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소희는 임구택을 따라 출근했다. 이미 정체가 드러난 상황에서, 구택과 함께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조용히 지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임씨 그룹 직원들은 이미 주의를 받은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의 호기심, 경외심, 동경심을 조심스럽게 숨기고, 소희에게 평온하게 인사했다.구택의 사무실 구역에 도착했을 때, 칼리가 소희를 보고 일어서서, 흥분하여 말했다. “소희 님, 아니 소희 씨, 오셨네요!”소희는 구택의 손을 풀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잖아요. 흥분하지 말고, 예전처럼 해요.”이에 칼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동안 계속 흥분해 있었는데, 이제 막 진정되었는데, 소희 씨가 갑자기 나타나니까 제어가 안 됐어요!”소희는 이 귀여운 칼리 때문에 웃음을 터트렸다. 칼리는 사장님의 평온한 태도를 보더니, 기회를 엿보며 소희에게 말했다. “시간 되실 때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King?”소희가 묻자 칼리는 흥분하여 말했다. “어떤 이름이든 괜찮아요!”구택은 미소를 지으며 소희의 손을 잡고 사무실로 향했다.“예전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해. ‘소희 씨’라고 불릴 때도 아무도 감히 간섭하지 못했는데, 사모님에게 누가 뭐라고 하겠어!” 구택은 소희의 볼에 뽀뽀하며 말했다. “잠시 후에 회의가 있는데, 회의 기록을 하고 싶다면 환영이야!”소희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해!”“응.”구택이 일을 하러 가자, 소희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어 임유민의 성적을 물었다. 그러자 유민은 곧 메시지를 보냈다. [물어볼 필요가 있어요? 궁금할 게 뭐 있어요?]꽤 귀여운 반응에 소희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말해봐, 무슨 보상을 받고 싶어?][숙모가 가르쳐서 좋은 성적을 받은 거 아닌가요?]유민의 립서비스에 소희는 조금 민망해졌다. 이번 학기 동안 한 달 동안 온두리에 있었고, 돌아와서 일주일 동안만 가르치고 나서 시험을 봤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공을 세웠다고 하기 어려웠
소희는 순간 당황해서 귀끝이 살짝 뜨거워졌지만, 임구택의 말을 무시했다. 원래 임유민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결국 몇 마디만 보내기로 했다. [그럼 열심히 해봐!]유민은 집을 떠나는 캐릭터의 이모티콘을 보내고는 곧 게임 초대를 보냈다. 이에 소희는 소찬호도 끌어들여 함께 게임을 하며 유민에게 위로가 되도록 노력했다. 게임을 한판 하고 나자, 진우행이 들어와 구택에게 업무 보고를 했다. 그리고 소희를 보자, 우행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소희는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업무 보고가 끝난 후, 진우행이 소희에게 다가와 태블릿을 내밀며 말했다. “소희 씨, 제가 사람을 시켜서 앱을 하나 만들었어요. 한 번 보세요.”소희는 약간의 의문을 품고 태블릿을 받아 들고 열어보자 태블릿에는 메뉴가 표시되어 있었다. 각종 밀크티, 디저트, 아이스크림 등이 있었는데 모든 브랜드와 모든 맛이 다 있었다. 아마 우행이 소희를 위해 메뉴 북을 만든 것이었다.소희는 그룹 전체에 자신의 미식가 명성이 퍼진 건지 놀라며 우행을 올려다보자 우행은 바로 설명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회사 모든 사람이 소희 씨에게 음료나 디저트를 사주고 싶어 하지만, 너무 많이 보내면 사장님이 기분 나빠할까 봐서요.”“그래서 직접 선택하게 한 거예요. 뭐든지 고르면 제가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소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못 올 것 같네요!”우행은 옆에서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며 바로 공손히 말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당신이 오시면 우리 모두가 활기를 되찾아요. 이정도 간식쯤이야, 제가 비용을 청구할 수 있고요!”“이렇게 하면 그들도 기쁘고, 먹는 것도 더 즐겁잖아요!”소희는 진심으로 감사해하며 웃었다. “다들 고맙다고 전해줘요.”“그럼 주문해 보세요!” 우행은 더욱 부드럽게 말하자 소희는 밀크티 한 잔과 디저트 하나를 주문했다. 원래 아이스크림도 주문하고 싶었지만, 우행이 정말로 혼날까 봐 참기로 했다. 주문을 마친
“제가 미래 와이프에게 긴 고백을 준비했는데, 그때 긴장해서 잊어버릴까 봐 걱정돼요.”“진심으로 준비한 말이라면 잊어버릴 리 없잖아.”“그렇지 않아요. 그때 긴장해서 머리가 하얘지면 다 잊어버릴지도 몰라요!”이때 조백림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나한테 물어봐. 내가 경험을 전수해 줄게.”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은 사람이 등장하자 장명원은 조롱하며 말했다. “네가 마음에 없는 고백을 어떻게 해?”“내가 마음에 없다고? 유정아, 우리 약혼할 때 내 고백이 감동적이었지 않았나?” 백림이 유정에게 물었다. 유정은 소희와 대화 중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돌아서 말했다. “네가 뭐라고 했었지?”이에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고 보다 못한 장시원이 말했다. “백림이 평생 너만 사랑할 거라고 했어!”유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말 누가 믿어요? 분명히 날씨 예보 같은 그런 거 보고 나서 그런 맹세를 했을 거예요!”해탈해하며 말하는 유정에 모두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소희는 그 말을 듣고 과거에 구택이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웃었다. 백림은 맑은 눈으로 유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진심으로 한 말이라면?”백림의 오기에 유정은 몸을 뒤로 젖히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나를 멀리해, 벼락 맞을 때 나까지 다치게 하지 말라고!”백림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시원이 형, 제발 나 좀 구해줘요!”그러자 시원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지금은 겨울이니까 번개는 안 칠 거야!”모두가 한바탕 웃고 난 후, 명원은 시원에게 다가가서 시원의 품에 있는 요요를 안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자, 삼촌이 한 번 안아보자!”요요는 시원의 품에서 음식을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삼촌이 안아주는 거 싫어!”그러자 상처를 받은 듯 명원은 얼굴이 굳어져 말했다. “왜 삼촌이 안아주는 게 싫어?”음식을 냠냠 먹던 요요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삼촌은 이제 왕자님이 될 거니까, 왕자님은 공주님만 안아야 해요.”
