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건강을 회복한 강솔은 이미 작업실로 복귀하여 일하고 있었다.[진석!]강솔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까 스승님에게 전화했는데, 받지 않으시더라고.][아마도 강재석 할아버지와 함께 산책 중이신 것 같아. 그러니 내가 못 들어간다고 전해줘.]진석은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 “이렇게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가면 어디 가는데?”그러자 강솔은 기쁘게 말했다. [주예형이 오늘 일찍 퇴근할 수 있다고 해서, 같이 저녁 먹으러 갈 거야.]어둠이 깔리면서, 진석 또한 얼굴이 어두워졌고 진석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녁에 돌아오긴 할 거야?”[모르겠어. 영화표도 예매해 놔서, 저녁 먹고 나서 같이 영화 볼 거야. 너무 늦으면, 집에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어!]“응.”진석은 전화를 끊고, 어두운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갑자기 찬바람의 쓸쓸함을 느꼈다....강솔은 도씨 저택에 들어간 이후로 예형과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영상 통화로만 연락을 주고받았고, 오늘 예형이 드디어 시간을 내주었다. 그래서 강솔은 기쁜 마음으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영화표도 예매해 두고 데이트를 계획했다.저녁 7시에, 두 사람은 한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만났다.“왜 이렇게 비싼 곳을 예약했어?”예형의 질문에 강솔은 예형의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요즘 너무 고생했잖아. 제대로 영양보충 해주려고!”이에 예형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우리 둘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아!”“하지만 나는 너무 마음이 아프거든.”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한 후, 예형이 물었다. “전에 너에게 소희에게 전화하라고 했던 거, 했어?”강솔은 레몬 물을 마시고 나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아.”생각 밖의 말에 예형은 찡그리며 물었다. “왜?”“소희는 임씨 그룹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니까
식사 도중, 주예형의 전화가 울리자 고개를 숙여 확인하니 심서진이 보낸 메시지였다. 예형은 무의식적으로 강솔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야 의자에 기대어 메시지를 열었다.[사장님, 방금 작성한 계획서인데, 이 부분에 문제가 있나요?][이렇게 늦게까지 일해?][집에 가도 혼자 있을 바에야, 차라리 회사에 남아 선배를 위해 일하는 게 나아요!] 서진이 열심히 일하는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냈다.[나 지금 밖에서 저녁 먹고 있어서 돌아가서 볼게.][데이트 중인가요? 그럼 강솔 언니랑 시간 잘 보내세요! 맞다, 아침 회의 때 보니 코가 좀 불편해 보이던데, 오늘 날씨가 추워요. 그러니 따뜻하게 입으세요.]문자를 본 예형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이제 괜찮아졌어.][그러면 다행이에요. 더는 얘기하지 않을게요. 강솔 언니가 질투할 수도 있으니까요! 히히.][응. 돌아가서 계획서 본 뒤에 다시 연락할게. 집에 일찍 가.][알겠어요. 기다릴게요!]휴대폰을 계속 보고 있는 예형에 강솔은 고개를 들어 물었다. “누구야?”예형은 전화를 끄고 손가락을 움켜쥐며,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업무팀의 이혁이야. 팀을 이끌고 야근 중인데, 문제가 좀 생겨서...”곧이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영화는 같이 못 볼 것 같아.”갑작스러운 영화 캔슬에 강솔은 매우 실망하며 말했다. “이렇게 늦게까지 회사에 가야 해? 내일 해도 되지 않아?”“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내가 사장으로서 데이트를 즐기는 건 좀 아닌 것 같아.”“그럼 가. 영화는 다음에 보면 되니까, 회사 사람들이 너를 안 좋게 생각하지 않도록 해.”강솔은 빠르게 체념하며 말했다. “조금 이따가 몇 가지 음식을 포장해서, 야근하는 사람들에게 야식을 보내줄게.”예형은 강솔을 바라보며 갑자기 죄책감을 느껴 얼른 마음을 바꾸고 강솔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강솔이 예형이 말이 없는 것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사실 나도 오늘 피곤해. 식사 후 일찍 돌아가서 쉬
