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에요, 믿음은 상호적인 거잖아요.”소희가 진심이 담긴 눈빛으로 이 감독을 향해 가볍게 한번 웃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그리고 떠나는 소희의 뒷모습을 보며 이 감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소희 씨가 이 업계를 떠나는 그날까지, 난 반드시 최선을 다해 소희 씨를 보호할 거야.’장씨 그룹.아침 일찍, 최결이 대표 사무실로 들어가 장시원에게 오늘의 일정을 보고했다.“오전 9시, 정대 인수 건에 관한 임원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태위 대표님이 오늘 돌핀호텔에서 생일잔치를 주최할 거라고 반달 전에 대표님에게 청첩장을 보내왔는데, 제가 이미 선물을 보내 드렸습니다.”“그리고 점심, 셰엘호텔에서 연회가 열리는데, 혜성과 함력의 대표님도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 후엔…….”한참 후, 하루의 일정 보고가 드디어 끝났고, 최결이 잠깐 뜸을 들이다 다시 공손하게 말을 이어갔다.“대표님, 혜성과의 협력에 관해서는 줄곧 제가 책임졌으니, 점심에도 제가 대표님과 동행할까요?”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보고 있던 장시원이 듣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럼 점심 연회는 최 조수님이 책임지고 가주세요, 난 따로 볼 일이 있어서.”“네, 그렇게 하겠습니다.”여전히 웃으며 대답하고 있는 최결이었지만, 눈빛에는 약간의 실망이 담겨 있었다.오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고, 최결은 점심에 연회에 참석해야 해서 일찍 옷을 갈아입고 회사를 떠났다.그러다 곧 정오가 되니 장시원이 사무실에서 나와 일하고 있는 청아를 향해 말했다.“옷 입어, 장 보러 슈퍼 가게. 나 점심에 갈비 먹을 거야.”“점심에 다른 일정이 없으세요?”“없어.”장시원이 담담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전혀 청아를 기다리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이에 청아는 어쩔 수 없이 급히 컴퓨터를 끄고 부랴부랴 쫓아갔다.차 안에서,조용히 운전하고 있는 장시원의 표정은 이상하게 냉담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몇 번이고 곁눈질을 한 청아가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다음에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정소연 아버지의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려왔다.[실은 소연의 외삼촌이 며칠 전에 병이 나서 화남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화남병원에 가정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상대로 무료 병실을 제공해주는 정책이 있다던데, 그걸 신청할 수만 있으면 병실을 무료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타 비용도 엄청 많이 줄여줄 수 있대요. 그래서 청아 씨의 남편이 어떻게 소연의 외삼촌을 위해 무료 병실을 신청해 줄 수 있을지 묻고 싶어서 연락한 거예요.]‘남편?’낯선 두 글자에 얼굴색이 순간 변한 청아는 급히 스피커를 끄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운전하고 있던 장시원이 갑자기 청아가 뻗은 손을 찰싹 때렸다. 그러고는 차갑게 청아를 한번 흘겨보았다.이에 청아가 따끔해진 손등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만약 정책의 조건에 부합되는 거라면 직접 가서 신청하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하하, 부합되지 않으니까 이렇게 청아 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잖아요. 청아 씨의 남편이 화남병원의 부주임이니, 한번 잘 말해주면 무조건 될 거예요.]“죄송해요, 아저씨. 이건 제가 어떻게 도울 수가 없을 것 같네요.”[청아 씨, 이게 청아 씨 남편에게 있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제발 좀 도와줘요.]“정말 미안해요, 아저씨. 사실 하 선생님은 제 남편이 아니에요.”정소연 아버지의 태도가 너무 간절해 청아는 더 이상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입술을 깨물고 사실대로 말했다.그리고 청아의 말에 정소연 아버지가 깜짝 놀라 목소리마저 높아졌다.[뭐라고요? 하지만 그날 강남의 집에서 분명 하 선생이 청아 씨의 남편이라고 우리한테 소개했었잖아요?]끽-정소연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차가 갑자기 길옆에 멈추었고, 아무런 마음 준비도 없었던 청아는 그렇게 등받이에 부딪치고 말았다.어느새 슈퍼에 도착했던 것이다.하지만 장시원은 차에서 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노여움과 한기가 용솟음치고 있는 눈빛으로 청아를 노려보았다.이에 청아는 얼굴색이 창백해져 난감한 표정
