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청아를 바라보며 그녀의 옆 얼굴에 입술을 살짝 맞추었다. 그러고는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순간, 청아는 온몸의 피가 얼굴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어 힘껏 시원을 밀쳤다.“요요 보러 가요 어서!”시원이 소리 없이 가볍게 웃으며 경망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부끄러워하긴, 습관 되면 괜찮을 거야.”“시원 씨…….”청아가 가볍게 입술을 한번 말아 물고는 시원의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시원이 곧 그녀의 말허리를 끊었다.“시원 오빠라고 불러야지.”“싫어요!”청아의 얼굴에 불쾌함이 묻어 있었다.이에 시원이 한 걸음 양보하기로 했다.“그럼 저녁에 그렇게 부르는 걸로 하고.”청아가 조용히 시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시원 씨, 우리 지금 어떤 관계인 거죠?”“연인 관계.”시원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어떤 연인 관계요?”“당연히 진지한 연인 관계이지.”“3개월이요?”시원이 잠시 멈추더니 되물었다.“3개월 후에 끝났으면 좋겠어?”청아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러자 시원이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한번 도전해보자.”‘3개월이면 청아가 나의 마음속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아내기에 충분하겠지? 청아도 3개월 안에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도전해 볼 수 있고.’청아가 맑고 깨끗한 눈동자로 한참 고민하고 나서 천천히 대답했다.“그렇게 해요. 단 저는 우리의 관계를 공개하고 싶지 않아요.”자신에게 퇴로를 남겨주고 있는 것이었다.시원이 듣더니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청아의 부탁에 승낙했다.“그래.”“그럼 먼저 나가줘요, 저 옷 갈아 입어야 해요.”“내가 보는 게 쑥스러워?”시원이 낮은 소리로 웃으며 농담을 내던졌다. 그러고는 청아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청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한번 맞추고는 애정이 묻은 어투로 말했다.“내가 요요를 보고 있을 테니까 불편하면 좀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나.”청아가 두 눈
“연희 이모!”요요가 연희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달려왔다.이에 연희가 요요를 들어 안아 두 바퀴 돌고는 말했다.“이모 오늘 요요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을 사왔는데!”요요가 연희의 품에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단순한 즐거움에 주위의 어른들도 저도 모르게 따라 즐거워졌다.시원은 자신이 집에 있으면 청아가 많이 불편해할 것 같아 요요를 품에 안고 자상하게 말했다.“편하게 이야기 나눠요, 난 요요와 밖에서 놀고 있을 게요.”“어디 가는데요?”청아의 물음에 시원이 품속의 요요를 보며 물었다.“요요는 어디로 가 놀고 싶어?”“해피 놀이터요!”시원이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아를 향해 말했다.“우리 해피 놀이터에서 놀다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게. 저녁에 구택이도 불러서 같이 밥 먹자, 내가 쏠 터니까.”옆에 있던 연희가 농담 묻은 어투로 끼어들었다.“경사가 나서 그런가? 시원 씨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이네요?”청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연희를 한번 노려보고는 요요를 향해 당부했다.“함부로 뛰어다니지 말고, 아저씨의 말을 잘 들어야 해.”“네!”놀이터를 엄청 좋아했던 요요의 작은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고, 청아의 당부에 시원의 어깨를 꼭 껴안고 대답했다.시원이 요요를 데리고 집을 떠난 후 연희가 가져온 디저트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청아를 향해 물었다.“어젯밤에 함께 있기로 한 거야?”분명 어제 낮에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주 이성적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변해 있었으니.청아가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는 괴로운 표정을 드러냈다.“욕하고 싶으면 욕해, 나도 왜 승낙했는지 모르겠어.”“네 탓 아니야, 시원 씨의 매력이 흘러 넘쳐서 그렇지.”연희가 위로하 듯 청아의 머리를 다독이며 말했다.하지만 연희의 위로에 농담이 묻어 있다는 걸 눈치챈 청아는 더욱 난감해졌다.그러자 소희가 이미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마음 속의 결정에 따르면
