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웃으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강재석은 옆에 있는 강시언이 따라오자 멈춰 서서 말했다. “너는 왜 나를 따라오니, 손님을 챙겨야지!”강재석의 말에 시언은 무의식적으로 강아심을 바라보았고 아심은 고개를 들어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소희는 원래 아심과 함께 걷고 있었지만, 두어 걸음 앞으로 나가 임구택을 찾아갔다. “자기야, 나 뒷마당에서 감말랭이 좀 가져올 건데 같이 갈래?”“좋아!” 구택은 소희와 함께 청석길을 따라 뒷마당으로 향했고 시언은 한발 늦게 걸음을 옮겨 아심과 나란히 걸었다.며칠 전 운성에 내린 눈은 아직 녹지 않아 붉게 핀 매화 위에 얇게 덮여 있었다. 매화 향기가 더욱 맑고 달콤하게 퍼졌다. 바람이 불어오자 눈이 흩날리고 매화 꽃잎이 바람에 날렸다. 시언은 아심을 위해 살짝 몸을 돌려 바람을 막아주었는데 시언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 빛났다.“어떻게 운성에 오게 된 거야?”시언이 나지막하게 묻자 아심은 처음에는 자신이 오기 전에 몰랐다는 것을 설명하려 했으나, 입술을 살짝 비틀며 약간의 매력을 더한 웃음으로 말했다. “환영하지 않는 건가요?”“아니.” 시언은 아심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만 좀 놀랐어.”“저도 놀랐어요. 다시 뵙게 볼 줄은 몰랐거든요.”“휴가 중인가?”아심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일이 거의 끝나서 특별히 할 일이 없어요.”이에 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운성에서 며칠 더 머물러도 되겠네.”그러자 아심은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좋아요. 원래 설을 맞아 여행을 갈 계획이었는데 운성을 첫 번째 목적지로 할게요.”“두 번째 목적지는 어디야?” 아심은 잠시 멈칫하며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아심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시언의 앞에서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해도 금방 들킬 것이었다....황선국 셰프는 연희의 취향을 잘 알고 있어서 연희가 좋아하는 요리들을 빠짐없이 준비했다. 그러자 연희는 강재석에게 웃으며 말했다. “
강시언은 아심이 잔을 비우는 모습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곤란하게 하지 않으실 텐데, 왜 그렇게 서두르죠?”아심은 술잔을 들고 시언을 바라보았다. 아심의 입술에는 술 자국이 남아있었고, 얼굴은 살짝 붉어져 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 그러자 강재석은 약간 꾸짖으며 말했다. “나한테 술을 권하는데 말이 많네. 이 잔은 네가 대신 마셔라!”시언은 아심을 슬쩍 바라보며 말하지 않고 잔을 들어 한 번에 비우자 연희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시언 오빠가 아심에게 술을 천천히 마시라고 말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술을 더 많이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한 번에 다 마셔야 한다니.”모두가 웃으며 분위기는 한결 편안해졌다. 식사 중 강재석은 아심을 특별히 챙기지 않아서 아심은 더욱 편하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도 이들 속에 녹아들어 특별한 대우를 받는 외부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매실주는 진한 맛이 있어 아심은 연달아 두 잔을 마셨고, 시언은 아심의 잔을 조용히 과일차로 바꿨다. 아심은 술을 마셔서 손끝부터 발끝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소희는 강아심에게 물었다. “운성에 처음 와?”아심은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전에 한 번 왔었는데, 출장이라서 급히 왔다 갔다 했어.”“급하게 돌아가지 않으면 여기서 며칠 쉬어도 돼. 마침 나도 일이 없으니까, 운성의 경치를 보여줄게.” 소희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하자 강재석도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왔으니 여기 머물러요. 집에는 방이 많으니까.”아심은 거절할 수 없어 동의했다. “좋아요!”연희는 너무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어서 놀라운 나머지, 탁자 밑에서 소희의 손을 살짝 쥐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곧 연희는 웃으며 말했다. “아심아, 여기서 설 보내자. 설이 지나면 나도 올게. 우리 모두 함께 즐겁게 보내자.”아심이 대답하려는데, 시언과 강재석이 벌써 결정을 내렸다.“그렇게 정해졌어. 연희도 말한 대로 연희는 설 지나