예형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들어와요!”심서진이 문을 밀고 들어오며 놀란 듯 말했다. “강솔 언니와 데이트하러 간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다시 돌아왔어요?”예형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갑자기 처리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돌아왔어. 넌 아직 퇴근 안 했어?”서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예형에게 뜨거운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 “좀 이따가 갈게요. 요즘 회사가 너무 바빠도, 사장님께서 강솔 언니와 시간을 보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강솔 언니가 불만을 가질 거예요!”예형은 눈을 내리깔며 씁쓸하게 말했다. “예전엔 강솔이 날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근데 지금에서야 그게 아니란 걸 알았지.”서진의 눈빛을 번뜩이며 예형의 옆에 앉고는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다투셨어요?”한밤중, 예형은 피곤했고, 마음속에 쌓인 말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서진은 자신의 고민을 들어줄 좋은 대상이었다.“강솔이 임씨 그룹의 사모님과 사이가 좋아서, 우리 제품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녀가 여러 번 거절했어. 마치 내가 잘못된 일을 한 것처럼.”예형은 자조적으로 고개를 젓자 서진은 놀란 듯 물었다. “왜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왜 강솔 언니가 거절했을까요?”예형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소희와의 관계가 영향을 받을까 봐 그런 것 같아.”서진의 눈빛이 어둡게 빛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솔 언니가 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임씨 그룹과 협력하면 우리 회사가 크게 도약할 수 있고, 사장님도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될 텐데요.”“사장님이 매일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면 가슴이 아파요.”예형은 짜증 났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강솔은 겉으로만 날 신경 쓰는 척하는 거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전혀 모르고 있어.”서진은 예형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사장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저는 항상 당신 편이에요. 제 능력이 한정되어 있지만, 회사에 모든
강솔은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이 불편해서 밖에 좀 앉아 있으려고 한 거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굴지 마, 어?”“무슨 일이야?” 진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주예형과 데이트하러 영화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기분이 안 좋아?”“영화 못 봤어. 회사에 일이 생겨서 다시 일하러 갔거든.” 강솔은 풀이 죽어 말하자 진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바쁘면 얼마나 바쁘길래, 네가 아파도 신경 쓰지 않고, 약속도 어기고, 한밤중에 다시 회사에 가야 해?”“대통령보다 바쁘다는 거야! 너 걔가 진짜로 일하고 있는지 확인해 본 적 있어?”강솔은 놀란 눈으로 진석을 쳐다보자 진석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 “그냥 좀 화가 나서 그래.”예형이 강솔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게 화가 나고, 강솔이 예형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게 화가 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것이었다.강솔은 진석의 옷자락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네가 날 위해 화를 내는 건 알지만, 난 예형을 믿어. 예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진석은 침묵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화가 나서 강솔의 손에서 옷을 빼앗고 싶었지만, 외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그러지 못했다. 진석은 애써 화를 억누르며 약간 비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서, 왜 혼자서 우울해하고 있어?”강솔은 툴툴거렸다. “사람이 좀 기분 나빠할 수도 있잖아?”진석은 강솔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예형이 강솔을 화나게 했지만, 정작 마음 아파하는 사람은 진석이였다. 진석은 전생에 분명 강솔에게 큰 빚을 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힘들 리가 없었다.“진석, 내일 나는 집으로 돌아갈 거야. 내 병은 다 나았고, 더 이상 약도 필요 없고, 돌봐줄 사람도 필요 없어.”강솔은 고개를 돌려 말하자 진석은 기둥에 기대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가고 싶으면 가.”“넌? 여전히 여기서 지낼 거야?”
