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돌아왔을 때, 청아는 여전히 창피함을 느꼈고 심지어 자신이 허연의 시중을 들 때보다 더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배달을 할 때 손님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학우들에게 보일 때도 창피하지 않았지만 오늘 시원의 면전에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자존심이 다른 사람에게 밟혀 힘껏 깔렸다고 느꼈다.창피함 외에도 슬픔이 들어 있었고, 그것은 가난으로 인한 슬픔이었다!이 순간 그녀는 자신과 시원의 신분의 현격한 차이를 더욱 깊이 깨달았다.그녀는 한참을 울다가 휴대전화를 꺼내 집을 찾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장설을 속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시원의 집에서 계속 살 면목이 없었기에 가능한 한 빨리 이사해서 앞으로 다신 그와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다음날 아침, 장설은 아침도 먹지 않고 떠났다.청아는 출근하지 않았고, 가능한 한 빨리 집을 구한 뒤, 이사를 마친 후에 다시 회사에 갈 계획이었다.그녀가 집을 구하는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소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집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은 집세가 너무 비싸서 합세해도 감당할 수 없었고 멀리 있는 집은 또 너무 외딴곳에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정말 끌고 싶지 않아 외딴곳에 있지만 임대료가 싼 집을 골랐고, 심지어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야 했다. 다행히 함께 세낸 사람도 여자였다.집을 예약하고 집세를 지불하고서야 청아는 소희에게 이사 간다고 알려주었다.소희는 무척 놀라며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청아는 그녀에게 맛있는 거 가득 만들어 주며 웃었다."랍스터, 새우볶음, 모두 네가 좋아하는 거야. 먼저 가서 손 씻어. 아직 마지막 요리가 남았어!”소희는 청아의 손에서 접시를 받으며 그녀가 방수 장갑을 두 개나 낀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끌고 식탁으로 돌아왔다."하지 마, 이미 충분해!"청아는 깨끗한 미소를 지었다."하나 더 만들게 해줘, 너 앞으로 다시 내가 만든 요리 먹고 싶어도 기회 없어!"소희는 그녀의 장갑을 벗었는데, 다행히 상처에 물이
저녁에 소희는 청아가 이사 가려는 일을 구택에게 알려준 다음 생각했다."청아가 갑자기 이사하는 이유가 그 장설하고 관계가 있는 거 같아요.”구택은 핸드폰에서 정보를 찾다가 이 말을 듣고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 같은 게 아니에요!"소희는 눈을 돌렸다."구택 씨도 청아의 새언니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구택은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티 나잖아요! 시원은 더욱 모를 리가 없고요. 틀림없이 그가 청아 씨와 무슨 말을 했기에 그녀가 기어코 이사를 가려고 하는 것일 거예요!"소희는 쿠션을 안고 소파에 누워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우리 시원 오빠한테 말해야 할까요?"구택은 잠시 생각했다."그래야죠. 청아 씨는 지금 그의 집에 살고 있고 그도 줄곧 그녀를 여동생으로 삼고 있었으니까요."소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구택 씨가 말해요!"구택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뒤 소희를 자신의 다리에 베게 하고는 손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주물렀다."많이 아파요?"소희는 눈을 뜨고 찔린 듯 그의 팔을 안았다."다행히 그렇게 아프지 않아요!"그녀의 생리는 이번 달 하루 앞당겨서 확실히 심하게 아팠지만, 그녀는 참을지언정 사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구택은 싸늘하게 웃었다."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도 발뺌하는 거예요! 아파도 싸요, 내가 곁에 없었다고 자포자기했으니 제대로 아파봐야죠!"소희는 그가 이런 말 할 줄 알았다. 그녀는 남자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몸을 돌려 아랫배를 누른 채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만해요, 정말 아파요!"구택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품에 안고는 손을 안에 넣어 그녀의 배를 주물러 주었다."앞으로 내 말 좀 들어요.”소희는 그의 어깨에 엎드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나한테 화내지 마요!"구택은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음, 앞으로 무슨 일 있어도 우리 솔직하게 말하고 화내지 마요."소희는 그의 어깨를 꼭 껴안으며 갑자기 가슴이 찔렸다.10여 분 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자 구택