“그래, 돌아가렴. 길 조심하고, 강성에 도착하면 잊지 말고 알려줘.” 강재석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연희는 밝게 웃으며, 떠나기 전 소희와 잠시 껴안고 차에 올라 떠났다. 연희가 떠나고 나서야 강아심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가 이번에 운성에 온 것은 아심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또한 아심은 무심코 설을 강씨 집안에서 보내기로 동의했다. 자신이 외부인인데 왜 강씨 집안에서 설을 보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강시언은 아심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돌아서서 말했다. “무슨 생각 해요? 돌아가죠.”“아, 네!” 아심은 당황하며 고개를 들자 강재석이 아심을 불렀다. “아가씨, 이리 와요!”이에 아심은 곧바로 걸어갔다. “할아버지!”“소희는 나와 임구택을 챙겨야 하고, 어쩌면 제대로 신경 써주지 못할 수도 있어요.”“그러니까 이 집에 있는 동안은 강시언이 챙길 테니까 무슨 일이든 시언에게 말해요.”시언이 눈썹을 살짝 올리자 강재석은 즉시 말했다. “무슨 표정이야?”시언은 아심을 한 번 보고, 침착하게 말했다. “찬성하는 표정이죠.”강재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그러고는 아심에게 물었다. “괜찮겠어요?”“물론이죠. 다만 시언 씨에게 폐를 끼치게 되네요.”시언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폐가 아니에요.”소희는 구택의 옆에 섰는데 둘이 눈을 마주치자 소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좋은 징조야!”구택은 웃으며 그저 소희의 손을 잡았다....강재석은 술을 마시고 낮잠을 자러 갔고, 회사 사람들이 찾아와 시언은 서재로 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희는 아심을 뒷마당으로 데려가 아심이 머물 방을 정리해 주었는데 바로 시언의 옆방이었다.이런 배치에 대해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한 사람은 묻지 않았고, 한 사람은 설명하지 않았다. 소희는 아심에게 집안 환경을 소개해 주며 말했다. “나와 오빠는 집에 잘 없어.”“집에는 할아버지와 항상 곁을 지키는 오석 집사님, 요리하는
소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뜨렸고 하양이는 날개를 퍼덕이며 말했다. “누구야? 어서 할아버지한테 가!”소희는 하양이의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분은 강아심이니까 이름 기억해.”하양이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작고 둥근 눈으로 아심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날개를 퍼덕이며 외쳤다. “강아심! 강아심!”소희는 하양이를 다시 톡톡 치며 말했다. “기억하면 됐어. 괜히 떠들지 마!”그러고는 아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아이는 말이 많아서, 익숙해지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게 될 거야.”아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정말 귀엽네! 불에 구워서 고춧가루 좀 뿌리면 맛있겠어.”하양이는 새 눈을 크게 뜨며 아심을 바라보다가 몸이 굳어지고, 갑자기 난간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소희와 아심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저녁 식사는 성연희가 없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편안하고 즐거웠다. 식사가 끝나고, 강재석은 아심에게 일찍 쉬라고 했다. 낯선 곳에 익숙해지면 잠을 잘못 잘 수 있기 때문이었다.방은 따뜻했고 아심은 샤워하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누워 있었을 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무 창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발소리는 옆방에서 멈추고, 문이 살짝 열리고, 다시 밖은 조용해졌다.하루를 돌아보며 아심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아침에 출발할 때는 고객과의 일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밤에는 강씨 집안에서 강시언의 옆방에 자게 되었다.도시의 소음과 달리 여기는 아주 조용했다. 불을 끄면 회랑의 불빛이 나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새겨진 꽃과 새의 그림자를 바닥에 희미하게 비추었다. 그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아심을 안락하게 만들었지만, 침대에 누웠을 때 잠을 이루지 못했다.시간을 보니 이미 밤 10시를 넘었다. 잠이 오지 않아, 아심은 머리를 묶고 발판에 놓인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 회랑에는 이미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붉은 등불 아래, 시언은 고개