“소희는 같이 안 돌아가? 이제 곧 설인데.”“친구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서, 결혼식이 끝난 후에 돌아올 거야. 그때는 임구택과 같이 돌아올 거야.”이에 도경수는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올해 설은 정말 시끌벅적하겠구나!”“운성에서 설을 지내는 건 어때?”하지만 도경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됐어, 난 조용한 게 좋아.”강재석은 비웃음을 터트렸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도경수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물었다. “양재아와 강시언의 일, 정말 안 신경 쓰는 거야?”둘의 이름이 거론되자 강재석은 도경수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정신이 혼미한 거 아니야? 이미 말하지 않았나, 그 일은 거론하지 않겠다고. 소희가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딱 잘라 말하는 강재석에 도경수는 화가 나서 말했다. “좋아, 말하지 말자고. 누가 더 급할지 두고 보자고.”강재석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한편, 재아는 시언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좀 허전해졌다. 곧이어 소희가 도착하자, 공항에 같이 가서 배웅하고 싶어 했으나 소희는 정중히 거절하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떠나면 스승님이 외로울 거야. 네가 여기서 스승님과 함께 있어 줘.”재아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그대로 남기로 했다....전용기 활주로에서소희는 강재석을 부축하여 비행기에 올랐고 웃으며 말했다. “결혼식 끝나고 바로 돌아갈게요. 맛있는 거 준비해 주세요.”강재석은 사랑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너희 오빠랑 같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도도희 이모는 설 전에 돌아오지 않나요?”소희의 질문에 강재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것 같아. 걔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봐.”“그토록 오래 기다렸는데도 아직 인정받지 못했네요.”“재아도 갈 곳이 없으니 도씨 저택에서 머물 수 있게 해줘야지. 도경수가 기쁘다면 된 거야.” 강재석이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 전에 일을 잡지 않고 스승님 자주 뵈러 갈게요
임구택은 운전하며 소희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늘 뭐 할 일 있어? 나랑 같이 회사에 갈래?”소희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일 가자. 간미연의 웨딩드레스 디자인을 화영에게 넘겼는데, 오늘은 미연이랑 세부 사항을 논의해야 해.”이에 구택은 소희를 쓱 한 번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 “내 회사에서도 너의 일을 방해하진 않을 거야.”소희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누군가가 집중하지 못할까 봐서야.”정곡을 찌르는 소희의 말에 구택은 무언의 미소를 지었다.“자기야!” 소희는 갑자기 돌아보며 맑은 눈으로 말했다. “오빠가 강아심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요즘 계속 아심과 함께 있었는데, 왜 갑자기 떠난 걸까?”강시언이 아심과 오랜만에 다시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줄 알았는데 시언이 그렇게 결단력 있게 떠나다니. 이제 한 명은 운성에, 다른 한명은 강성에 있으니, 다시 만나는 건 어려울 것이었다. 소희의 질문에 구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며 천천히 말했다. “감정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 아니면 형님 같은 분이 임성현 집안사람들과 굳이 얽힐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형님이 임씨 집안과 방씨 집안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압박한 것은 모두에게 아심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였을 거야. 아심을 보호하려는 장벽을 세운 거지.”“감정이 없다면 왜 그렇게까지 했겠어?”소희는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아심일 수도 있을까?”소희의 질문에 구택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손을 꽉 잡았다. “두고 보면 알겠지.”약간의 희망이 보이자 소희의 눈에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정말 오빠가 자기 자신을 위해 좀 더 잘해주길 바라. 더 이상 그렇게 많은 짐을 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정아현은 의자에 앉아 서류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서류를 아심에게 건네면서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아심은 멍하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뭐라고요?”“하루 종일 미스터
강아심은 사무실의 불을 끄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심은 자주 혼자 가서 밥을 먹던 식당을 지나치자 차를 세우고 식당에 들어가 식사했다.아심은 혼자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골랐고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이 차가운 몸을 조금은 따뜻하게 해주었다. 아심과 익숙해진 직원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가져다주며 웃으며 말했다. “또 이렇게 늦게까지 일했어요?”이에 아심은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시간에 와서 우유를 얻어 마시려고요.”직원은 아심의 아름다움에 여전히 놀라며 말했다. “제가 당신처럼 예뻤다면, 돈 많은 남자를 찾아서 이렇게 힘들게 일하지 않았을 거예요.”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아심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게 가장 오래가는 거예요.”그 말이 납득이 간다는 듯 직원은 눈을 돌리며 말했다. “맞아요, 여자는 독립적이어야 해요!”식사를 마친 아심은 식당을 나서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밖은 매우 추웠고, 식당에서 가져온 따뜻함은 곧 차가운 바람에 사라졌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둡고 냉랭한 분위기가 아심을 맞이했다.어느 날 밤, 집에 돌아와 메시지를 보내려다 포기하려던 순간, 아심은 집의 발코니에 서 있는 강시언의 모습을 보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마치 어둠의 바다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갑자기 등대를 발견한 것처럼. 그때의 상황과 감정은 이제도 기억이 생생하고,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새겨졌다.아심은 불을 켜지 않고 천천히 발코니로 걸어갔다. 그곳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시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다가가서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 펼쳤다. 함께 식사하기, 영화 보기, 쇼핑하기, 커플룩 입기 등 적어 놓은 목록을 보았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남은 다시 만난다는 조항을 지워버렸다.그들은 연인이 아니었기에 이별이라 할 수도 없었기에 아심은 마지막에 다시 만난다는 조항을 썼던 것이었다.‘한때 가졌던 온기로 평생의 외로움을 대신할 수 있어.’
