했
그녀는 김승엽에게 몸을 한껏 기댔다. 그녀는 한 손으로 문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김승엽의 어깨를 잡고 다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뭘 무서워하는 거야?”“뭐가 무섭다고 그래? 하… 하나도 무섭지 않아.”김승엽은 입술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조금 두려웠지만 그래도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는 걸 티내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도 돼.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하지만 너한텐 내가 있으니까 전혀 무서워할 필요 없어.”우해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한껏 과장된 말투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눈빛… 지난번에 만났던 우해민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의 부드럽고 얌전했던 우해민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갑자기 확 달라진 우해민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너 정말 우해민 맞아? 아니면…”아니면 우해민인 척 하는 다른 사람인 건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분위기가 이렇게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김승엽의 말에 우해민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뭐라고? 다시 말해봐.”“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헛소리야, 헛소리.”그녀의 호통에 깜짝 놀란 김승엽은 서둘러 말을 바꾸고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조금 전 그 순간, 그녀는 정말 우해영과 똑같아서 김승엽은 깜짝 놀랐었다.그의 깜짝 놀라하는 모습을 보고 우해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김승엽을 놀래키려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 그의 말은 정말로 그녀를 화나게 했었다.김승엽은 분명히 그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와 우해영을 충분히 구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지금은 자신을 자기 언니라고 의심하는 건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언니랑 내가 어디가 그렇게 닮았다고 그래? 분명 하나도 닮지 않았구만.’“나를 자세히 잘 봐. 내가 우리 언니랑 어디가 그렇게 닮았어? 잘 봐. 내가 누군지.”그녀의 목소리는 한껏 부드러워지고 눈빛도 평온해졌다.단호한 말투에 부
김승엽의 말에 우해민은 화를 내지도 않고 오히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뭔 큰 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니네? 난 다 괜찮아. 네 마음속에 내가 있다면 말이야. 나한테 미안해할 것 전혀 없어.”우해민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품에 폭 기댔다.엄청난 미인이 자신의 품에 안겼지만, 김승엽은 하나도 두근거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김서진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걱정이 가득했다. 스스로 자기 집을 불태운다면 그건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김서진이 그의 손에 있던 자산을 전부 몰수한다면, 김승엽이 태운 건 그의 자산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우해민은 김승엽의 마음이 딴 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언짢았지만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이 문득 궁금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근데 아까 왜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고 한 거야?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그게…”김승엽은 건조해진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모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어제 우리 집을 불태웠거든.”“집을 불태웠다고?”그의 말에 깜짝 놀란 우해민은 고개를 들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김승엽을 빤히 쳐다봤다.“왜 집을 불태운 거야? 혹시… 본가를 불태운 건 아니지?”“아니.”김승엽은 한숨을 푹 쉬었다.그는 우해민을 부축하고 나란히 소파에 붙어앉아 어제의 일을 그녀에게 전부 털어놓았다.“난 우리 어머니가 우리 모자 관계를 한 번만 더 생각해주셨으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텐데… 저렇게까지 매정하게 구실 줄은 전혀 몰랐어. 그래서 화가 나서 그만… 충동적이었어.”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손바닥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그러면 마치 귀찮은 일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하지만 우해민은 그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녀가 관심하는 건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왜 또 거길 가려는 거야? 여기 싫어? 내가 어디 가지말고 내 옆에 있으라고 했잖아. 왜? 설마 나 몰래 도망치려는 거야?”