문을 닫은 후, 강심은 등을 문에 기대고 서 있었다. 밖에서 시언이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미소를 지으며 침대로 향했다. 방 안에는 향이 피어 있어, 은은한 향기가 잠을 부르며 아심은 몇 번 뒤척이다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옆방의 불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꺼졌다.다음 날 아침강재석은 아침 산책을 하며 시언이 밖에서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서인은 걸음을 재게 하며 다가왔는데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머리카락은 아침 이슬에 젖어 있었다. 이에 강재석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일찍 달리기하다니. 잠을 잘 자지 못한 거야, 아니면 밤새 못 잔 거야?”시언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할아버지의 안신향 덕분에 잘 잤죠!”강재석은 두 번 웃고 말했다. “그럼, 가서 아심이 일어났는지 봐라. 아직 자고 있으면 좀 더 자게 두고, 일어났으면 같이 아침 먹자.”“네.” 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뒷마당으로 향했다. 아심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아심은 여유로운 옅은 브라운 색의 니트 가디건을 입고,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있었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귀 옆으로 흘러내리자 깨끗하고 따뜻해 보였다.“안녕하세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아심은 웃으며 인사했다. “운동하러 가셨나요?”“응, 할아버지가 아침 먹자고 하셨어. 나 씻고 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줘.”“네, 좋아요!” 아심이 미소 짓자 시언은 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아심은 회랑에 잠시 서 있었다. 아침의 정원은 밤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붉은 나무 회랑 아래에 몇 그루의 소나무가 푸르게 우거져 있었고, 몇 마리의 새들이 소나무 열매를 쪼며 지저귀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정원에 생기를 불어넣었다.아심은 옆을 바라보았는데 시언의 방은 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고 살짝 열려 있었다. 시언은 아심에게 기다리라고만 했지,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그러면 방
아심은 얼굴이 뜨거워지며, 즉시 시선을 피하고 책을 진지하게 읽는 척했다. 심장이 마구 뛰었고, 시언을 몰래 엿본 것 때문인지, 허락 없이 방에 들어온 것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아심은 눈을 책에 고정하고, 시언이 자신의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시언은 아심의 앞까지 다가와서, 탄탄한 팔로 조각된 나무 의자를 지탱하며, 빛을 등지고 내려다보았다. “어디까지 읽었어?”시언의 눈빛은 어두워서 사람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같았고, 넓은 어깨는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사람을 설레게 하는 호르몬을 내뿜었다. 아심은 시언에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어 그저 시언을 바라보며 눈썹을 가늘게 치켜올리고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결국 서인이 먼저 몸을 숙여 아심의 입술을 맞췄다. 그 후에는 마치 불꽃이 터지듯이 급속도로 열기가 올라가며, 하늘로 솟아오르고 눈부신 불꽃을 피웠다. 아심은 눈을 감고, 팔을 들어 시언의 목을 감싸며 몰입했다.시언은 아심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그대로 들어 올린 후 몸을 돌려 자기 다리 위에 앉혔다. 손바닥으로 아심의 뒷머리를 감싸 안고,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랫동안 긴장된 현이 마침내 연주자를 만나 연주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이미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 같았다.아심은 허리를 살짝 움직이며, 눈을 반쯤 감고, 살짝 웃으며 시언을 바라보았다. 시언의 눈빛은 어둡고 깊었으며, 아심을 안고 있는 팔은 긴장되어 있었다. “보고 싶었어?”“그럼요, 매일 밤 보고 싶었어요!” 아심은 속삭이며, 시언의 턱에서 아래로 입맞춤했다. 한참 후, 시언은 아심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자신도 모르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내려가서, 샤워하고 아침 먹으러 가자.”아심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시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요?”아심의 질문에 시언은 아심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아직 고민이 있는 걸 아니까 조금 더 기다리자는 거야.”어젯밤 아심이 오지 않았을 때, 시언은 아심이 자기 집에서 마음에 부담을 느끼