다음 날, 소희는 임구택을 따라 출근했다. 이미 정체가 드러난 상황에서, 구택과 함께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조용히 지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임씨 그룹 직원들은 이미 주의를 받은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의 호기심, 경외심, 동경심을 조심스럽게 숨기고, 소희에게 평온하게 인사했다.구택의 사무실 구역에 도착했을 때, 칼리가 소희를 보고 일어서서, 흥분하여 말했다. “소희 님, 아니 소희 씨, 오셨네요!”소희는 구택의 손을 풀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잖아요. 흥분하지 말고, 예전처럼 해요.”이에 칼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동안 계속 흥분해 있었는데, 이제 막 진정되었는데, 소희 씨가 갑자기 나타나니까 제어가 안 됐어요!”소희는 이 귀여운 칼리 때문에 웃음을 터트렸다. 칼리는 사장님의 평온한 태도를 보더니, 기회를 엿보며 소희에게 말했다. “시간 되실 때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King?”소희가 묻자 칼리는 흥분하여 말했다. “어떤 이름이든 괜찮아요!”구택은 미소를 지으며 소희의 손을 잡고 사무실로 향했다.“예전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해. ‘소희 씨’라고 불릴 때도 아무도 감히 간섭하지 못했는데, 사모님에게 누가 뭐라고 하겠어!” 구택은 소희의 볼에 뽀뽀하며 말했다. “잠시 후에 회의가 있는데, 회의 기록을 하고 싶다면 환영이야!”소희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해!”“응.”구택이 일을 하러 가자, 소희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어 임유민의 성적을 물었다. 그러자 유민은 곧 메시지를 보냈다. [물어볼 필요가 있어요? 궁금할 게 뭐 있어요?]꽤 귀여운 반응에 소희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말해봐, 무슨 보상을 받고 싶어?][숙모가 가르쳐서 좋은 성적을 받은 거 아닌가요?]유민의 립서비스에 소희는 조금 민망해졌다. 이번 학기 동안 한 달 동안 온두리에 있었고, 돌아와서 일주일 동안만 가르치고 나서 시험을 봤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공을 세웠다고 하기 어려웠
마심호가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의사 말로는, 회장님께서 저녁에 술을 드셨다고 해요. 게다가 두 종류의 술을 함께 마셨고, 이번 심장 발작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요.”서선영은 즉시 말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술을 마시겠다고 하셨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회장님 성격상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어요.”“제가 말릴수록 더 화를 내시니까요.”구은서는 서선영의 팔을 붙잡으며 냉정하게 말했다.“엄마, 굳이 변명할 필요 없어요. 매일 아빠를 돌보며 고생하는 건 엄마잖아요. 엄마는 늘 집안을 위해 애쓰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 최소한의 효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빠를 걱정시키고 속상하게 만들죠.”“지금 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딴청 피우는 사람 아닌가요?”마심호는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아가씨, 그렇게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니에요. 도련님께서 집을 떠나 계셨던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죠.”은서는 그의 말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쏘아붙였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씀 속에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차라리 대놓고 말해보시죠. 오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게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제 어머니가 계모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오빠를 차별한 적 없어요. 오히려 저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이든 다 맞춰주려 하셨죠.”“그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계모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그렇게 애쓰고도, 결국 오해받아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은서의 날카로운 공격에 마심호는 더 이상 말다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너무 깊이 생각하신 것 같군요.”하지만 은서는 물러서지 않았다.“제가 생각이 많은 건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걸 제가 말한 건가요?”은서
소희는 어린 시절의 서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삼각주에서 함께 지냈던 그 시절,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그렇게 무기력하지도 않았고, 이처럼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여 있지도 않았다. 말수가 적다는 점은 같았지만, 그때의 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그때의 서인이 임유진을 만났다면, 분명 그런 복잡한 집안과 신분 문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유진을 깊이 사랑하고, 망설임 없이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임무가 실패한 순간부터, 서인은 변했다.서인은 과거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둬 버렸다. 빛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행복을 허락하지도 않았다.모든 것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소희는 서인을 이해했기에 그래서 안타까웠다.서인은 말하는 것처럼 유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감정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구택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어깨뼈를 감싸 쥔 채, 천천히 얼굴을 숙여 소희의 뺨에 입을 맞췄다.“그만 생각해. 유진이는 서인을 잊을 거야. 그게 운명이야.”소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쩌면, 어떤 일들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유진이가 정말 영원히 서인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둘의 결말일 것이다.구택의 가운이 풀어지면서, 튼튼한 몸이 드러났다. 구택의 피부는 탄탄하고 섹시했으며, 몸을 숙여 소희의 어깨를 입맞출 때, 그의 손은 아래로, 그리고 앞으로 움직였다.소희는 구택의 손을 붙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자기야, 아까는 씻고 나면 바로 잘 수 있다고 했잖아.”구택은 낮고 흐린 목소리로 대꾸했다.“아직 열 시야.”“그렇지만 나 졸려.”구택은 소희가 요즘 바쁘고, 유진이 걱정으로 지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구택은 소희를 부드럽게 품에 안고, 침대 머리맡의 조명을 어둡게 조절했다.“같이 자자.”소희는 구택의 품에 기대면서도, 머릿속이 서인과 유진이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혼란스러웠지만 구택의
