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는 임유민과 소찬호를 데리고 차를 몰아 시내로 돌아갔는데 찬호는 가는 길 내내 흥분하여 똑같은 말을 여러 번 하였다.“소희 누나, 누나 너무 대단한 거 같아요! 원래도 리스펙 했지만 더 리스펙해요!”흥분한 찬호와 달리 유민은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소희 선생님이 해결 못할 일은 없을 거라고. 도움이 필요하면 소희 선생님에게 부탁하는 게 최고야!”둘이 소희를 입이 침이 마르게 칭찬하자 소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하지 않아. 그저 우연히 구성혁 선생님을 알고 있을 뿐이었지.”소찬호는 앞좌석으로 몸을 기울이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누나, 구성혁 선생님을 어릴 때부터 아셨어요? 그분이 누나를 제자로 받아들이려고 했다고요?”“응, 예전에 구성혁 선생님댁에서 잠시 지냈어. 제자 얘기는 사실 농담이야. 구성혁 선생님도 내가 스승님이 있단 걸 알고 계셨으니까.”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호의 질문에 대답했다.“그럼 누나의 스승님이 더 대단하신 거야?” 소희의 답을 듣자 찬호는 더욱 궁금해져 꼬치꼬치 캐물었다.“예술 분야에선 누가 더 대단한지 비교하는 건 의미 없어. 구성혁 선생님은 단지 세속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라실 뿐이지.”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유민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미간이 찌푸려졌는데 소찬호도 알고 있는 소희의 스승님을 왜 자신만 모르는지 굉장히 불쾌했다.찬호와 소희가 즐겁게 이야기하며 말했다. “누나, 둘째 큰 아빠 집에 가지 말아요. 엄마가 동의하시게 내가 잘 말하면 누나도 우리의 진짜 누나가 될 수 있어요!”유민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썹을 치켜 올렸으나 소희는 웃으며 말했다. “네 엄마가 나를 인정할까?”“물론이죠! 내가 동의하면 우리 엄마도 동의할 거예요.” 찬호가 진지하게 대답하였으나 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마워, 난 너희의 그런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이미 너희랑 소시연의 누나니까.”찬호는 조용히 말했
소희가 운전하며 후방 거울로 임유민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 소희가 묻자 유민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랑 소찬호 중에 누구랑 더 친해요?” 소희는 뜬금없는 유민의 질문에 잠깐 놀라다가 질문 수준이 너무 하찮아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때문에 기분이 나빴던 거야?”“기분 나쁘기는 무슨, 그냥 물어본 거예요!” 유민은 강하게 부정했지만 다들 알다시피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었다.“너희 둘 다 내 동생이야, 똑같이 친해.” “동생이라니, 저희 삼촌이 들으시면 또 혼내시겠네요.”유민이 툴툴거리며 말했다.“네 삼촌이 네가 이렇게 쪼잔한 줄 알면 너도 혼낼 거야.”소희가 웃으며 말하자 유민은 눈을 굴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위험에 처하면 그때도 이렇게 걱정해 줄 거예요?”소희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되물었다.“아니면 어쩔 거라고 생각하는데?”유민은 자신이 납치되었을 때 소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생각을 하자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됐어요, 어차피 앞으로 소희 선생님은 우리 임씨 가문의 사람이 될 거니까. 일단은 찬호랑 비교하지는 않을게요.” 임씨 저택임구택은 집에서 물건을 찾아가려고 차를 주차하고 거실로 들어가자, 집사인 진수미가 맞이했다. “둘째 도련님, 고운서 씨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으셨어요.”구택은 거실에 앉아 있는 여성을 보고 놀랐다. “무슨 일이야?”고운서는 일어서며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이모님과 큰형님 내외가 돌아올 예정이라 왔어요. 어머님과 큰형님을 오랫동안 못 뵈어서 한번 뵈려고요.”구택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께서 일이 생겨서 내일 밤 비행기로 바꿨으니까 기다릴 필요 없어.”“그럼…….”운서는 눈이 반짝반짝해서 말했다.“괜찮아요, 당신한테 할 얘기도 있어서 온 거니까.”운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잠깐 올라가도 돼요?”구택은 무표정으로 말했다. “따라와.”두 사람은 3층으로 올라가 방에 들어갔고 구택은 책장에서 문서를 찾으며 말했다