끓는 물의 온도가 정점에 도달했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구택은 힘껏 그녀를 키스했고 미간, 눈가에서 볼 그리고 입가까지 끝없이 그녀에게 키스했다.소희는 그의 키스에 정신이 오락가락했고 한참 뒤, 냄비 뚜껑이 떨어질 것 같을 때에야 그는 손을 내밀고 불을 껐다…....30분 뒤, 소희는 식탁 앞에 앉아 구택이 끓인 오렌지 설탕물을 천천히 마시고 있었고 구택은 주방에서 치우고 있었다.그는 남은 설탕물을 그릇에 부어 냉장고에 넣은 다음 뒤돌아서 그녀에게 당부했다."내일 점심에 꺼내서 솥에 넣고 데운 다음 마셔요. 저녁에 내가 돌아와서 다시 끓여 줄게요."소희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중얼거렸다."내일 점심은 아마도 청아네 새 집 부근에서 먹을 거예요."구택은 냉장고를 짚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소희 씨 이런 상태로 어떻게 이사를 도와줄 수 있겠어요?"소희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이 처방은 아주 효과가 있는걸요. 마시니까 많이 좋아졌어요!""그래도 안 돼요!" 구택은 그녀를 흘겨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내일 명우를 부를 테니까 소희 씨는 청아 씨 따라가서 한 번 보고, 돌아올 때 명우랑 같이 돌아와요!"소희는 인차 말했다."명우 씨 귀찮게 할 필요 없어요!""그럼 내가 직접 갈까요?" 구택은 미간을 찌푸렸다.소희는 헛웃음을 지었다."그럼 명우 씨한테 부탁할게요!"구택은 다가와서 한 손으로 의자를 등을 받치더니 몸을 굽혀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보고 싶지 않나봐요?"소희는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회사 일 때문에 바쁠 거 같아서요!"구택은 다른 말 하지 않고 그릇에 있는 설탕물을 한 번 보았다."맛있어요?"소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엄청 맛있어요."그녀는 한 숟가락 떠서 남자의 입가에 놓았다."먹어봐요!"구택은 입을 벌려 마시고는 너무 달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 탕의 효능을 떠올리더니 안색이 어두워진 채로 설탕물을 삼킨 뒤,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괜찮네요. 좀 더 마셔요.”소희는 고개를 살
청아는 마음속의 슬픔을 삼키고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시원 오빠 말이 맞았어요. 우리는 같은 차원의 사람이 아니라서 사실 친구가 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에요."시원은 미간에 어두운 기운이 많아졌다."왜요, 친구도 하기 싫은 거예요?""나는 단지 시원 오빠를 나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난 그런 오빠를 감사하고 존경할 거고, 만약 나의 도움이 필요한다면 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도와줄 수 있어요!" 청아는 눈빛이 깨끗하고 부드러웠다."가게 해줘요.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서 지내도 난 안심할 수 없을 거예요."시원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물었다."꼭 이사 가야 하는 건가요?"청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시원은 그녀를 보며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졌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몸을 돌려 떠났다.청아는 텅 빈 문 앞을 바라보며 갑자기 말로 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녀는 묵묵히 문을 닫고서야 몸을 돌려 문에 기대고 눈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울었다.그녀는 자신이 왜 이렇게 괴로운지 몰랐지만, 그저 마음이 텅 빈 것 같았고 아무리 해도 채울 수 없었다.그녀는 애써 평온을 되찾은 뒤, 침실로 돌아가 계속 정리를 했다. 그녀는 물건이 별로 없었다. 일부 책, 평소에 입었던 옷, 그리고 전에 낡은 집에서 가져온 사진첩과 레고로 만든 성이었다.그녀는 그 성을 보면서 전에 시원이 깨진 성을 다시 맞춘 것을 떠올렸고 참지 못하고 또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그녀는 즉시 고개를 들어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 집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고 시원이라는 친구도 그녀의 생활에 나타나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떠나는 것도 단지 그녀의 원래 생활대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었다.‘슬퍼할 거 없어!’그녀는 세수를 하고 아침을 데운 뒤, 소희에게 전화를 걸어 아침 먹으러 내려오라고 했다.밥을 먹을 때 청아는 소희에게 시원이 왔었다고 알려주었고 그녀도 이미 말을 분명하게 했다고 말했다.소희가 말했다."내가 시원 오빠한테
