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에 왔을 때, 김승엽은 망설이다가 열쇠를 쥐고 좀처럼 문을 열지 못했다.‘이 문을 열면 갑자기 폭발하는 건 아니겠지? 혹은 사나운 개가 튀어나와 날 물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살해하고 시체를 여기에 숨겨 날 모함하려고?’순간 머릿속에서 무서운 생각이 많이 떠올랐고, 갑자기 다시 돌아가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그의 발밑은 마치 뿌리를 내린 것 같았다. 지금 여기서 떠나면 당장 오늘 묵을 곳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부닥쳤으니 죽는 한이 있어도 발버둥을 쳐보고 죽자는 심정으로 김승엽은 이를 악물고 과감하게 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집안은 조용했다. 그가 상상했던 일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어두컴컴해서 방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김승엽은 더듬거리며 벽에 있던 스위치를 켰다. 불이 켜지자 그제야 방안의 구조가 보였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집이었다.방안에는 간단한 진열품만 있었다. 거실에는 소파 하나, 책상과 의자, 침실에는 간단하게 침대 하나밖에 없었다.김승엽은 이렇게 초라한 집을 본 적이 없다. 잠자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더없이 간단한 집이었다. 주방에는 요리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냉장고나 세탁기도 없었다.하지만, 이렇게 초라한 집일지라 해도 지금의 그에게 있어선 괜찮은 집이다.그는 현관문을 닫고 방안에서 두어 번 둘러보았다. 이 집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집이었다. 거실, 주방, 침실과 화장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그가 밖에서 비바람을 쐬며 자는 것 보단 백배 천배 낫다.나름 아늑한 집에 들어오니 그의 팽팽해졌던 신경이 느슨하게 풀려 곧이어 잠이 쏟아졌다. 그는 더러워진 외투를 벗고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대충 씻고 침대에 눕자마자 곧 꿈나라에 빠졌다.꿈속에서 김서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조롱했다. 다른 친척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다. 이전에 그와 함께 놀던 그 친구들도 모두 그와 멀리하고 그에게 손가락질했다. 사방에 마치 흩어질 수 없는 안개가 자욱한 것 같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지르고 싶
지난날의 위풍당당함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의 그는 고개를 숙이고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마치 싸움에서 패배한 맹수처럼 예전의 위풍이 하나도 없었다. 문득 보기엔 약하고 무기력해 보였고 전 세계에 버림받은 사람 같았다.만약 이전의 김승엽이 그녀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다면, 지금의 그는 마치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전 세계에 배신당하고 명문가에 있으면서 갈 곳도 발 디딜 곳도 없는 자기 모습과 같았다.그녀는 괴로웠고, 또한 마음이 아파서, 그의 손등을 가볍게 걸치며 말했다.“두려워할 필요 없어. 이젠 다 지나갔어, 너도나도!"“???”그녀의 말은 김승엽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그는 자신의 손등에 걸쳐진 하얀 손을 보았다. 손가락이 가늘고 손가락 관절이 약간 튀어나와 피부가 희고 투명하며 푸른 혈관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는 순간 이상함을 느껴 그녀의 손을 획 잡아챘다.그의 반응이 너무 갑작스러워 우해민은 깜짝 놀랐지만, 손을 빼지 않고 자기 손을 잡도록 내버려 뒀다.김승엽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보며 생각하다 또 그녀의 다른 손도 잡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문질러 보기도 하고 주물러 보기도 했다. 머리가 멍해지다 어느 순간, 어디가 이상한지 알아차렸다.예전에는 그저 우해영이라는 여자가 정신병이 있어서 성격이 이리저리 변하는 거로 생각했다. 저번의 정신과에서 그녀를 마주치고 더욱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김승엽은 드디어 어디가 이상한지 눈치챘다.“넌 우해영이 아니야! 도대체 누구야?”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는 그녀의 손을 냅다 벌리고 놀라서 뒤로 두 번 물러섰다.그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우해영이 아니다. 오랜 시간 무술을 배워온 우해영의 손에는 무기를 자주 들어 생긴 굳은살이 박여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손바닥부터 손가락까지 힘이 들어갔었다.우해영의 손을 잡아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자신을 몇 번이나 때렸었고, 어깨를 힘껏 짓눌렀고 손목도 꽉 쥐었었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이 매우 힘이 있었고, 손가락 관절이 마치
김승엽의 반응은 그녀를 기쁘게 했다.“정말 날 알아보는 거야? 정말?”이 말을 듣고 김승엽은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왜 기뻐하는 거 같지? 우해영 같지 않다는 말에 왜 기뻐하는 거지?’이렇게 생각하니 김승엽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우해영이 아닌 거야? 그럼 넌 누군데?”우해민은 바로 알려주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알려준 적 있잖아. 한번 맞춰봐.”“알려준 적 있다고?”김승엽은 어리둥절했다.‘뭘 언제 알려 줬다는 거지?’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그만 바라보았다. 김승엽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언제 자신에게 말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았을 때 갑자기 그녀가 어제 김 씨 고택을 떠날 때 그의 귓가에 대고 한 말이 생각났다.순간, 김승엽의 눈이 갑자기 밝게 빛났다.“혹시 해민인거야?”우해민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난 해민이야!”김승엽이 알아맞히자 우해민은 너무도 기뻐했다. 행복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김승엽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웃다가 또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이 해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왜 우해영과 똑같이 생겼을까?그리고 해민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어제가 아니다. 오래전 그들이 데이트할 때 그녀는 이미 자신에게 이렇게 부르라고 했다. 설마 그때부터...“그러니까, 우리가 데이트할 때 몇 번은 우해영이 아니라 당신인 거야?”김승엽이 자기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슬쩍 그녀를 떠보았다.그러자 우해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이 날 것 같은 충동을 참으며 말했다.“몇 번이 아니라, 우리가 데이트 했을 때 모두 나였어! 내 이름은 우해민이야. 우해영은 내 쌍둥이 언니이고.”“언니? 쌍둥이?”김승엽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입을 크게 벌렸다.‘우해영, 우해민. 그 여자가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 쌍둥이였어!’그는 계속 우해영의