“저 그렇게 시비도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방금 대표님이 저를 도와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대표님을 탓하겠어요.”“그래서, 그 하온이라는 의사가 좋아?”“아니요.”“그럼 남편은 어떻게 된 거지? 너 정말 정씨네 가족 앞에서 하온이 네 남편이라고 소개했어?”장시원의 차가운 목소리에 청아는 어쩔 수 없이 그날의 상황을 간단하게 말해주었다.그리고 그걸 다 듣고 난 장시원은 화가 난 나머지 한심한 눈빛으로 청아를 흘겨보았다.“우청아, 난 네가 아무리 나약해도 최소한의 원칙은 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 그런데 너…….”대체 뭐라고 욕해야 청아가 정신을 차릴지 몰라 장시원은 결국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쳐다보았다.자신이 화를 참지 못하고 청아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렵기도 해서.하지만 청아는 장시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자조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한테 실망하셨죠?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우씨 집안의 사람이라 우씨 집안의 일에 대해 무심하게 방관할 수가 없거든요. 비록 저희 엄마가 지금은 오빠를 더 편애하고 있다지만 지난 20년 동안, 저희 엄마가 저를 낳아주셨고, 저를 대학까지 뒷바라지해서 보냈어요.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저희 엄마가 저한테 잘못한 거 없어요. 엄마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라고요. 대표님은 저와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서 일반 가정의 고민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장시원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차 안은 순간 고요함에 빠졌다.그런데 이상하게 장시원에게 다 털어놓고 나니 청아는 기분이 오히려 많이 좋아졌다.‘정씨네 가족들이 이것 때문에 불만이 있는 거라면, 내가 가서 사과하면 돼.’‘난 우리 집에 신세를 졌지만, 정씨네 집에 신세 지지 않았어.’“이만 갈비 사러 가요.”한참 후, 청아가 먼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리고 장시원이 듣더니 어처구니가 없어 바로 냉소를 드러냈다.“내가 지금 갈비 먹을 기분이 있게 생겼어?”장시원의 말
장시원을 바라보고 있는 청아의 눈동자는 의외로 깨끗하고 맑았다.“비록 저 돈이 많은 건 아니지만, 은혜에 보답할 줄은 알아요. 그러니 오늘은 제가 내게 해줘요.”“다음에.”장시원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담담하게 말했고, 청아가 듣더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청아의 웃는 얼굴은 이상하게 단아하면서도 깜찍했다.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간질간질해진 장시원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소리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한참 후, 주문한 음식이 하나 둘씩 올라오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그런데 이때, 청아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허홍연이었다.허홍연이 이 시간에 전화를 한 이유를 눈치챈 청아는 더 이상 장시원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급히 휴대폰을 들고 룸을 나서려 했다.그러나 장시원이 청아의 의도를 단번에 간파한 듯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여기서 받아.”“…….”청아가 장시원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천천히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엄마.”[청아야! 너 정씨네 가족한테 뭐라고 한 거야? 방금 정씨네 가족이 연락이 와서는 한바탕 화를 냈어! 그러고는 우리 집안의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네 오빠와 소연의 혼사를 다시 고민하겠대!]다짜고짜 청아의 죄를 묻는 허홍연의 목소리가 휴대폰 맞은편에서 들려왔다.정소연의 외삼촌이 화남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씨네 가족들은 다 같이 병문안을 갔고, 거기에서 정소연의 미래 시댁의 매제가 화남병원의 부주임이라고 자랑했었다.이에 정소연의 외삼촌이 바로 무료 병실에 관해서 부탁을 했었고, 정소연의 아버지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던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수속도 거칠 필요없이 쉽게 무료 병실에 들 수 있을 거라고 장담까지 해가면서.그래서 바로 청아한테 연락을 한 건데 그렇게 거절을 당할 줄은 미처 몰랐다.그 후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 정씨네 가족은 허홍연에게 연락을 해서 우씨네 가족이 다 거짓말쟁이라고,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허홍연이 듣더니 순간 기뻐하며 물었다.