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희는 이번에 출장 가서 엄청 중요한 거래처와 성공적으로 거래를 성사하게 되었다고 유난히 기뻐했다. 이에 소희와 청아도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주고 술을 마시며 별의별 이야기를 나눴다.그러다가도 옆에서 조용히 밥을 먹고 있던 요요가 뜬금없이 세 사람의 대화에 한마디씩 끼어들면 세 사람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밤은 점점 무르익어 갔고, 세 사람의 전쟁터는 어느새 주방에서 거실로 옮겨졌다. 연희는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고, 소희는 아이스크림, 청아는 감자칩을 먹고 있었다.하지만 먹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대화는 끊길 줄 몰랐다, 요요가 버티지 못하고 청아의 품속에서 잠들었는데도 세 사람은 자는 시간이 아까웠는지 늦은 밤이 되도록 계속 이야기를 나눌 만큼.그러다 술에 많이 취한 성연희는 결국 상에 엎드려 잠들었고, 소희는 잠든 성연희를 청아네 작은 침실까지 업고 가서 눕히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방으로 돌아온 후, 소희는 베란다의 소파에 앉아 새벽의 강성을 바라보았다.소파 옆에는 플로어 스탠드만 켜고 있었고,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줄곧 맑기만 했던 소희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황홀함이 묻어 있었다.그렇게 한참 새벽의 바람을 쐬어도 잠이 오지 않자 소희는 휴대폰을 꺼내 통신기록을 뒤졌다.임구택이 소희에게 건 마지막 한통의 전화는 8일전으로 멈춰 있었다.청원에서 돌아와, 소희가 디자인 원고를 마저 그려야 한다며 임구택의 저녁 데이트를 거절했던 날.그리고 그날 소희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임구택이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한마디만 했다.[소희야, 다음에 헤어질 때 한 번만 나 좀 돌아봐 줄래?]꽤 오래 전의 기억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소희는 여전히 그때 당시 임구택의 부드러운 말투와 목소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그때 소희는 잠깐 멍해 있다가 알겠다고 아주 간결한 대답을 내뱉었지만, 임구택은 그것 마저도 엄청 만족스러웠는지 웃으며 전화를 끊었었다.하지만 심명이 갑자기 나타나 두 사람 사이에 폭탄을 터뜨려 놓고 가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장시원이 듣더니 궁금해하며 물었다.하지만 임구택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술만 따라 마실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날 소희와 심명이 안고 있던 장면을 생각하기만 하면 임구택은 당장이라도 가서 심명을 죽이고 싶을 지경이었다.“소희한테 전화 안 해?”임구택이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으로도 일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던 장시원은 더는 캐묻지 않고 휴대폰을 그의 앞으로 밀어주며 물었다.그러나 임구택은 움직이지 않았다.“이 한밤중에 급한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려고?”“…….”맞는 말이긴 했다.임구택은 바로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들고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어…….]‘전원이 꺼져 있다고?’임구택이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한번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불길한 예감에 순간 안색이 어두워진 임구택은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복 외투를 잡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이에 장시원이 황급히 떠나는 임구택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무 조급해하지는 마, 소희가 네 번호를 차단했을 수도 있으니까.”“…….”소희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임구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아 또 소희에게 전화를 두 번이나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임구택은 페달을 끝까지 밟아 제일 빠른 속도로 경원주택단지에 도착했다. 그러다 다시 소희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문득 소희 침실의 불이 켜져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뭐야, 집에 있었어?’‘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배터리가 다 떨어진 거야, 아니면 정말로 나를 차단한 거야?’‘하지만 집에 있는데 휴대폰 배터리가 다 떨어질 리는 없는 거잖아? 그럼 정말로 나를 차단했다는 거네?’임구택의 얼굴색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그러다 몇 분 후, 소희 침실의 불은 꺼졌고, 임구택은 그걸로 소희가 집에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하지만 임구택은 날이 거의 밝