“왜? 못 믿겠어?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자.”말을 마치고, 우해민은 그의 팔을 끌어당겨 자리에서 일으켰다.“잠… 잠깐만.”김승엽은 우해민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왜? 나를 그렇게 못 믿겠어? ”우해민은 화가 났다.“옷은 갈아입고 가야지.”김승엽은 두 사람의 몸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현재 이 상태로 어떻게 밖을 나갈 수 있단 말인가?잠시 후, 김승엽은 우해민을 따라 우씨 가문 별장으로 갔다. 가는 길 내내 그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그는 우씨 가문 별장에 와본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매번 올때마다 우해영이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비굴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우씨 가문 전용 차에 앉아, 옆에는 우씨 가문 자녀를 앉힌 채 우씨 가문 별장으로 가고 있다.잠시 후, 그는 우해민을 따라 별장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고용인이 그들의 외투를 받아주었다.우씨 가문 별장 한가운데 서 있는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거 같았다. 사실 이 별장은 김승엽 가문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발 디딜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해민아,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지?”김승엽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비볐다.그러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우해민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네 언니는…”“우리 언니?”그러자 우해민은 헛웃음을 지으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이제부터 언니는 더 이상 내 삶을 제한할 수 없어. 언니가 앞으로 살아갈 나날은 내가 예전에 살던 날들, 아니. 아마 그것보다 더 나빠질 거니까.”“하지만, 해영 씨 무술은…”김승엽은 생각만 해도 아찔해났다. 우해영의 무술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승엽과 우해민 두 사람. 아니, 스무 명이 한 번에 덤빈다고 해도 우해영은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하하, 무술…”아무리 무술 실력이 뛰어난다고 해도 독극물
방문이 열리자 이내 안에서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승엽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잠시 후, 그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희미한 불빛만 나풀거리는 어두운 방안에는 작은 침대 하나만 놓여져 있었다. 침대 위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빛이 그다지 좋지 않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김승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언니야?”그는 고개를 돌려 우해민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우해영은 바로 알아차리고 미간을 찌푸렸다.“누구야?”우해민은 김승엽을 힐끗 쳐다보고는 피식 웃으며 두 발짝 안으로 들어갔다.“언니, 당연히 나지 누구겠어? 지금 언니 꼴이 이런데 설마 누가 언니를 보러 올 줄 알았어?”“혹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야?”우해영은 냉소했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긴 거야. 맞잖아? 언니, 설마 지금 언니가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 바보같이 굴지 마. 언니가 이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지는 나한테 달렸어.”“그럼 차라리 날 죽여. 그게 낫지 않아? 왜? 못하겠어?”우해영은 막다른 길에 놓여도 전혀 굴복하거나 자세를 낮추지 않고 계속 비아냥거렸다.“내가 어떻게 언니를 이렇게 쉽게 죽이겠어? 아직 제대로 괴롭히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내가 몇 년 동안 겪었던 고통을 언니도 똑같이 충분히 겪어봤으면 좋겠어. 언니도 내가 그동안 이런 나날을 어떻게 견뎌 왔는지 알아야지.”우해민이 말했다.그녀의 말에 우해영은 마른 기침을 두 번 했다. 그러더니 이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네가 스스로 그렇게 약해빠진 걸 지금 누굴 탓하는 거야? 내가 네 목숨을 지켜줬는데 넌 감히 이렇게 갚아줘?”“내 목숨을 지켜줬다고?”우해민은 그녀의 말에 크게 분노하여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기고 머리를 위로 치켜올렸다. “언니가 어떻게 뻔뻔하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다 같은 엄마 아빠의 자식인데 왜 나만 죽어야 하냐고. 나를
“내 초라함은 한순간일 뿐이야. 하지만 너희 둘은 처음부터 계속 패배자였어. 아니, 영원히 패배자야.”우해영은 그들을 조롱하듯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우해영은 지금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어도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김승엽은 마음이 동요했다.그렇다, 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실패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총애를 받아왔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를 그렇게 좋게 봐주지 않았다. 예전에는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사실 김승엽은 그의 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었으며 김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그에게 가문을 넘겨줄 생각조차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처음부터 그는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 경쟁할 자격조차 없었지만, 몇 년 동안 그는 끊임없이 이익을 쟁취하려 애썼다. 김승엽의 이런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얼마나 우스웠을까? 결국, 그를 가장 총애하던 어머니마저 그에게 등을 돌렸고, 그는 이제 가진 것 없이 빈털털이가 된 채 남의 집 신세를 지고 있다. 아마 김승엽보다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김승엽은 안색이 한껏 어두워진채로 밖으로 나갔다. 그런 김승엽을 보고 우해민은 바로 그를 따랐다. “승엽아, 승엽아.”“보아하니 내가 당신 아픈 곳을 찌른 모양이군. 한 번 패배자는 영원한 패배자일 뿐이야. 아무리 비열한 수단을 써도 그저 일시적인 득에 지나지 않지. 조만간 큰 코를 다칠 거야. 하하하, 하하.”우해영의 웃음소리가 온 방안에 울려퍼졌다. 하지만 우해민은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겨우 김승엽을 따라잡았다. “왜 그래?”우해민은 그의 팔을 덥석 잡아당기며 물었다. “설마 언니가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픈 거야?”그녀는 불안했다. 이런 불안은 자신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어릴 적부터 남들이 지켜봤던 사람은 전부 우해영, 그녀의 언니였으니까 말이다.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