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청아가 최결을 따라 회의실에 들어섰고, 회의는 그제야 비로소 정식으로 시작되었다.회의에서 몇몇 고위층 임원은 열띤 토론을 통해 인수합병건의 이해득실을 분석하면서 각자의 해결방안을 제기했다.청아는 최결의 옆자리에 앉아 임원들이 제기하는 내용을 열심히 귀담아들으며 그 속에서 중점을 골라 기록했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옆모습을 장시원은 이미 5초 넘게 쳐다보았다. 흰색 셔츠에 검은색 긴 바지 차림을 한 청아는 오늘따라 확실히 커리어 우먼 같았다. 다만 약간의 젖살이 붙어있는 하얀 얼굴은 옷차림이랑 다르게 많이 깜찍해 보였다. 특히 지금처럼 말하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 모습은 이상하게 더욱 위화감이 들었다.‘몸매는 수척한데, 하필이면 둥글고 윤택한 얼굴을 가졌으니.’“대표님, 명실 쪽에서 제시한 조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때 한 임원이 갑자기 장시원을 향해 물음을 제기했고, 그 소리에 청아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장시원을 쳐다보았다.그러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장시원이 천천히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명씨 가문에 지금 분열이 나타났고, 명실이 이렇게 쉽게 우리 손에 수매되기를 원하지 않은 몇 명이 고의로 중간에서 방해하고 있습니다.”장시원의 대답에 다들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그제야 문득 문제의 중심을 알게 된 듯했다.그렇게 회의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회의가 끝난 후 장시원은 또 부대표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러다 청아가 마실 차를 가지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부대표가 웃으며 물었다.“신입?”청아가 듣더니 바로 공손하게 인사했다.“처음 뵙겠습니다, 배 부대표님.”아까 회의실에서 청아는 이미 장시원 주변 몇몇 고위층 임원들의 자료를 다 살펴보았다. 그중 당원이라는 임원과 지금 사무실에 앉아있는 배강 배 부대표가 바로 장시원의 아주 유능한 오른팔이다.“장 대표님의 관심을 받을 만큼 예쁘게 생기긴 했네요. 오자마자 39층에 배치된 걸 보니.”배강이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
최결은 청아에게 장시원의 업무 시간과 휴식시간이 적혀있는 리스트를 건네주었다.‘두 시간마다 대표님에게 물 한 잔 건네줄 것.’‘매일 점심 대표님에게 점심 주문 하겠냐고 문의할 것.’‘저녁 퇴근 후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면 같이 동행할 것.’‘대표님 대신 오가는 모든 인정을 기억할 것.’‘대표님이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면, 대표님 대신 모든 기념일을 기억하고 여자친구분을 위해 선물을 챙겨줄 것.’……‘족히 세 페이지나 되는 내용을……’청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회사 대표의 조수는 아무나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차라리 무미건조한 디자인 원고를 만드는 게 더 낫겠네.’그러다 장시원의 여자친구를 위해 선물을 챙겨줘야 한다는 사항에 청아가 고개를 들어 최결에게 물었다.“그럼 대표님 지금은 여자친구분이 계신가요?”“아직은 없어요. 하지만 언제든지 생길 수 있으니까 많이 유의하세요.”장시원이 여자친구를 바꾸는 속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난 이만 밥 먹으러 갈 테니까, 청아 씨는 대표님께 점심에 따로 스케줄이 있는지 한번 여쭤봐요. 배달시킬 필요 있는지도요.”“네! 지금 바로 가서 여쭤보겠습니다.”최결의 당부에 청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최결이 떠난 후, 청아는 바로 대표 사무실로 향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리에 돌아가 앉아 업무를 보았다. 그러다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장시원이 안에서 나오지 않자 청아는 그제야 부득불 사무실로 향했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대표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고, 안에서 전해오는 장시원의 대답을 들은 청아가 숨을 깊게 한번 들이마시고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대표님, 점심밥 주문해 드릴까요?”고개를 숙인 채 공손하게 물음을 묻고 있는 청아의 모습을 장시원이 고개 들어 한번 쳐다보고는 미적지근한 말투로 대답했다.“아니, 입맛 없어.”이에 청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뒤에서 바로 남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몇 분 후, 깨끗하게 청소된 주방을 본 순간 청아는 할 말을 잃게 되었다.