소희는 먼저 성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창 운전 중이던 성연희는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바로 물었다.[언제부터 잘 때 휴대폰 전원을 꺼두는 습관이 생겼어?]“배터리가 다 돼서 전원이 꺼진 거야. 무슨 일인데?”소희한테 아무 일도 없다는 걸 확인한 성연희는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별일은 아니고, 나 지금 공항으로 가고 있어, 명성 씨가 프란스로 출장 가는데 같이 가재. 네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인사하고 갈 겨를이 없어서 전화했던 거고.]“그래, 즐겁게 놀다가 와.”[응! 이제 내가 돌아오면 우리 또 술 마시자.]“알았어.”성연희와의 통화가 끝난 후 소희는 또 청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청아도 성연희의 일 때문에 전화를 걸었던 거였다. 그러면서 또 요요랑 놀이공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아침 밥은 주방에 있다고 알려주었다.그렇게 두 통의 통화가 끝나는 동안 소희는 이미 1층에 도착했고, 임씨네 운전기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올라탄 소희는 계속해서 통화기록을 위로 올렸고, 손가락이 ‘임구택’의 이름을 지나치는 순간 바로 멈추었다.그러다 한참 임구택에게 전화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심명의 전화가 걸려왔다.[자기야, 일어났어?]“시간이 몇 시인데? 설마 너 아직도 안 일어났어?”오주는 국내보다 3시간이 빨랐다.[나 지금 점심 먹고 있지.]심명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물었다.[내 생각 했어?]“나 지금 임유민한테 과외 해주러 가야 해. 중요한 일이 없으면 끊어.”[또 임씨네 집에 가는 거야? 설마 벌써 임구택과 화해했어?]“지금은 유민이에게 과외 해주러 가는 거고, 그거랑은 별개의 일이야.”[그 말의 뜻은 아직 화해하지 않았다는 거네? 그럼 됐어,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곳까지 와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 녀석을 이렇게 놔둬서는 안 되지.]방금 전 까지만 해도 목소리에 불만이 섞여 있던 심명은 금세 또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소희는 차창 밖만 바라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
추소용이 바로 쫓아와 웃으며 말했다.“누나, 걱정 마. 앞으로 나 절대 누나에게 달라붙지 않을 게. 오늘은 그냥 누나한테 감사를 표하려고 찾아온 거야, 누나가 내 친 누나를 찾아줬으니까.”오늘의 추소용은 꼬질꼬질했던 평소와는 달리 헤어스타일도 바뀌었고, 옷도 브랜드들로 새로 차려 입었다. 하지만 양아치 같은 기질은 여전했다.소희가 듣더니 발걸음을 멈추고 추소용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힘들게 찾은 누나인데 잘 지켜, 또 잃어버리지 말고.”“당연하지! 이 세상에 이젠 나와 누나 두 사람밖에 안 남았는데. 나 평생 누나랑 같이 붙어 살 거야.”“그래, 그런 생각이 맞는 거야.”“나 그럼 먼저 누나 찾으러 갈게.”추소용이 들떠서 말하며 고개를 돌려 떠났고, 그 모습에 소희가 차가운 웃음을 한번 드러내고는 일하러 갔다.같은 시각,전에 소희가 마민영더러 8시에 출근하라고 한 이후로 하루도 지각한 적이 없는 마민영은 오늘도 아침 일찍 출근 도장을 찍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사실 마민영이 맡은 여주인공의 화장은 아주 간단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정부의 딸이라 화장을 너무 뚜렷하게 할 수도 없었으니. 하지만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화장을 해주고 있었다. 너무 빨리 했다간 마민영한테 일을 제대로 안 한다고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까.마민영의 성질이 나쁘다는 건 제작팀 전체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만큼 주는 임금도 상상 그 이상으로 높았기에 매일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마민영한테 욕을 먹게 되더라도 그들은 두 말없이 마민영의 곁에 남아서 일하고 있었다.한참 졸고 있던 마민영이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눈을 감은 채로 어디론 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다 휴대폰 맞은편의 사람이 전화를 받자마자 마민영이 바로 투정을 부리 듯 입을 열었다.“소희야, 나 너무 졸려!”[어젯밤에 몇 시에 잤어요?]다른 배우에게 오늘의 의상을 안배하고 체크하고 있던 소희가 듣더니 덤덤하게 물었고, 이에 마민영이 멋
