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쌍둥이 자매 중 하나만 남기는데, 왜 자신이 될 수 없단 말인가? 언니가 자신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도 죽고 싶지 않고 살고 싶었다.“뭘 그렇게 득의양양해? 언니가 예전의 우해영이라고 생각해? 나한테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 이렇게 폐인처럼 누워서, 뭘 어떻게 하겠냐고!”갑자기 몸을 숙인 우해민이 우해영에게 다가가 모질게 말했다.원래 아무것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우해영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했다.“너 나한테 뭘 한거야?!”그 눈빛에 우해민은 깜짝 놀랐지만, 곧 자신감 있는 웃음을 터뜨렸다.“맞혀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맞히면 상이라도 줄까?”“너…….”사납게 웃는 우해민의 얼굴과 미친 눈빛을 보며, 우해영의 뇌가 빠르게 돌아갔다. 최근 들어 몸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비적에 문제가 있다고만 생각했지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깝고 믿음직한 사람들이었고, 아무도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우해민을 신경쓰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어떤 방비도 하지 않았다.아무리 그래도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여동생인데, 감히 자신을 해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런 담력이 있었다니.우해민의 말을 들으며 마치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깜짝 놀란 뒤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그래, 몸에 문제가 있던 건 최근 두 달 동안의 일이고, 최근에 특이했던 점은 비적을 수련하고 있던 것과 또…….“나에게 끓여준 그 탕?”우해영이 곧 원인을 찾아내자, 우해민이 웃었다.“언니는 정말 똑똑해. 어쩐지 부모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더라! 그래, 그 탕! 맛있었지? 비밀 하나 알려줄게. 내가 그 탕에 특제 양념을 넣어서 언니가 지금 여기 누워서 쉴 수 있는 거야!”“너, 간도 크지!”놀라고 화난 우해영이 목을 꼿꼿이 세우고 욕설을 퍼부었다.예전 같았으면 바로 우해민을 때려
이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우해영은 반항할 틈이 없었다.우해민은 우해영의 손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몇 번 두드리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매섭게 말했다.“우리 언니, 예전에 나를 이렇게 때렸지. 얼굴은 때리지 않았지만 말야. 때릴 수 없었겠지, 어쨌든 비슷한 얼굴을 이용해 일을 처리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두렵지 않아. 나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나 자신으로 살 거야!”“너 자신으로?”우해영이 비웃으며 말했다.“너 자신이 누구야? 너는 네가 뭐라고 생각해? 엄마 아빠도 너를 인정하지 않았고, 우리 집에 딸은 나, 우해영밖에 없어. 이 세상에 우해민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없어! 너 자신으로 살겠다고? 정신 차려, 우해민은 죽었고 우리 집에는 딸이 한 명뿐이야. 바로 나, 우해영!”원래 큰 소리로 해야 할 말이, 허약한 몸을 거쳐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약하게 끝나버렸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우해민은 화가 나서 두 눈에 불꽃이 튈 지경이었다.이건 그녀가 한평생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일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자신을 우해민을 알지 못한다. 족보에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 친부모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존재…….“닥쳐, 입 다물어!”그녀가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고 소리치자, 자극받은 그 모습을 보고 우해영이 계속 비웃었다.“봐, 거울에 비친 네 모습을 봐! 내가 여기서 누운 채로 움직일 수 없다 하더라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네 말을 들을 것 같아? 정말 네가 나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꿈도 꾸지 마, 이 그림자 같은 게!”“입 닥쳐, 닥치라고!”우해민이 히스테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우해영의 뺨에 손을 세게 내리쳤다.뺨을 맞은 우해영이 완전히 멍해졌고, 우해민 자신조차도 멍해져서 방금 정말 자신이 때렸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감히 나를 때리다니!”한참 동안 정신을 못차리던 우해영이 화를 내려 말했다.우해민이 자신을 때릴 수도 있다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어쨌든 지