장시원이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우청아가 신부 들러리를 한다고?”“그래요, 청아가 형한테 말하지 않았어요?”시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너 아까 나한테 신랑 들러리를 서달라고 했지? 사실, 불가능하지는 않아.”“형이 아까는 안 한다고 했잖아요. 사실 신랑 들러리 한명 부족한데, 형이 내 형이라서 먼저 생각해 본 거예요.”“형이 안 하겠다고 해서 구택 형한테 물어보려던 거예요. 소희가 있으면 분명히 수락할 거니까!” 장명원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시원은 비웃으며 말했다. “구택이 네 들러리를 서주겠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소희가 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죠!”“그래, 그럼 내가 불편함을 감수할게. 구택한테 가지 마.”이번엔 명원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구택이 형이랑 협의하든 둘이서 내기해 봐요. 이기는 사람이 기회를 가지는 걸로 할게요!”이에 짜증이 난 시원이 발로 명원을 한 번 차며 말했다. “당장 사라져!”명원은 웃으며 뒤로 넘어가 소파에서 굴러떨어졌고, 요요는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설이 다가오자, 강솔의 엄마인 윤미래가 강솔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집에 올지 물었고 강솔은 펜을 돌리며 웃었다. “뭘 그렇게 서두르세요? 설날까지 아직 열흘 남았어요!”[설날이 급한 게 아니라 우리가 급한 거야. 설날에 네가 한 살 더 먹잖아. 네가 함께 자란 서현지는 애도 두 살이 됐어!]“애가 두 살이라니, 난 아이를 못 낳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자랑거리가 돼요?” 강솔은 펜 끝을 입에 물며 불만스레 말했다.[네가 남자친구를 데려오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아직 소식이 없어? 설마 네 남자친구가 우리 집에 오기 싫은 건 아니겠지?”]“그럴 리가요? 그냥 너무 바빠서 그래요. 내가 말했잖아요. 사업 초창기라고요.”[아무리 바빠도 설날은 챙겨야지. 이번 설날에 데려와. 우리는 너희 약혼 얘기도 해야 해.] 이에 강솔은 기쁘게 대답했다. “그럼 제가 한
심서진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아직 젊고, 일이 제일 중요해요!”주예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는 말이야!”서진은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예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은 퇴근 후에 함께 할 사람이 있어서 부러워요. 저는 매일 혼자 집에 가면, 집이 텅 비어 있고, 춥고 외로워요.”그러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회사에서 야근하는 게 더 나아요. 집에 가기 싫어요.”뜻밖의 말에 예형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나한테 의지하러 여기 왔다는 거 알아. 여기서 친구도 없고.”서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선배님이 있으면 돼요!”꽤 달콤한 말에 예형은 마음이 살짝 움직였다. “오늘 저녁에 일찍 퇴근해서 우리랑 같이 밥 먹자.”“그건 안 돼요. 선배님과 강솔 언니랑 데이트하는데, 제가 왜 같이 가겠어요?”“괜찮아. 그냥 같이 밥 먹는 거야. 어쩌면 너랑 강솔이 친해지면, 나중에 너도 강성에서 친구가 하나 더 생기는 거지.” 예형이 따뜻하게 웃으며 말하자 서진은 눈빛이 흔들리며 말했다. “강솔 언니가 화내지 않을까요?”“당연히 안 그러지. 걔는 이해심이 많아.”“강솔 언니는 분명히 좋은 사람이겠죠. 아니면 선배님이 그렇게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서진은 부드럽게 웃자 예형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서진은 기쁘게 말했다. “그럼 저 먼저 일하러 갈게요. 퇴근 후에 선배님을 찾아올게요.”“그래, 가봐.”...강솔은 식당을 예약하고, 예형을 기쁘게 기다렸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예형과 다른 여자가 함께 오는 것을 보았다.“강솔 언니!”서진이 다가와 친근하게 포옹하며 웃었다. “퇴근이 늦어서 선배님이 저를 차에 태워주셨어요. 또 제가 저녁에 혼자 있는 걸 듣고 저도 같이 오게 했는데 화난 건 아니죠?”강솔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떨떨 했지만 예형을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그래요, 좋아요!” 심서진은 아주 매운 요리 두 가지를 더 주문했고 주문을 마친 후, 서진이 말했다.“선배님, 오늘 영업팀에서 문연정이 만든 보고서를 봤는데, 문제가 꽤 많더라고요.”“어떤 문제?”서진은 휴대폰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 보세요, 지난번 보고서의 데이터와 큰 차이가 있어요.”두 사람은 업무 이야기를 나누었고, 강솔은 대화에 끼어들 수 없어서 물을 마시며 휴대폰을 보았다. 드디어 음식이 나오자, 예형과 서진은 고향 음식을 두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강솔은 여전히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식사가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서진은 보기만 해도 엄청 매워 보이는 불맛 닭발을 강솔앞에 스윽 밀어놓으면서 말했다. “한 번 먹어봐요. 불맛 닭발이 저희 고향에서 해 먹는 거랑 되게 비슷해요. 매콤하면서 맛있어요.”“나중에 선배님과 저희 고향에 오면 미리 익숙해질 수 있을 거야.”예형도 말했다. “정말 괜찮아, 고향의 맛이 나.”