수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사실, 나도 당신을 좋아하긴 해요. 하지만 당신이 집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이 가게에서 살겠다는 거예요?”그러나 서인의 마음은 이미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더욱 냉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그 문제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함께할 수 없어요.”수아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듯,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다시 생각해 봐요. 당신은 구씨 집안의 장남이야. 당연히 돌아가서 그룹을 이끌어야죠.”“이 작은 샤부샤부 가게에 머물러서 무슨 미래가 있겠어요? 난 다 당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서인은 수아를 바라보며, 불현듯 소희의 말이 떠올랐다.“앞으로 순수하게 좋아해 줄 유진이 같은 아이는 다시 못 만날 거야. 한 번 놓치면, 영영 없는 거야.”서인의 가슴이 죄어들 듯 아팠고,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진수아 씨, 더 이상 여기 오지 마세요.”그 말과 함께 서인은 주저 없이 돌아서 걸어 나갔다. 수아는 서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화가 난 듯 핸드백을 탁자 위에 내던졌다.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서인은 구씨 집안으로 돌아가 왕처럼 살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치고, 이런 작은 샤부샤부 가게에서 지내려 하는 걸까?수아가 꿈꿨던 재벌가 사모님의 꿈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서인은 후원으로 돌아왔다. 마당에는 장미 덩굴이 늘어서 있고, 계화나무가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고양이 집, 새로 바뀐 나무 테이블...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서인의 마음을 찔러댔다.이곳의 모든 것이 유진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유진은 이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작은 고양이 애옹이는 불안한 듯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며 약한 울음소리를 냈다.야옹이조차도 초조한 듯,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서인은 묵묵히 의자
유진의 다리는 아직 움직일 수 없었기에, 침대에 누워 있거나 침대 머리를 높여 반쯤 기대는 상태로 있어야 했다.그녀는 리모컨 버튼을 눌러 침대 머리를 살짝 올린 뒤, 소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구은정 삼촌이 여기 와서 이상한 말을 많이 했어. 그리고 자기가 날 친 거라고 했어!”소희는 조용히 물었다.“아무런 기억도 안 나?”유진은 잠시 생각하려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는데, 고개를 저었다.“정말 기억이 안 나. 내가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아!”소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기억이 안 나면 그냥 두는 게 좋겠어. 너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너무 애쓰지 마.”유진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소희, 엄마도 갔고, 이제 우리 둘뿐이잖아!”소희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그래서?”유진은 더욱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맛있는 거 좀 먹자!”그녀는 밀크티를 마시고 싶었고, 치킨을 먹고 싶었으며,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었다.이에 소희도 웃으며 말했다.“좋아!”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을 두 바퀴쯤 뛰어다닌 뒤, 소희에게 커다란 포옹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었기에, 대신 눈빛으로 기쁨을 표현했다.소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의사에게 먼저 문의하여, 유진이가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확인한 뒤, 철저히 지시를 따르며 간식을 골랐다....유진의 머릿속에서 서인과 관련된 기억은 마치 흐릿한 공백이 된 듯했다. 그와 연관된 오현빈 같은 사람들조차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끔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 유진은 침대 곁에서 말을 걸던 구은정 삼촌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그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고, 머리도 아팠다.그래서 유진은 본능적으로 서인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한편, 서인은 샤부샤부 가게로 돌아왔는데, 마침 진수아도 와 있었다.수아는 자리에서 일