“이름 익히 들었어요!” 여자는 강아심을 놀라움과 함께 바라보며 칭찬했다. “정말 아름다우시네요!”“감사합니다!”아심이 예의상으로 인사치레하자 여자의 표정은 더욱 온화해졌다. “저는 설우연이라고 해요. 우리 집에서는 연말에 고급 개인 클럽을 오픈해요.”“오빠분이랑 설 연휴 동안 시간이 나시면 꼭 놀러 오세요. 여기 평생 무료 골드카드가 있으니 받아 주세요!”우연은 가방에서 정교하게 만든 골드카드를 꺼내어 두 손으로 아심에게 건네자 아심은 이때야 우연이 사람을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연이 찾고 있는 사람은 소희이거나, 실제로는 강시언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아심은 우연이 건넨 골드카드를 보았는데 골드카드에는 오크 클럽이라고 쓰여 있었다.아심은 카드를 받지 않고, 우연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우연은 프라다의 분홍색 스카프와 구찌 가방, 지엠의 사파이어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명품으로, 기품이 자연스럽게 풍겼다. 아심은 살짝 눈썹을 올리며 생각했는데 외모는 보통이었다. 이에 아심은 부드럽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와 오빠는 그걸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집에서 오빠와 함께 있을 거라 심심하지 않을 거예요.”우연은 더욱 달콤한 미소로 말했다. “그렇겠네요. 오빠분이랑 정말 사이가 좋아 보여요. 정말 부러워요!”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오빠분은 여자친구가 있나요?”“물론이죠!” 아심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있는데 여자친구가 없을 리가 없죠.”그러자 우연은 놀란 눈으로 아심을 바라보았다. “서인 씨가 사업에만 전념하고 연애는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소문일 뿐인데 그걸 어떻게 완전하게 믿어요?” 아심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오빠가 잘 숨겼죠. 다른 사람들이 방해하는 걸 원하지 않거든요.”“그렇군요.” 우연은 실망하며 물었다. “그러면 오빠분의 여자친구는 정말 예쁘겠네요?”“맞아요. 보는 사람마다 칭찬할 만큼 예쁘죠.” 아심은 고개를
우연은 시언이 자신과 대화하고 있다는 것에 들뜬 마음으로 말했다. “동생분이 정말 귀여워요.”“제가 오빠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물었더니, 웃으면서 ‘나이가 있는데 여자친구가 없을 리가 없죠.’이러더라고요. 정말 농담을 잘해요!”나이 얘기에 시언의 미소는 약간 희미해졌다. ‘나이가 있다고?’“농담을 좋아해요!” 시언은 강아심을 한번 제대로 교육을 시켜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웃으면서 얘기 말했다.“설우연 씨, 아버지를 찾아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우연은 실망했지만, 시언이 이미 돌아서려 하자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구실을 찾지 못했다. 우연은 굉장히 아쉬웠다. ‘이렇게 훌륭한 남자의 여자친구는 어떤 사람일까?’...소희는 여전히 도경수와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도경수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너희 할아버지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더라. 너무 기쁜 나머지 정신이 혼미한 것 같아.]유쾌한 장난에 소희는 웃으며 말했다. “손님이 와서 할아버지가 회의를 하고 계세요. 끝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중요한 일은 아니야. 그냥 자랑하는 거 듣고 싶었을 뿐이지.] 도경수가 웃자 옆에 있던 양재아가 소희에게 인사했다.“우리는 설이 끝나고 돌아갈 예정이에요. 만약 지루하다면 강솔을 보내드릴게요.”그러자 재아가 말했다. [강솔 언니는 이미 경성으로 돌아갔어요. 몰랐어요?]재아의 말에 소희는 다소 놀랐는데 강솔은 정말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이어 도경수가 덧붙였다. [강솔이 떠난 날 마음이 무거워 보였고 이튿날에 진석도 돌아갔어. 무슨 일 있었어?]소희는 강솔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강솔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다음 날 진석에게 물어보자 진석은 그저 강솔과 주예형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후 장명원의 결혼식이 있었고, 결혼식이 끝난 다음 날 소희는 다시 운성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강솔이 설까지 집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돌아갔다.‘아직도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유진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구은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생각했다.