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집은 구조상 방음이 좋지 않다.장시원은 그 욕실을 생각하며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설렜다. 자신과 우청아가 같은 샤워 젤을 쓴다는 사실에 새삼 신기해졌다. 술기운이 서서히 몸을 감쌌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욕실에서 나는 소리가 멎었고, 옆방 문이 조심스레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의 불도 꺼졌다.시원은 옆방 문 닫는 소리를 듣고 괴로워했다. 그래도 자기 전에 한번 자신을 보러 올 수 있지 않는가. 손님이기도 하고 지금 청아의 집에 머물고 있으니. 그런데 청아는 왜 잠자리가 괜찮은지 물어보지도 않는 걸까?’‘정말로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걸까!’시원은 화가 났다. 왜 여기에 머물려 했는지 속상함에 몸을 뒤척이며, 새벽 늦게야 잠이 들었다.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났다. 낯선 집이라 복도 스위치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방으로 돌아왔다.그리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시원의 품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첫 번째 생각은 ‘또 어떤 여자가 나의 침대에 올라온 걸까?’였다.시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를 밀쳤다.“내가 화내기 전에 스스로 나가!”그런데 그 여자는 청아였다. 청아는 시원이 밀치는 바람에 깨어나, 침대에 낯선 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시원도 일어나 어둠 속에서 청아와 눈이 마주쳤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며 불편한 감정이 고조되었다.“우청아, 당신이 왜 내 침대에 있어요?”청아는 당황해서 그를 걷어찼다. “이건 당신 침대가 아니라고요!”시원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청아에게 차여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청아도 놀라 시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침대에서 떨어졌다.청아는 시원의 품에 안겨 떨어졌다. 시원은 이 기회를 이용해 청아 위에 가만히 있었다. 다행히 청아가 요요를 위해 바닥에 카펫을 깔아 놓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잠깐의 침묵 끝에 청아는 그를 밀쳐냈다.“일어나세요!”“움직이지
우청아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잠시 후, 청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직 술이 덜 깬 거예요?”장시원은 낮게 웃으며 이마를 그녀의 귀에 더 가까이 대고 말했다. 겉보기에는 애정이 담긴 포즈였지만, 그의 말투는 한없이 냉담하고 무심했다. “난 자주 당신이 생각나요. 여자가 나에게 접근할 때마다 항상 당신이 생각나죠!”청아는 어둠 속에서 깊이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심장은 격렬히 뛰었지만, 그의 말투가 어딘가 잘못된 듯했다. 시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거의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전 다시 여자를 만지고 싶지 않아졌어요. 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나를 허연에게 팔아 넘겼잖아요! 내가 얼마나 역겨워했는지 알아요? 다른 여자를 만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역겨워요!”청아는 숨을 죽이고 들었다. 시원의 목소리는 냉정했다.“우청아, 내 몸에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마음에 문제가 있는 건지 말해봐요.”청아는 놀란 눈으로 시원을 바라보았다. 시원이 술에 취해 그런 비밀을 털어놓을 줄은 전혀 몰랐다. 술에서 깨어나면 자신을 해치려 들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청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체검사나 심리상담을 받아보는 게 어때요?”청아의 말이 끝나자, 시원의 숨결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청아도 말을 잇지 못했다. 시원은 분노했다. 그는 청아의 턱을 잡고 차갑게 그녀를 응시했다.“당신이 나에게 보상하는 방법은 찾지 않고 의사한테 보내려고요? 나를 온 강성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어요?”청아는 내심 두려웠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시원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보상할 거예요?”청아는 그의 냉정한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딘가 낯설고 뭔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어떻게 보상하길 원해요?”시원은 청아를 응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동시에 애정 어린 듯했다. “저는 2년 동안 여자를 만지지 않았어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요?”청아