“뭐? 다 썼다고? 도박하다 잃은 거 아니고?”소동이 믿기지 않은 듯 두 눈을 부릅뜨고 묻자 추소용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어떻게 썼는지는 상관하지 말고, 빨리 돈이나 줘. 하룻밤에 200백만 원씩 퍼붓는 사람들도 있는데, 난 엄청 절제해서 쓴 거라고!”“너 미쳤어? 내가 네 현금 출금기야? 네 부모님이라고 해도 너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줄 수가 없잖아.”“우리 아빠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어. 지금 이 세상에 나의 가족이라고는 누나뿐인데, 내가 누나를 찾지 않으면 누구를 찾겠어?”“난 네 가족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서 떨어져! 다시 들러붙었다간 신고할 수도 있으니까.”“신고하고 싶으면 해, 일을 더 크게 벌리면 나한테는 더 좋은 거고. 어차피 나 누나 어디에 사는지도 알아. 어떻게, 누나 그 양부모님을 찾아가 한번 도리를 따져 봐?”겁도 없이 자신을 협박하고 있는 추소용의 모습에 소동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너 나를 미행했어?”“누나도 참, 미행이 뭐야? 난 그냥 누나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한번 따라가봤을 뿐인데, 그게 어떻게 미행이야?”“너 대체 뭘 원하는데?”“천만 원만 줘. 그러면 돈이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 누나를 찾지 않을 게.”소동이 듣더니 즉시 고개를 저었다.“안 돼! 우리 집이 잘 사는 건 사실이지만 돈은 아직 부모님이 관리하고 있는데, 내가 어디 가서 그렇게 많은 돈을 얻어 와?”“그럼 400만! 400만 정도는 있는 거 아니야? 만약 400만도 없다면, 난 누나 부모님을 찾아가 돈을 요구할 수밖에 없어.”“내가 4천만 원을 줘도 너 며칠 사이에 다 도박에 처넣을 거잖아!”“아니야! 나 도박하지 않아. 나 그 돈으로 친구와 사업을 할 거야.”“너 강성에 친구가 있기는 한 거야?”“그건 누나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빨리 돈이나 줘!”소동은 당연히 추소용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싶지 않았다.추소용은 밑 빠진 독이라 이번에 주고 나면 또 찾아올 게 뻔했으니.그래서 소동이 잠시 생각한 후 차가운
맞은편 문은 방범 문으로 새로 교체되었다. 고급 질감의 은회색에 중간에 액자처럼 장식되어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아주 특별한 문이라 소희는 아침에 외출할 때 두 번 정도 더 본다.퇴근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갑자기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퇴근하셨어요?”소희는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뒤에 아무도 없었다.그러나 맞은편 문에 달린 액자 같은 태블릿을 열어보니 화면이 나왔다. 아이패드와 비슷한 크기의 보송보송한 털을 가진 애니메이션이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둥글둥글한 고양이 같다!소희는 의심을 드러내며 몇 걸음 다가갔다.“네가 말한 거야?”“네, 여기 우리 둘뿐이에요!”스크린 속의 애니메이션은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자기소개 할게요. 저는 지니라고 합니다. 로봇 가족의 28976번째 모델입니다. 앞으로 당신 이웃이 될 테니 잘 부탁드려요!”소희는 이제야 이것이 로봇 지능 시스템이라는 것을 알았다.소희는 이에 흥미를 느꼈다.“넌 뭐할 수 있는데?”“주인님을 도와 문을 지키고, 주인님이 원하시는 것을 대신해드릴 수 있어요. 이웃 관계 처리, 배달 주문, 전화 등 다양한 업무를 해드릴 수 있고 주인님의 건강이 안 좋으면 병원 의사 예약을 해드릴 수 있습니다. 주인님이 상상하시는 것은 모두 할 수 있습니다!”지니는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소희는 점점 더 재미있었다.“네 주인은 이사 왔어?”“아니요, 주인님이 이사를 오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이사 오기 전에 당신과 좋은 관계를 맺어 앞으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게요!”지니가 진지하게 말했다.소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네 주인이 너한테 알려준 것이야, 아니면 네 생각이야?”“주인님이 알려 줄 필요는 없어요. 제가 주인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니까요!”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며 말했다. “네 주인은 프로그래머지?”‘아주 재미있는 프로그래머일 것이다!’지니가 말했다.“주인님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되어 있어요.
