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원이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이렇게 막 들어가는 건 아닌 것 같아 발길을 멈추고 이씨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요요 엄마가 집에 계신가요?""안 계십니다. 환자 돌보러 갔거든요."장시원이 듣더니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딸이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상관하지는 않고 무슨 환자를 돌보러 갔다는 거죠?""그런 게 아닙니다. 요요 엄마도 어쩔 수 없었어요."이씨 아주머니가 황급히 설명했다.하지만 장시원은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갔다. 아무런 기운도 없이 소파에 누워 흐느끼고 있는 요요의 모습은 여간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장시원은 얼른 과일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요요를 안았다."요요야, 아저씨 왔어. 어디가 불편한 건데?"희고 포동포동한 얼굴에 눈물을 달고 있던 요요가 울먹이며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이마를 만지니 놀라울 정도로 뜨거운 열이 손을 타고 전해왔다."요요가 줄곧 열이 나있었던 상태였습니까?""아니요. 어젯밤에 한 번 또 열이 나서 약을 먹인 후 나아졌다고 했어요. 오전 내내 괜찮았었는데, 점심을 먹고 나니 또 열이 나시 시작하더라고요.""계속 이렇게 놔두면 큰일이 날 겁니다. 어서 병원으로 가야 해요."장시원이 초조해서 일어서려 하자 이씨 아주머니가 급히 말렸다."동네에도 같은 병으로 앓고 있는 아이가 있어 제가 한 번 물어봤는데 다들 이렇게 반복적으로 열이 난대요. 그러니 병원에 가도 소용없다고, 제때에 약만 먹이면 된대요."장시원이 듣더니 눈썹을 찌푸린 채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의사에게 아이의 상태를 물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사의 대답은 이씨 아주머니의 대답과 비슷했다.이런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4~5일 정도 발열 현상이 지속될 거고 3일을 더 지켜보다 별문제 없으면 괜찮은 거라고.장시원이 전화를 끊고 이씨 아주머니에게 물었다."해열제는 먹였습니까?""네!"잘생긴 남자한테서 풍겨 나오는 위엄 때문에 이씨 아주머니는 처음 이곳에 와서 면접 볼 때보다 더
"이렇게 인내심이 있는 걸 봐서는 앞으로 틀림없이 좋은 아버지가 될 겁니다."이씨 아주머니가 웃으며 칭찬했다.이에 장시원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도 자신이 요요를 이토록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설마 정말 나이가 들어 아버지가 되고 싶은 욕망이 생긴 걸까?’하지만 장시원은 순간 자신의 생각이 우습다고 느껴졌다."그럼 요요를 잠깐만 봐주세요. 저 장 보고 올게요. 요요가 깨나서 먹을 이유식을 해야 하거든요.""걱정마세요. 제가 있으니 시름 놓고 갔다 오세요.""네!"이씨 아주머니가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열쇠와 지갑을 들고 집을 나섰다.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오후의 햇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조용한 방안을 따스하게 비춰주었다.장시원은 고개를 숙인 채 요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곤히 잠든 요요의 속눈썹은 길고 촘촘했고, 포동포동한 얼굴에 박힌 작은 코는 오똑하면서 깜찍했다......그냥 모든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장시원은 자신도 모르게 요요를 더 꼭 껴안았다. 은은한 젖 향기가 이상하게 그를 안심시키고 있었다.그렇게 한참 고개를 숙이고 요요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장시원은 이내 눈살을 찌푸린 채 무음 모드로 해놓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한참 후, 볼 일이 다 끝났는지 장시원은 다시 거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꽃병 속의 작은 데이지는 약간 시들어 있었다. 보아하니 이 집의 여주인이 확실히 꽃들을 관리할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쁜 것 같았다.벽에 기대어 세워진 찬장 위에는 오르골이 놓여 있었다. 핑크색 성 앞에, 함께 춤을 추고 있던 왕자와 공주가 갈라져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스위치를 켜고 음악이 울리면 그들은 다시 껴안고 나풀나풀 춤을 추겠지.정교하게 만들어진 성을 보면서 장시원은 자기도 모르게 다른 여인이 생각났다.‘잘 지내고 있을까?’‘가끔 내 생각은 할까?’‘남자친구는 사귀었을까?’‘낯선 외국에서는 누군가가 곁에 있어 줘야 외롭지 않겠는데.