‘그분이 여자친구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방연하한테 연락처를 물어봐 준다고 한 건 너무 성급했던 거 아닌가?’유진은 여진구를 돌아보며 물었다.“선배, 구은정 삼촌이랑 친해요?”그러자 진구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잘 몰라. 왜 갑자기?”유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방연하가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하더라고요. 혹시 여자친구 있는지 알아요?”진구는 마음속으로 안도하며 자연스럽게 웃었다.“한 번 보고 마음에 든 거야?”유진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연하는 잘생긴 남자만 보면 좋아해서, 하나도 이상할 거 없어요.”진구는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네가 그 사람 연락처를 알게 된다면, 방연하한테 줄 거야?”“당연하죠. 그런데 나도 몰라요.”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만약 다시 마주치게 되면, 그때 한 번 물어볼 수도 있죠.”진구는 화제를 바꾸며 말했다.“곧 생일이지? 원하는 선물 있으면 미리 말해. 사실 하나 준비해 두긴 했지만.”유진의 눈동자가 살짝 빛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선물은 필요 없어요. 생일날 내가 걸어서 다닐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그 말에 진구는 호탕하게 웃었다.“그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의사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걸로 말해 봐.”유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요.”유진은 짐짓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누가 생일 선물을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놀랄 일도 없잖아요!”이에 진구가 웃으며 말했다.“괜히 쓸데없는 걸 주는 것보다, 네가 진짜 원하는 걸 주는 게 낫잖아.”유진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그럼 난 안 어렵게 할게요. 내가 회사 출근하면, 휴가 좀 더 주는 걸로 해요.”이에 진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휴가 쿠폰 만들어 줄게. 네가 원할 때마다 쓸 수
방연하는 임유진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우산을 씌우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제가 들게요!”서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산을 넘겨주고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그때, 한 차량이 서점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여진구는 우산을 들고 서 있다가 서인의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곧장 긴장한 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유진에게 다가갔다.“유진아!”유진은 진구를 보자 놀란 듯 기쁜 표정을 지었다.“어? 선배 왜 왔어요?”유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본 서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다물었다. 진구는 서인을 경계하듯 바라보며, 한 손으로 우산을 높이 들어 유진의 머리 위를 가려주었다.그리고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비가 올 것 같아서 걱정됐어. 운전기사가 제때 도착하지 못할까 봐 직접 데리러 왔어.”진구는 오는 길에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했지만, 차가 막혀 도착이 늦어지고 있었다.유진은 고개를 들어 진구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선배는 정말 빈틈이 없네요!”“이제 집에 가자.”진구는 외투를 벗어 유진의 어깨에 걸쳐 주었고, 유진은 연하를 돌아보았다.“집까지 태워 줄게.”“괜찮아!”연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곧 효성이 차 가지고 올 거야. 우리 둘이 같은 방향이니까, 넌 먼저 가. 도착하면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 남길게.”“알겠어. 효성이랑 나 대신 인사해 줘. 나 먼저 갈게!”유진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진구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다른 손으로 휠체어를 밀며 그녀를 자신의 차로 데려갔다. 그는 일부러 공간이 넉넉한 SUV를 타고 왔다.조심스럽게 유진을 들어 올려 차에 태운 뒤, 문을 닫았다. 그제야 유진은 무언가 떠올랐다.유진은 고개를 돌려 서인을 바라보았고, 서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 너머로 그의 표정이 희미하게 보였고, 어깨 한쪽이 젖어 있었다.유진에게 우산을 씌워 주느라 비를 맞은 것이었다. 그러나 유진이 서인을 바라본 것은 한순간이었다.진구는
