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구택은 줄곧 소희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다가 차가 멀리 떠나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이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가자."그러는 그의 모습에 이현의 눈동자에 순간 빛이 번쩍였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임구택을 따라갔다.......이튿날, 소희가 일하고 있는데 구은서가 손에 커피 한잔을 들고 들어와서는 창가에 기대 말했다."내가 오지 않은 사이에 또 재밌는 구경을 놓친 것 같던데?"소희가 종이 위에 설계도를 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보고 싶으면 스스로 찍던가."구은서가 소희를 보며 냉소했다."설마 너도 정말 여민 씨가 너를 해치려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소희의 펜끝이 순간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은서가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말을 이어갔다."내가 장담하는데, 이 일은 무조건 이현이 한 짓이야. 먼저 여민 곁에 붙어있는 왕연을 매수한 후 류 조감독의 손을 빌려 너를 제작팀에서 쫓아내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데 네가 그렇게 똑똑할 줄은 몰랐던 거야. 게다가 구택 씨의 도움으로 일이 들통나자 아예 또 왕연더러 모든 일을 여민 씨에게 뒤집어씌우게 하고 자신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구경만 하고, 겸사 겸사 구택 씨 앞에서 좋은 사람 역할을 한 거지."구은서가 "쯧쯧"거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어린애가 속은 참 깊네."소희가 듣더니 비웃듯이 물었다."은서 씨의 진수를 전수받은 게 아닐까?""그런 말은 넣어둬. 난 그렇게 오랫동안 계획했는데도 구택 씨를 얻지 못했으니 감히 그 여인과 비교할 수 없는 거야.""겁 먹지말고 다시 한 번 겨뤄봐.""뭐야, 지금 이간질하는 거야?""아니, 둘 중에 누가 이기든 나와 상관없거든."구은서가 듣더니 갑자기 다가와 짙은 메이크업을 한 눈으로 소희를 쳐다보았다."구택 씨가 사실 너를 해치려고 한 게 이현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소희는 조용히 구은서를 바라보았다.그러자 구은서가 눈썹을 올린 채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나도 눈치챌 수 있는 일을
조백림이 전화를 끊고 바로 임구택에게 전화를 걸었다."구택 형, 회사에 있어요?"임구택은 방금 회의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공문을 보고 있었다."왜?""전에 구택 형을 다치게 한 일 때문에 내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저녁에 우리 같이 밥 먹어요, 내가 조용하게 구택 형에게 밥 살게요."조백림이 아주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관둬."하지만 임구택이 담담하게 거절했다."우리 사이에 그런 인사치레는 필요 없어.""인사치레가 아니에요!"조백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희 씨도 부를 거거든요. 유정이 줄곧 소희 씨에게 직접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다던데, 저녁에 같이 만나요."임구택이 손에 쥐고 있던 펜이 순간 멈추었다."그럼 저녁에 다시 결정하지.""그래요, 내가 저녁에 전화할게요!""응."전화를 끊은 후 임구택이 잠시 생각하고는 사무실 안의 전화를 눌러 분부했다."저녁에 나 다른 볼일이 있으니까 호명의 파티엔 네가 가."진우행이 대답했다."네, 대표님!"전화를 내려놓고 임구택은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창밖의 햇빛은 따듯했지만 그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를 녹여주지는 못했다.그의 눈빛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 깊은 곳에는 유감스러운 정서가 비쳐져 있었지만 그 유감스러움은 점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오후에 유정이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구해준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소희가 웃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그날 룸안의 모든 사람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나도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선 거였으니까."유정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그러나 당시 가장 위험했던 사람이 나였잖아요. 그러니까 밥은 무조건 대접할 겁니다. 백림 씨의 뜻이기도 하고요. 밥만 먹는 건데, 친구 한 명 사귀는 셈 치고 나오면 안 될까요?"소희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결국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위치가 어디죠?""내가 주소를 보내드릴게요.""네."전화를 끊자