임구택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난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넌 내가 미워할 가치도 없으니까 나와 소희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돼.”고운서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이미 당신과 충분히 멀어졌어요. 소희를 괴롭힌 적도 없어요. 오늘 여기 온 건 주시후를 용서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예요. 내 이모님을 만나게 해주고 바로 떠나게 해주세요.”“불가능해.” 구택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신후가 돌아오면 나는 신후의 목숨을 노릴 거고 소희가 입은 모든 상처를 신후에게 되돌려줄 거야.”운서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우리 거의 30년을 알고 지냈어요. 내 얼굴을 봐서라도 조금의 여지를 주지 않을 건가요?”“우리의 우정은 네가 소희를 다치게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미 끝났어.”“소희, 소희!” 운서는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다.“당신 마음속에 정말 나에 대한 조금의 마음도 없나요?”구택은 차갑게 대답했다.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마.”운서는 눈물을 흘리며 절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정말 어리석었네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당신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거요.”운서는 뒷걸음질 치며 손에 스프링 나이프를 들고, 날카로운 칼날을 손목 위에 대고 울어서 빨갛게 된 눈으로 구택을 응시했다.“내가 시후 오빠가 소희에게 빚진 것을 대신 갚을게요. 다 갚으면 당신은 만족할껀가요?”구택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나를 협박하는 거야?”“당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협박할 수 있겠어요?” 운서는 구택을 아프게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목숨으로 소희에게 했던 죄를 물을 수 있으면 시후 오빠를 용서해 줄 수 있나요?”위험해 보이는 운서의 모습이었지만 운서를 바라보는 구택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다.“고운서,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럼 한 번 더 바보가 돼 보죠.”운서는 결연한 표정으로 손목을 세게 그었다. 구택이 운
고운서가 가장 슬펐던 것은, 운서가 아무리 극단적인 행동을 해도 임구택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구택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온 마음을 다 바치는 타입이라, 다른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왜 소희만 그렇게 운이 좋은 것일까? 운서는 정말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진수미는 운서의 손을 치료하고, 운서를 일으켜 세웠는데 운서는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지 얼굴이 창백해졌고 일어나자마자 어지러움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서 좀 쉬게 해주세요.” 운서가 약한 목소리로 부탁하자 수미는 운서가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마음이 약해져서 운서를 침실로 안내했다. 침대에 누워서 운서는 눈앞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으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운서는 이전에 자주 임씨 저택을 방문했고, 직원들에게 음식이나 선물을 가져다 주곤 한 그녀의 친절함을 기억하는 수미는 운서를 불쌍히 여기며 잠시 쉬라고 권했다.구택의 이불은 사용하지 않고, 수미는 새 얇은 담요를 가져다 운서에게 덮어주었다. 운서는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며 담요를 끌어올려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가렸다.수미는 거실을 정리하러 갔는데 거실 바닥에는 피가 튀었고, 방 안에는 약간의 피 냄새가 나 창문을 열고, 바닥 카펫도 새것으로 교체했다.……소희는 임씨 저택으로 차를 몰고 가자 임유민은 집 밖에 주차된 차를 보고 기뻐하며 말했다. “삼촌이 집에 계시네요!”소희는 내리고 싶지 않았지만, 유민에게 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수미는 세탁실에서 고운서의 피 묻은 옷을 빨고 있었고, 이선 아주머니만 집에 있었다.“삼촌은 어디 계세요?” 유민이 묻자 이선 아주머니는 소희와 인사를 나눈 뒤 웃으며 대답했다.“둘째 도련님은 위에 계세요.”유민은 소희의 손목을 잡고 3층으로 올라갔다. “우리 둘이서 삼촌을 놀래켜요.”“삼촌이 놀랄 거라고 생각해?” 소희가 웃으며 물었다.“누나도 함께 있잖아요. 놀라지 않는다면 다른 의미로 서프라이