소희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일하고 있는데 방해한 거 아니야?]“아니. 솔직히 나 지금 당신 생각하고 있어.”구택이 창문 앞에 서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이에 소희가 낮은 소리로 한번 웃고는 다시 물었다.[내가 평소에 먹던 약을 어디에 뒀어?]“누구에게 주려고?”[장시원 씨.]구택이 나지막하게 웃었다.“침실 캐비닛 두 번째 서랍에 있어.”[알았어. 계속 일 봐.]소희가 지니에게 인사하고는 구택의 집으로 들어갔다.구택이 손목 들어 시간을 한번 확인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방금 시원이 나에게 연락이 왔어. 나 이제 한 시간 더 있으면 돌아갈 거니까 저녁에 보자.”[응, 알았어.]소희가 전화를 끊고 침실로 들어가 서랍을 열었다. 그러다 안에 가지런히 놓인 약상자들을 보고는 순간 멍해졌다.전에 구택이 그녀에게 피임 약을 많이 준비했다고는 했지만, 서랍 가득 갖춰진 약을 직접 보고 나니 여전히 심장이 한번 움츠러들었다.‘구택 씨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야.’‘다들 구택 씨가 나를 그토록 사랑하는데 분명 아기도 엄청 원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구택 씨는 반대로 이렇게 많은 피임약을 준비하고 있어.’‘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거지?’……소희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소시연의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언니! 오늘 ‘여신의 옷장’ 첫방 날이야! 나 너무 긴장돼!]소희가 가볍게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침착해, 이건 첫 시작일 뿐이야.][나 꼭 언니가 쟁취해 준 기회에 부끄럽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할 거야! 우리 엄마도 엄청 기뻐하셨어, 그러면서 집안 친척들에게 오늘 저녁 무조건 ‘여신의 옷장’ 첫방을 봐야 한다며 통지까지 하셨다니까, 하하! 언니, 나 정말 이번 기회는 언니가 쟁취해 준거라고 엄마에게 알려주고 싶어.][괜찮아. 네 노력만 보여주면 돼.][그럼 이제 내가 방송에서 성공하고 유명해지면 그때 가서 엄마한테 사실대로 말하게 해 줘! 나 정말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진짜
하룻밤 사이에 프로그램은 여러 짤로 만들어져 각 동영상 사이트에 퍼졌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프로그램과 게스트를 토론하는 화제에 합류하였다.비록 방송에서 세 스타와 각 디자이너가 같이 제작해낸 작품이 심사위원의 점수에 의해 승패가 갈렸지만 프로그램이 대박을 치게 되면서 게스트 전부 관중들의 관심을 받았다.소희는 이른 아침 소시연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언니, 우리 성공했어!]휴대폰 맞은편에 있는 시연의 넘치는 기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축하해.][하지만 이번에 소동이에게 진 것만 생각하면 여전히 달갑지 않아. 다음 회차에서는 내가 반드시 소동이를 이길 거야!][꼭 그럴 수 있을 거야.]같은 시각, 인터넷에서 열띤 토론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찬양 속에서 King의 팬이 갑자기 의문을 제기했다.[님들, 소동의 창작 스타일이 King과 비슷한 것 같지 않으세요?]그리고 곧 그 댓글 아래에 많은 댓글이 달렸다.[맞아요, 정말 비슷해요. 어젯밤 첫방 볼때부터 느꼈는데.][지금 많은 디자이너들이 King의 스타일을 본뜨고 있으니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도 크게 놀랄 필요는 없을 듯.][King이 국풍 디자인 쪽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첫방의 주제가 마침 고풍이고 하니 다들 비슷하다고 느끼시는 거 아닐까요?][국풍이 이미 King의 대명사로 되었으니 님들이 무의식적으로 King을 떠올리고 있는 걸 거예요. 소동 디자이너의 다음 번 작품이나 기대해봅시다.][그러게, 소동처럼 뛰어난 신인에게도 기회를 줍시다. 다들 먼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말고 좀 더 지켜보자고요.]……이번 프로그램 때문에 기뻐하고 있는 건 소씨 가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 세 명의 디자이너 중 두 명이나 그들 소씨 가문의 딸이었으니까.이른 아침, 진연과 하순희는 분분히 소씨 본가에 그 좋은 소식을 알렸다.순희는 프로그램이 대박 났고 시연과 소동 두 사람 모두 유명해졌다고만 전했다.하지만 진연은 특별히 강조했다.[소동
