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해덕과 그의 가족은 회장에서 초라하게 나왔다. 소해덕은 아직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소희가 King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소해덕은 방 안을 이리저리 몇 바퀴 돌더니 물었다.“소정인, 어디 있어?”큰아들인 소정춘이 서둘러 대답했다.“정인이는 아마 뒤에서 진연과 소동이를 챙기고 있을 거예요.”그러자 소해덕이 급하게 말했다.“소동을 챙길 게 뭐가 있다고 챙겨? 전화해, 빨리 전화해!”“네, 알겠어요.”소정춘은 곧바로 소정인에게 전화를 걸었고, 한참 지나자 겨우 연결되었다.“정인아, 아버지가 너를 찾고 계셔.”소해덕은 아예 전화를 낚아채며 물었다. “정인아, 넌 지금 어디에 있어?”해덕의 물음에 소정인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동이가 쓰러졌는데, 기자가 너무 많아서 집으로 데려왔어요.”“소동은 신경 쓰지 말고 지금 당장 소희를 데리고 집에 와.”“그리고 우리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고 발표하고 환영식을 치러야 해!” 소해덕이 급하게 말하자 하순희는 옆에서 비웃으며 말했다.“지금은 이미 늦었어요. 아버님, 저번 축하 파티때 형님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소희를 양녀로 말했잖아요. 잊으셨어요?”하순희의 말에 소해덕은 잠시 멈칫하며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고, 장연경은 무심히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소희를 양녀라고 하더니, 소희가 King인 걸 알고 나서 바로 말을 바꾸면, 저희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통화를 하고 있던 소정인도 장연경의 말을 듣고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잠시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이게 다 너희 두 사람 때문이야. 소희가 도경수의 제자라는 중요한 사실조차 몰랐어.”“다른 사람의 딸은 보물처럼 여기고 있으면서, 정작 우리 집안의 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어!”“내가 얼마나 많이 말했는데, 소희를 집으로 데려와서 잘 대해야 한다고, 너희는 듣는 시늉조차도 하지 않았지.”“그리고 이제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이 모든 것을 수습해야 하니 정말 기가 차는구나!”“진연이
소정인은 침대 옆에서 깊은 한숨을 쉬고는 방을 떠났다.소동은 눈을 떴는데, 눈에는 원망과 증오가 가득했다. 이불을 꽉 움켜쥐고 있었지만, 손끝은 얇은 이불을 뚫고 그녀의 손바닥까지 파고들었고, 피가 흘러 하얀 이불을 적셨다. 마치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 같았고, 마음이 이보다 더 찢어질 수가 없었다.소동은 소희가 다시 한번 본인의 미래와 모든 것을 망쳤다고 생각하며 분노에 휩싸였다.왜 소희가 King인 것일가?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인가?북극 디자인 작업실에서 처음으로 진석이 소희를 그토록 믿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진석과 여정은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날 전화에서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소동이 망신당하는 걸 보고 싶었던 것이었고, 이제 소동이한테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고 완전히 끝장났다.진연은 소동이 쓰러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기에, 소희, 여정, 진연,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미웠다.소정인이 방에 놓고 간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자 확인해보니 담당자였다. 소동은 숨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당신, 왜 전화를 안 받아? 당신이 우리 회사에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켰는지 알고는 있지?” 담당자의 화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예전의 친절함은 온데간데없었다.“회사가 당신이랑 계약을 해지할 거야. 당신의 거짓말과 속임수로 회사에 큰 손해를 입혔으니, 회사는 당신을 고소하고 배상금과 위약금을 요구할 거고.”“또한 당신이 맺은 모든 광고 계약도 해지될 거고, 위약금도 내야 할거야.”“그리고 ‘여신의 옷장’프로그램 제작진도 전화가 왔어. 당신이 그들의 프로그램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담당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동은 갑자기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뭐가 더 있어요? 당신들 정말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담당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화를 내며 말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당신을