소희는 놀라서 의심스럽게 그것을 바라보았다.“어떻게 알았어?”“저의 눈으로 님의 건강을 스캔할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체질은 볼 수 있어요.”지니는 자신의 큰 귀를 쳤다.소희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정말 대단해!”“밥 먹으러 가세요, 안녕. 나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보러 갈게요.”지니는 작별 인사를 하고 휙 하고 사라졌다. 이윽고 스크린은 어두워졌다.그리고 은색 금속 케이스가 자동으로 닫혔다.소희는 로봇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크게 놀랐다.‘로봇도 감정이 있다고?’소희는 이 스마트 시스템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다고 느꼈다.청아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청아에게 곧 도착할 것이라고 알렸다.다음날.소희가 아침에 외출하려는 데 맞은편 스크린이 밝아지며 지니가 튀어나왔다.“소희님,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어젯밤 소희는 집으로 돌아온 후 또 지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지니를 스크린이나 로봇으로 생각하지 않고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지니는 뚱뚱한 손을 입에 대고 하품을 하며 풀밭을 달리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야?” 소희가 물었다.“달리기, 공주가 어제 저한테 뚱뚱한 남자는 별로라고 했어요. 그러니 살을 빼야겠어요!”소희는 지니의 동글동글한 몸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젯밤 이야기를 나눌 때 지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공주라는 것, 또 그 공주는 자기소개도 했다. 덕분에 지니는 공주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맞아요!” 지니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15분 후에 강성에 비가 올 것입니다. 우산을 가지고 가는 게 좋겠어요!”“그래?”소희는 핸드폰을 켜고 날씨를 살펴보았다. 과연 15분 후에 비가 올 것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지니는 화가 나서 말했다.“나를 믿지 않는 거예요!”“아니, 습관일 뿐이야, 우산 가지고 갈게!”소희는 집에 들어가 우산을 들고나왔다. 나올 때 지니는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뚱뚱한 몸이 한번 뛸 때마다 화면 전체가 진
소희는 부탁받고 마연을 찾아갔다.마연은 휴게실에서 과일을 먹고 있었는데, 소희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콧방귀를 뀌었다.“이 감독님이 불렀죠.”“당신은 배우이고, 감독과 협조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입니다. 게다가 혼자만 맞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비를 맞습니다.”소희가 밖을 보았다.“비가 이제 거의 그치는 것 같으니 빨리 가보세요!”“저는 비 오는 날이 싫어요. 젖으면 몸에 달라붙으니 찝찝해 죽겠어요!”마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원망했다.소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마연은 일어나서 매니저에게 말했다.“옷을 많이 준비해 줘. 촬영이 끝나면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안심하세요!” 매니저가 웃었다.마연은 밖으로 나가면서 소희를 보며 웃었다.“화내지 마세요, 지금 갈 테니까!”“감독님과 잘 협조해서 한 번에 오케이 사인받으세요. 그러면 당신도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고 감독님도 더 꾸짖지는 않을 겁니다.”소희가 말했다.“네!” 마연은 매니저를 따라 촬영장으로 갔다.이때 소연은 옆 분장실에서 구은서와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패션, 설계, 명품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수다를 떨고 있었다.또 소연은 구은서의 아우라가 좋아 평범한 제작진 팀의 옷을 입어도 명품을 입은 것 같다며 칭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은서의 담담한 웃음은 온화하고 고상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그 어떤 단점도 없는 완벽히 아름다운 얼굴이다. 소연은 마연의 직설적인 성격을 좋아하지 않는다. 늘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구은서와 며칠 대화를 나누면서 직설적인 사람도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적어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러나 구은서, 종래로 온화하고 단아한 태도다. 수다를 같이 떨 수 있지만 그녀에게서 무언가 얻으려고 한다면 인차 화제를 돌린다.정말 빈틈이 없다!이렇게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데 소연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가 일어서며 말했다.