소정인이 멋쩍게 한번 웃고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같은 시각, 위층에서 소동은 지훈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소동아, 나 정말 널 다시 보게 되었어. 넌 나의 자랑이야!]휴대폰 맞은편의 지훈이 기뻐서 말하자 소동이 쑥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저 지훈 씨를 속이지 않았죠? 이 프로그램 정말 대박 났어요.”[그것도 다 네 덕분이지. 오늘 우리 아버지께서 특별히 나를 호출해 엄청 칭찬해 주셨어, 나의 안목이 독특하다고, 또 이번 프로그램의 광고 협찬이 우리 가문에 큰 효익을 가져다주었다고. 고마워, 소동아! 우리 저녁에 만나자, 내가 너의 대박을 축하해주려고 식당까지 예약했거든.]그날 이후, 소동과 지훈은 이미 여러 차례 데이트를 했었다. 하지만 소동은 지훈에게 쉬운 여자라는 이미지를 주고 싶지 않아 결국 거절했다.“오늘 저희 부모님도 저를 축하해 주기 위해 식당을 예약해서요, 저희는 아무래도 다음번에 만나야 할 것 같네요.”[하지만 나 지금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매일 밤 네가 보고 싶어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야.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회의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네 생각이 나 미칠 것 같아.]지훈의 애정 멘트에 소동은 마음이 흔들렸는지 웃으며 말했다.“그럼 내일에 만나요.”[그래, 그럼 네 말 대로 하루만 더 참을 게.]그렇게 두 사람은 애정 멘트를 한참 더 주고받고 서야 겨우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동의 휴대폰이 또 울렸고, 수신번호를 확인한 순간 소동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휴대폰 벨 소리는 소동이 받기전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기세로 계속 울리고 있었다.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소동은 결국 언짢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누나, 축하해. 인터넷 보니까 누나가 참가한 그 프로그램이 대박 났더라?]휴대폰 맞은편에서 추소용이 히죽거리며 말했다.이에 소동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일인데? 나에게서 돈 요구할 생각이면 끊어, 너에게 줄 돈이 없으니까.”[누나, 사실 나 친구랑 같이 투
소동이 전화를 끊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진연이 바로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소동아, 엄마가 너의 첫방 대박을 축하해 주려고 사이 꽤 좋은 친구 몇 명을 불렀는데, 가고 싶은 식당이 있어?”소동이 듣더니 속으로 냉소를 드러냈다.‘내가 아직 쓸모 있는 것 같으니 바로 이렇게 태도가 돌변하네.’하지만 소동은 모든 원망과 불쾌함을 마음속에 묻어둔 채 해맑은 웃음을 드러내며 진연의 곁으로 달려갔다.“엄마가 알아서 결정해요, 전 아무런 의견도 없어요.”진연이 자신의 품에 달려든 소동을 껴안고 부드러움과 사랑이 가득 찬 눈빛으로 소동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소동이 제일 장해! 이번에 누가 감히 또 우리 소동의 험담을 하는지 엄마가 두고 볼 거야.”“제가 그랬잖아요,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거라고.”소동의 애교에 진연은 더욱 기뻐했다.“우리 착한 딸!”그런데 이때 소정인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늘 우리 쪽에서 한턱 쏘는 날이고 또 이렇게 큰 경사가 났는데 이 기회를 빌려 소희도 불러오자, 다 함께 앉아 밥 먹으면서 오해를 풀어나가는 것도 좋잖아.”진연이 듣더니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럴 필요까지 있어? 어차피 이 일은 그 아이와 상관도 없는데.”이에 소동이 눈빛 한번 반짝이더니 바로 웃으며 말했다.“엄마, 화내지 마요. 아빠도 그냥 언니를 불러와 가족끼리 오손도손 밥을 먹으려고 그러시는 거잖아요. 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괜찮긴 뭐가 괜찮아?”하지만 진연은 다시 냉소를 드러냈다.“넌 이렇게 좋은 일만 있으면 그 아이를 생각하지만, 그 아이는 언제 네 생각을 한 적이 있어? 항상 널 밟고 올라갈 생각만 하고 있잖아.”정인이 듣더니 바로 정색하여 진연에게 귀띔했다.“소동이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마.”“아무튼 난 그 아이를 불러오는 거에 동의하지 않아. 게다가 나 오늘 손님도 초대했단 말이야. 우리 한 번도 소희를 공개한 적이 없는데 그때 가서 어떻게 유 부인과 하 부인에게 소희를 소개해?”“그럼 이 기