청아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어둠 속에서 어깨가 가볍게 떨라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소희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눈이 크게 떠졌다.방문이 열리는 순간 키가 큰 남자가 문 앞에 나타났다.남자는 소희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자기야, 잘 잤어?”소희는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너 어떻게 들어온 거야?”소희는 어젯밤 문을 꼭 닫은 것으로 기억한다.당황해하는 소희와 달리 구택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다.구택은 서서히 소희 곁으로 다가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그의 차분하면서도 언제나 냉담하게 보이던 얼굴이 아침 햇살에 의해 훨씬 부드러워졌다.미소를 띠며 그는 할 말을 다시 가다듬었다.“참, 내가 깜빡하고 자기한테 얘기하지 않았네. 집 살 때 자기 이 집까지 내가 같이 샀어.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우리 자기 집주인인 셈이야. 집주인이 키를 가지고 있는데 뭐가 문제라도 돼?”그러자 소희는 말문이 막혔다.‘그래! 돈만 많으면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거지!’“잘 잤어?”구택은 맑고 그윽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고 있다.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잘 잤어.”“왜 나한테 잘 잤냐고 안 물어봐?”“인사가 늦었습니다. 집주인께서는 어젯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아니, 난 한숨도 제대로 못 잤어. 우리 세입자 생각하느라 잠이 와야 말이지.”그러자 소희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어차피 평소에도 제대로 못 자잖아.”소희의 일침에 구택은 단번에 안색이 어두워졌다.하지만 곧 눈썹을 들썩이며 주도권을 도로 잡아 왔다.“근데, 너랑 같이 자기만 하면 난 푹 잘 수 있어. 넌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소희는 더 이상 그의 말꼬리를 받지 않았다.“너 먼저 나가 있어. 씻고 나갈게.”“볼 것 다 본 사이에 이러면 섭섭하지.”구택은 말하면서 직접 소희를 이불에서 끌어안았다.소희는 잠옷 한 세트를 반듯하게 입고 있었다.이 모습을 본 구택은
청아는 자기 자리로 다가와 앉았다.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다듬고 하루의 업무를 시작하기로 했다.오전 내내 시원은 무슨 일이든 최결에게만 부탁했다.평소에 청아가 책임져야 했던 업무도 모두 최결에게 맡겼다.그뿐만 아니라 청아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기원의 협력 방안마저도 최결에게 넘겨주었다.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에 최결은 한껏 흥분한 얼굴로 대표 사무실에서 걸어 나왔다.그녀는 그대로 청아 곁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청아 씨, 저는 점심시간에 대표님과 함께 참석해야 하는 협상 회의가 있어요. 아마 좀 늦게 돌아올지도 몰라요. 그동안 다른 업무는 청아 씨가 처리해 주세요. 남은 자료들도 부탁할게요.”최결은 다소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청아에게 말했다.마치 시원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청아가 아니라 자기라고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이제 알겠어? 대표님은 아끼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그렇게 최결은 기타 자질구레한 업무를 전부 청아에 떠넘기고 시원과 함께 기원으로 가서 협상 회의에 참석할 준비에 전념했다.청아는 아무런 불평불만도 없이 최결의 업무를 건네받았다.12시도 되지 않아 최결은 예쁘게 차려입고 시원과 함께 회사를 떠났다.청아는 오후 1시쯤이 다 되어서야 손에 든 일을 다 마치고 밀린 점심을 먹으려고 12층으로 갔다.점심을 먹고 나서 청아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서 업무를 계속 보았다. 시간은 서서히 흘러 오후 3시가 되었고 최결은 그제야 회사로 돌아왔다.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재무부의 안나와 업무상의 얘기를 나누고 나서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안나는 부러워하며 운을 뗐다.“대표님이 최결 씨한테 점점 잘해주시는 것 같아요. 기원과의 중요한 협상 회의에도 최결 씨만 데리고 가셨잖아요.”그러자 최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과 함께한 세월이라는 게 있는데, 설마 그 모든 세월이 부질없겠어요?”최결은 말하면서 청아가 있는 쪽을 흘겨보았다.그러다 씩 웃으며 덧붙였다.“저희 대표님은 밥이나 해주고 내숭이나 떠는