"늦지 않았어요. 우리도 방금 도착했는걸요!"조백림이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이때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백림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임구택은 아무 말도 없이 소희의 옆쪽 의자에 앉았다.붙어 앉은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갑자기 미묘해졌다.유정이 메뉴판을 들고 주문하기 시작했다."소희 씨, 뭐 드시고 싶으세요?"조백림이 웃으며 대신 말했다."소희 씨는 단 음식을 좋아하니까 디저트 같은 것들을 많이 주문해 줘.""단 음식을 좋아하는 건 아마 우리 여자들의 공통성일 거예요. 이곳의 아이스크림이 괜찮은데, 우리 한 사람당 2인분씩 주문하는 게 어때요?"먹는 얘기가 나오니 유정의 눈이 순간 빛나고 있었다.하지만 소희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임구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1인분이면 됩니다. 소희가 요 며칠 차가운 걸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거든요."다들 어린애도 아니라 순간 임구택의 뜻을 알아차렸다.유정은 멍하니 소희와 임구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소희는 줄곧 소외감이 묻은 얼굴을 하고 있어 임구택과의 관계가 자신과 조백림과의 관계보다는 친밀하지 않은것 같았지만 임구택의 말을 들으면 또 왠지 이유 모를 정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그러다 유정은 갑자기 그날 넘버 나인에서 소희가 폭탄을 들고 베란다로 달려갈 때 필사적으로 같이 달려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소희를 품으로 감싼 임구택의 모습이 생각났다.그런 본능적인 보호는 절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설마 임구택 씨가 소희 씨를 좋아하는 건가?’이때 소희가 유정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2인분으로 주문해 줘요."임구택이 눈을 길게 뜨고 소희를 흘겨보았다."1인분.""2인분."임구택이 실눈을 뜨고 차갑게 물었다."꼭 그렇게 나와 맞서야 해?"이에 소희가 평온하게 대답했다."임 대표님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저의 일을 제가 알아서 결정하는 건데, 맞선다고는 할 수 없죠."임구택이 조용하게 어두운 눈빛으로 소
조백림이 듣더니 고개를 돌려 매혹적인 눈으로 유정을 쳐다보았다. 눈빛에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자기야, 우리 이미 약혼까지 했어. 그런데 자기는 날 뽀뽀도 못하게 하고, 잠자리도 같이 들려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이제 손도 못 잡게 하는 거야?"조백림의 잘생긴 외모에 전혀 넘어가지 않은 유정은 두 손을 뒤로 한 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저기요, 조수정의 일이 해결되긴 했나요? 그리고 우리의 혼사가 계속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요. 난 그쪽과 그렇게 친하지 않거든요."조백림은 소녀의 눈에 비친 야유를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누구나 다 과거가 있는 법이잖아. 듣자니, 너에게도 죽도록 사랑했던 전 남자친구가 있었다며? 다 같은 사랑에 얽매여 있는 사람으로서 누구도 누구를 비웃지는 말지?"‘전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소녀의 마음을 건드렸는지 소녀의 얼굴색이 조금씩 어두워졌다."입맛이 없네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조백림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왜, 전 남자친구 얘기에 바로 화를 내고, 아직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유정의 뒤에 선 조백림은 앞으로 다가가 유정을 자신의 품과 벽 사이에 가두고 천천히 몸을 숙였다. 매혹적인 두 눈은 여전히 우아하고 다정했다."성질을 그만 부려. 나에게도 과거가 있으니까 네가 마음속에 다른 남자를 품고 있는 걸 허락해 줄게. 우리는 누구도 누구를 멸시할 자격이 없어."유정의 눈빛 깊은 곳에는 침통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바로 시선을 떨구었다. 남자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저 배고파요."그러는 유정의 모습에 조백림은 왠지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유정을 놓아주며 웃었다."가자, 밥 먹으러."유정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백림의 뒤를 따랐다.조백림이 앞에서 두 걸음 걷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왜 헤어진 거야?"유정의 눈동자는 그윽해 있었다. 그녀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조소하듯 웃으며 말했다.
