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한소은은 노부인이 자기의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주도록 내버려 둘수 밖에 없었다.그녀의 엄지손가락에 비취반지가 꼭 맞았다.반지를 낀 그녀의 손을 보며 노부인이 허허하며 웃었다.“딱 맞네! 예전에 집안의 큰 부인들과 황가의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에 반지를 자주 꼈었지, 이건 네 운명인가 보구나!”“감사해요. 할머니.”한소은은 작게 대답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손은 마치 천근만근을 들고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김승엽은 방에서 푹 잤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정신이 많이 회복된 것을 느꼈다. 사람도 그렇게 의기소침하지 않았다.다만 이 집이 너무 비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커녕 밥을 할 수 있는 주방용기마저 없었다. 홀로 밥을 해 먹으려 해도 할 수가 없어 배달 음식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다행인 것은 우해민이 가면서 그에게 돈을 남겨 주었다. 이 돈으로 배달 음식을 먹으며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남은 잔액을 보면서 김승엽은 자기의 모습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그는 단 한 번도 어느 날 여자가 주는 돈에 의지하여 살아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예전의 그는 외출할 때마다 돈을 펑펑 썼고, 행여 돈이 모자랄 때는 외상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자기 대신 계산하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그때의 그는 김씨 가문의 가주가 아니었지만 김씨 가문의 도련님이었고 김서진의 작은아버지였다. 하지만 지금은...‘설평 이 망할 자식! 감히 나를 때려? 이 상황만 해결하면 망할 자식의 팔을 하나 부러뜨려야겠어!’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김승엽은 자기가 정말 이 상황을 해결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순간 그의 빛나던 눈동자는 다시 암담해졌다.그는 짜증스럽게 옆에 있던 작은 의자를 걷어차고 창문 쪽으로 걸어가 밖을 바라보았다.이 아파트 단지의 환경은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예전에 살던 곳과 비교하면 초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집은 그가 살았던 침실보다도 작았다. 그는 자기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별장이 그리 멀지 않은 데다가 지금 손에 현금이 있으니, 콜택시를 불러 빠르게 갔다.별장 구역의 경비원은 그를 알아보았기에 그를 막아서지 않았다. 그는 순조롭게 자신의 별장 앞에 도착해 자기의 집이 맞는지 재삼 확인하였다.그의 명의로 된 부동산은 사실 적지 않다. 작은 아파트에 별장을 더하면 여러 채가 있다. 타지역에 있는 것도 있고, 제성에도 있다. 집이 하도 많으니, 그가 모든 위치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 집을 기억하는 이유는 최근 2년에 새로 샀기 때문이다.김씨 가문의 산업 범위가 넓었고 특히 부동산업종에 가장 일찍 발을 들여놓아서 영향력이 생각보다 컸다. 이 부근의 토지는 다 김씨 가문의 소유이다. 이곳에 집을 짓고 나서 가장 좋은 몇 채는 가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남겨 두었다.이전에 김승엽은 이런 것들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다. 사둔 집이 너무 많아 어떤 곳은 가보지도 않았고 만에 하나 가문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모든 건 자기가 가지게 될 서이어서 집 몇 채에 연연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이런 집 한 채는 그가 한동안 머물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중 한 채를 팔면 앞으로 아주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돈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다.김승엽은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비밀번호는 사실 아주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일이다. 그 많은 비밀번호를 기억할 수 없었기에 줄곧 그의 생일로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이윽고 별장의 문이 열렸다.문이 열리자, 김승엽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곧 문을 열고 들어갔다.집안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사람이 살지 않아도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사람이 살지 않았기에 썰렁했다. 다만, 우해민의 작은 집보다는 훨씬 나았다.큰 거실에 서서, 그는 하늘을 우러러 몇 번 크게 웃고 싶었다. 그는 아직 궁지에 몰린 것이 아니다. 그는 집이 있고 돈이 있다. 그는 여전히 다시 일어설