장시원이 정말로 주방을 만들어낼 줄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다.탕비실 뒤쪽의 벽에 큰 책장이 세워져 있었는데 장시원이 무슨 버튼을 눌렀는지 책장이 순간 자동적으로 분리되면서 면적이 엄청 큰 주방이 나타났다.그리고 그 주방엔 모든 도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단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새것들이었다.청아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식, 식재료가 없는데요?”“없으면 당연히 사러 가야지. 그런 것도 내가 가르쳐줘야 해?”“아, 그럼 지금 가서 사 오겠습니다.”장시원의 대답에 청아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그러다 엘리베이터를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장시원도 양복 외투를 들고 다가왔다. 이에 청아가 저도 모르게 의아한 눈빛을 드러내자 장시원이 바로 짜증을 내며 말했다.“내가 데려다줄게. 혼자 갔다가 가장 가까운 슈퍼를 찾지 못하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나 지금 배고파.”‘저기요? 아까는 입맛이 없다면서요? 왜 또 갑자기 배고파지셨어요?’‘대체 언제 이렇게 변덕스러워진 거냐고요!’그렇게 슈퍼에 도착한 후, 청아는 쇼핑 카트를 밀고 좌우를 훑어보며 장시원에게 물었다.“대표님 점심에 뭘 드시고 싶으세요?”“아무거나.”아무거나라……청아가 썰어놓은 스테이크를 집어 들고 물었다.“점심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으니까, 스테이크 어때요?”장시원이 듣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이런 냉동 스테이크는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음식이야. 청아 씨는 나의 조수로서 어떻게 그렇게 성의 없이 상사를 모실 수 있는 거지?”장시원의 느닷없는 엉터리에 청아가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시며 평정심을 되찾은 후 공손한 태도로 사과를 했다.“제가 잘못했네요. 사과할게요.”그리고 성의 없이 상사를 모시지 않기 위해 청아는 물고기 두 마리에 장시원이 좋아하는 기타 고기와 야채들도 조금씩 담았다.장시원은 입맛이 엄청 까다로워 힘줄이 달린
‘그렇게 장 주머니를 드는 게 좋은 건가? 그럼 앞으로 매일 장 주머니 하나씩 들고 출근해야겠네, 시원 씨가 수시로 들고 다닐 수 있게.’‘업무를 보다가도 기분이 안 좋다면 바로 장 주머니를 들게 해야지.’슈퍼의 장 주머니를 들고 회사를 오르내리는 장시원의 모습이 상상된 청아는 참지 못하고 ‘픽’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이에 장시원이 바로 차가운 눈빛으로 청아를 힐끗 쳐다보았다.“뭘 웃어?”웃음이 새어 나온 순간 청아도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장시원의 차갑고 사나운 눈빛에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그러는 청아의 모습을 장시원이 또 한 번 차갑게 흘겨보고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다행히도 크게 욕먹지 않은 청아는 더 이상 웃을 담이 없어 아예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다시 39층으로 돌아왔을 땐 최결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청아는 시간을 한번 확인하고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식재료들을 준비했다.식탁 옆의 의자에 앉아 바삐 돌아치는 청아의 뒷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장시원이 갑자기 선심을 쓴 사람마냥 담담하게 말했다.“오늘은 두 가지 음식만 준비하면 돼.”청아가 듣더니 고개를 돌려 물었다.“물고기 조림과 야채 볶음, 괜찮아요?” “알아서 해. 양은 좀 많게.”“네!”시간이 많이 촉박하긴 했지만 청아는 일사불란하게 식재료들을 준비하며 음식을 만들어 나갔다.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모습이 예전보다 많이 능숙해진 청아의 모습에 장시원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외국에 있는 2년 동안, 혼자 밥 해 먹었어?”“네. 첫해에는 집주인 아줌마께서 제가 만든 음식이 맛있다고 하셔서 제가 매일 저녁 직접 음식을 만들어 드렸거든요. 심지어 그것 때문에 저의 집세까지 면해 줬는걸요.”청아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에 장시원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갑갑해졌다.“이듬해는?”“이듬해에는 소희가 자주 와서 제가 아예 심명 씨의 집으로 이사했거든요. 그렇게 몇 명이서 함께 살면서 제가 시간이 될 때마다 그들에게 음
