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황정아 뒤에 있던 한 여인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나 죽기 싫어! 나 여기서 죽기 싫어!"그녀는 놀란 나머지 당황해하며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조수정이 바로 소리쳤다."움직이지 마, 그렇지 않으면 당장 유황탄을 폭파할 거야!"역시나 여인은 그곳에 멍하니 서 있을 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방 안의 공기는 마치 정지된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어떻게 도망칠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또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사소한 동작이 눈앞의 미친 여자를 격노시켜 폭탄을 터뜨릴까 봐.사랑에 미친 여인은 세상 두려울 게 없었다.다들 숨쉬기조차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고, 여인의 손에 든 폭탄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았다."둘. 셋. 넷."조수정은 또 수를 세기 시작했다.임구택이 소희를 데리고 조용하게 베란다로 물러났다. 소희는 그의 손을 팽개치려 했지만 임구택이 꼭 잡고 있어 팽개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소희가 갑자기 입을 열어 큰 소리로 말했다."내가 대신 죽여줄게!"소녀의 말은 마치 잔잔한 호수에 갑자기 던져진 돌멩이처럼 고요함을 깨트리고 순간 물결을 일으켰다.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잠깐 멍해지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았다.임구택이 칠흑같이 어두운 눈빛으로 소희를 한번 힐끗 보고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내가 할게."이에 소희가 의외라는 듯 남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임구택은 그녀를 다시 보지 않고 바로 조백림 앞으로 가서 칼을 주웠다. 그러고는 조수정을 향해 말했다."내가 백림을 대신해서 그의 약혼녀를 죽이면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을 보내줘."조수정이 음흉한 눈빛으로 임구택을 주시하고 있었다."그래, 네가 가서 죽여!"임구택은 칼을 들고 유정을 향해 걸어갔다.그리고 임구택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에 유정이 경악해하며 뒤로 물러났다."안돼!"조백림은 무의식중에 소리를 치며 임구택의 손에 있는 칼을 빼앗으려 했다.이때 소희가 갑자기 손을 들어 조수정의 뒤를 가리키며 급하게 소리쳤다."빨리 나가, 들어오지 마!"조수
소희는 일어난 후 신속히 고개를 돌려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그도 마침 소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부딪힌 순간, 그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조백림과 오진수 등이 임구택에게 몰려와 소희의 시선을 막았고, 소희는 그렇게 간미연과 함께 뒤로 밀려났다.폭탄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넘버 나인 전체가 혼돈에 빠졌다.조수정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통제되었지만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여전히 모른 채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있었다."백림 씨! 당신 나를 사랑한다며? 어서 저 여인을 죽여! 저 여인만 죽이면 아무도 당신을 강요하지 않을 거야! 그럼 우리도 함께 있을 수 있어!"......유정은 황정아 등에게 둘러싸인 채 미쳐버린 조수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개하는 동시에 조수정이 불쌍하기도 했다.하지만 조백림은 증오하는 눈빛으로 조수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가서 그녀의 뺨을 몇 대 때려주고 싶은 표정이었다.곧 경찰이 도착했고 사건의 경과를 알아본 후 조수정을 잡아갔다. 그러면서 조사에 협조해야 한다며 조백림도 데리고 갔다.임구택은 등에 폭파상을 입어 장시원 등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떠나기 전 장명원이 소희에게 물었다."구택 형님이 많이 다친 것 같은데, 같이 병원에 가 볼래요?"소희가 잠깐 멍해있더니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어서 가세요. 일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고요."장명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좋아요. 그럼 미연이와 먼저 돌아가세요. 일이 있으면 바로 전화할게요.""네."다른 사람들은 연이어 현장을 떠났고, 유정은 홀로 뒤쪽에서 걸으며 소희에게 감사를 전했다."소희 씨, 아까는 소희 씨와 임 대표님이 있어서 살았습니다. 고마워요. 생명을 구해 준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천만에요. 다 함께 위험에 부딪혔는데, 누가 먼저 나서든 전부 당연한 일인걸요."소희가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러자 유정도 덩달아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소희 씨와 임 대표님이