시원의 눈빛을 떠올린 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청아는 정신을 차리고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지금이 딱 좋아. 내가 원했던 거잖아.’‘그래! 더는 신경 쓰지 말자!’청아는 입가에 느긋한 미소를 지었지만, 두 눈에는 여전히 복잡한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입가의 미소마저도 곧 사라지고 말았다.금요일 오후에 시원과 최결은 한창 회의실에서 회의하고 있는데, 민율이 갑자기 시원을 찾아왔다.그녀는 짧은 머리를 자르고 옷 스타일도 바꾸었는데 여전히 아름답기 그지없다.넓은 긴 치마에 짙은 남색 스카프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요조숙녀가 따로 없었다.민율은 핸드백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청아에게 말했다.“대표님 입맛대로 커피 한 잔만 부탁해요.”“네.”청아는 웃으며 커피 한 잔을 따라 탁자 위에 놓았다.민율은 핸드백에서 모 브랜드의 립스틱을 꺼내서 청아에게 건네주었다.“지난번에 제가 청아 씨한테 선물을 드리지 못했어요. 자, 이 립스틱 선물로 받으세요.”케이스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립스틱은 불빛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한눈에 봐도 가치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하지만 청아는 단번에 거절했다.“고맙습니다만 마음만 받을게요.”그러자 민율은 눈썹을 들썩이며 되물었다.“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CL에서 이번에 새로 나온 디자인인데, 프리미엄 제품이라 사고 싶어도 사기 힘든 제품이에요.”“필요 없습니다.”청아의 태도는 더없이 단호했다.“그래요 그럼.”민율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맑고 솔직한 청아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립스틱을 탁자 위에 놓고 고개를 들어 다정하게 웃으며 청아에게 말했다.“요즘 대표님 찾으러 온 여자는 있었어요? 아니면 대표님이 대신 선물을 사 달고 시킨 적은 없었나요?”청아는 사실대로 말했다.“아니요. 없었습니다.”그러자 민율의 두 눈에는 기쁨이 드러났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앞으로 대표님 찾으러 오는 여자분이 있으면 저한테 좀 알려주실래요? 이건 제 명함이에요. 우리 서로 연락
최결은 민율이 손에 들고 있는 립스틱을 보고 경탄했다.“이거CL에서 이번에 새로 나온 디자인이죠? 케이스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진짜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우 비서가 선물로 달라고 한 모양이네요.”청아는 비아냥거리는 최결을 뒤로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아직 밀린 업무가 있어서 전 그만 실례하겠습니다.”말을 마치고 청아는 몸을 돌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시원은 청아의 뒷모습을 한 번 보고 민율의 손에 있는 립스틱도 한 번 훑어보았다.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민율에게 물었다.“여긴 어쩐 일로 온 겁니까?”그러자 민율을 마냥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제가 먼저 찾아오지 않으면 우린 만날 수도 없잖아요.”최결도 몸을 돌려 두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었다.“사무실로 가시죠.”시원은 덤덤하게 말했다.민율은 그의 말에 두 눈이 밝아지며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하고 따라 들어갔다.최결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청아에게 눈썹을 치켜세웠다.“봤어요? 우리 대표님이 좋아하는 여자는 저분이에요.”청아는 그녀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그리고 고개를 들었는데, 두 눈은 여전히 깨끗하고 덤덤했다.“저기요, 최 비서님, 전 그 어느 방면으로든 최 비서님에게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저를 적대시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최결은 약간 경악한 표정으로 청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물론이죠.”청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계속 일했다.한편, 대표 사무실.민율은 넓은 책상 앞에 서서 몸을 숙여 앞으로 엎드려 한 쪽 다리를 들고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아양을 떨며 시원을 바라보고 있다.“머리 짧게 잘랐는데, 어때요? 예뻐요?”시원은 뒤로 등을 의자 기대어 입꼬리를 올렸다.“예쁘네요.”“그럼, 저녁에 제가 식사 자리 한 번 마련해도 될까요?”“제가 저녁 대접할게요.”시원은 두 눈에서 부드러운 감정이 흘러나오면서 나지막하게 웃었다.“인제 저를 마다하지 않네요? 제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이제야
“네, 알았어요.”청아는 전화를 끊자마자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무슨 일로 또 찾아가신 거지?’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 확실했다.처음부터 하온을 남자친구라고 소개를 해버린 것이 실수였다.거짓말 하나가 수많은 번거로움을 가져올 줄은 몰랐다.청아는 손을 들어 흩어진 머리카락을 위로 모으고 짜증이 나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청아는 회사 주소를 하온에게 보냈다.그리고 시간을 한 번 보고는 그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4시 반쯤에 청아는 물건을 정리하고 퇴근하려고 했다.엘리베이터로 갈 때 뒤에서 갑자기 문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청아 씨.”청아는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그러자 시원과 문율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보아하니 두 사람은 데이트하러 가려는 것 같았다.청아를 바라보는 시원의 눈빛은 여전히 무관심한 가운데 냉기를 띠고 있다.“이제 퇴근하시는 거예요?