장시원이 야채볶음을 한입 집어 입에 넣었다. 순간 익숙한 맛에 옛 기억들이 다시 자극되어 눈앞에 펼쳐졌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시큰거려 난 그는 고개를 들어 젓가락으로 물고기의 가시를 골라내고 있는 청아를 쳐다보았다.그러다 한참 후 마음속의 이상한 정서를 짓누르고 덤덤하게 입을 열어 물었다.“적응할 만 해? 업무 강도가 높지는 않았고?”청아가 듣더니 바로 고개를 들어 진지하게 대답했다.“적응할만합니다. 강도도 높지 않고요.”“지금은 쉬는 시간이니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이에 청아가 다시 고개를 숙여 물고기 가시를 고르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정말인데.”“적응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나나 최 조수님한테 말해,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고. 난 우리 회사 직원이 나나 회사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일하는 걸 제일 반대해.”“네. 있으면 꼭 제때에 말하겠습니다.”장시원의 진심 어린 말에 청아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청아의 웃는 모습에 장시원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러다 한참 지나서야 다시 담담하게 물었다.“요요는 어때?”너무 뜬금없이 전환 된 화제라 청아는 잠깐 멍해있다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잘 지내고 있어요.”“날 찾지는 않았어?”“네… 아마도요.”“찾은 적이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뭐가 ‘아마도’야?”장시원이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또 혼난 청아는 입술을 깨문 채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장시원이 다시 화가 묻은 어투로 물었다.“네가 출근하면, 요요는 누가 돌보는데?”“이씨 아주머니요.”궁금했던 물음들을 드디어 다 물었는지 장시원은 청아를 한번 흘겨보고는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이에 청아도 가시를 다 골라낸 물고기를 장시원의 앞쪽으로 밀어주고는 덩달아 조용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리고 가시 발라진 고기를 본 순간 장시원은 이유 없이 치밀었던 화가 비로소 풀려 천천히 물고기를 집었다.그렇게 밥을 다 먹고 나니 마침 2시가 되었고, 장시원
“아닙니다! 전철 타면 정말 금방이면 도착해요.”청아가 장시원을 쫓아가 급히 설명했다.“게다가 제가 출근 첫날부터 대표님의 차에 올라탄 모습을 다른 직원들이 보게 되면 잡담할 수도 있어요.”청아가 극구 사양하는 모습에 장시원은 순간 욱해졌다.“누가 잡담을 한다고 그래? 설령 내가 너를 마음에 들어 해서 내 곁에 꽂아두었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어.”청아가 듣더니 멍해져 장시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는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낮은 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은 두렵지 않겠지만, 저는 두렵습니다.”저도 모르게 이상한 말을 내뱉은 장시원은 갑자기 욱해진 자신에게 화가 나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청아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있을 뿐, 엘리베이터에 올라 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장시원이 짜증이 묻은 눈빛으로 그녀를 힘껏 끌어당겼다.그리고 얼떨결에 엘리베이터로 올라 탄 청아는 바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장시원과 거리를 유지했다.이에 장시원이 안색이 어두워져 말했다.“오늘은 퇴근 시간이 늦었으니 그냥 내 차로 가고, 앞으로는 나도 더는 너를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이상한 생각도 하지 말고, 난 단지 집에서 애타게 너를 기다리고 있을 요요가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거니까.”청아도 더 이상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지하 주차장에 들어서니 운전기사가 바로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고, 청아와 장시원은 함께 뒤좌석에 앉았다.운전기사가 있으니,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좀 더 미묘해졌다.이에 청아가 속으로 자신을 최면했다. 장시원의 곁에 여자가 끊긴 적이 없었으니 운전기사도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하지만 청아는 여전히 조금씩 차문 쪽으로 몸을 옮기며 최대한 한 장시원과 거리를 유지했다.차에 올라타서부터 장시원의 전화는 끊이질 않았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가끔씩 청아를 힐끗 쳐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소희는 먼저 이씨 아주머니더러 퇴근하라고 했다.