청아는 트렁크를 끌고 작은방으로 갈 때,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어색함에 얼굴이 빨개지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남자는 청아의 몸을 힐끗 훑어보더니 건들건들 안방으로 들어갔다.소희는 다가와서 담담하게 고장미에게 물었다."청아가 돈 낼 때, 집주인은 분명 당신 혼자만 산다고 했는데.”고장미는 개의치 않고 웃었다. "내 남자 친군데, 자주 오지 않아."말이 끝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청아도 마음이 좀 불편했다. 그러나 이미 3개월의 집세를 낸 데다 집주인은 환불할 수 없다고 했으니 그녀도 잠시 이렇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작은방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한번 멍해졌다.작은방에는 침대 하나, 책상 하나, 나무 옷장 하나밖에 없었고 이때 침대 위에는 시트가 깔려 있었는데 시트는 한데 뭉쳐 있었고 바닥에는 쓰던 콘돔과 휴지가 가득 널려 있었다. 딱 봐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소희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돌려 고장미를 찾아가려 했지만 청아가 그녀를 막았다."됐어, 그들이 이 방을 썼다고 해도 내가 이사 오기 전의 일이야. 내가 깨끗이 치우면 돼!"소희는 타당하지 않다고 느꼈다."난 여기가 그다지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다른 집으로 바꾸자!"청아는 웃으며 말했다."우리 대학 동창들도 다른 사람들과 합세하는 경우가 많은데, 별의별 상황을 다 겪어서 사실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야. 집을 바꾼다 해도 어떤 사람을 만날지 아무도 몰라. 그리고 난 이미 3개월의 집세를 냈으니 먼저 여기서 지내다가 그때 가서 다시 보자."그녀는 소매를 걷어올렸다."넌 깨끗한 곳에 앉아서 좀 쉬어. 내가 방 치울게."소희는 빗자루를 가지러 갔다. "같이 치우자!"옆방의 남자는 웃통을 벗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게임을 하고 있었고 고장미는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녀는 무심한 듯 남자에게 말했다."새로 온 두 여자 꽤 예쁜걸!"남자는 담배를 물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그럭저럭이야!""개뿔,
청아는 들어오자 좀 뻘쭘해하며 소희를 밖으로 밀어냈다."내가 청소할 테니 넌 나가서 기다려."소희가 아직 말을 하지 않을 때, 전화가 들어왔다.그녀는 구택의 전화인 것을 보고 밖에 나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베란다까지 걸어가서 창밖의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여보세요?""자기야, 도착했어요?" 구택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소희가 대답했다."응!"“지금 뭐 해요?”"집 청소요!"구택은 눈살을 찌푸렸다."방에 오랫동안 사람 살지 않았나요?"소희는 구택이 사람 사는 집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더러울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청소에 몰두하고 있는 청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명우 씨 먼저 가보라고 해요. 난 오후에야 돌아갈 것 같으니까 기다리게 하지 말고요.""그렇게 오래 있어야 해요?" 구택은 잠시 멈칫했다."주소 나한테 보내요. 오후에 시간이 있으면, 내가 소희 씨 데리러 갈게요!"소희는 "응" 하고 대답을 한 뒤 전화를 끊고 주소를 구택에게 보냈다.문자를 보낸 뒤, 소희는 청아를 도와 함께 청소했다. 두 사람은 먼저 바닥 청소를 했다. 방\마다 바닥은 모두 엄청 더러웠고 마치 몇 달 동안 땅을 닦지 않은 것 같았다. 두꺼운 한 층의 때는 아무리 닦아도 닦아낼 수 없었다.청아는 매우 쑥스러웠지만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와 함께 치웠다.두 사람은 10여 분 동안 일했지만 방 한 칸의 땅도 깨끗하게 하지 못했고, 한창 바쁠 때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소희가 문을 열자 밖에 통일된 작업복을 입은 네 사람이 서서 공손하게 말했다."소희 아가씨 맞습니까?"소희는 멈칫했다."맞아요!"밖에 있는 사람은 웃으며 말했다."저희는 푸른 하늘 가사 서비스입니다. 성이 임 씨인 선생님께서 저희더러 이곳에 와서 방을 치우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들어가도 될까요?"소희는 멍해졌다. 구택이 방금 그녀더러 주소를 달라고 한 것은 단지 그녀를 데리러 오려고 한 게 아니었다