고운서는 소희를 보고 얇은 담요로 몸을 가렸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희를 바라보았다.“임구택을 찾으러 왔나요?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요.”임유민의 눈에 분노가 번졌다. “삼촌 어디 계세요?”“전화 받고 옆 서재로 갔어요.” 운서가 대답하자 유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주먹을 꽉 쥐었다.“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운서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임유민, 예전엔 나한테 이렇게 대하지 않았잖아!”“당신이 삼촌을 유혹한 거야, 맞지?” 유민이 차갑게 말하자 운서는 비웃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봐!”운서가 말을 마치자, 거실에서 걸어 들어오는 구택을 보았다. “봐, 왔네!”소희는 뒤를 돌아보자 구택과 눈이 마주쳤는데 구택이 놀라 하자 소희의 마음이 무너졌고 유민은 분노에 차 구택을 노려보았다. “삼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구택은 잠시 당황하며 침대 위의 고운서를 바라보았다. “넌 왜 여기 있는 거야?”“다행히 안 갔네.”소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려 하자 구택은 당황하여 소희의 손목을 붙잡았다.“소희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내 손 놔!”소희가 차갑게 말하고는 손목을 돌려 그의 손에서 벗어나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구택은 큰 보폭으로 그녀를 따라가자 소희는 갑자기 멈춰 서더니 눈가가 빨개진 채로 말했다.“나 따라오지 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난 하나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구택의 눈엔 당황한 기색으로 가득 찼다.“소희야, 네가 지금 오해를 하고 있어!”“나 좀 진정하게 내버려 둬!”소희는 마음이 굉장히 복잡한 상태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자 구택은 주저 없이 소희를 따라나섰고 유민은 문에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진수미는 운서의 옷을 빨아 건조한 뒤 가져왔는데 문 앞에 서있는 유민을 보고 놀랐다. “작은 도련님, 언제 오셨어요?”유민의 표정은 차가웠고 화가 나서 말했다. “운서 옷을 왜 빨아주는 겁니까? 당신은
소희가 임구택의 손을 피했다. 평소와 다르게 아무런 광채가 없는 소희의 두 눈동자는 곧 하늘을 뒤덮을 저녁 빛 마냥 암담했다.“나 혼자 있고 싶어.”“구은서는 주시후의 일 때문에 날 찾아온 거야. 그러다 흥분되어 칼로 손목을 그은 거고, 난 단지 가정 이모보고 상처를 치료해주라고 했을 뿐이야.”구택이 어두워진 눈빛으로 정색해서 해명했다.그러자 소희가 물었다.“그럼 왜 당신 침대에 있는 건데?”“나도 몰라. 나 줄곧 옆방 서재에 있었어.”소희가 듣더니 두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구택은 마음이 무거워져 다시 말을 이어갔다.“당신이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에게 말해줘, 이러지 말고.”하지만 소희는 임구택을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당신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우리 서로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 아직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 내가 다른 여인이랑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계속되는 구택의 해명에 소희가 이마살을 찌푸린 채 애원했다.“나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러는데, 혼자 조용하게 있게 해주면 안 돼?”“안 돼.”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하고 싶은 말이거나, 아니면 의심이 가는 점이 있으면 다 말해, 내가 설명해 줄 수 있어.”“모르겠어, 그냥 혼자 있고 싶어.”“아니, 이럴 때일수록 당신 혼자 있게 할 수는 없어.”소희의 두 눈에 순간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났다.“구택 씨, 우리 사이에 줄곧 문제가 있었어, 안 그래?”구택이 잠깐 멍해 있더니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데?”소희가 손가락을 긴 머리 사이에 끼워 넣고 짜증이 묻은 눈빛으로 흩어진 머리를 뒤로 빗어 넘겼다. 마음속은 헝클어져 버린 실 뭉치처럼 복잡하여 어떻게 정리할 수가 없었다.“말해 봐, 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데?”구택이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로 소희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이에 소희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며 입을
