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율은 괴로웠다. 마음이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소문에는 장시원이 여성들한테 젠틀하다고 하는데 그건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말하는 헛소리이다. 장시원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여성에게 그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는 남자였다.2년을 쫓아다녔다. 그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시했다. 하지만 시원은 그런 그녀를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우민율은 얼굴에 비통함을 띠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당신 말이 맞습니다. 다 제 탓이죠.”말이 끝나자 가방을 들고 분연히 떠났다.우민율은 자리를 떠났지만, 최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장 사장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회사를 위해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일한 것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봐주세요!”“한 번뿐입니다. 당신이 우청아씨의 공을 채가는 것을 한 번이라도 다시 보게 된다면 짤 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장시원은 고개를 숙이고 보고서를 보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한기를 느끼게 하였다.최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벌벌 떨며 말했다.“예, 장 사장님 감사합니다!”“나가세요, 그리고 우청아씨 보고 오라 하세요!”장시원이 말했다.최결은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사장실 문을 나서서야 자기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원망을 품고 우청아에게 다가가 말했다.“장 사장님이 불러.”그러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청아는 우민율이 슬픈 표정을 눈치챘다. ‘최결의 안색이 안 좋은 걸 보니 사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본데?’청아는 장시원이 화를 냈다고 짐작했다. 그녀는 이미 그의 변덕스러움을 경험해 보았다.청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 안에서 어떤 감정의 변화도 없는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다.청아가 장 사장 앞으로 다가갔다.“장 사장님, 찾으셨어요?”장시원은 보고서를 뒤적이며 미지근한 표정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사무실에서 일할 때 곤욕을 참으면서 일할 필요는 없습
장시원이 소리 없이 심호흡 한번 하여 마음을 가다듬고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이것뿐만 아니라 고정자산의 변화도 한번 봐 봐, 비정상적이잖아.”장시원이 제표 중의 잘못된 부분들을 짚어내며 청아에게 김화의 의도를 분석하는 걸 가르쳐주었다.조금 전 까지만 해도 오리무중이었던 청아는 장시원의 설명을 들으며 연이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장시원한테서 무언가를 배우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청아가 회사에 온 이후로, 장시원은 기회가 되면 청아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설령 점심에 밥을 먹다가도 청아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묻게 되면, 장시원은 항상 인내심을 가지고 해석해 주었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고, 곁눈질로 그걸 눈치챈 청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지기 시작했다.그리고 어느새 빨갛게 물든 청아의 귓불을 쳐다보며 장시원의 눈빛이 더욱 그윽해졌다.“내가 한 말들, 다 기억했어?”“네! 다 기억했어요.”“집중해서 들어, 같은 말 두 번 다시 반복하는 건 딱 질색이니까.”얼핏 들으면 상사가 직원에게 해주는 정상적인 귀띔이었다. 하지만 청아는 왠지 모르게 꿍꿍이가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순간 얼굴까지 빨개졌다.“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아무일 없는 척하며 덤덤하게 대답하고 있는 청아의 모습에 장시원이 그녀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앞에 있는 다른 제표를 가리켰다.“그럼 정풍의 제표를 한번 체크해봐, 진짜로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보게.”청아는 더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장시원이 가르쳐준 대로 제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제표에 대해 토론을 이어갔고, 최결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야 청아는 이미 퇴근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다.또각또각 사무실로 걸어 들어온 최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청아를 한번 쳐다보고는 장시원에게 퇴근해도 되냐고 물었다.