진연은 낙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소동을 선택하고 소희를 포기했어. 그래서 우리를 뼛속까지 미워할 거야.”“소희가 King이라 해도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하지만 소정인의 생각은 달랐다.“우리가 과거에 좀 지나친 짓을 했지만, 피는 속일 수 없어. 그리고 소희도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소정인의 말에 진연은 어이없다는 듯 비웃었다.“소희가 그렇게 독한 앤데 우리를 봐주기라도 하겠어요? 난 이 모든 게 소희의 계략이라고 생각돼.” “소동이 높은 자리에까지 가게 한 후에, 다시 추락시키려고 일부러 그런거고. 이 시점에 자신이 King이라고 밝힌 것도 우리한테 복수하기 위해서고.”“아마 처음부터 그 디자인을 소동이 보게 한 것도 계획의 일부였을 거야.”소정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은 너무 망상이 심해. 소희가 그럴 리 없어!”이에 진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왜 그녀가 지금 나타나서 자신이 King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소희는 일부러 소동을 그 덫에 빠뜨리고,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어요.”“정말 악독하기 그지없어!”정인이 말을 이어가려던 참에, 가정부가 달려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사모님, 소동 아가씨가 자살 시도를 하신 것 같아요!”“뭐라고?” 정인은 황급히 일어섰고, 진연은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소동의 방으로 올라갔다.2층 소동의 방에서, 소동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한 팔이 침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소동의 손목이 베여 피가 카펫 위로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고, 흰 카펫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 충격적인 광경에 모두가 경악했다.“아!” 진연은 공포에 질린 소리를 질렀고, 정인은 달려가면서 가정부에게 지시했다.“즉시 지혈대를 가져와. 그리고 구급차에 전화해!”가정부는 두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갔다.15분 후, 구급차가 소동을 데리고 갔다. 소씨 집안 앞에서 잠복하던 기자들도 이 사건을 즉시
“소희야, 왜 소동이 조금만 성공하면 네가 나타나서 망치는 거야?”“나에게 편애한다고 미워하고,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한테 화풀이하지, 왜 소동을 해치는 거야?”“걔가 죽어야 만족할 거야?”진연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진연과 반대로 소희의 눈빛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차분했다. “왜 지금까지 저를 탓하고 있는 거죠? 소동이 디자인을 훔쳐서 예능 프로그램에 참가한 게 저 때문인가요?”“소동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되레 나를 공격한 것도 저 때문인가요”“아니면 소동이 오만하고 거만하게 행동해서, 나를 공격하기 위해 물의를 일으킨게 나 때문이라는 거예요?”그러자 진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어, 너 때문이잖아. 네가 일부러 그 디자인을 소동이 볼 수 있게 한 거잖아, 네가 소동을 해치려고 계획한 거야!”말도 안되는 소리에, 소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놀란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비웃듯이 말했다. “진연 씨, 당신과 소동 모두 피해망상이 있는 거예요? 좋아요. 내가 백번 양보해서 그 디자인을 소동에게 보여줬다고 해요.”“그래도 그건 걔가 명예와 이익에 눈이 멀어서 훔친 거죠. 만약 소동이 정직했다면, 내가 앞에다 갖다 놔줘도 보는 척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고, 전화기 너머에서 진연의 희미한 울음소리와 무력함, 공포가 느껴졌다. 하지만 어쩐지 소희는 전화를 끊지 않고 계속 듣고 있었고, 소희는 진연의 울음소리를 듣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초가을이었고, 해당화 나무의 잎들은 이미 노랗게 변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몇 잎이 떨어져 내렸고, 땅에는 이미 잎이 한 겹 쌓여 있었다.오랜 침묵 끝에, 진연이 다시 말을 꺼냈다. “소희야, 만약 소동이 살아난다면, 내가 널 낳았다는 것을 생각해서 소동을 용서해 줘.”“네가 나타난 이후에 소동이 이렇게 변했어. 소동은 네가 자신의 사랑과 자리를 빼앗을까 봐 두려워했어. 그래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거야.”소희는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대