이때 이씨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나와 말했다."요요야, 아줌마한테로 와. 아저씨가 요요를 몇 시간 동안이나 안고 있었으니 팔이 엄청 시큰거릴 거야.""괜찮습니다. 마저 요요 이유식을 만드세요. 제가 좀 더 안고 있을게요."요요가 다시 기운을 차린 모습에 장시원의 말투도 많이 가벼워졌다."그래요 그럼. 이유식은 다 됐어요. 조금만 식히고 가져올게요."이씨 아주머니가 말하고는 몸을 돌려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아저씨, 손 아파요? 요요가 호~ 해줄게요. 엄마가 그랬는데, 이렇게 호~ 해주면 아프지 않대요!"이때 요요가 작은 손으로 장시원의 큰 손을 만지며 다가갔다.장시원이 요요를 안아 다리에 앉히고 웃으며 물었다."요요 너무 똑똑한 거 아니야? 어떻게 엄마가 한 말을 다 기억하고 있어? 요요 올해 몇 살이야?"장시원의 말에 요요가 오른손을 내밀고 왼손으로 오른손의 엄지와 약지,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눌러 두 손가락만 남겼다. 그러다 한참 생각하고는 웃으며 장시원에게 말했다."두 살!"장시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장하네! 그럼 요요의 이름은?""요, 요!"요요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박또박 이름을 말하고 있는 진지한 모습은 너무 귀여웠다."그럼 성은?""요요의 성은......""야채국수가 나왔습니다!"그런데 이때 이씨 아주머니가 그릇을 들고나와서는 웃으며 말했다."이유식이 다 됐어요. 요요 밥 먹어도 돼요."장시원은 단지 요요랑 놀아주고 싶을 뿐, 무언가를 알아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아주머니의 말에 바로 요요를 안고 식당으로 갔다.별로 크지 않은 집안의 주방은 유난히 작아 키 큰 장시원이 들어서니 왠지 더 작아진 것 같았다.이씨 아주머니가 손을 뻗어 요요를 건네받고는 요요를 유아용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요요가 가장 좋아하는 국수야. 아줌마가 야채, 두부, 새우를 넣었는데 요요 어느 것부터 먹고 싶어?"그런데 요요가 숟가락을 들고 장시원을 바라보았다."아저씨가 먹여줘요."장시원이 바로
청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씨 아주머니에게 말했다."예전에 알고 지냈던 친구예요."이에 이씨 아주머니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 친구분이 엄청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인내심도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점심에도 그분이 요요를 재웠는걸요."요요도 도도하게 말했다."아저씨가 내일에도 요요 보러 온다고 했어요!"청아는 순간 조백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요요에게 말했다."잠은 혼자서 자야지,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 말고.""아저씨는 다른 사람이 아니에요!"요요가 듣더니 바로 반박했다.그 모습에 청아가 아이의 코를 살짝 쓸어내렸다."언제 이렇게 낯을 가리지 않기 시작한 거야?"요요가 웃으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장시원은 오후에 업무가 바쁘지만 않으면 와서 요요랑 놀아주고, 재우고, 함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요요도 가끔 열이 나서 울다가도 장시원만 보면 이내 조용해졌다.매번 장시원이 오후에 밥 먹고 와서는 4시경에 떠나다 보니 한 번도 청아와 마주치지 못했다.그러다 나중에 이씨 아주머니한테서 요요 엄마가 병원에서 요요의 외할머니를 돌보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이씨 아주머니를 청해 요요를 온종일 돌보게 한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시원은 요요 엄마가 너무 요요한테 소홀하다고 생각했고, 그것 때문에 요요를 더욱 끔찍이 아꼈다.그렇게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좋아졌다.......제작진의 업무가 점차 손에 잡히기 시작했고 새로 전근된 조수가 비록 가인이보다는 영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부지런하고 눈치도 빨라 소희가 딱히 신경 쓸 일은 없었다.이날 밖에서 야외 씬을 찍고 있는데 이현의 팬들이 몰려와 사인을 요구하는 바람에 촬영은 잠시 중단되었고, 소희도 부득이하게 나무 그늘에서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그러다 물을 마시고 있는데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우정숙이었다.화면에 나타난 이름에 소희는 다소 놀랐다. 그러다 벨 소리가 네댓 번 울려서야 천천히 받았다."사모님