장시원도 그제야 시간을 한 번 보고는 청아를 향해 말했다.“너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임구택의 얼굴이 생각났는지 소희는 순간 가슴이 따끔하게 아파났다. 그러나 소희는 바로 두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모든 정서를 거두고 무심하게 말했다.“공부나 열심히 해,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제발 우리 둘째 삼촌을 소중하게 여겨, 그러다 둘째 삼촌이 다른 여인한테 빼앗기기라도 하면 쌤은 후회할 기회조차 없을 거니까.”임유민이 재차 진지하게 소희를 향해 충고를 했고, 이에 소희가 차갑게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물었다.“그렇게 누구나 차별없이 대하겠다던 사람이 입만 벌리면 둘째 삼촌 걱정이야? 네 마음속에선 그래도 나보다 네 둘째 삼촌이 더 중요하지? 그렇지?”“누가 그래? 내가 지금 쌤을 위해 그러는 거잖아, 그것도 눈치 못챘어?”“어, 못챘는데?”“어휴, 내가 그렇게 진심을 다 했는데, 결국 눈치도 못채다니.”어른스러운 척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드는 임유민의 모습에 소희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어서 수업 준비나 해.”……오전에 청아가 요요랑 함께 그림책을 보고 있는데 허홍연의 전화가 걸려왔다.허홍연의 목소리는 유난히 다정하고 부드러웠다.[청아야, 오늘 쉬는 거야?]“네, 지금 집에서 요요랑 같이 놀고 있어요.”옆에서 한창 놀고 있던 요요가 휴대폰에서 새어 나오는 허홍연의 소리를 들었는지 바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는 똘망똘망한 두 눈을 깜빡이며 청아를 향해 깜찍하게 물었다.“외할머니에요?”청아가 웃으며 요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요요의 앳된 목소리를 들은 허홍연이 다시 휴대폰 맞은편에서 입을 열었다.[방금 그거 요요 목소리야? 나 아직 요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청아야, 바쁘지 않으면 지금 요요를 데리고 집에 와, 마침 오늘 다들 집에 있으니까.]요요의 기대에 가득 찬 눈빛에 청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금 바로 요요를 데리고 갈게요.”[그래, 기다리고 있을 게!]전화를 끊은 후 청아가 휴대폰을 내려 놓으며 요요를 향해 물었다.“우리 옷 갈아입고 외할머니와 외
처음에 청아가 결혼하지도 않고 아이를 먼저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강남은 엄청 화를 냈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이상하게 요요를 본 첫 눈에 우강남은 요요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그는 사랑이 가득 찬 두 눈으로 요요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청아를 향해 말했다.“너 어렸을 때와 똑같아.”“그래요? 난 모르겠는데?”그렇게 두 사람은 웃으며 집안으로 들어갔고, 우강남이 요요를 품에 안은 채 거실에 앉아있는 허홍연을 향해 소리쳤다.“엄마, 누가 왔는지 한번 봐봐요.”우강남 품속의 아이를 알아본 허홍연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기뻐하며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요요야! 외할머니한테로 와 봐!”화기애애하게 요요를 둘러싸고 인사를 나누고 있는 우강남과 허홍연의 모습에 청아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고, 이 시각에 우강남의 집에 나타나서는 안 될 사람이 거실에 앉아있는 걸 본 순간 청아는 멍해졌다.그리고 청아가 집에 들어 서서부터 줄곧 청아를 주시하고 있었던 하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정하게 웃었다.“저 아이가 바로 청아 씨의 아이예요? 참 사랑스럽네요.”“하 선생님이 왜 여기 계세요?”이때 허홍연이 요요를 품에 안은 채 청아에게 눈짓 한번 하고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하 선생님이 이곳을 지나치다 내가 잘 회복되고 있는지 체크하려고 들린 거야. 참 마음씨도 착하 분이시지.”하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던 청아는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요.”“아닙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 뭐.”하온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요요를 바라보며 물었다.“아이 이름이 뭐에요? 정말 예쁘게 생겼네요, 청아 씨처럼.”“요요라고 해요.”“아가야, 하온 삼촌한테 한번 안겨 봐.”청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허홍연이 품에 있는 요요를 하온에게 건네주려 했다.하지만 요요는 하온한테 가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거부하면서 고개를 돌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두 눈으로 청