그래서 청아가 집에 들어섰을 땐 이씨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았고, 소희와 함께 책을 읽으며 게임을 하고 있던 요요가 그녀를 발견하고 바로 달려와서는 소리쳤다.“엄마, 돌아오셨어요!”청아가 웃으며 허리를 굽혀 요요를 안았다.“오늘 말 잘 들었어?”“당연하죠, 요요는 가장 착한 아이라고요.”이때 소희가 일어서서 청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첫 출근 괜찮았어? 장시원이 괴롭히지는 않았고?”“괜찮아, 걱정 마. 무사히 돌아왔잖아.”청아가 웃으며 요요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배고프지? 내가 바로 맛있는 거 해줄게.”“아니야, 하지 않아도 돼. 네가 오늘 늦게 돌아올 줄 알고 내가 이미 음식을 주문했어, 곧 도착할 거야. 출근하느라 피곤했겠는데, 쉬어.”소희가 웃으며 말했다.이에 청아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나 소희를 가볍게 안았다.“소희야, 전생에 내가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했기에 이번생에서 너를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그러게? 아마도 전생에 내가 굶주림에 시달려 있을 때 네가 선행을 베풀어 나에게 음식을 주었을 거야.”소희의 농담에 청아는 그제야 웃음을 드러냈다. 장시원의 변덕 때문에 쌓였던 우울함이 순간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저녁을 다 먹고 나서 소희가 위층으로 돌아가 집문을 열려는데 마침 맞은편 집에서 나오고 있는 옆집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경원주택단지는 매 층마다 두 집이 살고 있었고, 소희네 맞은편에 사는 세입자는 한쌍의 커플이었다. 하지만 평소에 서로 너무 바빠서 거의 마주친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때 소녀가 소희를 불러 세웠다.“저기요, 우리 이사 가야 해서 많은 물건들을 버려야 하거든요. 시간이 되면 한 번 들어와서 보세요, 필요한 물건이 있을지. 그냥 드릴게요.”소희가 듣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마음은 고맙지만 전 딱히 필요한 게 없어서요.”“그래요? 어휴, 집주인이 갑자기 집을 팔아
소동이 눈동자를 한번 돌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솔직히 나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집 셰프님께서 만든 밥에 비하면 제작진의 도시락은 다이어트식이나 다름이 없다니까요. 참 소희 씨가 부럽네요, 매일 점심 우리 것보다 더 좋은 걸 먹으면서도 여전히 말랐으니.”마민영이 듣더니 궁금해서 물었다.“소희가 매일 점심 뭘 먹는데?”“듣기로는 따로 주문한 도시락이라던데. 뭐 전복 랍스터 매일 바꿔가면서 먹는대요, 도시락도 우리 것과 다르다고.”“랍스터랑 전복이 뭐가 대단한 거라고. 어차피 난 먹지도 못하는데.”“물론 대단한 건 아니죠.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감독님이 왜 소희 씨에게 그렇게 잘해 주는 건데요?”소동이 눈꼬리를 올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민영 씨가 이번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제작팀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사람인데 이 감독님은 소희 씨를 민영 씨보다 더 중시하잖아요. 진짜 너무 한 거 아닌가요?”“맞아!”마민영이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놓고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이 감독님이 왜 그 여인에게 그렇게 잘해 주는 거야? 여 주인공은 나고, 그 여인은 일개의 디자이너일 뿐인데!”“내가 듣기로는 사실 이 감독님께서 처음에 마음에 들어 했던 여 주인공이 소희 씨였대요. 심지어 직접 전화까지 해서 여러 번이나 부탁했는데 소희가 결국 승낙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또……”소동이 말하다 갑자기 뜸을 들였다.이에 마민영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또 뭐라고 했는데?”“또 소희 씨가 여 주인공 역을 거절했기에 그 배역이 민영 씨한테로 간 거라고. 이 감독님은 속으로 소희 씨를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여 주인공 역을 맡은 민영 씨보다 소희 씨를 더 챙겨주는 거죠.”소동이 눈썹을 찌푸리며 분개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내가 그때 듣고 나서 얼마나 화가 났는데요. 심지어 그들과 한바탕 싸우기까지 했다니까요.”마민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색마저 파래졌다.“내가 지금 바로 감독님을 찾아가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물어볼 거야!”“절대 가면 안 돼요!”