소희와 청아는 가사도우미가 청소할 때 마트에 가서 침대 시트, 이불과 기타 생활용품을 샀다.계산할 때, 소희는 청아 대신 돈을 지불했다.마트를 나서자 청아는 기필코 소희에게 돈을 돌려준다고 했지만 소희는 받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너 새집으로 이사 가면서 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으니 그냥 내가 너에게 주는 집들이 선물이라고 생각해.”청아는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소희야, 나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소희는 부드럽게 웃었다."아무 말 할 필요 없어. 친구들끼리는 원래 이런 거 따지는 거 아니야!"청아는 물건을 들고 감동을 받은 채 소희를 향해 웃으며 보조개 두 개를 드러냈다."그럼 이따가 내가 밥 살 테니까 꼭 내가 계산하게 놔둬!”소희는 입술을 구부렸다."좋아!"두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가자 가사도우미는 이미 청소를 마쳤다. 역시 프로라서 그런지 방 구석구석마다 깨끗해졌고, 유리도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이 닦았다. 두 사람은 들어갔을 때 집이 바뀐 줄 알았다.가사도우미가 떠난 후 소희와 청아는 내려가서 밥을 먹었다.청아는 전에 푸드 앱에서 운성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을 찾았는데 두 사람은 들어가서 청아의 집들이를 경축하는 의미에서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두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났고, 나올 때 이미 오후 2시였다.청아의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들은 고장미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소파에 앉아 배달 음식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남자는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밥 먹었어? 같이 먹을래?"고장미는 자신의 남자친구를 흘겨보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청아는 얼른 대답했다."우리는 이미 먹었어. 고마워!"말을 마치고 그녀는 소희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다, 소희는 구택의 전화를 받았고, 그는 이미 차를 몰고 오는 길이라며 대략 30분 후에 도착한다고 했다.소희는 전화를 끊고 청아에게 당부했다."만약 고
남자가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고 떠나며 점점 멀어져 갈 때까지 고장미와 그의 남자친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차가 보이지 않자 남자는 문득 깨달은 듯 추측했다."방금 그 남자가 등처가 아니야?"스타보다 더 잘생긴 데다, 몸매도 남자 모델처럼 좋았으며 또 소희의 비위를 그렇게 맞췄으니 아무리 봐도 등처가 같았다!‘틀림없어, 정말 부자라면 혼자 운전을 할 이유가 없잖아?’......이때, "등처가"인 구택은 차를 몰고 자신의 "스폰서"를 어정으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그는 소희의 손을 잡고 입을 열었다."청아 씨가 이사 갔으니 저녁에 아무도 소희 씨한테 밥해줄 사람 없잖아요. 내가 아주머니 한 분 청할게요."소희는 돌아보며 말했다."싫어요!""항의 무효에요, 난 단지 소희 씨에게 통지하는 거뿐이에요!" 구택은 앞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소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구택 씨도 나 이사 가는 거 보고 싶어요?"구택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이사요? 그럼 저녁에 배가 아플 때 다시 나랑 이사에 대해 말해봐요."소희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한참 뒤, 소희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난 스스로 밥하는 거 배울 수 있으니까요. 설마 내가 만든 밥 맛없다고 싫어하진 않겠죠!"구택은 전에 탄 계란 프라이를 떠올리며 눈썹을 찌푸리고 말을 하지 않았다."응?" 소희는 아직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럴 리가요!" 구택은 처음으로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우리 먼저 며칠 동안 요리해봐요. 정 안 되면 아주머니 부르고요!""그래요!" 이번에 소희는 흔쾌히 승낙했다.시내로 돌아오자 구택은 먼저 차를 몰고 마트에 갔다가 소희가 의혹해하는 것을 보고 설명했다. "밥하는 거 배운 다면서요? 그럼 지금 식재료 사러 가서 오후에 배우면 되잖아요.”소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회사에 안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내가 간호까지 해줬어요. 감사 인사는 필요 없고요.”구은정은 잠시 말이 막혔다. 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은정의 큰 키와 묵직한 분위기만으로도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졌다.