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제가 가는 길에 바래다 드릴까요?”문율은 기분이 좋아서 유난히 친절했다.“고맙습니다. 전 괜찮습니다.”청아는 심지어 그들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싶지도 않았다.입술이 유난히 붉은 문율은 시원에게 팔짱을 끼고 있다.“시원 씨 비서 꽤 재미있는 것 같아요.”그러자 시원은 청아를 흘겨보며 웃는 듯 마는 듯했다.“뭐가 재미있다는 거죠?”문율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청아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문율과 시원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문율은 고개를 돌리자, 청아가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게 되었다.그리하여 청아에게 웃으며 말했다.“어서 타세요. 편하게 타도 괜찮아요. 청아 씨네 대표님 그렇게 빡빡한 사람 아니에요.”청아는 시원을 한번 보았다.하지만 그녀는 곧 눈을 내리깔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청아는 가장 뒤쪽으로 들어가서 두 사람과 거리를 두었다.문율은 줄곧 시원의 팔짱을 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었다.“제 친구가 바 오픈했는데, 와 달라고 노래를 불렀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는 마침내 1층에 멈추게 되었다.시원은 등을 꼿꼿하게 펴고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문율도 그의 발걸음을 쫓아 나갔다.청아는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는데, 방금 시원의 말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그러나 아직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온이 생각에 더는 지체하지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회사 건물을 나서자, 시원과 문율은 아직도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하온은 차에서 내려 청아에게 인사했다.“청아 씨, 이쪽이에요.”청아는 하온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그녀는 오늘 연희로부터 선물을 받은 오피스 룩을 입었다.치마 기장은 평소보다 좀 짧고 몸에 붙는 재단이 마침 몸매를 감싸 아름다운 곡선을 드러냈다.뒤에서 보면 더욱 영롱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다.문율은 웃으며 청아에게 말했다.“데이트 잘해요!”청아는 감히 몸을 돌리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즉시 시원 앞에서 사라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다.하온의 두 눈에는 석양이 비추면서 반짝이는 눈빛으로 청아를 바라보았다.“오피스 룩도 너무 잘 어울리네요.”청아는 덤덤하게 웃었다.원래 뒷좌석으로 앉으려고 했는데, 이미 주동적으로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는 하온을 보고하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문율은 하온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시원에게 말했다.“방금 청아 씨가 좀 재밌다고 했었잖아요, 실은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좀 이상해요.”시원은 앞의 차 그림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어디가 이상한데요?”“경계심이 너무 많은 거 같아요. 조금 전에도 분명 남자 친구인데, 아니라고 했잖아요.”문율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웃었다.이때 운전기사는 이미 차를 몰고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시원은 곧 발을 들어 차에 올랐다.문율은 시원의 얼굴에 어느새 웃음이 사라지고 눈빛도 다소 음침해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청아는 즉시 하온에게 물었다.“형수 아버님은 무슨 일로 찾아간
강아심은 그에게 대답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돌리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이 살짝 빛났다. 아심은 가능한 시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벽 구석에 깨진 도자기 조각이 보여. 우리가 어떻게든 가서 그걸 손에 넣어야 해.”깨진 도자기 조각은 절반이 먼지 속에 묻혀 있었고, 아마도 산에 올라온 사람들이 여기서 밥을 먹다 그릇을 깨뜨리고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놓은 것 같았다.여자의 숨결이 부드럽게 시언의 귀를 간질이며 퍼졌다. 아심의 부드러운 입술이 열렸다 닫히며 그의 귀밑 민감한 피부를 살짝 스쳤다. 시언은 몸이 순간 굳어졌다가 늦게서야 대답했다.“소용없어.”“뭐?” 아심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이 줄엔 합금 섬유가 섞여 있어. 칼로도 자를 수 없으니 도자기 조각으로는 더더욱 불가능해.”시언이 낮게 말하자, 아심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낮게 속삭였다.“정말 당신을 특별대우해 주긴 하네요!”이번엔 시언이 이해하지 못했다.“응?”“아니, 그런 거지! 일부러 합금 줄까지 써서 묶어놨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분명 이런 대접 못 받을걸요!” 