강솔과 진석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강솔은 기쁜 표정으로 소희를 부르며 소희에게 달려갔다.오늘은 모두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비록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불안감도 여전히 있었지만 말이다.진석과 임구택도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옆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소희는 강솔과 함께 대화를 이어갔다.소희가 강솔에게 물었다.“양재아는 어디 있어?”강솔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아침 먹을 때까지만 해도 있었어. 상태도 괜찮아 보였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도경수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며 말했다.“걔도 마음이 복잡할 테니 억지로 불러내지 말게. 혼자서 마음을 가라앉히게 둬.”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아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어색했으니, 혼자 위층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언젠가는 모든 걸 받아들이게 될 것이었다....아침 8시, 아심은 시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 시언은 그녀에게 내려오라고 했다.몇 분 후, 아심은 차에 올라탔다.“도도희 이모는요?”“먼저 가셨어.” 시언은 도로 상황을 살피며 말했다.“우리는 먼저 아침을 먹고 나서 합류할 거야.”“저는 이미 아침을 먹었어요.”시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심을 돌아보자, 아심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왜요?”“아무것도 아니야.” 시언은 무심하게 대답하고 차를 출발시켰다.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얼마 가지 않아 조그만 아침 식당이 보였고, 아심이 말했다.“여기 아침 식사가 괜찮아요. 당신은 여기서 아침을 먹고 오세요. 저는 차에서 기다릴게요.”그러자 시언은 무심하게 말했다.“괜찮아, 안 먹어.”“안 먹으면 배고프지 않아요?” 아심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안 고파.” 시언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운전만 계속했다. 아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가방에서 따뜻한 우유 한 병과 직접 만든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샌드위치는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시언은 그녀를 흘긋
[내가 그 사람을 좀 찾아볼게요. 문제없을 거예요. 그냥 미리 보는 거잖아요. 결과를 조작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건 절대 못 하죠!] 권수영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아는 권수영의 숨겨진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일부러 자신감 넘치는 척 말했다.“당연히 결과를 바꿀 필요 없죠. 그냥 한 시간만 미리 알게 되면 전 그걸로 충분히 기쁠 거예요.”[걱정하지 말아요. 내일 시간 알려주면 미리 가 있을게요.]“정말 감사드려요!” 재아는 감격해서 말했다.“내일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그래요!]두 사람은 몇 마디 더 나눈 후, 재아는 약간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듯, 씻어야 한다는 핑계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내려놓은 재아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결과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리 볼 수만 있다면,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재아는 속으로 다짐했다. 설령 자신이 도도희의 딸이 아니더라도, 도도희가 아심을 인정하게 두진 않을 거라고.‘만약 강아심이 진짜라면, 내가 이 집에 계속 있을 수 있을까?’재아는 절대 도경수가 친손녀를 찾게 둘 수 없었다. 진짜 재희가 돌아오지 않는 한, 자신이 가짜라도 진짜가 될 수 있었다.재아는 속으로 끝없이 계산하며 내일의 계획을 철저히 준비했다....다음 날 아침, 재아는 이층 창가에 서서 도도희가 차를 몰고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다.도경수는 도도희를 따라가며 몇 마디 당부를 건넸다. 그의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에서 도도희와 강심의 결과를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에 재아는 비웃음을 지었다.‘할아버지는 입만 열면 나를 친손녀처럼 여긴다고 하지만, 결국엔 강아심이 진짜 손녀이길 더 바라고 있어.’재아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창가의 커튼을 움켜쥐었고, 손아귀의 힘 때문에 커튼에 구멍이라도 뚫릴 것만 같았다.한편, 아래층으로 소희와 임구택이 도착했고, 도경수는 소희에게 도도희가 이미 나갔다고 말했다.소희는 도경수의 팔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안으로 들