그렇게 두 사람은 몇 마디를 더 나누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고, 전화를 끊은 후 소희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비록 그녀가 우정숙과 임유민 때문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임유민의 공부를 돕겠다고는 했지만 임구택을 다시 마주할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다.그날 레스토랑에서 임구택과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는 그와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곧 또 그의 집으로 가야 한다니.소희가 손을 들어 이마의 혈을 짓눌렀다. 왠지 일이 계속 계획을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이미 승낙한 일이니 번복할 수는 없었다.그래서 임유민의 하교 시간에 맞춰 소희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소희 쌤?"전화를 받은 임유민의 소리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묻어 있었다.이에 소희가 웃으며 물었다."하교했어?""응,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나한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부터 듣고 싶어?"임유민이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좋은 소식!""좋은 소식은 네 엄마께서 네가 지금의 가정교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너에게 가정교사를 바꿔주려고 한다는 거야.""뭐 그럭저럭 좋은 소식이라고 치지. 나쁜 소식은?""앞으로 주말마다 또 나를 마주해야 한다는 거."소희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러나 한참 기다려도 임유민이 말이 없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야, 왜 말이 없어? 슬퍼서 우는 거 아니지?"같은 시각, 차 안에 앉아 있는 임유민이 고개를 돌려 몰래 웃고 있었다. 그러다 소희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일부러 우울한 척하며 대답했다."확실히 나쁜 소식이네.""어쩔 수 없어. 앞으로 임유민 친구께서 잘 협조해 줘. 성적을 올려야 이런 고통스러운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으니까."소희가 눈썹을 올리고는 웃으며 말했다.그러자 임유민이 진지하게 대답했다."난 괜찮아, 어차피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일이니까.""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고.""그럼 조건 하나 제시해도 돼?""일단 먼저 말해봐. 내가 할 수 있으면 들어줄게.""만약 내 성적이
2년 전 소희가 마지막으로 임유민에게 수업을 해주고 떠났을 땐 나중에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2년 만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다니.소희가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검은색으로 된 대문 밖에는 이미 하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소희가 다가가자 공손하게 소희를 맞이했다."소희 선생님, 오셨습니까!"소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하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2년 동안 정원의 나무가 더 굵고 커진 거 제외하고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이때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빗고 몸에 알맞은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한 집사가 다가와 친절하게 인사했다."소희 선생님, 오셨습니까!""집사님."소희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집사의 태도가 이전보다 더 친절해진 것 같았다."큰 사모님께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작은 도련님이 지금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제가 위층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고마워요!"소희가 대답하면서 신발을 갈아신고 집사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막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임구택이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흰색 셔츠와 검은색 양복바지 차림에 팔에는 양복 외투를 걸친 채 계단 위에 서 있는 그는 여전히 고귀하고 차가운 기풍을 내뿜고 있었다. 특히 계단 위에 서서 사람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위압감을 주는 게 높은 곳에 앉아있는 군주와도 같았다.임구택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계단 위에 멍하니 선 채 조용히 소희를 내려다보았다."안녕하세요, 임구택 씨."이에 소희가 담담하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임구택이 먼저 내려가기를 기다렸다.임구택의 희노가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그녀를 지나 집사에게로 향했다.그러자 집사가 즉시 말했다."소희 아가씨는 큰 사모님께서 작은 도련님을 위해 새로 청한 가정교사로 오늘 첫 수업하러 왔습니다."임구택이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말 없이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와 소희를 스쳐 지나갔다.소희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곧장 위층으