허홍연이 듣더니 멋쩍게 웃었다.“너도 너무 그러지 마. 적어도 넌 세계 명문대를 졸업했고, 생긴 것도 예쁘잖아. 안 그러면 하 선생이 왜 널 쫓아다니겠어?”“그만해요, 엄마. 아무튼 저와 하 선생님은 아무런 가능성도 없어요. 요요를 낳으면서 제가 속으로 맹세한 게 있거든요, 절대 결혼하지 않고, 둘째를 낳지 않고, 요요에게 새 아빠도 찾아주지 않겠다고.”너무나도 집요한 청아의 태도에 허홍연은 많이 언짢았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너 어쩜 성질이 네 아빠랑 그렇게 똑같아?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는 건데? 너 좋으라고 이러는 거잖아. 너 홀로 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알아요. 하지만 저 이미 그렇게 2년을 견뎌냈으니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어요.”“고작 2년을 버티고 그런 소리 하지 마, 앞으로의 나날이 더 길다고!”“엄마, 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거니까, 그만해요.”청아가 씻은 사과를 과일 쟁반 위에 올려놓고 쟁반을 들고 밖으로 나가면서 한마디를 더 뱉았다.“그리고 이 일도 두 번 다시 언급하지 마시고. 그럼 저 요요 보러 먼저 나갈게요.”“너 어디가!”허홍연이 급히 청아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데 주방 문이 갑자기 열렸고, 우강남이 요요를 안고 나타났다.“주방에 숨어서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 해요?”“네 동생과 하 선생의 일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 너도 어떻게 청아를 좀 타일러 봐.”허홍연이 언짢은 표정으로 우강남에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하지만 우강남이 급히 손을 흔들었다.“청아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 저 방금 소연이와 통화를 끝냈는데, 소연의 부모님이 이쪽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우리 집에 한번 들러 구경해보고 싶대요. 지금 이미 주택단지에 거의 도착했을 거라는데, 어떻게 하죠?”“뭐? 왜 이렇게 갑자기 왔대?”“제가 어떻게 알겠어요?”허홍연과 우강남이 초조해하며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했다.그리고 그들이 왜 초조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청아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오면 왔지, 뭐가
허홍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마침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청아는 우강남의 품에서 요요를 건네받아 허홍연과 함께 거실로 나갔고, 우강남은 손님 마중하러 갔다.그런데 청아가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요요가 갑자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청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엄마,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엄마를 슬프게 했어요?”이에 청아는 급히 마음속의 슬픔을 억누르고 억지로 웃으며 요요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런 거. 집에 손님이 오셨대, 우리 손님 만나러 갈까?”“네!”요요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엄마, 슬퍼하지 마요, 엄마에겐 아직 요요가 있잖아요.”요요는 고작 두 살 밖에 안 되는 아이였지만 항상 청아의 정서를 제일 먼저 눈치 채곤 했다.그리고 또래아이들보다 더 철이 든 요요의 모습에 청아는 순간 코끝이 시큰거리면서 눈물이 날 뻔했다.같은 시각, 문어귀 쪽은 유난히 떠들썩했다.정소연의 동생과 부모님, 그리고 고모에 사촌 여동생까지 대규모가 도착했고, 허홍연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그렇게 다들 한창 인사를 나누다 거실로 들어섰고, 허홍연이 정씨네 가족에게 청아를 소개했다.“이건 내 딸 청아고, 이 아이는 내 외손녀에요.”“강남의 동생이 벌써 결혼까지 했네요, 애도 이렇게 컸고. 따님이 많이 예쁘시긴 하네요.”소연의 엄마가 듣더니 경악하여 청아와 요요를 한번 훑어보았고, 옆에 있던 소연의 아빠가 하온을 보며 웃음을 드러냈다.“그럼 이분이 바로 아이의 아빠겠네요? 정말 훤칠하네요.”허홍연이 하온을 한번 쳐다보고는 바삐 대답했다.“네, 맞아요!”이에 하온이 살짝 멍해졌다. 갑자기 몰려 든 정씨네 가족에 한번 놀라고, 그가 요요의 아빠라고 말하는 허홍연의 대답에 또 한 번 놀란 듯했다.그러다 어색하여 몸 둘 바를 몰라 그를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청아의 모습에 하온은 순간 눈치를 채게 되었다, 우씨네 가족들이 그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다는 걸.하지만 그는 화를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허홍연이 갑자기 다가와 하온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내가 요요를 보고 있을 테니까, 두 사람 편히 이야기 나눠요.”허홍연의 눈빛이 너무나도 수상하여 청아는 허홍연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더욱 난처해져 고개를 숙였다.“괜찮습니다, 제가 요요랑 놀고 있을 게요.” 하온이 바삐 앞으로 나서며 요요를 안으려고 팔을 뻗었고, 허홍연이 유난히 열적정으로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젊은이들끼리 이야기해요. 요요야, 외할머니 방에 가서 놀까?”허홍연의 물음에 요요가 자애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허홍연을 한번 쳐다보고, 또 다시 고개를 돌려 청아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고분고분 허홍연을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그러나 정씨네 가족들이 아직 돌아가지 않은 이상 허홍연은 당연히 요요랑 계속 방에서 놀아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 분만 설렁설렁 놀아주다가 청아의 휴대폰을 꺼내 요요에게 건네주었다.