"당신과 이현의 사이에 대해 난 전혀 알고 싶지 않아. 내가 말했듯이 우리는 이미 헤어졌고, 헤어진 그 순간부터 난 당신한테 마음 접었어."임구택의 말허리를 차갑게 끊어버린 소희의 눈빛은 단호했다.그리고 그런 소희의 대답과 눈빛에 임구택이 순간 멍해졌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통증이 조금씩 만연되기 시작하더니 곧 모든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그렇게 한참 소희를 쳐다보다가 임구택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사랑이 멈추고 싶을 때 바로 멈출 수 있는 거라면 네가 나를 전혀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설명하겠지.""아마도."소희가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러자 임구택의 미간에 순간 서늘한 기운이 묻어났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소희를 주시하고 있었다."맞아. 넌 단 한 번도 내가 널 사랑한 만큼 날 사랑한 적이 없었어. 심지어 우리가 함께 있을 때에도 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 매번 헤어질 때마다 나만 아쉬워하고 그리워했고, 넌 항상 평온하고 덤덤했지. 설령 내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냉정했고. 왜서인지 알아? 당신은 날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난 당신이 표현에 서툴러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했었어. 넌 단지 밀실에서 나와 생사를 겪었기 때문에 소씨 가문이 제기한 통혼을 받아들였고, 또 호기심으로 나에게 접근했을 뿐인데. 그리고 당신은 어릴 적에 겪었던 일 때문에 극도로 안정감이 결핍해 매사에 목적을 달았고 누구에게나 경각심을 높였지. 그래서 한 번도 나에게 당신의 신분을 고백한 적이 없었고, 또 한 번도 우리의 사랑에 진심을 다 한적이 없었어. 넌 그렇게 항상 퇴로를 남겼으니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만 내뱉고 바로 빠질 수 있었던 거겠지."임구택의 말을 듣고 있던 소희의 긴 속눈썹이 심하게 한 번 떨렸다. 그러다 천천히 아래로 늘어뜨린 채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유유히 입을 열었다."당신 말이 맞아. 지금까지 난 내가 이미 건강을
식당에서 나와 길을 따라 한참 걸은 후에야 소희는 비로소 차를 아직 식당 주차장에 세워두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종일 너무 바쁜 탓에 점심에 밥을 대충 몇 입밖에 먹지 못했더니 위가 슬슬 아파 나기 시작했다.그러다 사방을 둘러보고 식당이 강성대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발견한 소희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지 않고 면 먹으러 방고거리까지 걸어갔다.예전에 그녀가 자주 왔던 국숫집, 벽에 걸려 있는 메뉴판마저도 예전 그대로였다. 깨끗하고 소박한 가게에는 삼삼오오 식객들이 앉아 있었고, 모양을 봐서는 대부분 강성대 학생들인 것 같았다.소희가 빈자리를 찾아 앉자 사모님이 곧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아가씨, 뭐 좀 드실래요?"그러다 소희를 알아보더니 얼굴에 단골손님을 만난 후의 놀라움과 기쁨이 드러났다."아가씨였네. 오랜만이야. 이미 졸업했지?"소희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난 2년 동안은 외국에 있었어요.""어쩐지!"사모님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열정적이고 담소 나누기를 좋아했다."오랫동안 보이지 않는다 했어. 자네 그 남자친구는 자주 왔었는데."사모님의 말에 소희가 잠깐 멍해졌다."남자친구요?""그래! 예전에 자네랑 같이 국수 먹으러 왔던 그 양반 말이야."사모님이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기품이 뛰어난 남자는 한 번만 보면 영원히 잊히지 않았다.‘임구택이 면 먹으러 이곳을 왔다고?’소희가 놀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아무래도 임구택이 성장해 온 환경이 있었으니 이런 붐비고 좁은 곳에서 음식을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그녀와 몇 번 왔던 것도 단지 그녀가 이곳의 면을 좋아했기 때문이다.심지어 그는 국수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매번 올 때마다 그냥 그녀의 비위에 맞춰주기 위해 보여주기식으로 몇 입만 먹곤 했을 뿐."오늘도 게황면, 맞지?"소희가 멍때리고 있는 모습에 사모님이 웃으며 물었다."네? 아, 네, 게황면이요."소희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임유민은 집사와 인사를 나누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3층으로 올라갔다.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방안에는 플로어 스탠드만 조용하게 켜져 있었고 그의 둘째 삼촌은 소파에 앉아 멍을 때리고 있었다.그러다 인기척에 임구택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는 불빛 때문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나 때문에 깬 거야?"임유민이 듣더니 다가가 재떨이에 가득 찬 담배꽁초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담배를 얼마나 피운 거예요?"임구택이 일어나 창문 앞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습한 공기가 순간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방안의 담배냄새를 어느 정도 씻어냈다.임구택이 일어나자마자 임유민은 소파 위에 놓인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사진 정면이 아래로 향해 있어 임유민이 호기심에 뒤집어 보려는데 임구택이 마침 몸을 돌려 돌아왔다.