유진은 찡그리며 눈을 떴다. 눈앞에 서인이 있는 것을 보자,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고, 이내 놀란 기색과 함께 경계심이 스며들었다.서인은 푸른 기운이 감도는 눈 밑과 덥수룩한 수염, 깊고 어두운 시선으로 인해 영락없이 위협적인 인상으로 보였다.“구은정, 삼촌?”유진은 낮게 중얼거리며 본능적으로 거실 쪽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정숙이 어디 갔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왜 낯선 이상한 아저씨가 자신의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걸까?서인은 유진을 바라보며 깊은 상처를 숨긴 채, 갈라진 목소리로 묻듯이 말했다.“너, 정말 날 잊었어?”유진은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기억하는데요. 어릴 때 한 번 본 적 있어요.”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기억 속 모습과는 꽤 많이 달랐지만, 그의 깊고도 아픈 시선 속에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이 녹아 있었다.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낯설고도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잊어버린 게 차라리 잘된 거야.”서인은 시선을 떨구며, 굳게 다문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애초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로 알아서는 안 됐어.”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짙은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고, 목소리는 더욱 잠겨 있었다.“유진아, 미안해.”유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서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문득 놀란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설마, 삼촌이 날 친 건 아니죠?”서인은 유진을 바라보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웃음은 울음보다도 더 아프고 쓸쓸했다.“내가 직접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나와 관련이 있어.”유진은 아, 하고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이상했다. 이에 유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삼촌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라고 믿어요. 난 괜찮아요
“전에는 그랬지만, 나중에는 이미 회복됐어. 의사도 유진이가 잘 회복했다고 했고!”소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우리, 의사에게 한번 물어보자!”두 사람은 임유진의 담당 주치의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자 의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이런 사례가 있긴 해요. 환자의 신체가 자체적으로 보이는 일종의 스트레스 반응이죠.”“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뇌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줬던 기억을 지워버리고요.”“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고, 심리적 장애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죠.”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물었다.“그럼, 다시 기억할 수 있나요?”의사는 고개를 저었다.“확신할 수 없어요. 서서히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고, 영영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고요.”서인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충격과 당혹감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유진이가 나를 잊었다고?’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깊숙이 퍼져나가며 그의 심장을 온통 뒤덮었다.유진이는 중상을 입고 깨어난 후 모든 사람을 기억했으며, 심지어 구은태도 알아봤다. 그런데, 유독 서인만 잊어버렸다.이윽고 갑자기 그날 밤을 떠올렸다. 유진이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울기만 했던 그녀.그 슬프고 억눌린 흐느낌이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랬다. 유진이는 언제나 서인을 향해 밝고 용감하게 다가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응답을 주지 않았다. 늘 차갑게 대하고, 때로는 조롱하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서인이 유진에게 준 건 오직 고통뿐이었고, 그랬기에 유진은 결국 그를 잊어버렸다.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자기 삶에서 서인을 내쫓아 버린 것이다.서인은 늘 유진이가 자신을 잊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왔지만, 정말 그렇게 되니, 왜 이토록 허망하고 아플까?소희는 불안에 휩싸인 서인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의사가 다시 기억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어.”그러나 소희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여진구는 순간 굳어버렸다. 그저 멍한 눈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더욱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무슨 일을 엄마한테 말했다는 거예요?”진구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떠봤다.“서인, 너 정말 모르는 사람이야?”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네, 모르는 사람이에요.”그 대답에 진구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침착한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아, 내가 착각했네. 내 친구인데, 네가 본 적 없는 사람이야.”그러나 유진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이었고, 그녀는 다시 진구를 추궁했다.“그런데 아까는 나와 그 사람 얘기를 엄마한테 말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었는데요?”이에 진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급히 변명을 지어냈다.“아, 그게 그 친구가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네가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해서 이모께 한번 여쭤봤던 거지.”“아직 너한테 얘기하기도 전에 그냥 조언을 구한 거야.”유진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런 거였어요? 일하는 문제인데 우리 엄마한테 왜 물어보려고 했어요?선배 친구라면 괜찮아요.