우청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창밖을 가로지르는 새 한 마리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한 뒤, 차분하게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우리 집안일이 궁금하시면, 엄마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왜 제가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엄마가 힘들게 살아온 거 저도 잘 알아요.”“하지만 저는 이미 갚을 만큼 갚았고, 더는 후회할 것도 없어요. 바쁜 일정이 있어서, 외삼촌과 이모는 이만 보내드릴게요.”청아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청아야!”허홍천이 청아를 붙잡았다.“부모가 자식에게 잘못할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어떤 부모도 자식을 해치려고 하진 않아!”“설령 네 엄마가 편애했거나 실수했더라도, 네가 딸이면서 어머니에게 원한을 품고 사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냐?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넌 불효자가 되는 거야!”하서형도 거들었다.“청아, 네 엄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는구나. 네가 약혼식에 초대하지 않겠다고 하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어. 몸도 안 좋아졌고.”“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이번 기회를 계기로 가족 간의 오해를 풀면 되잖아.”“친엄마랑 무슨 그렇게 깊은 원한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하지만 청아는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허홍천은 집안에서 나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평소 거들먹거리던 그가 이렇게까지 몸을 낮춰 사정하는데도 청아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결국 분노를 터뜨렸다.“청아야, 너 정말 이렇게 매정하고 가족도 모르는 사람이 될 거야? 나중에 남들이 널 보고 배은망덕한 인간이라고 욕해도,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그 순간, 청아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가워졌다.“그렇게 말하라고 해요.”청아는 다시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밖에서 막 들어서려던 장시원과 마주쳤다.시원은 한 손을 들고 있었다. 마치 방금 막 문을 열려고 했던 것처럼. 청아를 본 순간, 그의
그러자 직원들은 즉시 지시를 따랐다. 우청아는 허홍연과 확실히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정소연 역시 이제는 함부로 나서지 못할 것이라 믿었다.하지만 청아는 스스로 몇몇 사람들의 바닥을 너무 높게 평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회사에서 외삼촌 허홍천과 이숙모 하서형을 보게 되면서.두 사람은 미팅룸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청아가 들어서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미소는 청아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나치게 다정하고 온화한 것이었다.“청아야!”하서형이 다가와 친근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외숙모 좀 보자, 어릴 때부터 미인이 될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구나!”허홍천도 잽싸게 맞장구쳤다.“우리 청아는 예쁜 것뿐만 아니라, 머리도 비상하지!”청아는 두 사람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허씨 집안에서는 유일하게 우씨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청아가 예전에 외삼촌 집을 방문했을 때, 허홍천은 늘 우월감을 내비쳤고, 말투도 오만했다.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거들먹거리기 일쑤였다.그런데 허홍연은 오히려 그 가족을 붙들고 환심을 사려했고, 덕분에 사촌인 허연은 청아네 집안을 더욱 깔보았다.청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외삼촌, 외숙모, 앉으세요.”허홍천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을 쏟아냈다.“청아, 이게 네가 운영하는 회사야? 직접 와서 보니 믿기지 않는군. 내 조카가 이렇게 대단하다니, 남들한테 자랑할 때마다 어깨가 으쓱해!”하서형 역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역시 명문대 졸업생은 다르네! 우리 집 허연이도 청아만큼만 따라가면 좋겠는데, 그럼 더 바랄 게 없지!”“우리 애들은 말할 것도 없고!”“그러니까, 청아가 최고야!”“네 엄마는 복이 많아. 이렇게 능력 있는 딸을 뒀으니 말이야!”두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나 청아는 시계를 힐끗 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외삼촌, 외숙모, 무슨 일로 오셨어요? 곧 회의가 있어서요.”하서형은 재빨리 허홍천을 바라보
우청아는 점점 걸음을 재촉하다가 결국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란 장시원의 눈빛에 바로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청아는 시원을 꼭 끌어안으며 몸을 살짝 떨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스스로 해결했어!”청아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시원을 바라보았다.“당신을 이용해서 위협한 거긴 하지만 말이야.”시원은 울면서 웃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청아의 표정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려왔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깊고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잘했어.”시원은 한 손으로 청아를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 청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고, 다정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괜찮아. 세상 모든 부모가 다 온전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넌 나와 요요가 있잖아.”“그리고 널 기다리고 있는 시부모님도 있어. 넌 잃은 것보다 얻는 게 훨씬 많을 거야.”청아는 더욱 시원의 품을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하늘이 내게 날 너무 잘해주는 것 같아.”시원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아니, 하늘이 잘해주는 게 아니라 남편이 잘해주는 거지!”청아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청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의 품에서 해맑게 웃었다.시원은 그녀가 조금이나마 기운을 되찾자 안심이 됐다. 이윽고 그는 청아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자, 이제 가자. 남편이 데려다줄게.”어느덧 해가 저물어 퇴근 시간도 훌쩍 넘었다. 정말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청아는 노을이 반사된 차창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차 타고 왔어!”“그럼 네가 운전해. 난 뒤에서 따라가면서 지켜줄게.”시원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그럼 내가 얼마나 운전 실력이 늘었는지 보여줄게!”“내 아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안 봐도 알지. 벌써 프로 레이서 급이겠지!”그의 칭찬에 청아는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문을 닫는 청아의 동작조차도 평소보다 더 힘 있고 세련돼 보였다.두 대의 차가 차례로 출발했다.