2년 사이에 임유민의 키가 엄청 많이 자랐다. 소희보다 좀 더 큰 걸로 봐서는 170센치미터는 쉽게 초과한 것 같았다. 게다가 임씨 가문의 우수한 유전자까지 합쳐져 금방 12살 밖에 안 되는 임유민은 이미 눈부신 소년으로 변해 있었다.임유민이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이래도 나를 때릴 거야?""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세요, 도련님!"소희가 말하면서 두 손을 내밀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다.그 모습에 임유민이 눈부신 웃음을 드러내며 소희를 한 번 훑어보았다."소희 쌤은 여전히 그대로네,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고마워,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소희가 눈썹을 올린 채 웃으며 대답했다."쳇! 내가 경솔했어. 분명 뻔뻔스러워졌는데 변하지 않았다고 했으니."소희가 듣더니 옆에 있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그의 머리를 때렸다."선생님을 그렇게 말해도 돼?""네네. 선생님이든, 둘째 숙모든 어른인건 마찬가지인데 내가 잘못했네요. 됐지?"임유민이 웃으며 말했다.그러자 소희의 미소가 순간 입가에 굳어졌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소희가 다시 말했다."그만 장난 치고, 수업해야 지. 테스트한 걸 꺼내 봐, 어떻게 풀었기에 합격하지 못했는지 한 번 구경하게.""그럼 놀라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임유민이 말하면서 답안지를 찾아냈다.소희가 답안지를 대충 훑어보고 난 후 임유민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인재네."임유민이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과찬입니다.""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으로 여겨?"소희가 눈썹을 올리고 말했다. 그러고는 임유민이 말하기도 전에 손에 든 답안지로 그의 머리를 살짝 때렸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 이 시구만해도 2년 전에 이미 외울 수 있었잖아."그러자 임유민이 머리를 만지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누가 기억력이 그렇게 좋아서 2년 전에 외웠던 걸 기억해? 소희 쌤은 이틀 전의 일이 기억나?"소희가 그를 보며 냉소했다.그 모습에 임유민은 그녀를 잡아당겨 의자에 앉혔다."내가 멍청할수록 소희 쌤의
소희가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임구택을 향해 말했다."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임구택이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소희도 신발을 갈아 신고 얼른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그러다 집에서 나오니 임구택의 차가 이미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한 장면은 소희의 마음속을 심란하게 했다.차에 오른 후,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앞쪽에 와 앉아."이에 소희가 눈썹을 찌푸리고 똑같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 자리가 편합니다.""지금 날 운전기사 취급하는 거야?"임구택이 내던진 말투에서는 아무런 정서도 느껴지지 않았다.소희가 입술을 오므린 채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차 문을 열고 내려 조수석에 앉았다.그리고 그녀가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야 임구택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소희는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임구택은 열심히 운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시간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제일 낯선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차가 길목에 서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소희의 휴대폰이 울렸다.[허니야,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맞혀봐.]휴대폰을 귓가에 대니 심명의 격동된 목소리가 바로 휴대폰을 뚫고 들려왔다. 비록 스피커폰을 켜지 않았지만 고요한 차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뚜렷했다.소희가 앞에 깜박이는 빨간 신호등을 보며 싱긋 웃었다."돌아왔어?"[뭐야, 목소리가 왜 이렇게 평온한 거야? 전혀 흥분하지 않았지? 나 지금 기분이 나빠지려고 그래! 난 밤낮으로 네 생각만 하고, 일이 끝나자마자 널 보려고 달려왔는데.]심명의 투정 부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소희가 웃으며 물었다."일이 다 해결되었어?"[누가 너더러 그런 쓸모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라고 했어? 난 네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를 원한다고!]심명이 포악하게 말했다.그런데 이때 갑자기 차가 앞으로 쏠려 나가는 바람에 소희가 의자 등에 세게 맞혔다. 빨간불이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