“요요야, 외할머니는 손님 접대하러 다시 나가야 하니까 혼자서도 조용하게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지? 그리고 엄마 지금 하온 아저씨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절대 방해하지 말고.”“엄마랑 하온 아저씨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요?”“두 분이 지금 맞선 보고 있어. 요요 맞선이 뭔지 알아?”요요의 나이에 맞선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요요는 말똥말똥한 두 눈으로 허홍연을 바라보며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요요는 엄마랑 하온 아저씨가 맞선 보는 게 싫어요.”허홍연이 듣더니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요요는 아직 어려서 몰라. 나중에 하온 아저씨가 엄마랑 잘 되어서 요요의 새 아빠가 되어주는 게 얼마나 좋아?”“안 좋아요!”요요가 고집이 섞인 말투로 고개를 저었고, 허홍연이 보더니 바로 화 난 척 두 눈을 부릅뜨고 요요를 훈계했다.“요요야, 좋다고 해야지! 그리고 하온 아저씨도 좋다고 해야 해, 그래야만 네 엄마가 행복해질 거니까.”“
“네!”요요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휴대폰을 들고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문 쪽으로 뛰어갔다.하지만 문 손잡이의 위치는 꽤나 높았고, 아직 1미터도 안 되는 요요는 까치발을 들어가면서까지 힘들게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다 여러 번의 시도만에 겨우 문을 열었고, 사람들로 가득 찬 거실을 한번 훑어보고 나서 즉시 청아한테로 달려갔다.한참 하온에게 물을 따라주고 있던 청아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요요를 발견하고 즉시 웃으며 물었다.“너 어디 갔었어, 요요야?”요요가 자기 손보다 훨씬 더 큰 휴대폰을 청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엄마, 아저씨가 엄마를 찾으세요!”“아저씨? 어느 아저씨?”요요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고개 숙여 들여다본 청아는 수신 번호를 확인한 순간 멍해졌고, 그 바람에 찻주전자 속의 물이 흘러나와 하마터면 청아의 손을 데일 뻔했다.이에 하온이 즉시 다가와 찻주전자를 받아 한쪽에 내려놓고 긴장해하며 물었다.“왜 그래요? 화상 입은 거 아니에요?”“괜찮아요.”“괜찮기는! 어디 봐 봐요.”“아니요, 진짜 괜찮습니다.”“가만히 있어봐요, 그러다 흉이라도 지면 어떻게 하려고요?”[…….]휴대폰 맞은편에서 두 사람의 ‘애정’ 대화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똑똑히 듣고 있던 장시원은 더는 참지 못하고 노호하며 청아를 불렀다.[우청아!]분명 스피커폰을 켜지도 않았는데 장시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휴대폰을 뚫고 나와 온 거실에 퍼졌고, 순간 웃으며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다 물고 요요 손에 들린 휴대폰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에 난감하여 얼굴색까지 붉어진 청아는 바삐 휴대폰을 건네받고 주위 사람들을 향해 해석했다.“저희 대표님이세요, 급한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저 잠시 전화 받고 올게요.”그러면서 휴대 폰을 들고 황급히 허홍연의 침실로 들어갔고, 허홍연이 급히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청아가 아무래도 세계 명문대를 나왔으니 회사 대표님이 청아를 엄청 중시하나 봐요. 이번에도 틀림없이 중요한 일이 있어 청아를 저렇게 급히 찾고 있
강아심은 그에게 대답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돌리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이 살짝 빛났다. 아심은 가능한 시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벽 구석에 깨진 도자기 조각이 보여. 우리가 어떻게든 가서 그걸 손에 넣어야 해.”깨진 도자기 조각은 절반이 먼지 속에 묻혀 있었고, 아마도 산에 올라온 사람들이 여기서 밥을 먹다 그릇을 깨뜨리고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놓은 것 같았다.여자의 숨결이 부드럽게 시언의 귀를 간질이며 퍼졌다. 아심의 부드러운 입술이 열렸다 닫히며 그의 귀밑 민감한 피부를 살짝 스쳤다. 시언은 몸이 순간 굳어졌다가 늦게서야 대답했다.“소용없어.”“뭐?” 아심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이 줄엔 합금 섬유가 섞여 있어. 칼로도 자를 수 없으니 도자기 조각으로는 더더욱 불가능해.”시언이 낮게 말하자, 아심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낮게 속삭였다.“정말 당신을 특별대우해 주긴 하네요!”이번엔 시언이 이해하지 못했다.“응?”“아니, 그런 거지! 일부러 합금 줄까지 써서 묶어놨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분명 이런 대접 못 받을걸요!” 아심이 말하자, 시언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가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었다.