이에 유진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씩 물러섰다.“유진아, 대체 언제까지 나 피할 거야?”은정이 묻자, 유진은 당황해서 반문했다.“내가 뭘요?”“너 어젯밤 내가 아픈 틈을 타서, 키스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맘껏 했잖아. 다 잊은 거야?”유진은 말문이 막혔다. 은정은 다시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날 좋아하면서 왜 인정 안 해?”유진은 등을 문에 기대고 은정을 올려다보았고, 눈빛에는 불쾌한 기색이 스며 있었다.“그렇게 나오실 줄 알았으면, 어젯밤 동정 따윈 하지 말 걸 그랬네요.”“동정?”은정은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럼 뭐겠어요, 삼촌?”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은정의 가슴을 밀치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걸어 나갔다. 복도에는 유진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만 가볍게 울렸다.“아플 땐 약 꼭 챙겨 드세요. 헛소리는 고열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요.”엘리베이터에 탄 유진은 곧장 떠났고, 은정은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마를 찌푸리며, 눈매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오전 10시.강성의 어느 프라이빗 클럽.서선영은 넓은 챙이 달린 프렌치 스타일 모자를 쓰고, 스카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서선영은 한 룸의 문을 열고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을 확인하자, 모자를 벗으며 차가운 표정을 드러냈다.“요즘 회사 안에 당신을 지켜보는 눈 많아. 그런데 이 타이밍에 날 만나면 어쩌자는 거지?”최이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며칠간 이어진 불안과 압박 속에서 예전의 자신감은 사라졌고, 초췌한 인상만 남아 있었다.“내 문제 어떻게 해결할 건데?”서선영은 침착하게 말했다.“변호사 제일 좋은 사람으로 붙여줬잖아.”최이석은 비웃었다.“증거가 빼박인데? 최선이란 게 결국 내가 돈 다
“안 가요, 이불 가지러 가는 거예요.”유진은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달래듯 한 말투였다. 그제야 은정은 그녀를 놓아주었다.유진은 방 안에 있던 에어컨을 끄고, 은정의 침실로 향해 이불을 가지러 갔다. 유진은 처음으로 은정의 침실에 들어섰다.외부와 같은 인테리어 분위기, 차분하고 단정하지만 지나치게 냉정한 느낌이었다. 그 방처럼, 그 역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따뜻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유진은 이불을 안고 잠시 방 안을 둘러본 뒤 거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이불을 은정에게 덮어주고, 소파 앞에 쭈그려 앉아 한참을 바라보다가, 스탠드 조명을 끄고 조용히 돌아서려 했다.그 순간, 은정의 낮고 흐릿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유진아, 안 간다고 했잖아.”유진은 뒤돌아봤다. 어두운 거실 속에서 은정의 눈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그 눈빛엔 서운함과 외로움이 함께 담겨 있는 듯했다. 몇 초간 정적이 흐른 뒤, 유진은 조용히 돌아와 은정에게 말했다.“조금만 안쪽으로 가요.”은정은 곧바로 소파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유진이 옆에 눕자마자, 은정은 유진을 품에 끌어안았고, 이내 그의 뜨거운 입맞춤이 쏟아지는 듯했다.유진은 눈을 감고, 몇 초 뒤엔 어색하지만 조심스레 반응을 보였다. 그 작은 반응 하나에도 은정은 순간 멈칫했다가, 곧 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더 뜨겁고 격렬하게 키스했다. 제어 불가능한 감정이 담긴 입맞춤이었다.유진은 마치 물속에 잠긴 듯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하려 하자, 은정의 손이 유진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어둠 속, 낮고 거칠게 갈라진 은정의 목소리가 귀에 와닿았다.“우리 침실로 갈까?”유진은 얼굴이 새빨개져 그의 품에 파묻혔다.“적당히 해요.”은정은 알았다. 지금 조금만 더 약하게 굴면, 유진은 진짜 넘어올 수도 있다는걸. 하지만 동시에 은정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침대까지 가면, 진짜 더는 참지 못할 거