병원임구택은 응급실 침대에 엎드려 상의를 벗은 채 처치를 받고 있었다."구택 형, 어떻게 됐어요?"마지막으로 달려온 장명원이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급히 물었다.임구택은 무의식적으로 장명원의 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갑자기 소독수로 상처를 눌렀다. 그러자 가슴을 파고드는 통증이 앞가슴과 등을 관통해 와 임구택은 미간을 찌푸린 채 즉시 고개를 숙였다.장시원이 담담하게 말했다."상처를 처리하고 있어. 조금 있다가 몇 가지 검사도 해봐야 하고.""아."장명원이 걱정하며 안쪽을 바라보았다.경찰서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병원을 따라와 응급실 밖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시원은 나가서 오진수 등더러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모두 이곳에서 지킬 필요가 없다면서.오진수 등은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구택 형과 소희 씨 덕분에 우리 모두가 살아났어. 구택 형 쪽에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단톡방에 알려줘.""걱정 마."장시원이 오진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다들 데리고 같이 돌아가."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서서히 흩어졌다.장시원이 뒤돌아보며 장명원을 바라보았다."너도 가서 미연 씨를 지켜줘. 여기엔 내가 있으니까.""아니야, 미연 씨는 소희 씨랑 같이 돌아갔어. 나도 여기에 있을래."장시원이 응급실을 한 번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소희 씨는 온다고 하지 않았어?"장명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장명원의 대답에 장시원은 살짝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들어갔다.......집에 돌아오자마자 먼저 씻으러 들어 간 소희는 옷을 벗고서야 팔에 살짝 긁힌 상처를 발견하고 물로 피를 씻어냈다. 그러자 통증이 순간 피부를 찌르는 것처럼 온몸에 번졌다.그렇게 오랫동안 씻은 후에야 그녀는 몸을 닦고 나왔다.잠옷을 갈아입은 후 소희는 책상 앞에 마주 앉아 책을 보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그녀는 세계 일주를 떠났다. 그래서 요 며칠 그녀는 다시 대
근 일 년 동안 소희가 약을 복용하고 있는 것 때문에 매운 음식을 금하고 있어 청아는 될수록 담백한 음식들만 했다. 그래서 소희가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동시에 청아의 요리 솜씨도 많이 진보되었다.밥을 먹고 난 후 소희는 요요랑 한참 놀아주었다. 그러다 요요가 졸려 하는 걸 보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샤워를 다 하고 나온 소희는 어제 다 보지 못한 책을 계속 읽었다.그러다 10시가 다 되어갈 무렵 소희가 마침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임유민의 전화가 갑자기 걸려 왔다.목소리가 많이 조급했다."소희 쌤!"소희가 듣더니 즉시 일어섰다."유민아, 왜 그래?""우리 둘째 삼촌 지금 열이 엄청 심하게 나고 있는데 우리 집으로 와주면 안 돼?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소희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병원에 있는 거 아니었어?""점심에 퇴원했어. 오후까지만 해도 분명 괜찮았는데, 방금 내가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어 방으로 가보니까 열이 나고 있는 거야.""홈닥터는? 바로 홈닥터에게 전화해.""장 의사 지금 여기에 계셔. 하지만 둘째 삼촌이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아."소희가 듣더니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졌다."그 사람이 아이야?""소희 쌤, 제발 빨리 와줘. 삼촌이 지금 열이 엄청 심해. 나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임유민이 목이 메는 소리를 냈다.그러자 소희가 바삐 대답했다."그래, 내가 곧 갈게. 너도 방법을 써서 삼촌에게 약 먹여.""응, 빨리 와!"전화를 끊은 후 소희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핸드폰과 차 키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소희의 발걸음은 엄청 빨랐다.차가 주택단지를 나서자 밤바람이 순간 차창을 따라 불어 들어왔고, 소희는 바로 차를 세웠다.바깥의 그윽한 야경을 보며 그녀의 눈동자는 점점 맑아졌다.몇 분 후, 소희는 핸드폰을 꺼내 장시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시원 오빠, 잠들었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방해해서 미안해요."장시원의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같은 시각, 장시원은 차를 몰고 임구택의 집으로 갔다.위층으로 올라가 문을 여니 임유민이 즉시 마중을 나왔다. 그러다 눈빛이 기대에서 놀라움으로 변했다."