말을 할수록 마치 이 행위에 중독되는 것 같았다. 우해민의 눈에서 불꽃이 튀며 좌우로 우해영의 따귀를 쉴새없이 때렸고, 곧 두 볼은 높이 부어올라 말을 분명하게 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한참을 때리고서야 멈춘 우해민은 빨갛게 부은 손바닥을 보았다. 손은 아팠지만 기분은 아주 상쾌했다. 이렇게 사람을 때린 적이 없었는데, 게다가 가장 두려워하는 언니를 때릴 일은 전혀 없었다.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흥분이 떠오르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웃었다.“내가 해냈어, 내가 정말 해냈어! 이제 나는 우해민이야, 더 이상 우해영의 그림자가 아니라고!”“너… 꿈도 꾸지 마!”우해영이 이를 갈며 그 틈으로 몇 마디 말을 짜냈다. 지금 말하기도 어려운 상태였지만, 여전히 기가 꺾이지 않은 모습이었다.“너는 영원히 실패자야. 진작 죽었어야 할 운명이야!”“내가 아니라 언니야, 죽어야 할 건 언니라고!!!”우해영의 반격에 우해민이 자극되어 화가 난 두 손으로 우해영의 목을 힘껏 꽉 졸랐다.“만약 집에서 자식 하나만 남겨야 한다면, 언니가 죽어야지! 무슨 근거로 내가 죽어야 해? 죽을 사람은 언니여야 해! 이 괴물, 이 냉혈한, 정이 뭔지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해? 그 무공 비적 연구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지! 죽을 사람은 너야!!!”“컥… 컥컥…….”목이 졸린 우해영은 두 눈이 뒤집힌 채 기절하기 직전이었다.그녀가 자신의 목숨이 이렇게 없어진다고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신선한 공기가 크게 밀려오며 목의 압력이 풀렸다. 즉시 숨을 크게 쉰 그녀의 머리가 어지럽고 피가 도는 게 느껴졌다.“내가 그렇게 빨리 죽일 것 같아?”우해민이 일어서서 우해영을 차갑게 쳐다보며 비웃었다.“그럴 순 없지!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나는 언니를 그렇게 쉽게 죽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받은 고통을 똑같이 맛보게 할거야. 내가 보냈던 그런 암담한 날들을 보내게 할거야. 충분히 괴롭힌 다음에 죽게 해 주지! 밖에 사람 없어?!”그녀의 말에 밖에서 몇 사람이 들어왔다. 숨을
우해영이 끌려간 후, 우해민은 혼자 큰 방에서 두 팔을 벌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고개를 들어 눈을 감고 힘껏 심호흡을 하며 이곳의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해영의 방은 음침하고 좁아서 햇빛이 들지 않는 자신의 방과 완전히 달랐다.어릴 때부터 그녀는 언니의 방을 몰래 보곤 했다. 크고 예쁜 방, 침대도 매우 커서 그녀의 방만한 크기였다. 안에는 옷도 아주 많았고, 책상, 옷장, 소파도…….하지만 그 모든 게 그녀의 방에는 없었다. 가장 중요했던 건 큰 창문, 따뜻한 햇빛, 그리고 햇빛이 들어오는 베란다.항상 몰래 부러워하며 자신이 그걸 가질 수 있다는 건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그때까지는…….우해영은 그 남자 때문이냐고 물었다.그래, 맞아. 하지만 아니야!김승엽이 그녀의 마음 속 가장 깊은 욕망과 갈망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도화선일 뿐 결코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다. 진정한 원인은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축적되고 억압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이 있다. 외부에서 이걸 억압하면, 결국 마지막에는 분출되어 폭발하는 역효과가 날 뿐이다.이제 그녀의 모든 욕망이 발동했다. 큰 집, 부드러운 침대, 투명한 창문, 공기 속에 서서 자유롭게 호흡하고 즐거운 연애를 하는 온전한 자신이 되고 싶었다.우해영이 양보하지 않는다면 망쳐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자신이 모든 걸 얻을 수 있다.큰 침대에 엎드린 우해민은 몸이 모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역시 큰 침대는 너무 편하다. 꿈에 그리던 침대!즐겁게 위에서 여러 번 뒹굴고 몸을 뒤척이던 그녀는 우해영의 휴대폰을 들고 이 즐거움을 김승엽에게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전화는 꺼져 있었다. 아마 김 씨 가문 사람에게서 연락이 올까 봐 꺼 놓은 것 같았다.하지만 갑자기 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쳤다.보고 싶으면 바로 만나면 되지 않을까? 그녀는 이전과 달라졌다. 지금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누구를 만나고 싶든지, 뭘 하고 싶든지 누구에게도 보고할 필요 없이 다 할 수 있다!이런 생각이