아심이 말하자, 시언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가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었다.어느새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그들을 감시하던 사람들이 교대로 밖에 나갔다 돌아왔다. 마지막 교대 때는 가면을 쓴 남자가 부하들을 데리고 모두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텅 비었던 방은 순식간에 꽉 찼다. 용병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험상궂은 인상에,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방 안 공기를 긴장감으로 가득 채웠다.시언과 아심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섰다. 시언은 벽에 몸을 대고 서서 손으로 아심의 등을 감싸며 가면 남자를 주시했다.가면을 쓴 남자는 남자는 방 한쪽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른 용병들은 방 안에 나무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방금 비가 내린 터라 산속은 밤이 되면서 습기와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
강아심은 용병에게 조하루네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용병은 냉랭하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기억해두었고, 하루가 망설이자 바로 그를 들어 어깨에 둘러메고 밖으로 걸어갔다. 이에 하루는 몸부림치며 울먹이며 외쳤다.“삼촌, 누나!”점점 그 목소리는 멀어져 갔다.아심은 목이 메었지만, 하루를 떠나보내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임을 잘 알고 있었다.오두막 바깥에서는 시언에게 맞아 쓰러진 자들이 동료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부상이 심한 자들은 땅에 누워 쉬고, 가벼운 부상자들은 안으로 들어와 명령을 기다렸다.가면을 쓴 남자는 밖에 나가 전화를 걸고, 돌아와 자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저들을 잘 지켜보고 있어. 윗선의 지시를 기다려.”“예!” 몇몇 용병들이 대답했다.가면 남자는 다시 밖으로 나갔고, 다른 용병들도 따라 나갔다. 오두막 안에는 두 명의 용병만이 남아 시언과 아심을 감시하고 있었다.잠시 후, 시언은 갑자기 아심을 들어 올려 돌며 옆에 있던 대나무 침대에 넘어졌다. 손발이 묶여 있어 힘 조절이 어려웠고, 그가 아심 위에 넘어지며 아심은 깜짝 놀랐다. 시언은 바로 몸을 뒤집어 아심이 자신의 위에 있도록 했다.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감시 중이던 용병들은 깜짝 놀라 총을 겨누었지만, 두 사람이 단순히 침대에 누워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천천히 총을 내렸다.아심은 약간 고개를 들어 아래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언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두 사람이 줄에 묶여서 뻣뻣하게 서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누워 있는 게 그나마 나아.”아심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요?”그러자 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이보다 더 위험한 상황도 겪어봤어. 걱정하지 마, 난 쉽게 죽지 않아.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도 절대 죽지 않을 거야.”아심은 그들을 감시하는 용병들을 한 번 흘깃 보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를 바로 죽여 노도를
시언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노도를 위해 복수하러 온 건가?”가면을 쓴 남자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변성기를 사용한 탓에 그 웃음소리는 거칠고 듣기 거북했다. 마치 산속에서 이빨을 드러낸 야수가 내는 소리 같았다.“진언이 설마 노도의 죽음을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남자가 손짓하자, 바로 누군가가 하루를 그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하루의 목을 쓰다듬으며 냉소를 지었다.“이게 진언의 아들인가?”“아니!” 시언이 차갑게 응수했다.“보기엔 아닌 것 같지만, 진언은 무고한 아이가 본인 앞에서 죽는 걸 원하지 않겠지?”가면을 쓴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하루는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지고 온몸이 떨렸다. 하루는 고개를 돌려 시언을 바라보며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지만, 도움을 청하거나 가면 남자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았다.이때 아심이 차갑게 말했다.“그 아이는 마을에 사는 평범한 농가의 아이야. 내가 인질이 될 테니 그를 풀어주고 집으로 돌려보내.”가면을 쓴 남자가 시언을 보며 물었다.“진언의 생각은 어때?”시언은 들고 있던 총을 내던졌다.“우리 조직에는 조직만의 규칙이 있어. 여성이나 아이를 인질로 잡는 건 가장 비열한 용병들만 하는 짓이야.”“너희들이 원하는 건 나니까 나를 마음대로 처리해. 하지만 여자와 아이는 산 아래로 보내.”아심이 시언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젓자, 시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낮고 깊은 눈빛을 보냈다.“내 말을 들어.”아심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때, 가면을 쓴 남자가 거칠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아이는 풀어줄 수 있어. 하지만 이 여자는 안 돼. 이름은 넘버세븐. 진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지? 내가 틀리지 않았군!”시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면 남자를 노려봤다. 그의 시선은 차갑게 얼어붙었다.“그럼 아이부터 풀어줘!”“서두르지 마. 그 아이가 내 손 안에 없으면, 이 사람들로는 진언을 막아낼 수 없어. 내가 그 정도는 알고