그러자 임유민이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둘째 삼촌, 상처가 금방 다 나았는데 아직 그렇게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고요."임구택이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알아.""둘째 삼촌, 삼촌 아직도 소희 쌤을 좋아해요?"그러다 임유민이 갑자기 임구택에게 물었다.이에 임구택이 웃으며 되물었다."너 좋아한다는 게 뭔지 알아?""당연하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매일 그 사람이 보고 싶고, 매일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그런 심정이잖아요."임유민의 진지한 대답에 임구택 입가의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너도 좋아하는 애가 있어?"임유민이 듣더니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전 아직 어리단 말이에요. 저의 주요 임무는 공부에요, 공부!"임구택이 나지막하게 웃었다."잘 알고 있네."임유민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 삼촌, 만약 아직도 소희 쌤을 좋아한다면 다시 잡아요."임구택이 듣더니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그 여인은 이미 나를 좋아하지 않아.""삼촌이 어떻게 알아요?""그 여인이 직접 말했으니까.""여자들은
이튿날 아침, 임유민은 학교로 가는 길에 우정숙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휴대폰 맞은편의 우정숙이 다정하게 물었다."학교로 가고 있어?""네, 곧 도착해요."우정숙이 듣더니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당부했다."엄마와 아빠는 며칠 더 있어야 집에 갈 수 있을 거 같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안 계시니 집에서 둘째 삼촌의 말을 잘 듣고.""알았어요. 제가 뭐 어린애도 아니고, 걱정마요."임유민이 어른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그러자 우정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내일 테스트가 있는 날이지? 긴장하지 말고, 평시대로만 하면 돼.""제가 고작 그런 테스트에 긴장할 사람으로 보여요?"임유민이 신심으로 가득 차서 대답했다."그럼 됐어. 밥 제때에 먹고, 누나와 집 잘 지키고 있어.""네, 엄마와 아빠도 몸 잘 챙기시고요."전화를 끊은 후 임유민은 다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음 날의 테스트 생각에 갑자기 눈에 교활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오후, 소희가 밖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새로 전근된 조수가 그녀의 휴대폰을 들고 달려왔다."소희 씨, 휴대폰이 두 번이나 울렸어요."이에 소희가 수신 번호를 한 번 확인하더니 바로 받았다."아주머니, 무슨 일이에요?"이씨 아주머니의 조급해하는 소리가 휴대폰 맞은편에서 들려왔다."소희 씨, 요요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열이 나기 시작해요. 청아 씨가 전화를 받지 않는데, 내가 먼저 요요를 데리고 병원이라도 갈까요?"소희의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졌다."네, 일단 먼저 택시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 저도 곧 갈게요!""알았어요!"이씨 아주머니가 대답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소희는 급히 이 감독과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향했다.소희와 청아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가장 가까운 병원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이씨 아주머니는 요요에게 옷을 갈아입힌 후 바로 택시 타러 나갔고, 동시에 소희도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중도에 소희가 또 청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후원에는 벽에 걸린 벽등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온 마당은 은은한 황금빛에 감싸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장미꽃은 조용히 피어 있었고, 애옹이는 작은 집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야옹이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앞발로 날아다니는 벌레를 잡고 있었다.서인은 등나무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고 있었고,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서인은 오늘 많은 술을 마셨다. 기분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중 절반은 유진 대신 술을 받아 마셨기 때문이었다.유진은 조용히 다가가, 서인의 앞에서 몸을 숙였다. 그가 정말 잠든 건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넋을 잃고 말았다.서인의 짙고 선명한 눈썹은 마치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고 선명했다. 책에서 묘사하는 ‘긴 눈썹이 관자놀이까지 이어진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그 눈썹만 봐도, 서인의 차갑고 오만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눈은 길고 날렵했으며,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콧날은 오뚝하고 반듯해, 본래부터 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턱선에는 거칠게 자란 수염이 덮여 있어, 평소보다 다섯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상관없었다.