정소연은 우청아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일단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아가씨, 어머님은 그저 아가씨 약혼식에 가고 싶을 뿐이에요. 예물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요.”하지만 청아의 태도는 변함없었다.“죄송하지만, 초대장은 이미 다 배포됐어요!”그제야 허홍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내가 친엄마인데, 딸의 약혼식에 가는 데 청첩장이 필요하다고? 그런 소린 난생처음 들어보네!”“분명히 말해 두는데, 나는 이 결혼 반대야! 그러니 약혼식 같은 건 꿈도 꾸지 마!”소연은 다급히 청아를 달래려 했다.“아가씨, 왜 어머님을 화나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 가족끼리 그렇게 깊은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난 일은 그냥 잊죠.”“어머님이 정말 반대해서 약혼식에서 소란이라도 피우면...”소연은 말하면서 슬쩍 허홍연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살짝 비웃듯 말했다.“아가씨 약혼식이 과연 제대로 진행될까요? 알다시피 장씨 집안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모두 강성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잖아요.”“근데 그 자리에서 소란이 벌어지면, 모두 난처해질 거라고요!”허홍연도 곧바로 맞장구쳤다.“청아야, 너무 고집부리지 마! 나를 끝까지 몰아붙이면, 정말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청아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조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청아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그럴 줄 알았어요. 내가 광명을 찾으면, 어떻게든 나를 어둠 속으로 끌어내리려고 할 테니까요.”청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연과 허홍연을 내려다보았다.“엄마, 만약 제 약혼식에서 소란을 피우면, 오빠는 곧바로 직장을 잃게 될 거예요. 심지어 강성에서도 버티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이내 청아의 시선이 소연을 향했다.“그리고 새언니 동생 공무원 시험을 본다면서요? 그러니 가만히 계세요. 안 그러면, 평생 공무원 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요.”“제 말 흘려듣지 마세
허홍연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청아를 바라보니, 반년 사이에 그녀가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정소연은 눈빛을 번뜩이며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며 말했다.“아가씨,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아무래도 우리 집안과 장씨 집안의 재산과 지위 차이가 크잖아요.”“그러니 예단과 혼수도 똑같을 수 없는 거고. 어머님도 당연히 최선을 다해서 네 혼수를 준비해 줄 거예요.”허홍연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 맞아!”“엄마가 준비한다고요?” 청아는 마치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가볍게 웃었다.“왜 엄마가 제 혼수를 준비해야 하죠? 애초에 양육비 책임 협의서에 서명하지 않았나요? 오빠가 엄마를 부양하고, 저는 아빠를 부양하기로 했잖아요.”“제가 시집가는 것도 아빠가 챙겨야죠. 다들 보셨다시피, 아빠는 지금 휠체어를 타고 계세요.”“돈이 없어서 제 혼수를 마련해 줄 수 없어요. 그러니 예물도 필요 없겠네요.”그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리고, 새언니 출산이 임박해서 외출이 어려운 상황이에요. 그래서 따로 엄마랑 새언니가 말하는 그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어요.”“초대장이 없으면 아예 들어올 수 없으니, 굳이 오지 않으셔도 돼요.”허홍연과 소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던 허홍연은 이내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청아야, 네가 결혼하는데 엄마를 부르지 않겠다고? 내가 널 20년 넘게 키웠는데, 정말 그 협의서 하나 때문에 나와 인연을 끊겠다는 거야?”청아는 냉랭하게 대꾸했다.“병원에서 아빠가 응급실에서 수술을 기다리며 보상 문제를 논의할 때, 엄마는 아주 시원스럽게 협의서에 서명했잖아요.”“그때 이미 모든 게 명확하게 정리된 거 아닌가요?”허홍연은 분노하며 소리쳤다.“그래도 난 네 엄마야! 장씨 집안에서 그렇게 성대한 약혼식을 치르는데, 신부의 부모가 안 보이면 남들이 수군거리며 뭐라고 하겠니?”화를 꾹 참으며
