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엽은 조금 이해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의문이 들었다.“왜 언니를 따라 해야 하는 거지? 그저 닮았다는 이유로?”이 얘기를 꺼내자, 우해민의 빛나던 눈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살고 싶으니까.”“살고 싶다고?”“응.”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껏 풀이 죽은 두 눈을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우리 우씨 가문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가 하나 있어. 만약 가문에 아이가 하나만 태어났다면 무탈하게 평생을 잘 살 수 있지만, 아이가 하나 이상 태어난다면 화를 입게 돼. 몇 명의 아이를 낳아도 결국에는 다 죽고 하나만 남거나, 하나도 안 남는 거지.”“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나와 언니는 하나만 살 수 있는 운명이야.”김승엽은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듯이 말했다.“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저주가 있어?”우해민은 반박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도 이 저주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줄곧 믿지 않았다.그러나 우해민의 부모님은 이 저주를 굳게 믿으셨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죽고 어머니만 남아 가까스로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아있기 때문이었다.원래 우해민의 어머니는 아이를 하나만 낳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가 쌍둥이 일주일은 생각지도 못했다.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저주를 피하려고 한 명을 죽이려 했는데 우해민의 아버지가 가로막았다. 어쨌든 공평한 경쟁의 기회를 주고 앞으로 누가 더 남기 적합하면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었다.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적합한 사람은 언니다.언니는 모든 면에서 그녀보다 뛰어났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니의 무술이 매우 대단하고 진취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간단한 나날을 근심 걱정 없이 보내고 싶어 한다.그들의 부모님이 마지막 결정을 내리고 그녀를 죽이려 할 때 가문에 이런 저주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날부터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언니의 그림자가 되어 언니를 도와 뭔가를 해야 했
갑작스러운 키스에 우해민은 살짝 떨었지만, 그의 입술을 피하지 않고 긴장감에 눈을 감았다.그날 이후로 그녀는 더 이상 그와 키스한 적이 없다. 때로는 그가 자신에게 키스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깨어나면 어두컴컴한 작은 집밖에 없다.그는 자기에게 키스가 무엇인지를 가르쳤고, 연애하는 느낌을 가르쳤으며, 그 작은 섬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가 온전한 한 사람이지, 누구의 그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했다.따뜻한 입술이 닿는 이 순간, 오직 서로만이 서로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 김승엽은 처음에는 가볍게 탐색적으로 건드렸으나 나중에는 점차 몰입하여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약간 따끔한 느낌이었지만 이런 느낌은 그녀에게 지금 이 모든 것이 진실이고 더 이상 꿈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우해민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에워싸고 그를 꽉 껴안았다. 두 사람의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김승엽은 천천히 뒤로 누워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자기의 몸 위로 눕게 했다.그러고는 몸을 돌려 그녀를 자기의 몸 밑에 꾹 눌렀다.김승엽은 위에서 그녀를 맘껏 눈에 담았다. 촉촉한 안개로 물든 눈, 몽롱해진 눈빛, 빨간 입술, 끝없는 사랑스러움, 이런 아첨하는 태도는 우해영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해민, 당신은 나만의 해민이야!”김승엽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녀의 목덜미와 귓가에 키스를 퍼부었다.이 순간, 우해민의 마음은 밀물이 들어오듯 끊임없이 요동쳤다. 그녀는 조금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몰라 긴장하고 있었다. 그저 바닷속에 떨어진 채 나뭇조각 한 개만 붙잡고 있는 사람처럼 김승엽을 끌어안고 또 끌어안았다.김승엽은 그 틈을 타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은 빠르게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었다. 이때, 우해민이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정신을 차리고 더 이상 그가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안, 안돼!”그녀의 말에 김승엽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
“무슨 방법?”김승엽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이 계획이 성공되면 그때 알려 줄게!”그가 불만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우해민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에게 숨기려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지금 말할 수 없어. 아직 이 계획이 성공할지 확신이 안 서기 때문이야.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시도해 볼 거야.”그녀가 "우리의 미래"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김승엽은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한 손을 잡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너도 알다시피 지금의 난 이런 상황이야. 어제 김씨 가문에서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다 보았잖아. 이제 난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야.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처지가 된 거지. 해민아, 이런 나라도 함께 해줄 거야?”“당연하지!”우해민은 대답하며 그의 품으로 폭 안겼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부드럽게 말했다."