소희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조금 옅어져 있었다.“오늘 양재아랑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예상대로 도씨 저택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 하더라고.”임구택은 눈빛을 깊게 가라앉히며 말했다.“그건 예상했던 일이야.”소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그래서 그게 문제예요. 만약 아심이 스승님의 외손녀로 밝혀진다면, 양재아는 어떻게 해야 할까?”소희는 이 상황이 자신이 만든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소희가 책임지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했다.소희는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재아가 요즘 지씨 집안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아.”구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내가 양재아를 주시하도록 사람을 붙여둘게. 어찌 되었든, 가 너나 도씨 집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그 외의 일은 문제없을 거야.”...한편, 재아는 저녁 내내 억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도도희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에 상실감과 걱정이 가득했고, 또 한편으로는 도도희가 친딸을 찾을 가능성에 대해 기뻐하는 척해야 했다.이 모순된 감정들로 인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미소는 억지스럽고 어색했다. 도경수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다가와 말했다.“재아야, 인제 그만 올라가 쉬어라. 너무 무리하지 말고.”재아는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문을 닫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는 억지로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서,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과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다.‘내가 친딸이 아니라는 것도 이미 절망스러운데...’‘이제 강아심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니?’재아는 손으로 옷을 움켜잡고, 억울함과 분노에 눈물을 흘렸다.‘어떻게 강아심일 수 있지? 왜 꼭 그 여자여야 하는 거야?’온두리에서 자신을 데리고 온 사람은 소희였고, 도경수도 자신을 좋아해 줬는데, 왜 마지막에 와서 모든 것이 아심 쪽으로 기울어져야 하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재아는 아심을 처음부터
강시언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그때 들어보니, 친자식이 아팠고 치료비가 급히 필요해서였던 것 같아요.”그 말에 도도희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심을 팔아넘길 정도였던 양부모라면, 아심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주었을 리가 없었다.“그럼 그 양부모는 어디에 있는 거니? 아심은 언제부터 그들에게 맡겨졌던 거야?”도경수가 이어서 묻자, 시언은 차분히 대답했다.“그들이 말하길, 아심은 강가에서 주운 아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어요.”“그 사람들도 강 씨였나?”“아니에요.”강시언은 잠시 말을 멈추다 덧붙였다.“제가 강 씨라서, 아심도 제 성을 따라 강 씨가 된 거예요.”방 안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각자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도경수가 다시 무언가 물으려는 순간, 소희가 나섰다.“내일 아침이면 도도희 아줌마와 아심의 친자 검사가 진행될 텐데, 스승님께서 너무 서두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내일 결과가 나오면 그때 더 자세히 알아봐도 늦지 않잖아요.”소희는 아심의 과거에 대해 성급한 판단이나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이 대화를 중단시키고 싶었다. 소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시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아심의 과거는 내일의 검사 결과와 무관해요. 결과를 보고 나서 판단하는 게 더 중요하죠.”도경수는 고개를 숙이며 자책하듯 말했다.“내가 조금 조급했구나.”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식사 시간 동안 이반스가 C국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이끌었고, 도경수도 몇 마디 거들었다.강솔은 중간중간 농담을 섞어 분위기를 풀었고, 덕분에 식사는 비교적 밝은 분위기에서 끝났다.식사가 끝난 뒤 밤이 깊어지자, 소희와 임구택은 먼저 도도희 집을 떠났다. 강재석은 도씨 저택에 머물렀고, 시언 역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떠나기 전, 시언은 도도희에게 말했다.“내일 아침에 아심을 데리러 가고, 그 후에 이모를 모시러 올게요.”도도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굳이 오지 않아도 돼. 오늘 가는 길을
강아심은 고개를 숙이고 국물을 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그렇게 우연한 일이 있을까요?”아심과 도도희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들이 친 모녀라고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드라마 같았다.“지금의 삶이 바뀌는 게 두려운 거야?”강시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그 말에 아심은 멍하니 시언을 바라보다가,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과 마주쳤다.길고 고운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이윽고 아심은 자리에서 일어나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며 말했다.“내가 설거지할게요.”“내가 할게.”시언이 그녀를 막아섰다.“자기 그릇은 자기가 씼는 거예요.”아심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시언은 약간의 불만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설거지가 끝난 뒤, 시언은 냉장고에서 요구르트 한 병을 꺼내 아심에게 건넸고, 아심은 요구르트를 마시며 거실로 걸어갔다. 뒤따라오는 강시언을 보며 그녀는 약간의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밥도 다 먹었는데, 아직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시언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날 쫓아내려는 거야?”