“무슨 소리야?”한숨을 쉰 우해민이 화가 나서 묻자 눈을 깜박거리던 김승엽이 갑자기 히히 웃기 시작했다.“너 해민이네! 우리 해민이야! 해민이는 착해서 욕할 줄도 몰라, 그러니까 너는 해민이야! 히히히…….”멍청하게 웃는 그의 얼굴은 술 때문에 빨개져서 눈빛마저 취해 멍청하고 어리석게 웃고 있었다.그러나 그 모습을 보면서도 우해민은 기뻤다. 그가 자신을 알아봤다. 이렇게 취했는데도 자신이 우해영이 아니라 우해민이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자신을 이해하고 알아볼 수 있다.“바보, 웃지 마!”감동받은 우해민이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받치고 눈을 마주치며 진지하게 물었다.“질문 하나 할게. 그럼 네가 좋아하는 건 우해영이야, 우해민이야?”그녀는 계속 그가 마음속으로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다. 만약 좋아한다면 그녀가 우해영을 닮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해민이기 때문일까?이건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다.술기운이 오른 김승엽은 얼굴을 그녀의 손에 올리고 약간 어질어질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생각하다가 그녀의 손을 툭 치며 말했다.“우해영!”“…….”그녀가 막 화를 내려고 할 때, 그가 우렁차게 트림을 했다. 그 소리가 끝나고 나서야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그 계집애가 뭐가 좋아! 사납고, 포악하고, 야만적이고, 이기적인데!”“그래도 우리 해민이가 좋아, 히히히, 해민이가 좋아!”그 말을 마친 그는 몸이 비뚤어지며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쓰러져 히히거렸다.마음속에서 떠오른 불이 한순간에 꺼진 우해민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아무 말이나 하는 버릇 좀 고칠래?”“해민아, 너만 나한테 잘해줘. 너 알지?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정말 모질어. 나한테 아무것도 안 준다고 했어. 내 모든 걸 다 가져가겠다고! 너도 알지? 엄마는 날 원하지 않아! 흑흑…….”말을 하던 그는 울기 시작했다. 화가 나고 무서워서 마음속으로 억울함을 가득 참고 있다가 마침내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되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콧끝은 그의 술냄새로 가득 찼지만 우해민은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아주 특별하다고 느꼈다.여전히 술에 잔뜩 취한 김승엽은 몽롱한 눈빛으로 우해민의 얼굴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민아, 가지 마. 날 버리지 마. 난 너밖에 없어…”그러면서 김승엽은 고개를 숙여 우해민의 입술에 힘껏 키스했다.심장의 떨림에 우해민은 김승엽을 밀어내지 않고 순순히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키스를 이어갔다.김승엽은 술기운 때문인지 거칠면서도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다가도 또 다시 평온함을 되찾고 행여 우해민을 아프게 한 건 아닌지 안절부절해했다.이런 일을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우해민은 그저 김승엽에게 몸을 맡겼다. 김승엽은 스킨십 방면에서 우해민에게 멘토같은 존재였다. 처음 손을 잡았을 때부터 첫 입맞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이 다음 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해민은 여기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마음속으로는 김승엽과 끝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온도는 금세 후끈 달아올랐고, 주위에서는 빈 맥주 캔이 이따금씩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해민은 김승엽이 술에 만취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전혀 깨우려 하지 않았다. 깊은 밤, 우해민은 김승엽과 함께 어둠 속으로 영원히 빠져들고 싶었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 꿈에서 깨어난 우해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뻐근하고 아프긴 했지만 마음만은 즐거웠다. 이건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한 선택이었다. 그녀의 몸, 그녀가 선택한 남자, 모두 그녀가 원한 것이었다.우해민은 잠들어 있는 김승엽을 바라보며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 우해민은 속으로 이제 자신이 바라고 바라던, 아름다운 미래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잠시 후, 우해민은 몸을 일으켜 쓰레기봉투에 쓸데없는 물건들을 전부 치우고 김승엽을 다시 침대로 옮기려고 했지만 그가 너