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그들은 당신의 깊은 뜻을 몰라. 이렇게 된 건 당신의 운이 좋지 않을 뿐이야. 당신의 어머니조차도 당신을 돕지 않았잖아. 이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 이건 모두 그들의 잘못이야!"우해민은 어려서부터 옳지 않은 집안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녀가 생각하는 방식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부모는 근거도 없는 저주 때문에 자기를 죽이려 했다. 혈연이고 뭐고 그녀에게 있어서 김승엽에 대한 사랑보다 못했다.어제 김 씨 고택에서 모든 걸 지켜본 사람으로서 우해민은 노부인이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했다. 친아들이 아니라 해도, 친아들처럼 지금까지 키웠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진실을 말하다니! 이건 김승엽의 길을 모두 막은 격이다.우해민은 그 사람들이 너무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김승엽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그녀의 눈에 비친 김승엽의 모습은 마치 자기와 같아 보였다. 그들 모두 세상에 버림받았다. 세상이 이렇게나 큰데 그들이 머물 자리가 조금도 없
한참이 지나서야 김승엽은 그녀를 놓아주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해민, 기다릴게."이것은 어떤 사랑의 속삭임보다 더 듣기 좋았다. 우해민 역시 아쉬움 가득한 말투로 대답했다.“응.”사실 그녀도 너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해영은 너무 눈치가 빨랐다. 요즘 자기가 말을 잘 듣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작은 자유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만약 그녀에게 걸리게 되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돼버린다.우해민은 마음속으로 조금만 더 참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연신 말했다. 계획대로만 되면 곧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그녀는 자신을 단단히 가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후 작은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다. 아까 했던 뜨거운 키스로 인해 입술이 빨갛게 부어올랐다.이 모습을 우해영이 보았다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길가의 화단으로 가서 화단 가장자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입술을 화단 가장자리를 향해 힘껏 부딪쳤다.이가 화간 가장자리에 부딪히니 금세 아픔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의 입술에는 피가 흘러나왔고 더욱 부어올랐다.우해민은 재삼 거울 속 자기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렇게 하면 입술이 부은 것에 대해 우해영에게 설명할 수 있다.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 데일이 아직 2층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우해영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눈으로 살짝 인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해민은 손가락으로 지하실 방향을 가리키며 먼저 들어갈 테니 언니가 일이 생기면 다시 부르라고 표시했다.데일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갔다.방문을 닫고 그제야 한숨 돌렸다. 언니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줄 알았다면 그렇게 일찍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해민은 아쉬워하며 책상 서랍을 열고 맨 안에서 작은 서랍에 손을 넣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작은 약 한 통을 꺼냈다.병원에서 처방받
“이틀이라고?!”노부인은 정신이 멍해졌다. 그녀는 자기가 이렇게 오래 잤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가족회의로 인해 모였던 사람들이 이미 다 가고 없다는 뜻이다.“서진이는...”“서진씨는 1층에 있어요. 아직 안 갔을 거예요. 불러드릴까요?”“잠깐.”노부인이 이어서 말했다.“이틀 동안 수고했다.”한소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수고는요! 이틀 내내 서진 씨 고모가 할머니를 돌보셨어요. 저는 한 게 없는걸요.”“지영이가...”노부인은 한숨을 푹 쉬며 두 눈은 앞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눈빛이 멀리 떠 있었다.“할머니...”한소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사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조금 어색하다 느껴졌다. 원래는 사람을 불러 노부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하고 노부인에게 미음을 먹게 해야 하는데 노부인은 그녀가 나가지 못하게 손을 꼭 잡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말을 하자니, 노부인이 다시 충격을 받고 쓰러질까 봐 아무런 말도 못 했다.잠시 후 노부인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마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말이 입가에 닿았다가 다시 삼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사실 노부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소은은 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서진 씨 작은아버지 일을 묻고 싶으신 거죠?”노부인은 조금 의아해했다.“아직도 그를 작은아버지라 부르는 거야?”‘이렇게 많은 일이 생겼고, 승엽이는 그들을 모함하고 서진이를 무너뜨리려 했고, 심지어는 무술 비적까지 훔쳤는데. 그런데도 작은아버지라 부른다고?’“서진 씨가 이렇게 부르니 저도 따라 부르는 거예요.”한소은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노부인을 달래듯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배고프실 거예요. 먼저 뭐 좀 드시고 나중에 얘기해요.”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노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침내 손을 놓았다.한소은은 웃으며 몸을 돌려