유진은 병원에 있을 때 서인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깊게 파인 눈두덩과 덥수룩한 수염,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로 피폐한 기운이 가득했다.그러나 지금, 눈앞의 남자는 크림색 캐주얼 정장을 입고 깔끔하게 면도를 한 상태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단단한 인상은 그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해요!”서인은 책을 내려서 유진에게 건네며 반쯤 무릎을 굽혀 마주 앉았고, 깊고 어두운 눈빛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다리는 좀 어때?”유진은 공손하게 미소 지었다.“많이 좋아졌어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앞으로 반 달 정도면 걸을 수 있을 거래요.”서인은 유진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이 가장 조심해야 할 시기야. 뼈가 아직 약하니까, 부상 조심해야 해.”“감사해요!”유진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삼촌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삼촌?’유진이 마침내 자신을 삼촌이라고 불렀으나 서인의 가슴 한편이 묘하게 저려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나도 책을 사러 왔어.”“정말 우연이네요!”희미하게 붉어진 노을이 책장 사이로 스며들어 유진의 옆얼굴을 감쌌다.살며시 흔들리는 눈동자는 맑고 생기 있었으며, 슬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담담함과 거리감만 남아 있었다.유진은 반쯤 무릎을 굽혀 자신과 시선을 맞추는 서인을 보며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아이를 대하듯 부드러운 목소리와 친절한 태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유진은 책을 받아들며 말했다.“제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잘 가.”유진은 가볍게 웃었다.“안녕히 계세요, 삼촌!”유진은 휠체어를 조종해 몸을 돌렸고, 다시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가볍게 스쳐 지나간, 특별할 것 없는 우연한 만남처럼.서인은 천천히 일어섰다. 유진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서인의 눈빛은 점점 더 깊고 어두워졌다. 마치 구름에 삼켜진 석양처럼,
우정숙이 집에 없었기 때문에, 노정순은 도우미를 붙여 임유진을 돌보게 하려 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은 탐탁지 않아 했다.“할머니, 저를 돌봐 줄 친구들도 있어요. 굳이 도우미까지 따라오면, 친구들이랑 편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워요.”노정순은 손녀를 아끼는 마음에 그녀가 기분 나빠할까 걱정되었지만, 결국 장효성에게 유진을 잘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했다.효성과 친구들은 긴장한 듯 조심스럽게 대답했고, 집을 나서자마자 효성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아까 너희 할머니가 나한테 말씀하실 때, 너무 긴장해서 혀가 꼬일 뻔했어.”그러자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할머니 엄청 온화하신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효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우, 넌 몰라. 그 분위기라는 게 있어. 아무 말 안 해도, 그냥 위엄이 철철 넘치는 그 느낌 말이야!”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는데, 여진구가 차에서 내렸다. 그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유진아, 어디 가는 거야?”그러자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친구들이랑 좀 돌아다니려고요.”효성이 슬쩍 친구에게 눈짓을 보내자, 진구는 곧바로 말했다.“나도 같이 가도 돼?”유진이 눈썹을 찌푸렸다.“친구들이랑 모임인데, 선배가 왜 따라와요?”진구는 그녀의 다리를 걱정하며 물었다.“다리는 괜찮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걸어 다니는 것도 아닌데요, 뭐.”이에 진구는 할 수 없이 물러났다.“몇 시에 돌아올 거야? 데리러 갈게.”“그걸 지금 내가 어떻게 알아요?”“그러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전화해.”“알았어요!”임씨 저택에서는 휠체어를 올릴 수 있도록 특별히 개조한 차량이 준비되어 있었다.진구는 직접 휠체어를 밀어 그녀를 차에 태운 후, 차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서 효성이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사람 네 남자친구야? 완전히 잘생긴 데다가 다정하기까지 하네!”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냥 친구야.