[그게 정말이에요?]“그럼 제가 이모님을 속이기라도 하겠습니까?”[어이쿠, 그럴 리가 있겠어요? 시원 군이 나선다면 정씨네 가족이 부탁한 일은 일도 아니죠. 고마워요, 시원 군.]“저한테 고마워하지 마시고 청아한테 고마워하세요. 전 오로지 청아의 체면을 봐서 도와드리겠다고 한 거니까.”[암요! 그럴 게요!]“그럼 저희 밥 먹고 있던 중이라, 이만 끊겠습니다.”기뻐하고 있는 허홍연과는 달이 장시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고는 바로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청아에게 돌려주었다.“제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제가 정씨네 가족을 찾아가 사과하면 그만이니까.”“정씨네 가족이 억지 부리는 모습 못 봤어? 그러는 그들이 네 사과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장시원의 한심한 눈빛에 청아가 죄책감이 든 표정을 드러냈다.“그, 그래도 대표님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하온한테는 남편 역까지 부탁할 수 있으면서, 나랑은 이렇게 선 긋는 거야?”“저 엄마의 핍박에 이기지 못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대표님도 아시잖아요!”“네가 너무 바보 같아서 이용당한 거 아니고? 누구의 부탁은 들어줘야 하고. 누구의 부탁은 절대 들어줘서는 안 된다는 것도 구분 못해?”장시원의 뼈 때리는 질문에 난처해진 청아는 얼굴까지 빨개져 아무 말을 못했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모습에 장시원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청아의 접시에 음식을 집어주었다.“일단 밥이나 먹어. 정씨네 가족의 부탁은 나에게 있어 어려운 것도 아니니 부담 가지지 말고, 신세 졌다고 생각하지도 말고.”“하지만 신세 진 건 사실이잖아요.”“너 나한테 진 신세가 적어?”“…….”“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갚아.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신세 갚는다 생각하고 밥 해줄 때 내키지 않는 표정이나 짓지나 말고.”청아가 듣더니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은 적이 없는데요?”“그럼 나한테 밥 해주는 게 좋다는 거야?”“당연하죠!”장시원
장시원이 능글맞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배강을 힐끗 쳐다보고는 경고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청아는 낯가죽이 얇으니까 이상한 농담하지 마.”“뭐야, 이렇게 감싸고 돈다고? 설마 진심?”배강이 의아해하며 장시원을 향해 묻자 장시원이 얼굴빛 한번 변하지 않은 채 덤덤하게 대답했다.“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야. 그러니까 걔 앞에서 입 조심해.”“친구?”배강이 듣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네 손아귀에서 무사히 벗어났던 여자가 있었나? 내 기억으로는 새 한 마리라도 너한테 반하면 제대로 날지 못했던 것 같은데?”“제대로 날지 못하는 새면 병이 든 거 아니야?”장시원이 어처구니가 없어 냉소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대답이 청아가 말대꾸할 때 사용하던 화법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 웃음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정색하여 배강을 향해 물었다.“왜 날 찾은 건데?”“아, 도국 쪽에서 이틀 후에 사람을 보내겠대, 스마트 기술 향상에 관해 의논해 보고 싶다고.”업무 이야기에 배강도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장시원의 물음에 대답했다.……화남병원정소연의 외삼촌이 무료 병실로 옮긴 후, 정씨네 가족은 또 한 번 병문안을 갔다.이에 외삼촌네 가족이 기뻐하며 연거푸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이틀은 더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는데, 오후에 바로 병실을 옮겨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소연의 미래의 매제 역시 대단한 사람이네요, 이렇게 어려운 일을 쉽게 해결해 주다니. 우리 뭐라도 사가서 감사를 표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체면이 제대로 선 정소연 아버지가 득의양양해서는 고개를 쳐들고 대답했다.“같은 가족끼리 감사는 무슨. 게다가 하 선생이 개인 관계를 써가며 이 일을 해결해준 거니까 절대 찾아가서는 안 되죠.”“맞네요. 그럼 이 신세는 우리가 기억했다가 언젠가 갚을 게요.”“하하하! 이렇게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외숙모의 대답에 정소연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마침 약 바꾸러 왔다가 몇