강솔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서 불맛 닭발을 집어먹었다. 닭발이 입에 들어가자마자 강한 매운맛이 퍼져 나왔고, 강솔은 급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에서부터 목까지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이에 서진은 놀라며 말했다. “그 정도로 매워요?”예형도 걱정하며 말했다. “괜찮아?”강솔은 너무 매워서 말도 못 하고, 물을 한 컵 더 마신 후에야 조금 나아졌다. “좀 많이 매웠어, 괜찮아.”서진은 약간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매울 줄 몰랐어요, 미안해요.”강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한 끼 식사 동안, 예형과 서진은 열띤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먹었고, 강솔은 감자볶음만 조금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섰을 때, 서진은 기분이 매우 좋아서 함께 쇼핑하자고 제안했다.“오늘은 좀 피곤해서, 다음에 해요.”강솔이 거절하자 서진은 예형을 슬쩍 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저는 혼자 쇼핑하다가 집에 갈게요. 선배님은 강솔 언니를 집
강솔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그냥 너와 단둘이 데이트하고 싶었어.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고, 난 이 데이트를 정말 기대했는데 이게 뭐야. 둘만 얘기하고 우리는 거의 말하지 않았잖아.”예형은 동의하지 않으며 말했다. “우리는 자주 데이트할 수 있지만 심서진은 내가 초대한 손님이야. 손님을 두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야.”강솔은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고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팠다. 차 안의 분위기는 갑자기 팽팽해지고 무거워졌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밖의 네온사인만이 어둠 속에서 깜빡였다.잠시 후, 예형이 먼저 입을 열며 긴장된 분위기를 깼다. “네가 나에게 말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야?”강솔은 원래 설에 함께 집에 가자고 말하려 했지만, 이제는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너 휴가 언제야?”예형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게 네가 말하려던 일이야? 그건 전화로도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려고 했어?”강솔은 미간을 찌푸리며 예형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중요한 일이 아니면 우리 만날 필요가 없다는 거야? 네가 서진과 함께 일하는 걸 방해하는 거라고 생각되니까?”“당연히 아니지.”앞에 빨간불이 켜지자, 예형은 차를 멈추고 강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민감해졌어?”강솔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우리 함께 있는 시간이 서진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 적잖아. 데이트에도 데려오니까.”“내가 설명했잖아. 서진은 여기서 친구가 없어. 마침 저녁에 같이 퇴근해서 초대했을 뿐이야.”그러고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서진에게 네가 이해심 많고 배려심이 깊다고 말했어.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한 거야?”강솔은 서진에 대한 예형의 말이 듣기 싫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초록 불이 켜지자, 예형은 강솔의 손을 놓고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강솔이 사는 곳에 가까워졌을 때, 예형의 휴대폰에 알람이
예형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여기서 잠시 기다릴게. 그놈이 다시 오면 내가 혼내줄 거야!”서진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애처로운 모습으로 말했다. “이렇게 오셨는데, 강솔 언니가 화내지 않을까요?”예형은 강솔이 방금 보였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으나 무심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서진은 주저하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식사할 때 언니가 거의 말을 안 했어요. 혹시 저를 싫어하는 건 아닌가요? 우리가 데이트를 방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아니야, 그런 생각하지 마.” 예형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강솔은 네가 여기에서 혼자라는 걸 이해해서 나더러 너를 돌보라고 말했어.”“선배님, 정말 감사해요!” 서진은 예형을 안으며 말했다. “여기 강성에서는 선배님이 유일한 의지할 사람이에요.”예형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지만, 서진을 밀어내려던 찰나에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예형은 화난 얼굴로 빠르게 문으로 걸어갔다. 예형은 문을 열며 화를 내려고 했으나, 문밖에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얼굴이 변하고 그대로 멈췄다.“선배님!” 서진이 예형의 팔을 잡고 달려와 문밖의 강솔을 보고 놀라며 멈춰 섰다. 이윽고 서진은 예형의 팔을 놓고 한 발짝 물러났다. 강솔은 실망하고 마음 아파하며 예형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급하게 떠났는지 알겠네. 작별 인사도 없이, 결국 이 사람을 보러 온 거였어!”예형은 당황하며 급히 해명했다. “강솔, 너 오해한 거야!”“내가 뭘 오해했다는 거야?” 강솔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데이트할 때도 데려올 정도로 좋아하는 거라면, 그냥 솔직히 말하지 그랬어? 몰래 만날 필요는 없잖아!”서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정말 오해세요. 제게 문제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선배님을 부른 거예요!”“네가 부르면 바로 오는구나. 그런데 내가 아플 때는 예형에게 전화해도 얼마나 걸렸는지 알기나 해?” 강솔은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주예형, 네