어느새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그들을 감시하던 사람들이 교대로 밖에 나갔다 돌아왔다. 마지막 교대 때는 가면을 쓴 남자가 부하들을 데리고 모두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텅 비었던 방은 순식간에 꽉 찼다. 용병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험상궂은 인상에,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방 안 공기를 긴장감으로 가득 채웠다.시언과 아심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섰다. 시언은 벽에 몸을 대고 서서 손으로 아심의 등을 감싸며 가면 남자를 주시했다.가면을 쓴 남자는 남자는 방 한쪽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른 용병들은 방 안에 나무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방금 비가 내린 터라 산속은 밤이 되면서 습기와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
강아심은 용병에게 조하루네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용병은 냉랭하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기억해두었고, 하루가 망설이자 바로 그를 들어 어깨에 둘러메고 밖으로 걸어갔다. 이에 하루는 몸부림치며 울먹이며 외쳤다.“삼촌, 누나!”점점 그 목소리는 멀어져 갔다.아심은 목이 메었지만, 하루를 떠나보내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임을 잘 알고 있었다.오두막 바깥에서는 시언에게 맞아 쓰러진 자들이 동료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부상이 심한 자들은 땅에 누워 쉬고, 가벼운 부상자들은 안으로 들어와 명령을 기다렸다.가면을 쓴 남자는 밖에 나가 전화를 걸고, 돌아와 자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저들을 잘 지켜보고 있어. 윗선의 지시를 기다려.”“예!” 몇몇 용병들이 대답했다.가면 남자는 다시 밖으로 나갔고, 다른 용병들도 따라 나갔다. 오두막 안에는 두 명의 용병만이 남아 시언과 아심을 감시하고 있었다.잠시 후, 시언은 갑자기 아심을 들어 올려 돌며 옆에 있던 대나무 침대에 넘어졌다. 손발이 묶여 있어 힘 조절이 어려웠고, 그가 아심 위에 넘어지며 아심은 깜짝 놀랐다. 시언은 바로 몸을 뒤집어 아심이 자신의 위에 있도록 했다.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감시 중이던 용병들은 깜짝 놀라 총을 겨누었지만, 두 사람이 단순히 침대에 누워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천천히 총을 내렸다.아심은 약간 고개를 들어 아래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언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두 사람이 줄에 묶여서 뻣뻣하게 서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누워 있는 게 그나마 나아.”아심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요?”그러자 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이보다 더 위험한 상황도 겪어봤어. 걱정하지 마, 난 쉽게 죽지 않아.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도 절대 죽지 않을 거야.”아심은 그들을 감시하는 용병들을 한 번 흘깃 보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를 바로 죽여 노도를
시언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노도를 위해 복수하러 온 건가?”가면을 쓴 남자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변성기를 사용한 탓에 그 웃음소리는 거칠고 듣기 거북했다. 마치 산속에서 이빨을 드러낸 야수가 내는 소리 같았다.“진언이 설마 노도의 죽음을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남자가 손짓하자, 바로 누군가가 하루를 그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하루의 목을 쓰다듬으며 냉소를 지었다.“이게 진언의 아들인가?”“아니!” 시언이 차갑게 응수했다.“보기엔 아닌 것 같지만, 진언은 무고한 아이가 본인 앞에서 죽는 걸 원하지 않겠지?”가면을 쓴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하루는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지고 온몸이 떨렸다. 하루는 고개를 돌려 시언을 바라보며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지만, 도움을 청하거나 가면 남자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았다.이때 아심이 차갑게 말했다.“그 아이는 마을에 사는 평범한 농가의 아이야. 내가 인질이 될 테니 그를 풀어주고 집으로 돌려보내.”가면을 쓴 남자가 시언을 보며 물었다.“진언의 생각은 어때?”시언은 들고 있던 총을 내던졌다.“우리 조직에는 조직만의 규칙이 있어. 여성이나 아이를 인질로 잡는 건 가장 비열한 용병들만 하는 짓이야.”“너희들이 원하는 건 나니까 나를 마음대로 처리해. 하지만 여자와 아이는 산 아래로 보내.”아심이 시언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젓자, 시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낮고 깊은 눈빛을 보냈다.“내 말을 들어.”아심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때, 가면을 쓴 남자가 거칠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아이는 풀어줄 수 있어. 하지만 이 여자는 안 돼. 이름은 넘버세븐. 진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지? 내가 틀리지 않았군!”시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면 남자를 노려봤다. 그의 시선은 차갑게 얼어붙었다.“그럼 아이부터 풀어줘!”“서두르지 마. 그 아이가 내 손 안에 없으면, 이 사람들로는 진언을 막아낼 수 없어. 내가 그 정도는 알고