한참 지나서야 정말 전화벨 소리였다는 걸 발견하고 침대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가져와 걸려 온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받았다.“승엽아, 너니? 승엽아.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왜 아직 안 돌아 오는 거야!”전화기 너머에서 김승엽은 흠칫 놀랐다.그는 어머니가 이런 반응일 줄 생각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초조하게 들렸고, 또한 그를 매우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그날처럼 그렇게 무정하지도 않았고, 차갑지도 않았다.오히려 김승엽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어머니...”그러고 나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의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사랑하면서도 밉기도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를 예뻐했으면서 마지막에 가서 그를 배신했다.“승엽아, 승엽아...”김승엽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노부인은 마음이 급해 그를 불렀다. 그러다 잠시 생각하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에게 물었다.“승엽아... 아직도 엄마를 원망하는 거야?”“그러게 왜 그러셨어요!”노부인의 말을 듣고 김승엽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부인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손으로 소파를 내리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왜 제게 그러셨어요?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한 게 날 지옥으로 밀어버린 거란 생각이 들지 않으셨어요?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독할 수 있으세요!”그의 질문에 노부인의 눈물이 바로 떨어졌다.“엄마가 독한 게 아니라, 도저히 김씨 가문의 죄인이 될 수 없었어!”노부인이 울먹이며 말했다.“네가 그 유전자 검사 결과 보고서를 보았을 때 마음속으로 얼마나 괴로웠고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몸부림을 쳤는지 모르지! 엄마가 얼마나 마음 아팠는데... 넌 엄마가 가장 아끼는 아들인데 어떻게 네가...”“그러면 왜 진작에 내게 말하지 않으셨어요? 왜 내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 그들 앞에서 망신당하게 하셨냐고요?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어야 만족해하시는 거예요?”김승엽은
“그럴 리가!”그는 믿을 수 없었다. 모든 게 다 완벽하고 정확했는데, 예측하지 못한 게 있었다면 바로 어머니가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만 아니라면 어떻게 자신이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너는 몰랐겠지만, 서진이가 네 비밀을 이미 알고 있었어, 그것도 나보다 더 일찍. 이때까지 말을 안했을 뿐이지. 네가 서진이를 너무 몰아붙이지 않는 한 앞으로도 말할 일 없을텐데, 그런데 너는…….”김서진이 진작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건, 그녀도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녀도 김 씨 집안의 권력자인 김서진의 눈은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김승엽이 태어날 때부터 김 씨 집안에서 자랐다는 걸 감안했을 것이다. 애초에 할아버지가 김승엽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할아버지에 대한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라도 김서진은 이 비밀을 입밖에 내지 않았던 것이다.그러나 김승엽이 한 발짝 한 발짝 김서진을 몰아붙였고, 이는 자신을 스스로 막다른 길로 내몬 것과 마찬가지였다.“뭐라고요?!”김서진이 이미 알고 있었다니, 그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이때까지 입 밖에 내지 않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말도 안 돼요! 이 일을 알고 있었다면 진작 나를 김 씨 가문에서 쫓아냈을 텐데, 왜 지금까지 내버려 둔 거죠? 어떻게 가문의 회의를 열게 놔둔 거예요? 엄마도 걔한테 속은 거 아니예요? 걔만 좋은 사람이라고, 마음이 넓고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하시죠? 만약 정말 그렇게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선포하라고 해요! 그 감정 보고서는 가짜고,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위조한 것이며, 제 명의의 사업과 모든 재산을 마음대로 가져가지 않겠다고요!”주위를 둘러본 그는 갑자기 이 사건을 이용해 김서진을 휘두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김서진이 자신을 마음이 넓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고 과시하고 싶다면, 지난 일도 따지지 않고 자신의 것도 뺏으면 안 될 일이다.“승엽아…….”노부인은 어이가 없다