강아심이 몸을 드러내는 순간,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두 개의 창문을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던 아심은 결국 한 사람과 몸싸움을 벌이게 되었다.아심은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가능한 한 빠르고 강력하게 상대의 약점을 노려 공격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창문을 통해 밀려들었고, 하루가 숨던 곳에서 고개를 내밀자 한 고용병이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들어가!” 아심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발로 근처에 있던 나무 의자를 걷어차 상대의 어깨를 가격해 총을 떨어뜨렸다.“탕!” 총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방아쇠가 당겨졌고, 총알이 벽을 뚫고 나갔다.아심은 두 명을 밀어내며 하루가 숨은 대나무 침상으로 다가가 그를 보호했다. 그 순간 또 다른 고용병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 하루가 숨은 침상 밑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아심은 몸을 날려 고용병의 총을 걷어차며 떨어뜨렸고, 다시 그 총을 잡으려는 찰나 또 다른 고용병 두 명이 그녀를 공격해 왔다.아심은 한 남자의 팔을 비틀어 탈골 시키고, 몸을 회전시켜 다른 남자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했다. 아심의 힘은 이 고용병들보다 약했지만 몸놀림이 민첩하고 공격이 매끄러워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그러나 그 순간, 대나무 침상 위로 한 남자가 뛰어올라 침상을 들어 올리며 하루를 붙잡아 칼을 그의 여린 목에 들이댔다.“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이 아이를 죽일 거야!”이와 동시에 문이 거칠게 열리며 시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시언이 지나온 길에는 이미 쓰러진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언의 등장에 방 안의 고용병들은 더욱 경계하며 총을 모두 그에게 겨누었다.가장 가까이 있던 고용병이 아심의 머리에 총을 겨누자 시언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총으로 겨누지 마.”고용병은 시언의 서늘한 시선을 받자 손이 떨렸지만,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시언은 천천히 아심 쪽으로 걸어갔다. 고용병의 눈빛은 두려움이 엿보였고, 본
조하루가 즉시 과일 주스를 시언에게 내밀며 말했다.“삼촌, 이거 드세요. 저를 그렇게 오랫동안 업어 주셨잖아요. 고마워요!”시언은 얇게 입가를 올리며 주스를 다시 돌려주었다.“난 누나와 장난친 거야.”“아...”시언은 최대한 표정을 부드럽게 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효과는 없었다. 조하루는 멍하게 대답하며 다시는 시언을 쳐다보지 못했다.아심은 입술을 꽉 다물며 웃음을 참았고, 차마 대놓고 웃을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 빵을 베어 물었다.숲속에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 창가에 앉아 방 안을 들여다보며 검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쭈쭈 하고 소리를 내면서. 아직 인간에게 위협을 느껴본 적 없는 새는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아심은 빵 부스러기를 조금 떼어 창가에 놓았다. 새는 신나게 부리로 쪼아먹었지만 다 먹기도 전에 갑자기 날아가 버렸다. 시언은 창 아래에 서 있는 아심을 보며 반쪽 남은 빵을 들어 올렸다.“천천히 먹어, 난 밖에 좀 보고 올게.”아심은 시언이 문을 나가는 걸 보고 하루에게 속삭였다.“볼일 보러 가야 해? 삼촌이랑 같이 가면 돼!”하루는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갔다. 아심은 천천히 빵을 다 먹고 물병을 집어 들고 막 마시려던 순간, 밖에서 탕! 하고 커다란 총성이 들려왔다.아심의 얼굴이 굳어졌고,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시언이 떨고 있는 하루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는, 곧바로 따라오던 한 남자를 발로 차서 밖으로 날려 보냈다.그는 고개를 돌려 매우 빠르게 말했다.“지켜, 절대 나오지 마. 창문도 다 잠가!”문이 열리는 그 순간, 아심은 이미 상황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미 포위당한 상태였다. 나무집 주위는 전부 위장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용병들로 가득했고, 적어도 스무 명이 넘었다.문이 닫히고 난 뒤, 바깥에서는 치열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아심은 조하루를 안전한 곳에 숨기고 두 개의 창문을 빠르게 닫은 뒤, 창을 야생 동물로부터