임구택은 회사에서 처리할 일이 있어 전화를 끝내고 돌아왔지만, 소희가 방에 없었다. 의아한 구택은 잠시 멈춰 서서 소희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그녀의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문 너머로 뜰을 볼 수 있었는데, 소희는 뜰의 계화 나무 아래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가 있는 긴 원피스를 입은 소희에, 햇빛이 금괴화 나무의 가지와 잎 사이로 비치며 등에 그림자를 비췄다. 그 모습은 외롭고 쓸쓸해 보이자 구택은 마음이 아파, 바로 소희를 찾으러 나갔다.뒷마당에 도착해 가까이 가자, 구택은 소희가 손에 작은 야채를 들고 토끼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소희는 누군가가 가까이 오는 것을 낌새를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소희의 밝고 빛나는 미소는 구택에게 방에서 본 소희의 모습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구택은 소희의 옆에 앉았고, 다른 토끼 한 마리가 구택의 발쪽으로 다가와 채소를 달라고 하자 소희는 웃으며 말했다.“토끼가 너무 빨리 자라는 것 같지 않아? 몇 달만에 이렇게 커졌어.”“한 냄비에 다 들어가지 않을 거 같아.”소희는 웃음이 터졌고 가볍게 말했다. “이 토끼는 화진 언니 아들이 키운 거야. 걔가 화내기 전에 조심해야 해.”구택은 입술을 살짝 삐쭉이며 바구니에서 작은 채소를 꺼내 토끼에게 줬다. 토끼가 빠르게 음식을 먹어치우자, 소희는 그 모습을 보며 점점 더 웃음이 나왔다.“배 불렀어? 갑자기 왜 다시 와서 토끼를 먹이는 거야?” 구택이 웃으며 묻자, 소희는 손가락으로 들풀을 만지작거리며 집 지붕을 바라보며 말했다.“갑자기 깨달은 게 있는데,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정말 이유가 없는 것 같아.”“아무리 그 사람이 비열하고 거짓말을 해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사랑할거거든.”구택의 눈빛이 깊어졌다. “소씨 집안사람들이 전화했어? 진연이?”소희는 구택을 눈이 동그래서 쳐다봤고 구택의 날카로움에 놀랐다.“왜 전화했대?”
소희는 손에 남은 마지막 작은 채소를 토끼에게 먹이고 손을 털며 말했다.“가자!”“응!” 임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고 일어섰고 소희가 말했다. “회사로 돌아가. 나는 혼자 집에 갈게.”“회사에 안 가. 오후엔 너랑 있을 거야.” 구택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하자 소희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야? 걱정 마, 소동이 문제가 생기니까 회사가 고용한 물의를 일으키던 사람들은 모두 철수했어”“소동도 응급실에 누워서 나를 괴롭힐 에너지가 없을 거야.”“그냥 너랑 있고 싶어서야!” 구택은 소희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가자!”구택은 회사 일을 정리하고 휴대폰을 끄고는, 오후 내내 소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둘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발코니의 소파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함께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냈다.소희도 휴대폰을 끄고 폭풍 후의 평화로운 오후를 즐겼다.다음 날 저녁, 소시연이 소희에게 전화를 걸어 소동이 전날 밤에 살아났다고 알려줬다. 또한 프로그램 제작사, 스타쉽 매니지먼트, 그리고 소동이 계약한 광고 대행사들이 모두 소동을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하고 배상금을 요구했다.하지만 소동은 갓 깨어나 몸이 아직 매우 약했기에 소동을 대신해 소정인과 진연이 일을 처리해야 했다.진연은 여정이 연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소동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여정은 소동이 자신의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이미 분명히 말했다고 했다.그리고 소동과 친분이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소동이 이미 그들과 연을 끊었기에, 아무도 소동을 돕고 싶어 하지 않았다.결국, 진연은 소정인에게 가지고 있는 두 회사를 팔아 소동의 빚을 갚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소해덕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진연과 소씨 가문 본가 사이에는 신경전이 일어나고 있었다.또한, ‘여신의 옷장’ 이라는 프로그램은 소동의 모든 출연 장면을 삭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 중단 명령을 받았다. 따라서 제작진은 소동을 혐오하고 있었고, 안