마심호가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의사 말로는, 회장님께서 저녁에 술을 드셨다고 해요. 게다가 두 종류의 술을 함께 마셨고, 이번 심장 발작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요.”서선영은 즉시 말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술을 마시겠다고 하셨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회장님 성격상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어요.”“제가 말릴수록 더 화를 내시니까요.”구은서는 서선영의 팔을 붙잡으며 냉정하게 말했다.“엄마, 굳이 변명할 필요 없어요. 매일 아빠를 돌보며 고생하는 건 엄마잖아요. 엄마는 늘 집안을 위해 애쓰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 최소한의 효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빠를 걱정시키고 속상하게 만들죠.”“지금 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딴청 피우는 사람 아닌가요?”마심호는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아가씨, 그렇게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니에요. 도련님께서 집을 떠나 계셨던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죠.”은서는 그의 말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쏘아붙였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씀 속에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차라리 대놓고 말해보시죠. 오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게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제 어머니가 계모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오빠를 차별한 적 없어요. 오히려 저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이든 다 맞춰주려 하셨죠.”“그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계모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그렇게 애쓰고도, 결국 오해받아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은서의 날카로운 공격에 마심호는 더 이상 말다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너무 깊이 생각하신 것 같군요.”하지만 은서는 물러서지 않았다.“제가 생각이 많은 건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걸 제가 말한 건가요?”은서
소희는 어린 시절의 서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삼각주에서 함께 지냈던 그 시절,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그렇게 무기력하지도 않았고, 이처럼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여 있지도 않았다. 말수가 적다는 점은 같았지만, 그때의 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그때의 서인이 임유진을 만났다면, 분명 그런 복잡한 집안과 신분 문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유진을 깊이 사랑하고, 망설임 없이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임무가 실패한 순간부터, 서인은 변했다.서인은 과거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둬 버렸다. 빛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행복을 허락하지도 않았다.모든 것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소희는 서인을 이해했기에 그래서 안타까웠다.서인은 말하는 것처럼 유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감정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구택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어깨뼈를 감싸 쥔 채, 천천히 얼굴을 숙여 소희의 뺨에 입을 맞췄다.“그만 생각해. 유진이는 서인을 잊을 거야. 그게 운명이야.”소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쩌면, 어떤 일들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유진이가 정말 영원히 서인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둘의 결말일 것이다.구택의 가운이 풀어지면서, 튼튼한 몸이 드러났다. 구택의 피부는 탄탄하고 섹시했으며, 몸을 숙여 소희의 어깨를 입맞출 때, 그의 손은 아래로, 그리고 앞으로 움직였다.소희는 구택의 손을 붙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자기야, 아까는 씻고 나면 바로 잘 수 있다고 했잖아.”구택은 낮고 흐린 목소리로 대꾸했다.“아직 열 시야.”“그렇지만 나 졸려.”구택은 소희가 요즘 바쁘고, 유진이 걱정으로 지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구택은 소희를 부드럽게 품에 안고, 침대 머리맡의 조명을 어둡게 조절했다.“같이 자자.”소희는 구택의 품에 기대면서도, 머릿속이 서인과 유진이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혼란스러웠지만 구택의