강아심이 몸을 드러내는 순간,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두 개의 창문을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던 아심은 결국 한 사람과 몸싸움을 벌이게 되었다.아심은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가능한 한 빠르고 강력하게 상대의 약점을 노려 공격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창문을 통해 밀려들었고, 하루가 숨던 곳에서 고개를 내밀자 한 고용병이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들어가!” 아심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발로 근처에 있던 나무 의자를 걷어차 상대의 어깨를 가격해 총을 떨어뜨렸다.“탕!” 총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방아쇠가 당겨졌고, 총알이 벽을 뚫고 나갔다.아심은 두 명을 밀어내며 하루가 숨은 대나무 침상으로 다가가 그를 보호했다. 그 순간 또 다른 고용병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 하루가 숨은 침상 밑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아심은 몸을 날려 고용병의 총을 걷어차며 떨어뜨렸고, 다시 그 총을 잡으려는 찰나 또 다른 고용병 두 명이 그녀를 공격해 왔다.아심은 한 남자의 팔을 비틀어 탈골 시키고, 몸을 회전시켜 다른 남자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했다. 아심의 힘은 이 고용병들보다 약했지만 몸놀림이 민첩하고 공격이 매끄러워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그러나 그 순간, 대나무 침상 위로 한 남자가 뛰어올라 침상을 들어 올리며 하루를 붙잡아 칼을 그의 여린 목에 들이댔다.“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이 아이를 죽일 거야!”이와 동시에 문이 거칠게 열리며 시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시언이 지나온 길에는 이미 쓰러진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언의 등장에 방 안의 고용병들은 더욱 경계하며 총을 모두 그에게 겨누었다.가장 가까이 있던 고용병이 아심의 머리에 총을 겨누자 시언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총으로 겨누지 마.”고용병은 시언의 서늘한 시선을 받자 손이 떨렸지만,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시언은 천천히 아심 쪽으로 걸어갔다. 고용병의 눈빛은 두려움이 엿보였고, 본
조하루가 즉시 과일 주스를 시언에게 내밀며 말했다.“삼촌, 이거 드세요. 저를 그렇게 오랫동안 업어 주셨잖아요. 고마워요!”시언은 얇게 입가를 올리며 주스를 다시 돌려주었다.“난 누나와 장난친 거야.”“아...”시언은 최대한 표정을 부드럽게 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효과는 없었다. 조하루는 멍하게 대답하며 다시는 시언을 쳐다보지 못했다.아심은 입술을 꽉 다물며 웃음을 참았고, 차마 대놓고 웃을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 빵을 베어 물었다.숲속에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 창가에 앉아 방 안을 들여다보며 검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쭈쭈 하고 소리를 내면서. 아직 인간에게 위협을 느껴본 적 없는 새는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아심은 빵 부스러기를 조금 떼어 창가에 놓았다. 새는 신나게 부리로 쪼아먹었지만 다 먹기도 전에 갑자기 날아가 버렸다. 시언은 창 아래에 서 있는 아심을 보며 반쪽 남은 빵을 들어 올렸다.“천천히 먹어, 난 밖에 좀 보고 올게.”아심은 시언이 문을 나가는 걸 보고 하루에게 속삭였다.“볼일 보러 가야 해? 삼촌이랑 같이 가면 돼!”하루는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갔다. 아심은 천천히 빵을 다 먹고 물병을 집어 들고 막 마시려던 순간, 밖에서 탕! 하고 커다란 총성이 들려왔다.아심의 얼굴이 굳어졌고,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시언이 떨고 있는 하루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는, 곧바로 따라오던 한 남자를 발로 차서 밖으로 날려 보냈다.그는 고개를 돌려 매우 빠르게 말했다.“지켜, 절대 나오지 마. 창문도 다 잠가!”문이 열리는 그 순간, 아심은 이미 상황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미 포위당한 상태였다. 나무집 주위는 전부 위장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용병들로 가득했고, 적어도 스무 명이 넘었다.문이 닫히고 난 뒤, 바깥에서는 치열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아심은 조하루를 안전한 곳에 숨기고 두 개의 창문을 빠르게 닫은 뒤, 창을 야생 동물로부터