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어요.”진구는 유진의 얼굴에서 조금의 위화감도 찾을 수 없었다. 유진은 정말로 서인이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표정은 철저하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진구는 마음속에서 수많은 의문이 밀려왔지만, 그것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별말 없이 다 깎은 사과를 유진에게 건네주며 화제를 돌렸다.진구는 이 사실을 우정숙에게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조차도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틀 후 임씨 집안 사람들은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그날 아침, 구은태가 오랜만에 유진을 병문안 가고 싶다고 했다. 이제 유진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니 병원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임구택은 바로 간병인을 시켜 의사를 호출했다.“유진아, 유진아!”우정숙이 조용히 그녀를 부르자, 유진은 힘겹게 눈을 떴다. 유진의 눈동자는 완전히 흐려져 있었다.그리고 눈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유진아!”노정순이 유진의 손을 꼭 잡았는데,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할머니 여기 있어. 우리 모두 네 곁에 있어. 어때? 어디 많이 아프니?”하지만,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듯 주변을 둘러봤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팔과 다리는 이미 고정된 상태였다.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유진은 눈을 크게 뜨고, 고통에 겨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그 모습에 모두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괜찮아. 괜찮아, 유진아.”노정순이 유진의 손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달랬다.곧, 의사가 도착했고, 그는 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뇌 손상의 영향이고, 환자는 지금 막 깨어난 상태이니,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조용히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우정숙은 다급히 물었다.“만약 최악의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되나요?”의사는 잠시 말을 아끼다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지금으로서는 확실히 예측하기 어려워요.”그 대답에 모두의 가슴이 무거워졌다.유진은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의사는 그 모습을 보며 긍정적으로 말했다.“환자는 지금 극도로 쇠약한 상태라, 수면을 통해 회복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이건 오히려 좋은 신호예요.”유진이 다시 잠에 든 후 소희는 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진이가 깨어났어.”그러고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유진의 몸이 너무 약하니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을 전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서인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부탁할게. 잘 돌봐 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줘.”“알겠어.”서인이 돌아가고, 소희의 마음도 마치 우중충한 날씨처럼 무겁
어둑한 조명이 드리운 긴 벤치에 서인이 앉아 있었다. 서늘하고 적막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서인의 앞에 멈춰 섰는데, 임유민이었다. 유민은 미간을 좁히고 냉정하게 말했다.“이제 가세요.”서인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저었다.“난 유진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그러자 유민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차가운 기운이 스며든 눈빛으로 그는 조용히 말했다.“전 삼촌을 원망하지 않아요. 누나가 삼촌을 혼자 좋아한 거, 그건 우리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번 일은 누나와의 마지막 정리라고 생각하세요.”“이제 누나는 삼촌을 찾지 않을 거니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마세요.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다시 찾아오지도 마세요.”유민의 말은 칼날처럼 서인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머리가 더 깊이 숙여졌고, 눈동자는 공허했다.유민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조용히 등을 돌려 병실로 돌아갔다.새벽녘이 되자, 임지언이 병원에 도착했다. 평소 침착하고 냉정한 그도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임지언은 병실로 향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유진이는? 상태가 어때?”상황을 전해 들은 뒤에야, 그는 비로소 깊게 숨을 내쉬었다.임지언은 곧장 병상으로 다가가 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리고, 유진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한없이 애틋한 눈빛을 드리웠다.그러고는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유진아, 아빠가 너를 잘 지켜주지 못했구나. 그러니까, 제발 어서 일어나거라.”우정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겨우 가라앉혔던 감정이 다시 북받쳐 올라 참을 새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날 밤, 임지언과 우정숙은 잠도 자지 않고 유진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밤에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서인은 그 비를 피하지 않았다. 마치 조각상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서인은 온몸이 흠뻑 젖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해가 떠오를 무렵 소희가 서인을 찾았다. 소희는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