수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사실, 나도 당신을 좋아하긴 해요. 하지만 당신이 집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이 가게에서 살겠다는 거예요?”그러나 서인의 마음은 이미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더욱 냉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그 문제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함께할 수 없어요.”수아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듯,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다시 생각해 봐요. 당신은 구씨 집안의 장남이야. 당연히 돌아가서 그룹을 이끌어야죠.”“이 작은 샤부샤부 가게에 머물러서 무슨 미래가 있겠어요? 난 다 당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서인은 수아를 바라보며, 불현듯 소희의 말이 떠올랐다.“앞으로 순수하게 좋아해 줄 유진이 같은 아이는 다시 못 만날 거야. 한 번 놓치면, 영영 없는 거야.”서인의 가슴이 죄어들 듯 아팠고,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진수아 씨, 더 이상 여기 오지 마세요.”그 말과 함께 서인은 주저 없이 돌아서 걸어 나갔다. 수아는 서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화가 난 듯 핸드백을 탁자 위에 내던졌다.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서인은 구씨 집안으로 돌아가 왕처럼 살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치고, 이런 작은 샤부샤부 가게에서 지내려 하는 걸까?수아가 꿈꿨던 재벌가 사모님의 꿈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서인은 후원으로 돌아왔다. 마당에는 장미 덩굴이 늘어서 있고, 계화나무가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고양이 집, 새로 바뀐 나무 테이블...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서인의 마음을 찔러댔다.이곳의 모든 것이 유진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유진은 이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작은 고양이 애옹이는 불안한 듯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며 약한 울음소리를 냈다.야옹이조차도 초조한 듯,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서인은 묵묵히 의자
유진의 다리는 아직 움직일 수 없었기에, 침대에 누워 있거나 침대 머리를 높여 반쯤 기대는 상태로 있어야 했다.그녀는 리모컨 버튼을 눌러 침대 머리를 살짝 올린 뒤, 소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구은정 삼촌이 여기 와서 이상한 말을 많이 했어. 그리고 자기가 날 친 거라고 했어!”소희는 조용히 물었다.“아무런 기억도 안 나?”유진은 잠시 생각하려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는데, 고개를 저었다.“정말 기억이 안 나. 내가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아!”소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기억이 안 나면 그냥 두는 게 좋겠어. 너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너무 애쓰지 마.”유진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소희, 엄마도 갔고, 이제 우리 둘뿐이잖아!”소희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그래서?”유진은 더욱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맛있는 거 좀 먹자!”그녀는 밀크티를 마시고 싶었고, 치킨을 먹고 싶었으며,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었다.이에 소희도 웃으며 말했다.“좋아!”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을 두 바퀴쯤 뛰어다닌 뒤, 소희에게 커다란 포옹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었기에, 대신 눈빛으로 기쁨을 표현했다.소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의사에게 먼저 문의하여, 유진이가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확인한 뒤, 철저히 지시를 따르며 간식을 골랐다....유진의 머릿속에서 서인과 관련된 기억은 마치 흐릿한 공백이 된 듯했다. 그와 연관된 오현빈 같은 사람들조차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끔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 유진은 침대 곁에서 말을 걸던 구은정 삼촌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그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고, 머리도 아팠다.그래서 유진은 본능적으로 서인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한편, 서인은 샤부샤부 가게로 돌아왔는데, 마침 진수아도 와 있었다.수아는 자리에서 일
유진은 찡그리며 눈을 떴다. 눈앞에 서인이 있는 것을 보자,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고, 이내 놀란 기색과 함께 경계심이 스며들었다.서인은 푸른 기운이 감도는 눈 밑과 덥수룩한 수염, 깊고 어두운 시선으로 인해 영락없이 위협적인 인상으로 보였다.“구은정, 삼촌?”유진은 낮게 중얼거리며 본능적으로 거실 쪽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정숙이 어디 갔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왜 낯선 이상한 아저씨가 자신의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걸까?서인은 유진을 바라보며 깊은 상처를 숨긴 채, 갈라진 목소리로 묻듯이 말했다.“너, 정말 날 잊었어?”유진은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기억하는데요. 어릴 때 한 번 본 적 있어요.”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기억 속 모습과는 꽤 많이 달랐지만, 그의 깊고도 아픈 시선 속에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이 녹아 있었다.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낯설고도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잊어버린 게 차라리 잘된 거야.”서인은 시선을 떨구며, 굳게 다문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애초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로 알아서는 안 됐어.”