강시언이 앞서 걸었고, 중간에는 조하루, 뒤에는 강아심이 따라갔다.비에 젖어 미끄러운 산길을 걸으며, 아심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조하루에게 지팡이 삼아 주었다. 세 사람은 고요하고 습한 산림 속을 조용히 지나갔다.겨우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뿐인데, 하루는 이미 지쳐 헉헉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어린아이라 무리가 있는 듯했다.아심은 걸음을 멈추고 하루의 앞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자, 내가 업어줄게!”시언이 돌아서더니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을 아심에게 넘기며 말했다.“내가 업을게!”하루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겁먹은 듯 시언을 올려다보았다.“저, 저 아직 괜찮아요.”“아직 한참 남았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어? 올라와!” 이번에는 시언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냉정하고 단호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하루는 아심을 바라보았다. 아심의 격려하는 눈빛을 본 후에야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며시 시언의 등에 올라탔다.시언이 일어서자 조하루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시언의 넓고 든든한 등에 안겨, 하루는 안전감을 느꼈다. 시언은 고개를 돌려 아심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아심도 미소를 지으며 뒤따랐다. 열몇 개의 계단을 더 오르던 중, 하루는 손에 쥐고 있던 비타민 젤리를 시언의 입가에 내밀었다.“아저씨, 이거 드세요!”시언은 원래 거절하려 했으나, 아심이 늘 이 아이들이 자신을 무서워한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 한 손을 뻗어 젤리를 받아 입에 넣었다.하루의 검게 빛나는 눈이 환하게 반짝였고, 시언이 자기가 준 젤리를 먹자 무척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시언이 젤리를 씹으며 물었다.“더 있어?”하루는 허둥지둥 젤리 통을 꺼내 다시 시언에게 주려 했지만, 그가 말했다.“뒤에 있는 누나한테 두 알 줘.”하루는 그제야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에 다섯 여섯 개의 젤리를 쥐고 아심에게 내밀었다.“누나!”아심이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와 하나를 집었다.“고마워!”하루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지만, 아
“네!” 하루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이는 눈빛을 보였다. “정말 맛있어요, 우리 다들 엄청나게 좋아해요.”“하루에 두 알만 먹어야 해,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아심은 자연스럽게 하루와 대화를 이어갔다.“알아요, 선생님이 우리한테 말씀해 주셨어요.” 하루의 미소는 순수하고 귀여웠다.시언은 그들이 뒤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룸미러로 아심을 흘깃 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아심을 데리고 오길 잘했다. 아니었으면 이 작은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어둡고 흐린 날씨에,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 차창이 물안개로 덮여 바깥 풍경이 희미하게 변해 있었다. 차 안은 조용했지만, 아심과 하루의 대화와 빗소리, 그리고 쉼 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차가 한 시간 정도 달린 후, 시언은 뒷좌석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심은 이마를 차창에 대고 잠이 들어 있었다.하루는 창문에 성에 낀 자국을 손가락으로 그리다가, 시언이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자 얼른 손을 내리고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똑바로 세웠다. 시언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자기 외투를 벗어 소년에게 건넸다.“이거 좀 도와줘. 누나에게 덮어줘.”아심은 얇은 회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고, 그녀가 운성에 왔을 때 날씨가 더워서 두꺼운 옷은 가져오지 않았다. 하루는 외투를 받아 조심스럽게 아심의 몸에 덮어주었다.시언은 아심을 한 번 더 보자,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에 시언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차는 산길을 따라 다시 30분가량을 달렸고, 드디어 앞쪽에 무너진 도로가 보였다. 더는 차로 갈 수 없었다.“네 물건 잘 챙기고, 여기서 내려야 해.” 시언이 하루에게 말했다. “산을 돌아서 넘어가야 하거든.”“네!” 하루는 대답하며 자신의 가방을 메고, 안에 들어 있는 옷과 책을 잘 챙겼다.“삼촌, 누나를 깨울까요?” 