유진은 은정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데 놀라 잠시 멍해졌다.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잘못한 거 알면 고치면 되죠. 전 일단, 예전 일은 용서할게요.”유진은 해열제를 찾아내고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할머니가 미리 약들을 챙겨두셨거든요.”노정순이 각 약의 효능과 복용량을 따로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놓았고, 유진은 방금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 정도면 문제없을 것이었다.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 따뜻한 물을 받아왔고, 해열제를 구은정에게 건네며 말했다.“아까 의사 선생님한테 전화했어요. 감기몸살일 가능성이 크대요. 우선 이거 먹어요. 열이 안 내리면 병원 갈 거예요.”은정은 눈앞에 놓인 약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체온 안 재봐도 돼?”“체온? 만져보면 알죠!”유진은 다시 은정의 이마를 만지고, 곧바로 자기 이마와 비교해 봤다, 그러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안 재도 돼요. 확실히 열나요.”하지만 은정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약 안 먹어도 돼. 뜨거운 물 좀 마시면 곧 나을 거야.”“안 돼요. 꼭 먹어야 해요.”유진은 단호하게 약을 내밀었으나, 은정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혹시 약 먹는 거 무서워요?”은정은 유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약을 받아 입에 털어 넣더니, 물을 크게 한 모금 마시고 꿀꺽 삼켰다.그 급한 모습이 너무 긴장돼 보여서, 유진은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진짜 약 먹는 거 무서운 거였네.’아프기도 하니까, 그냥 웃지 않기로 했다.유진은 다시 몸을 돌려 거실 테이블 위의 약상자를 정리하려고 했다. 약을 넣으려다 상자 뒷면에 적힌 문구가 눈에 띄었다.유진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관장약? 관장이 무슨 뜻이에요?”은정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더니, 갑자기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목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려 했다.유진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배를 쥐고 웃기 시작했다. 소파에
유진은 몇 걸음 더 다가가 남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술 마신 거예요?”은정은 눈을 천천히 떴다.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유진아.”유진은 얼굴을 굳히며 반쯤 무릎을 꿇고 앉았다.“대체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요?”은정의 짙고 어두운 눈동자가 곧장 유진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유진의 마음이 한없이 흔들렸다.유진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여전히 거칠고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너 볼 수 있다면, 죽어도 괜찮아.”그 말에 유진의 눈가에 눈물이 갑자기 맺혔으나, 눈이 붉게 물든 채로 말했다.“그럼 안심해요. 죽어도 나는 쳐다도 안 볼 거니까요.”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돌아서려 했지만 유진의 손목이 갑자기 꽉 붙잡혔다. 힘이 세서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었다.유진은 차갑게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놓으세요.”그러자 은정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나 열 나는 거 같지 않아? 만져봐.”유진은 순간 당황했다. 은정은 머리를 쿠션에 기댄 채, 유진의 손을 잡아 자기 이마 위에 올렸다.뜨겁게 달아오른 열기에 유진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손바닥 전체를 이마에 붙이며 다시 확인했다. 정말 점점 더 뜨거웠다.“아픈 거예요?”유진이 놀란 목소리로 묻자, 은정은 유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런 것 같아.”“어디가 더 아파요?”유진이 걱정스레 물었다.“머리가 아파. 그리고...”은정은 유진의 손을 내려 가슴팍 위에 얹었다.“여기도 많이 아파.”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과 거친 심장 박동. 쿵, 쿵, 쿵, 그 격한 두근거림이 고스란히 유진의 손바닥에 전해졌다.유진은 놀라 손을 황급히 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구은정.”은정은 깊게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내 이름 그렇게 불러주는 거, 제일 좋아.”속으로는 바랐다. 언젠가 유진이 다시 자신을 사장님이라 부르는 날이 오기를.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일어서서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