시언은 아심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눈빛을 고정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럽게 울렸다.“만약 네가 도도희 이모의 딸이라면, 넌 재희인 거야.”아심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그녀는 가만히 입을 열어 말했다.“재희라면요?”“별다른 건 없어.”시언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그저 내가 널 만나게 된 걸 무척 기쁘게 생각할 거야.”시언의 손끝이 약간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아심의 뺨을 스치자, 아심의 가슴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두근거렸다.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시언은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오늘 밤은 여기 안 남아. 지금 상황에서
양재아는 도도희와의 친자 검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시언이 아심이 도도희의 딸일 가능성을 제기하자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된 것처럼 느껴졌다.그랬기에 재아는 이 상황이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도경수는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재아야, 네가 지금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것 같구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라.”재아는 도경수를 바라보며 복잡한 눈빛을 보냈다. 예전엔 자신이 아심에 대해 무슨 말을 해도 도경수는 그녀를 믿어줬다.하지만 지금은 검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도경수는 벌써 강아심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도경수는 계속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라. 네가 내 친손녀가 아니더라도, 이 집에 계속 있어도 괜찮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단다.”재아는 그가 할아버지라는 말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듣고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지만, 얼굴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 할아버지. 정말 저에게 잘해 주시는 것 같아요.”도경수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사이에도 정이 들었지 않니. 네가 친부모를 찾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마. 찾고 싶지 않다면 여기가 네 집이야.”재아는 감동한 듯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지만 곧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만약 아심이 정말 도도희 아줌마의 딸이라면, 저를 받아줄 수 있을까요?”도경수는 웃으며 대답했다.“만약 아심이 정말 우리 집안의 사람이라면, 걔도 자기 엄마처럼 마음이 따뜻하고 착할 거다. 그런데 어떻게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니?”재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속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재아는 아심에 대한 나쁜 말을 더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내심으로는 내일의 친자 확인 결과가 오늘과 같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시언은 아심을 그녀의 아파트 아래까지 데려다주었고, 아심은 차에서 내리려다 말했다.“오늘 데려다줘서 고마워요.”“고맙다는 말이 다야?”시언은 이미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말했다.“이렇게 늦었는데, 저녁 한
강솔이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저도 할아버지 말씀이 맞다고 생각해요! 강아심이 정말로 도도희 아줌마의 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아니더라도, 도도희 아줌마도 하룻밤 차분히 생각하고 나면 당장 떠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게만 되어도 괜찮잖아요?”도경수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그래.”소희는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양재아를 바라보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분명 양재아 역시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을 것이다. 소희는 기회를 봐서 그녀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강솔은 조금 전 도도희와 아심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아까 보니까 정말 놀랐어요! 두 분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어요!”도경수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도 닮았다고 생각해?”강솔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네, 정말 많이 닮았어요!”도경수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표정으로 강재석을 보며 말했다.“설날 때 아심이 네 집에 있었지? 우리가 화상 통화를 했을 때 본 그 아이가 바로 아심이었어. 그때부터 낯이 익다 싶었어!”사람들은 점점 더 흥분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재아는 이 모습을 그저 지켜보다가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소희는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임구택에게 짧게 말한 뒤 따라갔다. 재아는 정원 한쪽의 긴 벤치에 앉아 무릎을 껴안고 작은 소리로 울고 있었다.“재아야.”소희가 다가가 그녀를 부르자, 재아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닦으며 간신히 말했다.“소희.”소희는 재아의 곁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이번 일은 나도 책임이 있어. 널 온두리에서 데리고 온 뒤, 확인을 늦춘 건 내 잘못이야. 너를 이곳에서 오래 머물게 하면서 정이 들게 만든 것도 마찬가지고.”재아는 입술을 깨물며 울먹였다.“맞아. 나 정이 들어버렸어. 이제는 여기를 제집처럼 느껴지고.”소희는 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네 친부모를 찾는 걸 도와줄게.”그러나 재아는 고개