강시언이 앞서 걸었고, 중간에는 조하루, 뒤에는 강아심이 따라갔다.비에 젖어 미끄러운 산길을 걸으며, 아심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조하루에게 지팡이 삼아 주었다. 세 사람은 고요하고 습한 산림 속을 조용히 지나갔다.겨우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뿐인데, 하루는 이미 지쳐 헉헉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어린아이라 무리가 있는 듯했다.아심은 걸음을 멈추고 하루의 앞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자, 내가 업어줄게!”시언이 돌아서더니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을 아심에게 넘기며 말했다.“내가 업을게!”하루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겁먹은 듯 시언을 올려다보았다.“저, 저 아직 괜찮아요.”“아직 한참 남았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어? 올라와!” 이번에는 시언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냉정하고 단호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하루는 아심을 바라보았다. 아심의 격려하는 눈빛을 본 후에야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며시 시언의 등에 올라탔다.시언이 일어서자 조하루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시언의 넓고 든든한 등에 안겨, 하루는 안전감을 느꼈다. 시언은 고개를 돌려 아심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아심도 미소를 지으며 뒤따랐다. 열몇 개의 계단을 더 오르던 중, 하루는 손에 쥐고 있던 비타민 젤리를 시언의 입가에 내밀었다.“아저씨, 이거 드세요!”시언은 원래 거절하려 했으나, 아심이 늘 이 아이들이 자신을 무서워한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 한 손을 뻗어 젤리를 받아 입에 넣었다.하루의 검게 빛나는 눈이 환하게 반짝였고, 시언이 자기가 준 젤리를 먹자 무척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시언이 젤리를 씹으며 물었다.“더 있어?”하루는 허둥지둥 젤리 통을 꺼내 다시 시언에게 주려 했지만, 그가 말했다.“뒤에 있는 누나한테 두 알 줘.”하루는 그제야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에 다섯 여섯 개의 젤리를 쥐고 아심에게 내밀었다.“누나!”아심이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와 하나를 집었다.“고마워!”하루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지만, 아
“네!” 하루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이는 눈빛을 보였다. “정말 맛있어요, 우리 다들 엄청나게 좋아해요.”“하루에 두 알만 먹어야 해,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아심은 자연스럽게 하루와 대화를 이어갔다.“알아요, 선생님이 우리한테 말씀해 주셨어요.” 하루의 미소는 순수하고 귀여웠다.시언은 그들이 뒤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룸미러로 아심을 흘깃 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아심을 데리고 오길 잘했다. 아니었으면 이 작은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어둡고 흐린 날씨에,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 차창이 물안개로 덮여 바깥 풍경이 희미하게 변해 있었다. 차 안은 조용했지만, 아심과 하루의 대화와 빗소리, 그리고 쉼 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차가 한 시간 정도 달린 후, 시언은 뒷좌석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심은 이마를 차창에 대고 잠이 들어 있었다.하루는 창문에 성에 낀 자국을 손가락으로 그리다가, 시언이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자 얼른 손을 내리고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똑바로 세웠다. 시언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자기 외투를 벗어 소년에게 건넸다.“이거 좀 도와줘. 누나에게 덮어줘.”아심은 얇은 회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고, 그녀가 운성에 왔을 때 날씨가 더워서 두꺼운 옷은 가져오지 않았다. 하루는 외투를 받아 조심스럽게 아심의 몸에 덮어주었다.시언은 아심을 한 번 더 보자,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에 시언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차는 산길을 따라 다시 30분가량을 달렸고, 드디어 앞쪽에 무너진 도로가 보였다. 더는 차로 갈 수 없었다.“네 물건 잘 챙기고, 여기서 내려야 해.” 시언이 하루에게 말했다. “산을 돌아서 넘어가야 하거든.”“네!” 하루는 대답하며 자신의 가방을 메고, 안에 들어 있는 옷과 책을 잘 챙겼다.“삼촌, 누나를 깨울까요?” 