화요일 오후, 강솔은 소희에게 연락해 주예형이 저녁에 친구들을 불러 한턱 쏘기로 했다고 알렸다.강솔의 남자친구로서 강솔의 친구와 한 번쯤 만나봐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소희도 마침 강솔을 여러 해 동안 쫓아다녔던 남자가 궁금했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다 곧 퇴근할 때가 되어 소희는 임구택에게 전화해 오늘 작은 모임이 있어 저녁 늦게 돌아갈 것 같다고 알렸다.구택이 듣더니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또 연희 씨와 모이는 거야?]“아니, 강솔이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우리에게 소개시켜 준대. 나도 강솔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걸 금방 알게 되었어.”[진석 씨도 가?]“아마도? 왜?”구택이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야. 끝나기 전에 알려줘, 내가 데리러 갈게.]“알았어.”전화를 끊은 후 소희는 물건을 정리하고 바로 넘버 나인으로 출발하려고 사무실로 돌아갔다.그런데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소희는 휴대폰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급히 고개를 돌려 눈가를 닦는 미나를 발견하게 되었다.“미나 씨, 왜 그래?”요 며칠 미나는 줄곧 컨디션이 다운된 채 자주 멍해 있기만 했다.소희의 물음에 미나가 고개를 숙이고 초췌해진 얼굴로 대답했다.“소희 씨, 저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요.”소희가 잠깐 멍해 있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 미나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며칠 전에 저희가 데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남자친구가 조치는 취하지 않고 저더러 약을 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몸이 안 좋아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만약 정말로 아이를 가지게 되면 결혼하자고 했죠. 그런데 남자친구의 안색이 순간 변해버리더라고요. 제가 바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저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거냐고 물으니까 얼버무리며 성의도 없게 해석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수상해 보였어요.”미나가 눈물을 흘리며 작은 소리로 흐느꼈다.“그래서 남자친구가 잠든 틈을 타 그의 휴대폰을 봤는데 글쎄, 다른 여인이랑 썸 타고 있는 거 있죠? 심지어 그 여인이랑 제가
미나가 입을 헤벌리고 우는 것보다 더 못난 웃음을 드러냈다.“걱정 마요, 저 그딴 쓰레기 때문에 바보짓까지 하는 사람 아니에요. 단지 저 자신 때문에 우는 거예요.”사리에 밝은 미나의 모습에 소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다시 한번 다독이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사무실에서 나오니 뜨거운 햇빛이 바로 몸에 내리쬐었다.벌써 늦여름에 접어 들었는데도 날씨는 여전히 짜증이 날 정도로 무더웠다.차를 몰고 넘버 나인으로 향하는 길에 슬피 울던 미나의 얼굴이 계속 소희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고, 소희는 눈썹을 찡그리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가는 길이 너무 막혀 소희가 넘버 나인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오늘따라 석양은 평소처럼 그렇게 예쁘지만 않았다. 오히려 옅은 회색 안개가 낀 것 마냥 강성 전체를 뒤덮고 있어 유난히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소희가 주차하고 넘버 나인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희 씨!”소희가 듣더니 몸을 돌려 찬연하게 웃었다.“내가 가장 늦게 온 줄 알았는데.”“강솔의 꾸물거리는 성질로 봐서는 우리 둘이 제일 먼저 도착한 것 같은데요?”아니나 다를까, 예약한 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몇 분 후 진석도 도착했지만 강솔은 여전히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하영이 강솔에게 연락을 했고, 강솔의 해맑은 목소리가 바로 휴대폰 맞은편에서 들려왔다.[벌써 다 도착한 거예요? 저희 지금 길에 막혀 있어 좀 더 걸릴 것 같으니까 먼저 드시고 싶은 걸 주문하세요.]“주인공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먼저 음식을 주문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농담하지 말고요. 저와 뭘 그렇게 사양하시는 거예요?]“너랑은 당연히 사양 안 하지, 하지만 오늘 한턱 쏘는 사람이 네가 아니잖아.”하영의 농담에 강솔이 기쁨과 행복이 섞인 어투로 대답했다.[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요, 저희도 곧 도착해요.]“그래.”하영이 전화를 끊고 웃으며 말했다.“사랑에 빠진 여인은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