힘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멈추고 숨을 헐떡였다.땅에 떨어진 조각들을 보는 그의 귓가에 어머니의 말이 울렸다. 그 일은 김서진의 결정에 달렸고 어쨌든 가족이니까… 어쨌든 가족… 어쨌든…….“하하, 하하하, 하하하하…….”그는 폭소를 터뜨리며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었다. 줄곧 자신을 아끼는 어머니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바로 태도를 바꿔 무자비하게 대하다니.전에 들었던 말들은 모두 자신 위주였다. 김 씨 가문은 그가 이어받아야 하며, 자신이야말로 김 씨 가문을 이끌어 나갈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제 모든 것이 김서진으로 바뀌었다. 무슨 혈육의 정, 무슨 가족이야! 그들의 눈에는 혈연관계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닐 뿐이다.게다가 이 물건들을 다 뺏어갈 정도로 인색하게 대하다니.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을 편하게 둘 수는 없으니 자신이 망가질 수밖에.주머니에서 라이터 하나를 꺼내 커튼에 불을 붙이자 불이 곧 타올랐다. 이어서 힘껏 잡아당겨 커튼을 소파에 던지자 불이 번졌다.온 집에 짙은 연기가 자욱하고 갈수록 불이 번지자 그는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뛰쳐나와 문어귀에서 차갑게 뒤돌아본 뒤 바로 떠났다.한편, 다른 쪽에서는 노부인이 조급해하며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리고 한소은과 김지영이 비틀거리며 방문을 뛰쳐나오는 그녀에게 달려왔다.“왜 그러세요?”“승엽이, 승엽이가…….”노부인은 휴대폰을 쥐고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고, 김지영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그리고는 바로 한소은을 바라보며 말했다.“끊겼어.”“방금 뭔가를 부수고 있는 것 같았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큰 소리였어! 다칠까봐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마음이 급한 노부인의 얼굴이 온통 상기되었다.“진정하세요. 전화가 왔을 때 그 사람이 어디에 있었는지 말했어요? 아니면 어떤 요구라도 했나요? 왜 물건을 부숴요?”한참 생각하던 한소은이 물었고, 노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김지영에게 부축받아 의자에
“할머니, 우선 진정하세요. 제가 바로 사람을 보내서 찾아볼게요.”일단 노부인을 위로한 한소은이 김지영에게 말했다.“고모, 할머니를 좀 돌봐 주세요.”김지영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한소은은 곧 휴대폰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일단 이 일을 김서진에게 알린 뒤 사람을 보내 김승엽의 흔적을 조사하게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김승엽 명의의 사업이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소식이 전해졌다. 어쨌든 집에 불이 난건 큰 일이기에, 경비원이 바로 발견해서 경찰에 신고했으며 소방차가 달려와 불을 껐다. 한소은과 김서진이 도착했을 때 집의 불은 이미 많이 꺼져 있었다.화려한 집이 지금은 너덜너덜해 보이고, 경비원은 여전히 조사를 받고 있었다. 김서진은 눈썹을 비틀고 집 앞에 선 채 말이 없다.“김승엽 짓이예요.”한소은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물론, 절차대로 CCTV도 확인하고 조사를 해야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범인이 확실했다.이 집은 줄곧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김 씨 가문의 모든 집은 인테리어를 할 때 방화 등의 위험요소를 고려해서 공사했고, 주기적으로 청소와 점검을 하고 있다.그런데 김승엽의 전화 후에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당연히 그가 저지른 일이 틀림없다.“그가 할머니께 전화해서 망가뜨린다고 했어요.”담담하게 말하던 한소은이 또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그럼 다른 집과 사업들은…….”“그럴 수 없어요!”김서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이 집에 불이 난 건 그들이 그의 행방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할 줄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잘 대비한다면 절대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이렇게 큰 일을 저질러 놓고, 피하기는 이미 늦었지!“그를 어떻게 할 예정이예요?”한소은이 물었다.그동안 김서진은 할머니를 생각해서 김승엽에게 모질게 대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흡사 실성한 것만 같았다.“일단 빨리 찾아야 해요!”뒤돌아선 그의 뒷모습이 싸늘해 보인다.김