서인이 어떤 모습이든, 유진은 다 좋아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그의 수염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유진은 거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다. 서인의 턱에 닿기 직전 갑자기 서인이 눈을 번쩍 떴다.서인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경계와 서늘한 기운이 번뜩였다. 산길에서 적들의 포위에 둘러싸였을 때처럼, 그의 몸에는 순식간에 살기가 감돌았다.유진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으나 뒤에 있던 탁자에 걸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낡은 탁자는 이미 몇 번이나 수리를 거쳤던 터라, 유진의 몸무게를 버틸 수 없었다.쾅! 순식간에 탁자가 부서졌다. 몸을 지탱할 곳이 사라지자,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그 순간 굵은 손이 유진의 팔을 붙잡
이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고, 갑자기 가게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오현빈을 비롯한 직원들이 술과 안주를 들고 뛰어나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생일 축하해요!”이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멍하니 웃었다.“내 생일이었어?”“자기 생일도 모르다니!”임유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케이크를 그 앞에 내밀었다.“자, 촛불 끄고 소원 빌어요!”이문은 굳은 얼굴로 기계적으로 촛불을 불어 끄자 유진이 곧장 말했다.“소원도 안 빌고 그냥 끄면 어떡해요!”이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긴장해서 깜빡했어!”유진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긴장할 게 뭐 있어요?”그때, 오현빈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묻힌 생크림을 이문의 얼굴에 문질렀다. 이문은 한순간 얼어붙더니, 이내 손을 뻗어 현빈을 쫓기 시작했다.조용하고 따뜻했던 생일 파티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유진은 한가운데에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그녀의 웃음소리는 맑고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서인은 카운터에 기대어 서서 사람들의 장난을 바라보았다.평소의 냉랭한 표정과는 달리, 이날만큼은 희미한 미소가 얼굴에 걸려 있었다. 한 직원이 장난을 치려다 유진에게 다가갔다.그러나 유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긴 팔이 앞으로 뻗어져 나가, 상대의 손을 막아섰다.서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너한테 묻히면, 그대로 돌려줘. 괜히 억울해하지 말고.”유진은 본능적으로 서인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서인의 뒤를 따라 움직이며 사람들의 난장판을 피해 도망쳤다.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거의 서인의 어깨에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유진은 새로운 케이크를 꺼내며 작게 으쓱했다.“다행히도, 저는 항상 대비책을 준비하죠!”유진은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자르고 원래는 서인에게 주려 했지만,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손가락으로 크림을 살짝 묻혀 서인의 얼굴에 바르려 했다. 그러나 서인은 재빠르게 몸을 뒤로 피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검은 눈동자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서인이 보였다. 임유진은 기분이 한껏 좋아져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사장님!”“응.”그러나 서인은 무심한 듯 가볍게 대답했을 뿐,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유진은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가게 안 손님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우선 앞치마를 두르고 일손을 거들기로 했다.주방에서 음식을 나르던 중, 이문이 유진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었다.“이거, 너랑 사장님이 산에서 가져온 산나물로 끓인 버섯 갈비탕이야. 갓 끓였으니까 맛 좀 봐.”유진은 국물에 떠 있는 버섯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깊고 진한 풍미에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와, 너무 맛있어요!”“나도 좀 먹어볼까?”오현빈이 다가와서는 직접 손으로 갈비 하나를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현빈은 음미하듯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향이 진하네. 이게 진짜 자연산 버섯이지!”그는 유진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런데 오늘은 왜 저녁까지 여기 있어?”유진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오빠들이 보고 싶어서요. 마침 오늘 일찍 끝나기도 했고요.”현빈은 히죽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우리 보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어떤 사람 보고 싶었던 거야?”이에 유진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다 알면서 왜 물어요?”현빈은 유진에게 더욱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어제 형님 집에 갔더니, 밤늦도록 방에 불이 켜져 있더라. 아무래도 너 생각하느라 잠 못 잔 거 같은데?”유진의 볼이 붉어지며 눈을 굴렸다.“어떻게 그렇게 단정해요? 혹시 그냥 잠이 안 온 걸 수도 있잖아요.”“딱히 다른 이유가 있겠어?”현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유진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고마워요, 오빠!”“고맙긴, 우린 그저 축하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니까!”유진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결혼식 날은 사흘 동안 파티 열어드릴게요!”현빈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바로 그때, 서인이 주방으로 들어오며 차가운 목