마음이 아픈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미안해, 내가 잘못한 거 같아.”“아니, 난 동의하지 않아.”구택이 어두워진 얼굴색으로 말했다.“당신이 뭘 하든 상관없어, 단 헤어지는 건 절대 안 돼. 오늘의 일은 나의 잘못도 있어, 그러나 난 절대 당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지 않았어. 당신이 언짢아하든, 나와 대화하는 걸 거부하든, 화를 내든 다 괜찮아, 헤어지는 것만 제외하고. 내가 전에 말했듯이 난 절대 당신을 놓아주지 않아. 내가 죽기전까지 당신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날 수 없다고.”순간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든 소희는 두 팔 사이에 얼굴을 묻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구택 씨, 서로를 괴롭히는 감정은 오래가지 못해.”‘예전에 용병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팀원사이의 감정에 금이 가기만 하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목숨을 잃게 되기에 반드시 바로 팀을 해산해야 하는 것처럼.’‘두 사람 사이의 감정도 똑같은 거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료와 마찬가지로 서로의 목숨을 상대방의 손에 맡기는 거나 다름이 없는 거니까, 아무리 작은 장벽이나 금도 용납해서는 안 돼.’“소희야, 서로에 대한 믿음은 키워 나갈 수 있는 거야. 우리에겐 다시 믿음의 벽을 세울 수 있는 시간이 많으니, 절대 포기하지 말아줘.”구택이 소희를 안으려고 손을 내밀었다.하지만 구택의 손이 소희의 어깨에 닿자마자 소희가 무의식 중에 몸을 피했다.순간 구택은 찬물에 맞은 것 마냥 손끝마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구택 씨, 나 좀 혼자 있게 해줘. 나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구택이 천천히 손을 거두고 두 눈을 아래로 드리우고 조롱하듯 웃음을 드러냈다.“나보고 어디로 가라고?”“그럼 내가 나갈까?”되묻는 소희의 목소리는 덤덤했다.순간 구택의 눈동자가 세게 한번 떨리더니 곧바로 빛을 잃게 되었다.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소희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구택은 마음이 아파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러다 천천히 일어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무서워서 그러는 거잖아요.]임구택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너도 나와 소희 사이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아?”[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되잖아요. 연애라는 게 뭐가 더 있겠어요?]구택이 듣더니 낮은 소리로 웃었다.[걱정하지 마, 소희가 꼭 네 둘째 숙모로 될 거니까.][꼭 소희 쌤을 잘 달래야 해요! 그리고 그 구은서라는 여인이랑은 더 이상 연락하지 말고요.]“응.”통화를 끊고 구택은 창밖의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칠흑 같은 두 눈동자는 살얼음이 떠 있는 것 마냥 차가웠다.……청아 집에서 돌아온 뒤, 소희는 서재에서 디자인 원고만 새벽 1시까지 그렸다.그러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은서가 구택의 침대에 누워있던 모습이 끊임없이 머리속에서 맴돌고 있어 전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일은 절대 할 리가 없다는 걸 소희도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이 갑갑한 건 여전했다.그렇게 한참 뒤척이다 서너 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고, 날이 밝자마자 소희는 곧 다시 깨어났다.평소 이맘때 구택의 집에서 자던 소희가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구택은 분명 소희의 곁으로 다가와 소희를 한참 ‘괴롭’히다 같이 조깅하러 갔을 것이다.그러나 오늘은 오지 않았다.유난히 정신이 흐리멍덩한 소희는 두 시간을 더 자다 8시가 되어서야 다시 일어났다. 그러고는 간단히 씻고 침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마침 구택이 집 문을 열고 들어와 손에 든 아침밥을 식탁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다 기척에 고개를 들었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눈동자로 봐서는 온 밤 제대로 자지 못한 듯했다.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친 순간, 소희는 바로 시선을 돌리고 침실 입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아침 먹고 나가.”그 모습에 구택이 아침밥을 식탁에 꺼내 놓고 따뜻한 우유도 컵에 따라 놓은 후, 한마디만 남기고는 다시 집을 나섰다.식탁 앞에 앉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보고 있으니 소희는 목이 메어 아무런 입맛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