구은정이 갑작스럽게 회사로 돌아오자, 그룹 내에서는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안해하는 이들은 바로 외척인 서씨 집안이었다.한편, 구은서는 서선영을 원망하며 말했다.“엄마가 굳이 진수아를 구은정에게 소개해 줄 필요가 없었어요. 그게 결국 회사로 돌아오게 만든 거잖아요.”하지만 서선영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태도로 담담하게 말했다.“구은정은 어차피 언젠가는 돌아올 사람이야. 진수아가 아니었어도, 결국 돌아왔겠지.”은서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외삼촌께서 아직 완전히 회사를 장악한 것도 아니잖아요.”서선영은 거울을 보며 얼굴에 파우더를 두드리면서 비웃듯 말했다.“너희 아버지를 몰라? 왜 그렇게 외삼촌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생각해? 그건 결국 구은정을 돌아오게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구은태는 모든 걸 철저히 계산하고 있어. 너희 외삼촌들에게 맡긴 일들은 죄다 돈이 되는 자리야. 설령 실수하더라도 쉽게 넘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줬지.”“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대단한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룹의 핵심 의사결정에는 단 한 번도 관여하지 못했어.”“구은태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구은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거야. 심지어 구은정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지도 않을 거야.”“나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구은정만 돌아오면, 구은태도 경계를 늦출 테니까.”서선영의 눈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구은태가 철저한 전략가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구은태가 살아 있는 한, 서씨 집안은 그저 작은 이득을 취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구씨 그룹의 핵심 권한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은정은 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반항적이었고, 타고난 기질이 자유분방했다. 오랫동안 밖에서 떠돌며 방탕하게 살아왔고, 배운 것도 없으며, 늘 무기력하고 한심한 태도를 보였다.은정이 회사를 맡는다는 것은, 곧 회사를 한심한 인물의 손에 맡기는 것이나 다
유진은 서인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서도 참회할 수 없었고, 자기 잘못을 만회할 수도 없었다.소희는 서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함께 저려왔다.“유진이를 좋아한다면, 다시 찾아가서 붙잡아.”서인은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다시 여기로 오지 않을 거야.”소희는 단호하게 말했다.“여기로 오지 않는다면, 네가 직접 찾아가. 구은정의 신분으로 다시 그녀를 만나봐! 너희는 혈연관계도 아니잖아.”“족보 따위 신경 쓸 필요 없어. 네가 그녀를 좋아한다면, 도덕적인 문제도 없고, 다른 건 전부 중요하지 않아.”서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나보고 구은정으로 돌아가라는 거야?”소희의 시선이 깊어졌다.“그래. 정말로 구씨 가문을 서씨 집안 사람들에게 넘길 생각이야? 네 어머니가 생전에 쏟아부은 정성과 노력이 원수에게 돌아가도 괜찮아?”“네가 말했잖아. 임유진은 샤부샤부 가게의 사장이 될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구씨 집안의 안주인으로 만들어. 네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거야!”“유진이는 이미 충분히 노력했어. 이제 네가 노력할 차례야!”“내가 아는 서인은 혹독한 훈련 끝에 무적의 저격수가 된 사람이야.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할 정도였잖아.”“네가 가졌던 영광은 절망과 패배감 속에서 얻은 게 아니었어! 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잃어버린 것들은 전부 되찾을 수 있어!”서인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나한테도 기회가 있을까?”그는 구씨 가문의 운명이 누구 손에 들어가든 상관없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유진뿐이었다.“당연하지!”소희는 따뜻하면서도 힘이 실린 미소를 지었다.“서인은 유진을 잃었지만, 구은정은 그렇지 않아. 다시 사랑하게 만들어. 네가 유진에게 빚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돌려줄 기회를 가져!”“임구택이 예전에 이런 말을 했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픔도 기쁨도 상대방이 전부라고. 네가 유진이에게 주는 행복이야말로 유진이 진정으로 원하는 거야!”“유진이
불과 일주일 만에 다시 본 서인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분위기는 한층 더 어두워졌고, 그 무엇도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듯한 무기력함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소희는 가슴 한쪽이 시큰해져,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조용히 옮겼다.서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차갑고 고독했던 눈빛은 이제 빛을 잃어버린 채, 텅 비어 있었다.이윽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왜 왔어?”소희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너 보러 왔어.”서인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소희에게 차를 따라주었다.“내가 뭐 볼 게 있다고. 여전한데.”소희는 서인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진짜 네가 여전하다고 생각해?”서인은 찻잔을 들던 손을 멈췄다. 손가락이 살짝 떨리더니, 컵에 떨어지는 차가 잔 속에서 잔물결을 일으켰다. 그 투명한 소리는 고요한 오후에 묘하게 날카롭게 들려왔다.서인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얼굴이 더욱 피곤하고 초췌해 보였다.이윽고 서인은 조용히 물었다.“최근에 유진이를 봤어?”유진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서인의 눈빛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희미한 빛은 마치 어두운 심연 속으로 가라앉듯, 다시 사라져 버렸다.