“그 토끼도 내 거잖아요? 내 물건으로 내 토끼 먹인 건데, 돈을 받을 수 없죠!”박민란은 단호하게 임유진의 손에 돈을 쥐여주었다.“그리고...”박민란은 다른 바구니에서 화분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화분 속에는 난초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이 난초는 꽤 좋은 품종이에요. 기념 삼아 드릴 테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또 산에 놀러 오세요.”임유진은 난초를 받으며 말했다.“감사해요!”박민란은 손사래를 쳤다.“우리가 오히려 감사해야죠.”서인은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유진과 함께 강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했다. 자동차가 산길을 따라 달렸다. 유진은 창문을 내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환하게 웃었다.“정말 잔뜩 챙겨서 돌아가네요!”서인은 어젯밤 자신이 한숨도 못 자고 뒤척였던 걸 떠올리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정작 그녀는 마냥 즐거운 얼굴이라니. 하지만, 어쨌든 이 여행도 끝났다.강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차가 샤부샤부 가게 앞에 멈추자, 오현빈을 비롯한 직원들이 뛰어나왔다.서인이 차에서 내리고, 유진과 함께 가게로 들어가려던 순간, 서인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어느새 서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버린 듯했다.현빈은 서인과 유진의 맞잡은 손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서인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조금 어색한 듯 유진의 손을 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어서 일하러 가자.”유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며칠 놀았더니 다시 일하러 가기가 싫어지네요.”서인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며칠은 단지 예외일 뿐이야.”서인의 차분한 눈빛을 마주하자, 유진의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품에 안고 있던 난초를 바라보았다.“난 애옹이 보러 갈게요. 난초도 마당에 놓고 와야 하고요.”그렇게 말한 후, 유진은 뒷마당으로 향했다.한편, 현빈과 직원들은 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현빈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서인에게
임유진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서인은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 이불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몸속을 타고 도는 술기운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올라오는 듯했고, 유진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가 술기운을 더욱 자극했다.잠시 후,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찬물로 샤워를 한 뒤, 창가에 서서 한동안 밤바람을 맞았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서인은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그 사이, 유진은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녀는 두 개의 베개 사이에 머리를 묻고, 가느다란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꽤 얌전해 보였다. 그러나 서인이 자리에 눕자마자, 유진이 몸을 뒤척이며 다시 그의 품으로 굴러들어 왔다.‘오늘 밤, 잠은 포기해야겠군.’다음 날 아침, 유진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훤히 떠 있었는데, 침대에는 유진 혼자뿐이었고, 서인은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 내다보니, 서인과 안토니가 산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서인은 검은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아침 햇살이 서인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으며, 평소의 거친 분위기를 감싸 안았다.서인에게서 풍기는 느슨한 여유가 사라지고, 더없이 당당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진은 창틀에 두 팔을 올려 기대며 그를 바라보았다.맑고 영롱한 유진의 눈동자에는 오직 서인만 담겨 있었고,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둘이 가까이 다가오자, 유진이 소리쳤다.