하루가 묻자, 시언은 표정을 굳히며 뒤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시언은 이미 아침을 먹었을 거라 생각한 아심은 따로 묻지 않고 혼자 아침을 먹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아심은 평소처럼 전화를 걸어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오늘은 아이들이 다시 수업을 시작하는 날이라 아심은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가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러 갔다.도서관 입구에 들어서자, 그녀는 도도희와 시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은 무언가 심각하게 상의하고 있었고, 그 대화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산길이 비에 무너져서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어. 차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산길을 올라가야 해서 너무 위험해.”도도희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시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비가 많이 오진 않으니까 시도해 볼 만해요.” 이때, 아심은 다가가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생겼나요?”시언은 아심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분명히 옷 따뜻하게 입으라고 한 것 같은데.”오늘 아심은 얇은 검은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시언의 지적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도도희 앞이라 반박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곧 가서 갈아입을게요.”도도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아심에게 설명했다.“한 학생의 할아버지가 병이 너무 위중해서 의식이 흐려졌대.”“그런데 할아버지가 계속 손자를 찾고 계셔서 가족들이 전화로 아이를 데려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봤어.”도도희는 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시언은 아이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산길이 위험할까 봐 걱정돼.”“위험할 게 뭐 있어요?” 시언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그렇게 해요. 아이한테 준비하라고 전해주고, 곧 출발할게요.”시언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고, 아심도 뒤따라가며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요.”시언은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안 돼.”“왜 안 돼요?” 아심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시언을 따라붙었다.“그 애들이 얼마나 당신을 무서워하는지 모르죠? 혼자 데려가
차에 올라탄 지아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큰어머니, 이제야 제가 한 말 믿으시겠죠?”권수영은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눈빛이 반짝였다.“저 아가씨, 혹시 남자친구 없나?”“물론 없죠!”“그럼 기다릴 필요 없겠네. 빨리 승현이와 만나게 해야겠어.” 권수영은 이미 마음이 급해져 있었다.“제가 재아에게 말만 하면 분명히 승낙할 거예요.” 아윤은 눈을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할머니의 혼수품도 되찾고, 오빠에게 좋은 여자친구까지 소개해 드렸으니, 큰어머니께서 저를 어떻게 보상해 주실 건가요?”권수영은 속으로 이익을 따져 보며 생각했다. 만약 도씨 집안과 결혼까지 성사된다면, 그야말로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었다.“네가 승현이와 저 아가씨를 이어준다면, 내가 할머니의 혼수품을 되찾아도 그중 절반은 네 몫으로 줄게.”“정말 약속하신 거죠?” 아윤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내가 직접 약속했는데 속이겠니?”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반드시 최선을 다할게요!”...집에 돌아온 아윤은 바로 재아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권수영과의 만남 이유를 은근히 흘리며 설명했다. 그리고는 지승현을 칭찬하며 그와 한번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재아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속으로 기분이 상했다. 첫째는 자신이 누군가의 결혼 상대자로 몰래 계획된 것 같아서였고, 둘째는 현재 중간급인 지씨 집안과 연결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재아는 시큰둥한 태도로 말했다.“야, 그런 얘기를 진작해주지 그랬어? 미안하지만 난 지금 연애할 생각 없어. 아마 큰어머니께서 실망하실 거야.”아윤은 재아의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채고 급히 사과했다.[미안해, 재아야. 정말로 큰어머니께서 그냥 너를 보고 싶어 하셔서 그런 거야. 괜한 부담은 갖지 마.]아윤이 이렇게 간곡히 사과하자, 재아는 약간 기분이 풀리며 말했다.“괜찮아. 나 화난 건 아니야. 그냥 난 당분간 일에 집중하고 싶어. 외할아버지도 내가 빨리 결혼하길 원치 않으셔.”아윤은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