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회복하고 있어. 오른손도 가벼운 물건은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고, 정신 상태도 아주 괜찮아.”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잘됐네.”서인의 목소리는 더욱 가벼워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나를, 기억해 냈어?”소희는 잠시 머뭇거리다,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서인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입가를 살짝 비틀며, 마치 스스로를 조롱하듯이 중얼거렸다.“기억 못 해도 괜찮아.”소희는 깊은숨을 내쉬었다.“이게 원했던 거 아니야? 근데 왜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리는 거야?”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손을 뻗어 담배를 찾았지만, 막상 담배를 손에 쥐고 나서야, 담배를 끊은 지 오래됐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그대로 담배
서인은 돌아왔지만,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지 않았다. 혼자 후원에 머물러 있었고, 도대체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임유진이 사고를 당한 이후, 서인은 점점 더 후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오현빈은 서인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을 걸려 했지만, 문득 이 순간만큼은 그가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머뭇거리던 현빈은, 결국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서인은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 구은태는 의식을 되찾았고, 그는 직접 서인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돌아와 회사를 맡으라고 말했다.병을 앓은 뒤라 기력이 쇠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절실하고 진심 어린 듯 들렸다.[은정아, 돌아와라. 예전의 일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네가 아무리 아빠를 미워해도, 네가 구씨 집안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이제 나는 더 이상 그룹을 이끌 힘이 없어. 그러니 네가 이 책임을 맡아야 해!]서인은 미소인지 냉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씨 사람들이 좋다면서요? 그럼 그룹도 구은서에게 넘기면 되겠네요. 그럼 그쪽도 더 이상 싸울 필요 없겠죠?”구은태는 숨을 한 번 거칠게 들이쉬었다.[은정아, 정말 나를 그토록 미워해서, 우리 집안 사업까지 함께 외면하려는 거냐? 하지만 잊지 마. 회사에는 네 어머니의 노력과 땀도 스며 있어.]서인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이제서야 그게 기억났나 보죠?”구은태는 목소리를 낮추며, 한층 더 간절한 톤으로 말했다.[난 네 어머니에게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그래서 반드시 회사를 네 손에 넘겨야 해.]그러나 서인은 비웃듯, 차갑게 내뱉었다.“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어서 그러는 거겠죠?”이에 구은태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서인은 아무런 미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구은태가 자신에게 설득당하지 않자, 어디선가 알아낸 정보를 이용해 소희
마심호가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의사 말로는, 회장님께서 저녁에 술을 드셨다고 해요. 게다가 두 종류의 술을 함께 마셨고, 이번 심장 발작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요.”서선영은 즉시 말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술을 마시겠다고 하셨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회장님 성격상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어요.”“제가 말릴수록 더 화를 내시니까요.”구은서는 서선영의 팔을 붙잡으며 냉정하게 말했다.“엄마, 굳이 변명할 필요 없어요. 매일 아빠를 돌보며 고생하는 건 엄마잖아요. 엄마는 늘 집안을 위해 애쓰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 최소한의 효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빠를 걱정시키고 속상하게 만들죠.”“지금 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딴청 피우는 사람 아닌가요?”마심호는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아가씨, 그렇게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니에요. 도련님께서 집을 떠나 계셨던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죠.”은서는 그의 말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쏘아붙였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씀 속에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차라리 대놓고 말해보시죠. 오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게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제 어머니가 계모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오빠를 차별한 적 없어요. 오히려 저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이든 다 맞춰주려 하셨죠.”“그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계모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그렇게 애쓰고도, 결국 오해받아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은서의 날카로운 공격에 마심호는 더 이상 말다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너무 깊이 생각하신 것 같군요.”하지만 은서는 물러서지 않았다.“제가 생각이 많은 건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걸 제가 말한 건가요?”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