시원 삼촌!""소희 씨가 오라고 해서 온 거야. 네 둘째 삼촌은 어때?"장시원이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임유민이 의기소침해져서 대답했다."둘째 삼촌이 여전히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아요."장 의사도 다가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임 대표님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모습은 저도 처음 봅니다.""괜찮아요, 내가 할게요."장시원이 다정하게 웃으며 거실을 지나 침실로 걸어갔다.침실에는 침대 옆 헤드라이트만 켜져 있었다. 넓은 어깨와 등을 드러낸 채 침대에 엎드려 있던 임구택이 발자국 소리에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다시 눈살을 찌푸린 채 긴 속눈썹을 소리 없이 늘어뜨렸다.이상할 정도로 붉어져 있는 얼굴을 봐서는 열이 심하게 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소에 예리하고 칠흑같이 어둡던 눈동자에마저 피곤한 빛이 띠고 있었다."나를 보니까 실망했지?"장시원이 웃으며 물었다.임구택은 말하기 귀찮을 정도로 너무 아파 아예 소리를 내지 않았다."비록 소희 씨가 직접 오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전화를 한 걸 보면 여전히 너를 관심하고 있는게 틀림없어.""정말 관심하고 있었으면 직접 왔겠지."쉬어있는 임구택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정서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이에 장시원이 한숨을 쉬었다."일단 약부터 먹어.""안 먹어."임구택이 시선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너 지금 누구한테 성질을 부리는 거야?"장시원이 듣더니 키득거리며 침대 앞으로 다가가 약을 임구택에게 건네주었다."네가 주동적으로 소희 씨를 품속에 감싼 거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약을 먹지 않겠다는 건데?""누구와도 상관없어. 그냥 먹고 싶지 않아."임구택이 눈을 감고 코 막힌 소리로 대답했다."유민이도 너보다는 철이 들었겠다. 빨리 약 먹어. 그렇지 않으면 네 입에 강제로 주입할 거야.""안 먹어, 안 죽어."임구택이 고
장시원은 또 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임구택이 곤히 잠든 후 다시 체온을 재주었다. 그러다 열이 내려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일어나 방을 떠났다.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임유민과 장 의사는 임구택이 이미 열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한숨을 내쉬었다.시간이 많이 늦은 탓에 장시원은 운전 기사더러 장 의사를 집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분부했다.그리고 장시원은 임유민과 함께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왜 너와 네 둘째 삼촌 두 사람만 집에 있는 거야?""할아버지는 경성에 회의하러 가셔야 된다고 할머니를 데리고 함께 가셨고요, 저희 부모님도 출장을 가셨어요. 그리고 누나는 학교에 행사가 있어서 학교에서 지내고 있고요.""네 둘째 삼촌은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네, 시원 삼촌 고마워요. 삼촌도 어서 돌아가서 쉬어요.""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네!"장시원을 보내고 임유민은 또 3층으로 올라가 임구택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편안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방으로 돌아온 임유민은 한참 고민을 하다가 결국 소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소희 쌤, 둘째 삼촌이 이미 약도 먹고 열도 내렸어.]이미 새벽 2시가 되었으니 소희가 내일 아침에야 그의 메시지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몇 분 후 소희가 바로 답장이 왔다.[그래, 너도 일찍 쉬어.][응, 잘 자.][잘 자.]임유민도 확실히 많이 졸린 상태라 바로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임유민은 주방에서 만든 아침밥을 들고 3층으로 왔다.임구택은 금방 깨어나 침대머리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임유민이 보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병이 난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어떡해요?"예전에 소희와 있을 때 임구택은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근 2년 동안에 담배를 피우는 차수가 점점 많아졌다.임구택이 담배를 끄고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아직도 학교로 가지 않은 거야?""곧 갈 거예요!"임유민이 죽과 야채전을 그의 앞에