우해영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고, 집에 돌아가는 게 지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이렇게 되자, 그녀는 그 비적의 진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로 그 비적을 연습한 뒤로 몸이 점점 나빠진 것 같은데… 설마, 가짜를 그렇게 연습한 걸까?달갑지 않게 비적을 펼쳐 위의 글자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던 그녀는, 글자가 매우 정교하고 그림에도 큰 문제가 없으며, 특별하지도 않고 이상할 것도 없다고 느꼈다.그리고 무공은 모두 내면의 수양에 의해 향상되는 법인데, 그녀는 최근에 끝없는 노력으로 내면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침의 횟수가 갈수록 빈번해지고, 몸 전체가 빠르게 밖으로 비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갈수록 허약해지고, 갈수록 힘이 없고, 하루 종일 졸리고, 깨어나기도 힘들었다.뭔가 분명히 이상하지만, 또 어디가 잘못되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데일…….”힘없이 소리치자 데일이 곧 나타났다.“네, 아가씨.”“가서 의사 좀 불러 줘.”“의사요?”그녀가 눈을 반쯤 뜨고 작은 소리로 말하자, 데일은 놀랐다.큰 아가씨는 원래 의사에게 진찰을 잘 받은 적이 없었다. 아마 무술 연마를 잘 해서 체질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병이 난 적이 없었고, 가끔 감기에 걸리고 열이 나도 스스로 낫곤 했다. 내면의 상처도 모두 휴식과 휴양을 통해 이겨내곤 했는데, 이건 그의 기억 속에서 큰아가씨가 처음으로 먼저 의사를 찾는 것이다.“응.”고개를 끄덕인 우해영은 데일이 뭘 의아해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계속 말했다.“내 몸이 좀 이상한 것 같아. 그런데 병원에 갈 수 없으니 네가 믿을 만한 의사를 데려와 줘. 내 몸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어.”“아가씨, 괜찮으세요?”데일이 긴장해서 묻자 우해영은 고개를 살며시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몇 마디 말을 했을 뿐인데 힘이 많이 빠진 탓이었다.“괜찮아. 그래도 소문내지 마. 바깥 사람들이 알게 해서는 안 돼. 조용히
“그래. 나야, 언니.”우해민이 방글방글 웃으며 천천히 침대 앞으로 걸어와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설마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배짱도 크지! 내 허락 없이 감히…….”우해영이 차갑게 호통을 치자, 우해민이 그녀의 말을 끊고 웃으며 말했다.“감히 뭘 했다는 거야? 감히 이렇게 말을 한다는 거야? 아니면 감히 언니 방에 들어왔다는 거야? 아니면… 감히 그 음침하고 습한 낡은 지하실을 나왔다는 거야?”“너…….”그때, 우해영은 뒤늦게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앞에 서있는 건 더 이상 이전의 설설 기는 우해민이 아니었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높게 묶은 머리카락은 옆으로 빠져나온 잔머리를 제외하고 윗부분만 묶여져 있었다. 짙은 화장도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지금의 우해민은 대충 봐도 자신과 별로 닮지 않았다. 자세히 봐야 차이를 알 수 있었던 이전과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어쨌든 전체적으로 평소와 전혀 딴판이다.그녀의 도발적으로 조롱하는 말을 듣던 우해영은 차갑게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말했다.“반란이라도 일으킬거야?”“맞아, 언니의 폭정을 무너뜨릴 거야!”우해민이 정성껏 다듬은 손톱을 만지며 말했다. 우해영은 지금껏 손톱을 기르지 않았다. 무공을 연마할 때 불편했기 때문이다. 우해민은 손톱을 다듬는 걸 좋아했지만, 우해영이 싫어했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눈치보지 않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 살 수 있다. 앞으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침대 위의 우해영이 비웃었다.“너 같은 애가?”무공도 전혀 할 줄 모르고 자신의 앞에서 설설 기며 머리도 들지 못하고 큰 목소리도 내지 못했던 그 계집애가 지금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세를 부리다니. 마치 작은 쥐가 용맹하고 싸움을 잘 하는 고양이 앞에서 잡아먹겠다고 위협하는 것처럼 가소로운 일이다.비록 자신의 몸이 불편하고 병에 걸려서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안중에 둘 필요가 없는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