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짙은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고, 목소리는 더욱 잠겨 있었다.“유진아, 미안해.”유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서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문득 놀란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설마, 삼촌이 날 친 건 아니죠?”서인은 유진을 바라보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웃음은 울음보다도 더 아프고 쓸쓸했다.“내가 직접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나와 관련이 있어.”유진은 아, 하고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이상했다. 이에 유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삼촌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라고 믿어요. 난 괜찮아요
“전에는 그랬지만, 나중에는 이미 회복됐어. 의사도 유진이가 잘 회복했다고 했고!”소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우리, 의사에게 한번 물어보자!”두 사람은 임유진의 담당 주치의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자 의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이런 사례가 있긴 해요. 환자의 신체가 자체적으로 보이는 일종의 스트레스 반응이죠.”“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뇌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줬던 기억을 지워버리고요.”“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고, 심리적 장애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죠.”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물었다.“그럼, 다시 기억할 수 있나요?”의사는 고개를 저었다.“확신할 수 없어요. 서서히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고, 영영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고요.”서인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충격과 당혹감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유진이가 나를 잊었다고?’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깊숙이 퍼져나가며 그의 심장을 온통 뒤덮었다.유진이는 중상을 입고 깨어난 후 모든 사람을 기억했으며, 심지어 구은태도 알아봤다. 그런데, 유독 서인만 잊어버렸다.이윽고 갑자기 그날 밤을 떠올렸다. 유진이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울기만 했던 그녀.그 슬프고 억눌린 흐느낌이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랬다. 유진이는 언제나 서인을 향해 밝고 용감하게 다가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응답을 주지 않았다. 늘 차갑게 대하고, 때로는 조롱하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서인이 유진에게 준 건 오직 고통뿐이었고, 그랬기에 유진은 결국 그를 잊어버렸다.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자기 삶에서 서인을 내쫓아 버린 것이다.서인은 늘 유진이가 자신을 잊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왔지만, 정말 그렇게 되니, 왜 이토록 허망하고 아플까?소희는 불안에 휩싸인 서인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의사가 다시 기억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어.”그러나 소희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여진구는 순간 굳어버렸다. 그저 멍한 눈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더욱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무슨 일을 엄마한테 말했다는 거예요?”진구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떠봤다.“서인, 너 정말 모르는 사람이야?”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네, 모르는 사람이에요.”그 대답에 진구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침착한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아, 내가 착각했네. 내 친구인데, 네가 본 적 없는 사람이야.”그러나 유진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이었고, 그녀는 다시 진구를 추궁했다.“그런데 아까는 나와 그 사람 얘기를 엄마한테 말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었는데요?”이에 진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급히 변명을 지어냈다.“아, 그게 그 친구가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네가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해서 이모께 한번 여쭤봤던 거지.”“아직 너한테 얘기하기도 전에 그냥 조언을 구한 거야.”유진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런 거였어요? 일하는 문제인데 우리 엄마한테 왜 물어보려고 했어요?선배 친구라면 괜찮아요.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어요.”진구는 유진의 얼굴에서 조금의 위화감도 찾을 수 없었다. 유진은 정말로 서인이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표정은 철저하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진구는 마음속에서 수많은 의문이 밀려왔지만, 그것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별말 없이 다 깎은 사과를 유진에게 건네주며 화제를 돌렸다.