그렇게 3일이 지난 후에야 이현은 다시 제작팀으로 돌아왔고, 파파라치도 마침 임씨 그룹 빌딩 밖에서 회사로 돌아와 출근하는 임구택의 모습을 포착했다.이렇게 두 사람이 요 며칠간 줄곧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실증을 얻게 되었다.소희가 분장실에 옷을 정리하고 있는데 커튼을 사이에 두고 저쪽에서 이현과 여민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이현 씨, 며칠 동안 못 봤더니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잖아요."여민이 비위를 맞추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이에 이현이 단아하고 다정하게 웃었다."일이 좀 있어서 며칠을 지체하는 바람에 촬영 진도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네요, 정말 미안해요.""아무도 이현 씨를 탓하지 않았어요!"여민이 애교를 부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나한테까지 숨길 필요 없어요. 어서 사실대로 말해봐요. 요 며칠 임 대표님과 함께 있었죠?"이현이 옅은 파란색 커튼을 한 번 힐끗 보고는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없다고 약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니까요. 마치 어린애 같아요."여민이 듣더니 입을 가리고 웃었다."임 대표님이 분명 일부러 핑계를 대가면서 이현 씨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거잖아요. 그것도 모르겠어요?""알죠!"이현이 눈빛에 쑥스러움을 머금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서 그와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임 대표님이 이현 씨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곧 있으면 이현 씨 임씨 사모님이 되는 거 아니에요?"그런데 이현이 의외로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나 아직 그와 결혼을 할지 말지 생각하지 못했단 말이에요. 나에게 있어서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작품에 전념하는 거거든요!"여민이 듣더니 놀라서 물었다."그럼 임 대표님이 이미 이현 씨에게 청혼했다는 거예요?""아니에요, 함부로 말하지 마요!"그러나 무언가를 덮으려는 이현의 말투는 여민의 물음을 더욱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여민이 그녀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알았어요. 말하지 않을게요. 이제 임 대표님이 성대한 프러포즈를 준비하여 국내를 혼
이 감독은 소희와 이현이 서로에게 안 좋은 감정이라도 생길까 봐 한쪽으로 이현을 달래면서 또 한쪽으로는 조감독을 찾아 소희를 많이 타이르라고 분부했다. 소희가 개인적인 원한을 일에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이현과 잘 협조하라고.30대 미혼인 류 조감독은 전에도 소희를 몇 번 찾은 적이 있었는데 여러 번의 대화를 통해 의외로 소희에게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이날 조감독은 소희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며 업무에 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방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갑자기 소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소희 씨,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배우로 데뷔할 생각은 없어?"소희가 담담한 표정으로 거절했다."네."그러자 조감독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소희 씨의 얼굴로 배우가 되지 않으면 정말 아까운데. 진짜야, 연예계 같은 곳에는 딱 소희 씨처럼 순수하고 천연적인 미녀가 필요해."소희는 여전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저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워본 적도 없고 연기에 재능도 없어요."조감독이 곧장 말했다."배워본 적이 없어도 상관없어. 천부적인 재능이 없어도 후천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거고. 소희 씨 모르지, 엄청 많은 배우들이 내가 직접 키워낸 거야. 그러니 연기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나에게 말해!"그러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어갔다."그러지 말고 오늘 밤에 바로 곳을 잡고 이야기할까? 내가 연극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줄게. 소희 씨가 어떤 배역에 적합한지도 알려주고. 난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야, 바로 소희 씨에게 안배해 줄 수 있어."소희는 얼굴에 탐욕을 전혀 숨기지 않은 조감독을 힐끗 쳐다보고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제작진 스태프를 희롱했다가 맞아 죽는 씬도 안배해 줄 수 있어요?"조감독이 듣더니 안색이 순간 변했다.소희는 그러는 그를 보지도 않고 돌아섰다.소희의 가녀린 뒷모습을 보며 조감독은 이를 갈았다.‘고집이 이렇게 세다니! 정말 사회를 금방 나왔다고 겁도 없이 달려드네.’그는 마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