“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서인은 고개를 들어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차갑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향할 때, 그 안에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유진 또한 서인을 향해 눈길을 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얇은 아침 안개 너머에서 조용히 마주쳤다.산속의 안개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채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었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방 안의 두 개의 침대를 보고는 임유진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이렇게 자요. 밤에 쥐라도 나오면 또 사장님을 깨우러 갈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호텔에서도 이렇게 잤잖아요.”서인은 문득 예전에 유진이 쥐를 보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네가 먼저 씻어. 난 나가서 담배 좀 피우고 올게.”그렇게 말한 뒤, 서인은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유진은 두 다리를 툭 튕기며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감싼 채 웃음이 터졌다.샤워를 마친 유진이 침대에 누웠을 때쯤, 서인이 돌아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옷을 챙겨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이내 샤워기의 물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물이 흐르는 소리에 유진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알 수 없는 상상이 떠오르고,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차올랐다.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서인은 유진이 이미 잠들었다고 생각한 듯 조용히 침대로 가서 누웠고, 방의 불을 껐다.방 안이 암흑으로 변하자, 유진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자기 심장 소리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렸다.‘호텔에서도 같은 방을 썼는데, 왜 이번엔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게다가 묘하게 기대되는 기분까지 들었다. 아마도 이 방이 좁아서 서로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오늘이 서인과 함께하는 마지막 밤일지도 몰라서일까?어둠에 익숙해질수록, 달빛에 비친 방 안의 야경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산속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 풀숲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숲속을 스쳐 지나가는 밤새의 날갯짓 소리, 심지어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마저 들려왔다.달빛이 창살을 통해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운치를 자아냈다. 서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유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
안토니의 휴대폰이 몇 번이나 울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서인이 입을 열었다.“받아.”토니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갔다. 이에 유진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안주설이에요?”사실 주설이 토니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눈에 보였다. 다만, 주설에게는 계산이 많을 뿐이었다.서인은 입에 들풀 한 가닥을 물고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어.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도 아니잖아.”“참 관대하시네요?”임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바위 위에 앉아 두 다리를 살랑거렸다.서인은 멀리 산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안주설과 사귀는 건 토니지, 내가 아니잖아.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지.”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인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만약 당신이라면? 용서할 수 있어요?”서인은 깊은 눈빛을 드리우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럴 일은 없어.”“그렇겠죠.”유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적어도 당신한테 해가 되는 선택은 안 할 테니까.”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유진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가, 코웃음을 쳤다.“점점 뻔뻔해지네.”유진은 서인을 흘긋 쳐다보았다. 귀끝이 살짝 뜨거워졌지만, 동시에 서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말이 점점 거리낌 없이 나오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토니가 돌아왔다. 그는 화가 난 듯하면서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주설이 전화를 걸어와서 자기 잘못을 인정했어요.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고요.”유진이 물었다.“그래서 뭐라고 했어요?”토니는 맥주 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벌컥 들이켰다.“해성에서 일을 그만두고 흥성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그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더 삼켰다.“그랬더니, 헤어지지만 않는다면 자기도 따라와서 같이 살겠대요.”서인은 덤덤하게 말했다.“잊지 못하겠으면 다시 만나는 것도 방법이지.”토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젖히고 술을 들이켰다.이야기