하루가 묻자, 시언은 표정을 굳히며 뒤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시언은 이미 아침을 먹었을 거라 생각한 아심은 따로 묻지 않고 혼자 아침을 먹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아심은 평소처럼 전화를 걸어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오늘은 아이들이 다시 수업을 시작하는 날이라 아심은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가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러 갔다.도서관 입구에 들어서자, 그녀는 도도희와 시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은 무언가 심각하게 상의하고 있었고, 그 대화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산길이 비에 무너져서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어. 차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산길을 올라가야 해서 너무 위험해.”도도희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시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비가 많이 오진 않으니까 시도해 볼 만해요.” 이때, 아심은 다가가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생겼나요?”시언은 아심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분명히 옷 따뜻하게 입으라고 한 것 같은데.”오늘 아심은 얇은 검은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시언의 지적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도도희 앞이라 반박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곧 가서 갈아입을게요.”도도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아심에게 설명했다.“한 학생의 할아버지가 병이 너무 위중해서 의식이 흐려졌대.”“그런데 할아버지가 계속 손자를 찾고 계셔서 가족들이 전화로 아이를 데려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봤어.”도도희는 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시언은 아이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산길이 위험할까 봐 걱정돼.”“위험할 게 뭐 있어요?” 시언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그렇게 해요. 아이한테 준비하라고 전해주고, 곧 출발할게요.”시언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고, 아심도 뒤따라가며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요.”시언은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안 돼.”“왜 안 돼요?” 아심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시언을 따라붙었다.“그 애들이 얼마나 당신을 무서워하는지 모르죠? 혼자 데려가
차에 올라탄 지아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큰어머니, 이제야 제가 한 말 믿으시겠죠?”권수영은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눈빛이 반짝였다.“저 아가씨, 혹시 남자친구 없나?”“물론 없죠!”“그럼 기다릴 필요 없겠네. 빨리 승현이와 만나게 해야겠어.” 권수영은 이미 마음이 급해져 있었다.“제가 재아에게 말만 하면 분명히 승낙할 거예요.” 아윤은 눈을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할머니의 혼수품도 되찾고, 오빠에게 좋은 여자친구까지 소개해 드렸으니, 큰어머니께서 저를 어떻게 보상해 주실 건가요?”권수영은 속으로 이익을 따져 보며 생각했다. 만약 도씨 집안과 결혼까지 성사된다면, 그야말로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었다.“네가 승현이와 저 아가씨를 이어준다면, 내가 할머니의 혼수품을 되찾아도 그중 절반은 네 몫으로 줄게.”“정말 약속하신 거죠?” 아윤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내가 직접 약속했는데 속이겠니?”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반드시 최선을 다할게요!”...집에 돌아온 아윤은 바로 재아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권수영과의 만남 이유를 은근히 흘리며 설명했다. 그리고는 지승현을 칭찬하며 그와 한번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재아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속으로 기분이 상했다. 첫째는 자신이 누군가의 결혼 상대자로 몰래 계획된 것 같아서였고, 둘째는 현재 중간급인 지씨 집안과 연결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재아는 시큰둥한 태도로 말했다.“야, 그런 얘기를 진작해주지 그랬어? 미안하지만 난 지금 연애할 생각 없어. 아마 큰어머니께서 실망하실 거야.”아윤은 재아의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채고 급히 사과했다.[미안해, 재아야. 정말로 큰어머니께서 그냥 너를 보고 싶어 하셔서 그런 거야. 괜한 부담은 갖지 마.]아윤이 이렇게 간곡히 사과하자, 재아는 약간 기분이 풀리며 말했다.“괜찮아. 나 화난 건 아니야. 그냥 난 당분간 일에 집중하고 싶어. 외할아버지도 내가 빨리 결혼하길 원치 않으셔.”아윤은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