관계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지금, 강아심은 도씨 집안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도도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내일 보자.”그녀는 말을 마친 뒤 강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시언아, 아심을 데려다줘.”“네.”시언이 짧게 대답했고 아심은 강재석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할아버지, 이렇게 빨리 또 뵙게 될 줄 몰랐어요.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함께 식사하지 못하겠네요. 내일 다시 찾아뵐게요.”강재석은 다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는 기회가 많을 테니, 오늘은 괜찮아. 가는 길 조심하고.”아심은 소희와 임구택 등에게도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는 시언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도경수는 그녀를 떠나보내며 계속해서 아심의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저무는 저녁빛 속에서 선명한 아심의 옆모습은 젊은 시절 도도희를 떠올리게 했다. 그랬기에 도경수는 그녀를 붙잡아 두고 싶다는 말을 거의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양재아는 도경수의 이러한 반응을 감지하고 더더욱 불안해졌다. 이에 본능적으로 아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전엔 단지 아심이 싫었다면, 지금은 알 수 없는 증오가 스며들기 시작했다.‘아심일 리 없어. 이렇게 우연일 수는 없잖아!’재아는 자신을 계속해서 다독이며 안심하려 했다.시언은 차를 몰고 아심을 데리고 떠났다. 그리고 소희는 도도희의 손에서 캐리어를 받아들며 말했다.“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얘기해요.”도도희는 고개를 끄덕였고, 모두 다시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분위기는 어딘가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처음에는 오랜 기다림 끝에 양재아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모두가 실망과 무거운 마음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아심의 등장으로 다시 새로운 희망이 피어올랐다.마치 끝없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비쳐 들어온 것처럼. 그 한 줄기 빛 덕분에 모두의 침울했던 마음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도경수의 얼굴에서도 이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조금은 사라진 듯했다. 도도희는 도경
도도희는 필사적으로 참아왔던 눈물을 더는 막지 못하고 흘러내렸다.“시언아, 재희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그 순간, 마치 재희가 사라진 직후로 되돌아간 듯했다.10대였던 강시언이 강성으로 달려왔을 때, 도도희는 목이 터지라 울며 절망 속에서 물었다.“시언아, 재희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시언은 그때처럼 오늘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찾을 수 있어요.”그의 눈빛은 단호했다.“한 번 더 확인해 보면 안 될까요?”도도희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놀라며 되물었다.“뭐라고?”옆에 있던 도경수도 그 말에 희망을 얻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검사 결과가 실수일 수도 있다는 건가? 한 번 더 하면 더 정확한 결과가 나오는 거야?”“아니요.”시언은 고개를 돌려 아심을 바라보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어둠 속에서 앞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그녀를 도도희 앞에 세우며 말했다.“이모, 이번엔 아심이랑 친자 확인을 해보죠.”시언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사람이 놀라며 굳어버렸다. 도도희와 아심은 물론이고, 재아조차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재아는 얼굴이 새하얘지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저, 저와 이모가 어떻게.”아심은 당황하며 손목을 뿌리치려 했지만, 시언은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강아심, 네가 겪었던 일들과 재희가 겪었던 일이 비슷해. 그리고 네 등에 있는 태어나면서 생긴 점도 그렇고.”“많은 사람이 너와 도도희 이모가 닮았다고 한 적 있잖아?”도도희는 놀란 눈빛으로 아심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등에도 그런 점이 있어?”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있긴 하지만 문신 때문에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아심은 시언을 돌아보며 덧붙였다.“비슷한 일을 겪은 아이들은 많아요. 그 점도 단순히 우연일 뿐일 수 있어요. 괜히 이모를 또다시 상처받게 하지 마세요.”시언은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단호하게 말했다.“검사를 하지 않는 게 진짜 평생 후회로 남을 수도 있어. 검사를 해보고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