순간 밀물 마냥 밀려오는 무력감에 청아는 더 말할 힘도 없었다.“알았어요. 저 곧 내려야 하니까 이만 끊을 게요.”허홍연은 그제야 청아 말투 속의 냉담함을 눈치채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 하루 종일 출근하느라 피곤하지? 어서 돌아가 쉬어.]“네.”통화가 끝난 후, 청아는 드디어 다시 평정심을 되찾게 되었다.사실 청아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점점 얼어가고 있을 뿐.……저녁에 조백림이 넘버 나인에서 파티를 주최했고, 장시원이 퇴근하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미리 도착한 친구들은 이미 술을 마시며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다.장시원은 룸 안을 한번 둘러보고 홀로 소파에 앉아있는 임구택을 향해 직진했다.하지만 임구택은 다가오고 있는 장시원도 발견하지 못한 채 소파에 기대 열심히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이에 장시원이 눈썹을 올리고 임구택의 휴대폰 화면을 힐끗 쳐다보았다.휴대폰 속에는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고,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커피 말고 또 뭘 만들어낼 수 있어?][뭘 가지고 싶은데?][흠, 딱히 가지고 싶은 건 없는데? 당신이 제일 아끼는 공주님을 보여줄 수 있어? 정말로 나보다 더 예쁜지 보고 싶어.][당연히 당신보다 더 예쁘지. 그 아이는 내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봇이야.][그렇게 말로만 해서 누가 믿어? 나도 한번 보여줘 봐.]……소희의 목소리였다.장시원은 궁금한 마음에 임구택 쪽으로 바짝 붙어 물었다.“뭘 보고 있는 거야?”임구택은 그제야 장시원을 발견하고 바로 화면이 아래로 향하게 휴대폰을 뒤집고는 차가운 눈동자로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언제 온 거야?”“한참 됐어. 네가 그 동영상에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발견하지 못한 거고.”임구택이 듣더니 조용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 후,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손에 든 라이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장시원도 그의 손
레저룸에서 카드 놀이를 하고 있던 조백림은 연속 몇 판을 이겨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반대로 오진수 등은 연이어 우는 소리를 내며 불만을 토했다.그런데 이때 마침 웨이터가 술 가져다주러 들어왔고, 조백림이 웨이터를 향해 분부했다.“90년 산 강제로 두 병 가져다줘요, 내 이름으로 적고.”오진수 등은 그제야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역시 백림이 제일 통이 크다니까.”그렇게 몇 사람이 웃고 떠들며 카드 놀이를 다시 시작하는데, 한 웨이터가 술을 들고 와서는 허리를 반쯤 구부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조백림을 향해 말했다.“고객님, 고객님이 분부하셨던 90년 산 강제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이에 조백림이 고개를 돌려 예쁘게 웃고 있는 웨이터를 쳐다보았다.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그리고 조백림의 시선에 이선이 부끄러운 척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백림 씨 저 기억 안 나세요? 저 이선이잖아요.”조백림은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는 표정을 드러냈다.‘유정의 연적.’사실 이선은 물론이고, 조백림은 유정마저 여러 날 째 보지 못했다.“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조백림이 맑은 눈동자에 웃음을 머금은 채 이선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이선이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리며 깜찍한 말투로 대답했다.“저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밤 타임만.”“그래? 정말 열심히 사네.”조백림이 덤덤하게 칭찬했다.이에 이선은 순간 얼굴이 빨개져 부끄러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여자는 의지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잖아요. 특히 저처럼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한 여자는 더더욱 노력해야 하는 거고.”“맞는 말이지.”조백림이 계속해서 오진수 등과 카드 놀이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백림 씨, 술을 지금 따라 드릴가요?”이선이 더욱 빨개진 얼굴로 조심스레 조백림의 의향을 물었고, 조백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 지금 따. 내가 한잔 서비스로 줄게.”“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희 손님의 술을 마실 수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