“이번 일은 서인 형 덕분이에요. 이 잔은 우리 가족을 대표해서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거예요!”서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울 것까지야, 그냥 네 형이 집안을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동안, 임유진도 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다. 입안에 퍼지는 매실 향이 은은했지만, 마실 때는 생각보다 강한 알코올 향이 확 올라왔다. 이에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인은 그녀를 흘끗 바라보더니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조금 맛이라도 보게 해야지. 괜히 못 마시게 하면 자꾸 마시고 싶어질 테니까. 직접 마셔보고 얼마나 독한지 알면 다시는 손대지 않겠지.’동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동혁의 가족들은 자랑스럽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윤석경은 계속해서 유진과 서인에게 반찬을 집어 주며 말했다.“만약 너희가 우리 동혁이를 만나게 되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 우리 다 잘 지내고 있으니까.”“그리고 매달 그렇게 많은 돈을 부치지 않아도 돼. 자기 몫도 좀 남겨두라고 해.”서인은 목이 메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유진은 그런 서인을 한 번 바라보고는 윤석경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서인 오빠도 동혁 오빠를 자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만날 기회가 생기면 꼭 전할게요. 동혁 오빠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윤석경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그래, 다들 잘 지내면 그걸로 된 거야!”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동혁이 돌아올 순 없지만, 저는 계속 강성에 있을 거예요. 언제든 필요하시면 연락하세요.”안토니가 말을 받으며 말했다.“우리 집에는 아직 나도 있어요. 이번에 해성에서 일을 정리하고 흥성으로 돌아가려고요. 부모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이제 곁에서 모시려고 해요.”서인은 그런 토니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동혁은 이미...그래서 이제는 자신이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직감한 거겠지.’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오석준은 결국 해고되었고, 정휘현도 부하 직원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 징계받았다. 그리고 안토니네 민박집은 철거되지 않기로 확정되었으며, 주변의 다른 민박들도 철거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이 소식을 들은 박민란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모든 일이 해결되자, 서인은 마심호에게 먼저 강성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 뒤, 직접 차를 몰아 안토니네 가족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토니의 부모와 박민란은 서인의 차에 타고, 토니는 다른 차를 탔다. 돌아가는 길에, 오직 박민란만이 계속 떠들었다.“윤석경 씨, 솔직히 작은 안주설 같은 여자는 절대 며느리로 받아들이면 안 돼요. 헤어진 게 잘된 일이죠. 저런 애는 속이 너무 안 좋아요!”“그 애가 저도 속이려고 했어요. 저는 처음부터 서인 씨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죠!”“이번 일은 정말 서인 씨 덕분이에요. 덕분에 우리 집도 철거되지 않게 됐고요. 그런데 서인 씨, 그 오석준이 왜 당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던 거예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임유진이 뒤를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도련님은 말 그대로 뜻하는 거죠!”박민란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가씨, 나를 속이려는 거 아니죠? 난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그러면 왜 물어보셨나요?”박민란은 순간 말문이 막히더니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서인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한 듯, 태도는 더욱 공손해졌다.“아가씨도 참 대단해요!”유진은 여전히 밝은 미소로 말했다.“칭찬은 됐고요. 제가 선생님네 난초를 꺾은 걸 용서해 주시기만 하면 돼요!”박민란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민망하게 웃었다. 토니네 집에 도착한 후, 가족들은 모두 서인에게 미안해했다.비록 주설이 가족은 아니지만, 그녀는 약혼자나 다름없었기에 그녀의 행동이 곧 가족의 잘못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어차피 주설이 사진 몇 장으로 나를 모함하려고 했을 때도, 여러분은 저를 의심하지 않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