“아버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곧 시합 있다면서요? 어서 아저씨랑 바둑 두세요.”우청아는 간병인을 향해 살짝 눈짓을 보내자, 간병인은 즉시 알아차리고, 우임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휠체어에 태워 방을 나갔다.“아저씨, 다른 분들이 아까 찾고 계셨어요. 우선 바둑 두시고, 조금 이따 모시러 올게요.”금세 방 안이 조용해졌다.청아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 주스를 들이마셨다. 목이 말랐던 듯, 반 컵을 단숨에 들이켰다.정소연이 바로 종이를 꺼내 건넸다.“천천히 마셔요. 밖에 너무 더웠어요?”이에 허홍연도 잔뜩 친절한 태도로 말했다.“다 마셨으면 내가 더 따라 줄게.”두 사람은 청아를 어떻게든 편하게 해 주려는 듯 바삐 움직였다. 하지만, 청아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부드럽게 물었다. “오빠는 요즘 잘 지내요?”소연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늘 똑같지 뭐. 하루 종일 일만 하고, 번 돈도 많지 않고. 아가씨가 훨씬 낫죠!”허홍연이 맞장구쳤다.“그래서 내가 청아를 외국 유학 보낸 거야. 명문대 졸업한 사람이 다르긴 달라!”소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엄마도 그때 날 유학 보냈으면, 나도 지금쯤 재벌가 며느리 됐을걸요?”허홍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요즘 재벌가에서 며느리를 고를 때 집안보다는 외모랑 학력을 중요하게 보잖아.”소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우리 시댁은 청아한테 감사해야겠네. 덕분에 좋은 유전자 받았잖아.”청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박하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그리고, 드디어 허홍연과 소연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허홍연이 의도적으로 밝게 웃으며 말했다.“청아야, 너랑 장시원 사장이 약혼한다며? 이런 큰 경사가 있는데, 왜 엄마한테 말도 안 했어?”“내가 예전부터 말했잖아. 장시원 사장이 널 좋아한다고! 봐, 결국 내 말이 맞았지?”소연이 능청스럽게 맞장구쳤다.“아가씨, 우리한테 서프라이즈 해 주려고 했던 거죠?”
롤스로이스가 멀어지자, 서현진의 동료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와, 대박! 이렇게 화려한 차에, 직접 운전기사까지 동원해서 초대장을 배달하는 거예요? 현진 씨 친구, 진짜 재벌가에 시집가는 거 아니에요?”현진도 어리둥절한 채, 초대장을 열어보자 청아의 초대장이 확실했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고, 현진은 흥분한 목소리로 제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제니! 네 축의금, 내가 대신 전달 안 할 거야. 그러니 너 무조건 같이 가야 해!”...약혼식까지 10일 남았고, 청아는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지 않았다. 웨딩드레스 피팅과 메이크업 테스트 정도만 마무리하면 됐다. 장시원은 그저 회사 업무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회사는 이미 고명기를 중심으로, 시원이 보낸 유능한 관리자들이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어느덧, 몇 년 동안 운영된 회사보다도 청아의 회사는 더 체계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이제 시간이 조금 여유로워진 그녀는, 운전 연습을 겸해 출퇴근을 직접 하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시원이 조수석에 앉아 감독하듯 지켜보았다. 그러자 오히려 긴장감이 두 배가 되었다.청아가 강력하게 항의한 끝에, 결국 시원이 조수석에 타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혼자 운전하면서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속도를 내든, 천천히 가든, 항상 주변 차량들이 자신과 같은 페이스로 움직이고 있었다.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지만, 몇 번 반복되자 청아는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사람, 정말 티 안 나게 감시하는 재주가 있네.’그러면서도 묘한 따뜻함이 밀려왔다.화요일 오후, 청아는 고객과 함께 공사 현장을 둘러본 뒤, 돌아오는 길에 요양원 앞을 지나게 되었다.‘아버지를 몇 주째 못 뵀네.’청아는 차를 돌려 요양원으로 향했다. 미리 연락하지는 않았는데, 그저 얼굴만 보고, 잠깐 인사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하지만, 요양원에 도착하자마자 청아는 걸음을 멈췄다.소파 위 허홍연이 앉아 과일을 깎고 있었고, 정소연이 임신 검진 결과지를 들고 우임승에게 공