김서진이 노부인의 방에 올라갔을 때 노부인은 침대맡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안색이 괜찮은 것 같았다.하지만 이틀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영양주사로만 체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다소 허약해 보였다.”할머니.”김서진은 작게 말하며 들어왔다.“좀 괜찮아지셨어요?”그는 침대 끝에 서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부인이 잘 보이지만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그와 그의 할머니는 항상 이렇게 거리를 유지했었다.노부인은 김서진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그녀는 반평생 동안 많은 아이를 낳았고, 많은 아이를 먼저 보내었다.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그녀가 낳은 것이 아니다. 그녀와는 조금의 혈연관계도 없다. 이것은 마치 하늘이 그녀에게 큰 장난을 친 것 같다.그녀는 다시 김서진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이마와 눈은 그의 어머니를 닮았지만, 입과 코는 그의 아버지와 똑 닮았다.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은 그의 할아버지와 거의 똑같았다.이런 그를 두고 김씨 가문의 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유전자 검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았다면 김승엽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도 몰랐을 거고 그렇게 남은 인생을 막내아들에게 사랑을 쏟아부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노부인은 이 모든 게 다 자기가 정신이 나가 하마터면 친손자를 해칠 뻔했을 뿐만 아니라 승엽이도 해쳤다고 생각했다.“할머니?”그녀가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을 보고 김서진은 소리를 내며 물었다.“아.”그제야 정신을 차린 노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많이 좋아졌어. 이렇게 오랜 시간 잠들었으니 좋아지고말고. 난 별일 없으니 가서 일 봐.”“네. 그럼, 저 먼저 갈게요.”김서진이 시계를 한번 보고는 노부인에게 한마디 더 했다.“할머니는 집에서 푹 쉬세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아주머니에게 시키시면 돼요. 다른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의 말에는 집안의 엉망진창인 일들은 관여하지 말라는 은근한 암시가
수십 년 동안 친아들로 키웠기 때문에 혈연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그에게 준 사랑은 진심이었다. 인제 와서 그 ‘아들’을 버리라 하는 것은 누구에게 있어서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할머니, 지금은 제가 그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에요. 김승엽 혼자 이 사실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고 있어요. 나중에 그가 집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할 때 다시 얘기해요.”이 말을 마치고 김서진은 한마디 더 했다.“출근 시간이 늦었어요. 전이만 회사로 가볼게요. 할머니는 푹 쉬세요.”말을 마치고 나갈 때 마침 한소은이 먹을 것을 들고 문으로 들어가 그와 얼굴을 마주쳤다.“수고해요.”한소은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할머니.""배고프시겠어요. 우선 뭐 좀 드셔야 해요. 이건 호박 좁쌀죽이에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셨으니 한 번에 너무 많이 드시지 말고 천천히 드세요!”그녀는 쟁반을 들고 침대 옆에 앉아 작은 그릇과 숟가락을 들었다.그러자 노부인이 그릇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내가 직접 먹으마, 넌 임신한 상태이니 너무 힘들어선 안 돼.”"그냥 제가 할게요! 저는 아직 몇 달도 안 됐으니 괜찮아요."한소은이 웃으며 이어 말했다.“할머니 몸이 좀 좋아지시면 그때 게으름을 피워도 늦지 않아요.”다투다가 죽이 쏟아질까 봐 노부인도 더 말하지 않고 그녀가 죽을 자기의 입에까지 가져다주는 것을 받아먹었다.이렇게 큰 변고를 겪고 노부인은 마음과 눈빛까지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녀를 어떻게 봐도 눈에 거슬렸는데, 지금은 어떻게 봐도 예뻐 보였다.한소은의 피부는 하얗고 피부 결도 좋았다. 심지어는 여드름 자국이나 점 하나도 없었다. 지금 임신한 상태임에도 몸매가 좋은 것은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 조금도 임산부같이 많았다.눈을 떨구고 그릇에 담겨있는 죽을 볼 때 그녀의 속눈썹이 마치 작은 부채같이 자연스럽게 늘어진다. 김서진이 이렇게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의 말을 잘 듣는 것도 이해가
“우해영?”노부인은 우해영의 이름을 생각해 내더니 입을 오므리며 고개를 저었다.“그 여자는 안 된다.”“할머니...”“내기 이렇게 많은 나이를 먹고 가끔 노망날 때도 있지만, 사람 보는 눈은 아직 있어. 처음에 그 여자를 선택한 건 우씨 가문이라는 배경이 있어 승엽이를 도울 수 있고 그 여자의 도움으로...”노부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우씨 가문의 세력을 빌어 김승엽에게 김씨 가문 가주의 자리를 뺏어 주려 했었다. 이 말을 한소은에게 할 수 없어, 그냥 말을 흐렸다.‘내가 어리석었어! 하마터면 김씨 가문을 다 망칠 뻔했어. 나중에 죽어서 무슨 낯으로 영감의 얼굴을 보겠어!’“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사이일 뿐이야. 지금 승엽이가 이런 상황에 부닥쳐 있는데 그 여자가 돌이나 안 던지면 고마운 거지.”그날 김승엽이 김 씨 고택을 떠나기 전, 우해영이 그를 찾아 몰래 무언가 말을 하고 그의 얼굴에 뽀뽀까지 하는 모습을 본 아주머니가 있었다. 한소은은 노부인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느껴 노부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직접 본 게 아니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본 것이니 진실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소은아, 가서 저기 두 번째 서랍을 열어봐.”노부인은 고개를 획 돌려 죽을 더 먹지 않고 한소은에게 지시했다.한소은은 노부인의 시선을 따라 침대 옆의 서랍을 발견하고 손으로 가리켰다.“이거 말씀하시는 거예요?”“그래, 그거. 어서 열어봐!”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검은색의 비단으로 된 상자 하나만 있었다.“거기 안에 있는 상자 보이지? 꺼내오렴.”노부인이 이어서 말했다.그러자 한소은은 그 상자를 꺼내어 노부인에게 보여주며 다시 물었다.“할머니, 이거 맞아요?”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서 상자를 받아서 들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상자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세게 문지르면 망가지기라도 할 듯이 조심 또 조심했다.한소은은 궁금한 듯 노부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