진구는 이 사실을 우정숙에게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조차도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틀 후 임씨 집안 사람들은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그날 아침, 구은태가 오랜만에 유진을 병문안 가고 싶다고 했다. 이제 유진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니 병원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임구택은 바로 간병인을 시켜 의사를 호출했다.“유진아, 유진아!”우정숙이 조용히 그녀를 부르자, 유진은 힘겹게 눈을 떴다. 유진의 눈동자는 완전히 흐려져 있었다.그리고 눈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유진아!”노정순이 유진의 손을 꼭 잡았는데,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할머니 여기 있어. 우리 모두 네 곁에 있어. 어때? 어디 많이 아프니?”하지만,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듯 주변을 둘러봤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팔과 다리는 이미 고정된 상태였다.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유진은 눈을 크게 뜨고, 고통에 겨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그 모습에 모두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괜찮아. 괜찮아, 유진아.”노정순이 유진의 손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달랬다.곧, 의사가 도착했고, 그는 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뇌 손상의 영향이고, 환자는 지금 막 깨어난 상태이니,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조용히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우정숙은 다급히 물었다.“만약 최악의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되나요?”의사는 잠시 말을 아끼다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지금으로서는 확실히 예측하기 어려워요.”그 대답에 모두의 가슴이 무거워졌다.유진은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의사는 그 모습을 보며 긍정적으로 말했다.“환자는 지금 극도로 쇠약한 상태라, 수면을 통해 회복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이건 오히려 좋은 신호예요.”유진이 다시 잠에 든 후 소희는 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진이가 깨어났어.”그러고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유진의 몸이 너무 약하니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을 전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서인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부탁할게. 잘 돌봐 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줘.”“알겠어.”서인이 돌아가고, 소희의 마음도 마치 우중충한 날씨처럼 무겁
어둑한 조명이 드리운 긴 벤치에 서인이 앉아 있었다. 서늘하고 적막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서인의 앞에 멈춰 섰는데, 임유민이었다. 유민은 미간을 좁히고 냉정하게 말했다.“이제 가세요.”서인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저었다.“난 유진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그러자 유민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차가운 기운이 스며든 눈빛으로 그는 조용히 말했다.“전 삼촌을 원망하지 않아요. 누나가 삼촌을 혼자 좋아한 거, 그건 우리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번 일은 누나와의 마지막 정리라고 생각하세요.”“이제 누나는 삼촌을 찾지 않을 거니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마세요.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다시 찾아오지도 마세요.”유민의 말은 칼날처럼 서인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머리가 더 깊이 숙여졌고, 눈동자는 공허했다.유민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조용히 등을 돌려 병실로 돌아갔다.새벽녘이 되자, 임지언이 병원에 도착했다. 평소 침착하고 냉정한 그도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임지언은 병실로 향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유진이는? 상태가 어때?”상황을 전해 들은 뒤에야, 그는 비로소 깊게 숨을 내쉬었다.임지언은 곧장 병상으로 다가가 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리고, 유진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한없이 애틋한 눈빛을 드리웠다.그러고는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유진아, 아빠가 너를 잘 지켜주지 못했구나. 그러니까, 제발 어서 일어나거라.”우정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겨우 가라앉혔던 감정이 다시 북받쳐 올라 참을 새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날 밤, 임지언과 우정숙은 잠도 자지 않고 유진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밤에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서인은 그 비를 피하지 않았다. 마치 조각상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서인은 온몸이 흠뻑 젖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해가 떠오를 무렵 소희가 서인을 찾았다. 소희는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