이 일은 점차 잠잠해졌고, 다른 스타들의 비밀 결혼과 출산 뉴스로 관심이 옮겨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소시연은 소희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소씨 가문의 일들을 알려주었다. 그랬기에 소희는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소씨 가문의 소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예를 들어, 소동은 이미 퇴원해 집에 돌아왔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다. 우울하고 폐쇄적으로 되어 사람을 꺼리고, 몸이 많이 야위었다고…….그래서 진연은 소동을 위해 심리치료사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소정인은 소동의 배상금을 갚기 위해 결국 두 회사를 팔아, 소동의 모든 빚을 갚았다. 배상하지 않으면 소동은 감옥에 가야 했기에, 이 일로 인해 본가와 정인 사이에 큰 불화가 생겼다.이 일주일 동안 소해덕과 그의 아내는 소희에게 자주 전화를 걸었다. 둘의 태도는 너무나 온화하다 못해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둘은 소희에게 반드시 집에 들러야 한다고 말했고, 소희를 위해 화려한 환영식을 열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소희는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며 늘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임구택은 매일 소희와 함께 출근했고, 회의실을 자신의 사무실로 옮겨 항상 그녀를 지켜보았다. 소희가 소파에 앉아 디자인을 그리는 동안, 구택은 옆에서 회의를 했다.소희가 가끔씩 고개를 돌려 회의를 지켜보았는데, 소희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고위직들을 보며 자신이 희귀한 전시품처럼 느껴졌다.정신적 문제를 겪는 것은 소동이지 소희가 아니었기에, 소희는 구택이 왜 그렇게 긴장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특히 소설아의 태도가 가장 흥미로웠다. 설아는 소희를 볼 때마다 표정이 복잡했지만, 분명한 것은 예전에 소희한테 했던 오만함이 사라진 것이었다.……토요일, 소희는 임씨 저택을 방문했다. 일주일 동안 피하려 했지만, 결국은 피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구택은 한 손으로 운전하며 소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안심시켰다. “걱정 마, 내가 있잖아.”그러자 소희는 구택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나중에 이모가 내게 끓
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농담이에요!” 우정숙이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올라가 봐요. 임유민도 아까부터 소희 씨를 기다리고 있어요.”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계단을 오르며 소희가 임구택에게 물었다. “이렇게 하는 게 좀 그렇지 않나?”소희는 노정순과 우정숙을 매우 좋아했지만, 한 가족으로 녹아들기까지는 아마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괜찮은데?” 구택이 소희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 무엇도 네 행복보다 중요한 건 없어.”구택은 걸음을 멈추고 소희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편을 믿어. 네가 마음대로 살 수 있게 해줄게. 억지로 누군가를 응대하거나, 눈치 볼 필요 없어.”“나랑 결혼했다고 해서 예전에 누렸던 자유를 잃게 하고 싶지 않아.”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눈빛이 반짝였다. “나 억지로 그러는 건 아니야. 정말로 집안사람들 다 좋아해. 그저 가끔 적응하기 어렵고, 굉장히 열정적인데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어.”구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그저 편안하게 받아들이면 돼.”소희는 생각에 잠기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계단을 오르는 하인을 마주치자 소희가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 “유민이 수업 가야 해!”“응.” 구택이 소희의 볼에 뽀뽀하며 말했다. “가 봐.”소희는 수업을 하러 갔고,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유민이 환호하며 달려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를 속였다고 뭐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유민은 평소와 같이 차분히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고, 소희가 들어오자 담담하게 말했다. “탁자 위에 사인 카드가 있으니까 사인해 줘요.”소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말도 없이, 심지어 누구의 사인을 원하는지도 묻지 않고 사인 카드를 들고 사인을 하려고 준비했다.사인을 하려고 할 때, 소희가 뒤돌아보며 물었다.“K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