김승엽은 조금 이해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의문이 들었다.“왜 언니를 따라 해야 하는 거지? 그저 닮았다는 이유로?”이 얘기를 꺼내자, 우해민의 빛나던 눈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살고 싶으니까.”“살고 싶다고?”“응.”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껏 풀이 죽은 두 눈을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우리 우씨 가문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가 하나 있어. 만약 가문에 아이가 하나만 태어났다면 무탈하게 평생을 잘 살 수 있지만, 아이가 하나 이상 태어난다면 화를 입게 돼. 몇 명의 아이를 낳아도 결국에는 다 죽고 하나만 남거나, 하나도 안 남는 거지.”“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나와 언니는 하나만 살 수 있는 운명이야.”김승엽은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듯이 말했다.“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저주가 있어?”우해민은 반박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도 이 저주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줄곧 믿지 않았다.그러나 우해민의 부모님은 이 저주를 굳게 믿으셨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죽고 어머니만 남아 가까스로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아있기 때문이었다.원래 우해민의 어머니는 아이를 하나만 낳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가 쌍둥이 일주일은 생각지도 못했다.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저주를 피하려고 한 명을 죽이려 했는데 우해민의 아버지가 가로막았다. 어쨌든 공평한 경쟁의 기회를 주고 앞으로 누가 더 남기 적합하면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었다.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적합한 사람은 언니다.언니는 모든 면에서 그녀보다 뛰어났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니의 무술이 매우 대단하고 진취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간단한 나날을 근심 걱정 없이 보내고 싶어 한다.그들의 부모님이 마지막 결정을 내리고 그녀를 죽이려 할 때 가문에 이런 저주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날부터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언니의 그림자가 되어 언니를 도와 뭔가를 해야 했
갑작스러운 키스에 우해민은 살짝 떨었지만, 그의 입술을 피하지 않고 긴장감에 눈을 감았다.그날 이후로 그녀는 더 이상 그와 키스한 적이 없다. 때로는 그가 자신에게 키스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깨어나면 어두컴컴한 작은 집밖에 없다.그는 자기에게 키스가 무엇인지를 가르쳤고, 연애하는 느낌을 가르쳤으며, 그 작은 섬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가 온전한 한 사람이지, 누구의 그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했다.따뜻한 입술이 닿는 이 순간, 오직 서로만이 서로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 김승엽은 처음에는 가볍게 탐색적으로 건드렸으나 나중에는 점차 몰입하여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약간 따끔한 느낌이었지만 이런 느낌은 그녀에게 지금 이 모든 것이 진실이고 더 이상 꿈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우해민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에워싸고 그를 꽉 껴안았다. 두 사람의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김승엽은 천천히 뒤로 누워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자기의 몸 위로 눕게 했다.그러고는 몸을 돌려 그녀를 자기의 몸 밑에 꾹 눌렀다.김승엽은 위에서 그녀를 맘껏 눈에 담았다. 촉촉한 안개로 물든 눈, 몽롱해진 눈빛, 빨간 입술, 끝없는 사랑스러움, 이런 아첨하는 태도는 우해영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해민, 당신은 나만의 해민이야!”김승엽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녀의 목덜미와 귓가에 키스를 퍼부었다.이 순간, 우해민의 마음은 밀물이 들어오듯 끊임없이 요동쳤다. 그녀는 조금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몰라 긴장하고 있었다. 그저 바닷속에 떨어진 채 나뭇조각 한 개만 붙잡고 있는 사람처럼 김승엽을 끌어안고 또 끌어안았다.김승엽은 그 틈을 타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은 빠르게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었다. 이때, 우해민이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정신을 차리고 더 이상 그가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안, 안돼!”그녀의 말에 김승엽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