“아니.”이제니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우린 오래전부터 연락이 끊겼어.”그러자 고윤정은 비웃으며 말했다.“나라고 해도 나도 안 갔을 거야. 몇 년 동안 연락 한번 없다가, 갑자기 약혼한다며 연락하는 거? 결국 축의금 받으려는 거 아니야?”그 말에 제니는 눈살을 찌푸렸다.“너무 속 좁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윤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난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거야.”그러다 문득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어차피 같은 동기인데, 우리도 한 번 가서 축하해 주는 게 어때?”한 사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청아랑 몇 년 동안 연락도 안 했어. 굳이 찾아가서 돈까지 써야 할 이유는 없지.”윤정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축의금은 무슨 축의금이야? 우린 그냥 가서 얼굴만 비추는 거야. 청아가 명문대 출신이라면서? 도대체 어떤 재벌을 잡았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그제야 분위기가 달라졌고, 윤정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다들 눈치챘다.그녀는 진심으로 축하하려는 게 아니라, 청아가 어떤 남자를 만났는지 보러 가겠다는 심산이었다.누군가는 애써 걱정하는 척하며 말했다.“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안 좋지 않을까?”그러자 제니가 단호하게 말했다.“난 그렇게 유치한 짓 안 할 거야. 그러니 너희도 그러지 마.”윤정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약혼식이지 결혼식도 아니잖아. 우리가 축의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가주기만 해도 고마워해야지.”다른 몇몇이 맞장구치며 말했다.“그러네! 그러고 보니 약혼식 어디서 한다더라?”제니는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축하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청아를 깎아내리고,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가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들의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다.제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너희들끼리 얘기해. 난 갈 데가 있어서 먼저 가볼게.”그렇게, 제니는 더 이상 말도 섞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비록 몇 년 동안 청아와의 연락이 끊겼지만, 예전에는 친구였고, 설령 이후 친구가 못 되더라도 청
우청아는 초대 명단에 고명기 부부와 하성연, 고태형의 이름을 추가했다. 고태형이 정말 자신을 좋아한다면, 그를 약혼식에 초대하는 것이, 더는 미련을 갖지 않도록 정리하는 방법일 것이다.그리고 잠시 고민한 끝에, 대학 시절 친구였던 서현진의 이름도 적었다. 현진과 청아는 같은 학과, 같은 반이었고, 한때 무척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다.우임승이 청아 몰래 현진에게 돈을 빌린 후, 현진을 포함한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멀어져 갔으나 현진만은 끝까지 남아 주었다.청아는 혹시 아버지가 현진에게 다시 손을 벌릴까 두려워, 알바가 너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선택이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이번 약혼식에는 꼭 현진을 초대하고 싶었다.그것이 청아가 할 수 있는 조금이나마 늦은 사과이자, 다시 시작하는 계기였다.청아는 대학 시절 지도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동기 모임 단체 채팅방에 초대해 달라고 요청했다.곧 단체방에 초대된 그녀는, 현진의 연락처를 찾아 요청 메시지를 보냈다. 몇 초 후, 현진이 즉시 요청을 수락했고, 놀란 듯 메시지를 보내왔다.[청아야?]청아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현진아, 잘 지냈어?]그러자, 이번에는 바로 음성 통화가 걸려 왔고, 현진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너 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단톡방에도 안 들어오고, 동창회도 안 나오고!다들 널 찾았어!]청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작년에 강성으로 돌아왔어. 이제서야 연락하게 됐네.”청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사실, 나 약혼하게 됐어. 그래서 너 초대하려고 연락했어. 시간 괜찮으면 와 줄 수 있어?”그리고 약혼 날짜를 알려주자, 현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너 약혼한다고? 와, 대박! 난 아직 남자친구도 없는데, 그때 연애 안 한다고 말하던 네가 제일 먼저 가네?]현진의 말에 청아는 웃으며 말했다.“너도 서둘러야지.”현진은 장난스럽게 물었다.[다른 동기들은 누구 초대했어? 그냥 다 같이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