그들은 대표의 지시대로 김승엽에게 먼저 경고했다. 김승엽이 고분고분 그들의 뜻대로 그들과 함께 간다면 모든 것은 원만히 해결되겠지만 만약 김승엽이 반항한다면 그들은 사양하지 않고 바로 그를 끌고 갈 수 있다.“…”이 말에 수많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김승엽은 흐트러진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그는 자신이 쏘아올린 불길과,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벌써 여기까지 찾아와 그를 끌고 가서 시비를 가리려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김승엽의 얼굴빛은 한순간에 굳어졌다. 그가 생각정리를 끝내기도 전에 우해민은 이미 문을 열어버리고 말았다.그러자 그 남자는 초인종을 누르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해민은 품이 넓은 셔츠 하나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녀는 반들반들하고 긴 두 다리를 드러내고 태연하게 서 있었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우해민은 한 손으로 문틀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에게 문을 완전히 열어줄 생각은 없어보였다.“…”남자는 문을 여는 사람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어안이 벙벙해있었다. 게다가 이런 섹시한 옷차림의 여성이라니… 다시 고개를 돌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마룻바닥에 상의 탈의를 하고 앉아있는 김승엽이 눈에 들어왔다.“…”아찔한 상상을 자극하는 장면이었다.“뭘 봐? 또 이렇게 자꾸 초인종을 누르면 그땐 주택 칩입죄로 신고해 버릴꺼야. 그러니까 빨리 썩 꺼져.”우해민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문을 콱 닫으려고 했다.하지만 상대방은 손으로 문을 닫지 못하게 꽉 막았다.“도련님,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무슨 일이 있든지 먼저 집에 가서 천천히 얘기하자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피하셔도 평생 피하고 사실 수는 없잖아요.”“평생 피하고 살면 안된다고 누가 그래?”우해문은 턱을 치켜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이 말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같았는지 바로 말을 바꾸었다.“누가 이 사람이 평생 회피할 거라고 했
그녀는 김승엽에게 몸을 한껏 기댔다. 그녀는 한 손으로 문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김승엽의 어깨를 잡고 다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뭘 무서워하는 거야?”“뭐가 무섭다고 그래? 하… 하나도 무섭지 않아.”김승엽은 입술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조금 두려웠지만 그래도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는 걸 티내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도 돼.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하지만 너한텐 내가 있으니까 전혀 무서워할 필요 없어.”우해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한껏 과장된 말투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눈빛… 지난번에 만났던 우해민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의 부드럽고 얌전했던 우해민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갑자기 확 달라진 우해민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너 정말 우해민 맞아? 아니면…”아니면 우해민인 척 하는 다른 사람인 건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분위기가 이렇게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김승엽의 말에 우해민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뭐라고? 다시 말해봐.”“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헛소리야, 헛소리.”그녀의 호통에 깜짝 놀란 김승엽은 서둘러 말을 바꾸고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조금 전 그 순간, 그녀는 정말 우해영과 똑같아서 김승엽은 깜짝 놀랐었다.그의 깜짝 놀라하는 모습을 보고 우해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김승엽을 놀래키려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 그의 말은 정말로 그녀를 화나게 했었다.김승엽은 분명히 그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와 우해영을 충분히 구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지금은 자신을 자기 언니라고 의심하는 건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언니랑 내가 어디가 그렇게 닮았다고 그래? 분명 하나도 닮지 않았구만.’“나를 자세히 잘 봐. 내가 우리 언니랑 어디가 그렇게 닮았어? 잘 봐. 내가 누군지.”그녀의 목소리는 한껏 부드러워지고 눈빛도 평온해졌다.단호한 말투에 부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