“무슨 방법?”김승엽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이 계획이 성공되면 그때 알려 줄게!”그가 불만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우해민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에게 숨기려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지금 말할 수 없어. 아직 이 계획이 성공할지 확신이 안 서기 때문이야.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시도해 볼 거야.”그녀가 "우리의 미래"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김승엽은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한 손을 잡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너도 알다시피 지금의 난 이런 상황이야. 어제 김씨 가문에서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다 보았잖아. 이제 난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야.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처지가 된 거지. 해민아, 이런 나라도 함께 해줄 거야?”“당연하지!”우해민은 대답하며 그의 품으로 폭 안겼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부드럽게 말했다."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그들은 당신의 깊은 뜻을 몰라. 이렇게 된 건 당신의 운이 좋지 않을 뿐이야. 당신의 어머니조차도 당신을 돕지 않았잖아. 이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 이건 모두 그들의 잘못이야!"우해민은 어려서부터 옳지 않은 집안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녀가 생각하는 방식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부모는 근거도 없는 저주 때문에 자기를 죽이려 했다. 혈연이고 뭐고 그녀에게 있어서 김승엽에 대한 사랑보다 못했다.어제 김 씨 고택에서 모든 걸 지켜본 사람으로서 우해민은 노부인이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했다. 친아들이 아니라 해도, 친아들처럼 지금까지 키웠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진실을 말하다니! 이건 김승엽의 길을 모두 막은 격이다.우해민은 그 사람들이 너무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김승엽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그녀의 눈에 비친 김승엽의 모습은 마치 자기와 같아 보였다. 그들 모두 세상에 버림받았다. 세상이 이렇게나 큰데 그들이 머물 자리가 조금도 없
한참이 지나서야 김승엽은 그녀를 놓아주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해민, 기다릴게."이것은 어떤 사랑의 속삭임보다 더 듣기 좋았다. 우해민 역시 아쉬움 가득한 말투로 대답했다.“응.”사실 그녀도 너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해영은 너무 눈치가 빨랐다. 요즘 자기가 말을 잘 듣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작은 자유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만약 그녀에게 걸리게 되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돼버린다.우해민은 마음속으로 조금만 더 참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연신 말했다. 계획대로만 되면 곧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그녀는 자신을 단단히 가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후 작은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다. 아까 했던 뜨거운 키스로 인해 입술이 빨갛게 부어올랐다.이 모습을 우해영이 보았다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길가의 화단으로 가서 화단 가장자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입술을 화단 가장자리를 향해 힘껏 부딪쳤다.이가 화간 가장자리에 부딪히니 금세 아픔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의 입술에는 피가 흘러나왔고 더욱 부어올랐다.우해민은 재삼 거울 속 자기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렇게 하면 입술이 부은 것에 대해 우해영에게 설명할 수 있다.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 데일이 아직 2층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우해영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눈으로 살짝 인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해민은 손가락으로 지하실 방향을 가리키며 먼저 들어갈 테니 언니가 일이 생기면 다시 부르라고 표시했다.데일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갔다.방문을 닫고 그제야 한숨 돌렸다. 언니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줄 알았다면 그렇게 일찍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해민은 아쉬워하며 책상 서랍을 열고 맨 안에서 작은 서랍에 손을 넣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작은 약 한 통을 꺼냈다.병원에서 처방받
“이틀이라고?!”노부인은 정신이 멍해졌다. 그녀는 자기가 이렇게 오래 잤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가족회의로 인해 모였던 사람들이 이미 다 가고 없다는 뜻이다.“서진이는...”“서진씨는 1층에 있어요. 아직 안 갔을 거예요. 불러드릴까요?”“잠깐.”노부인이 이어서 말했다.“이틀 동안 수고했다.”한소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수고는요! 이틀 내내 서진 씨 고모가 할머니를 돌보셨어요. 저는 한 게 없는걸요.”“지영이가...”노부인은 한숨을 푹 쉬며 두 눈은 앞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눈빛이 멀리 떠 있었다.“할머니...”한소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사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조금 어색하다 느껴졌다. 원래는 사람을 불러 노부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하고 노부인에게 미음을 먹게 해야 하는데 노부인은 그녀가 나가지 못하게 손을 꼭 잡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말을 하자니, 노부인이 다시 충격을 받고 쓰러질까 봐 아무런 말도 못 했다.잠시 후 노부인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마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말이 입가에 닿았다가 다시 삼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사실 노부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소은은 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서진 씨 작은아버지 일을 묻고 싶으신 거죠?”노부인은 조금 의아해했다.“아직도 그를 작은아버지라 부르는 거야?”‘이렇게 많은 일이 생겼고, 승엽이는 그들을 모함하고 서진이를 무너뜨리려 했고, 심지어는 무술 비적까지 훔쳤는데. 그런데도 작은아버지라 부른다고?’“서진 씨가 이렇게 부르니 저도 따라 부르는 거예요.”한소은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노부인을 달래듯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배고프실 거예요. 먼저 뭐 좀 드시고 나중에 얘기해요.”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노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침내 손을 놓았다.한소은은 웃으며 몸을 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