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소희는 먼저 이씨 아주머니더러 퇴근하라고 했다.그래서 청아가 집에 들어섰을 땐 이씨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았고, 소희와 함께 책을 읽으며 게임을 하고 있던 요요가 그녀를 발견하고 바로 달려와서는 소리쳤다.“엄마, 돌아오셨어요!”청아가 웃으며 허리를 굽혀 요요를 안았다.“오늘 말 잘 들었어?”“당연하죠, 요요는 가장 착한 아이라고요.”이때 소희가 일어서서 청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첫 출근 괜찮았어? 장시원이 괴롭히지는 않았고?”“괜찮아, 걱정 마. 무사히 돌아왔잖아.”청아가 웃으며 요요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배고프지? 내가 바로 맛있는 거 해줄게.”“아니야, 하지 않아도 돼. 네가 오늘 늦게 돌아올 줄 알고 내가 이미 음식을 주문했어, 곧 도착할 거야. 출근하느라 피곤했겠는데, 쉬어.”소희가 웃으며 말했다.이에 청아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나 소희를 가볍게 안았다.“소희야, 전생에 내가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했기에 이번생에서 너를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그러게? 아마도 전생에 내가 굶주림에 시달려 있을 때 네가 선행을 베풀어 나에게 음식을 주었을 거야.”소희의 농담에 청아는 그제야 웃음을 드러냈다. 장시원의 변덕 때문에 쌓였던 우울함이 순간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저녁을 다 먹고 나서 소희가 위층으로 돌아가 집문을 열려는데 마침 맞은편 집에서 나오고 있는 옆집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경원주택단지는 매 층마다 두 집이 살고 있었고, 소희네 맞은편에 사는 세입자는 한쌍의 커플이었다. 하지만 평소에 서로 너무 바빠서 거의 마주친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때 소녀가 소희를 불러 세웠다.“저기요, 우리 이사 가야 해서 많은 물건들을 버려야 하거든요. 시간이 되면 한 번 들어와서 보세요, 필요한 물건이 있을지. 그냥 드릴게요.”소희가 듣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마음은 고맙지만 전 딱히 필요한 게 없어서요.”“그래요? 어휴, 집주인이 갑자기 집을 팔아
소동이 눈동자를 한번 돌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솔직히 나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집 셰프님께서 만든 밥에 비하면 제작진의 도시락은 다이어트식이나 다름이 없다니까요. 참 소희 씨가 부럽네요, 매일 점심 우리 것보다 더 좋은 걸 먹으면서도 여전히 말랐으니.”마민영이 듣더니 궁금해서 물었다.“소희가 매일 점심 뭘 먹는데?”“듣기로는 따로 주문한 도시락이라던데. 뭐 전복 랍스터 매일 바꿔가면서 먹는대요, 도시락도 우리 것과 다르다고.”“랍스터랑 전복이 뭐가 대단한 거라고. 어차피 난 먹지도 못하는데.”“물론 대단한 건 아니죠.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감독님이 왜 소희 씨에게 그렇게 잘해 주는 건데요?”소동이 눈꼬리를 올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민영 씨가 이번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제작팀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사람인데 이 감독님은 소희 씨를 민영 씨보다 더 중시하잖아요. 진짜 너무 한 거 아닌가요?”“맞아!”마민영이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놓고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이 감독님이 왜 그 여인에게 그렇게 잘해 주는 거야? 여 주인공은 나고, 그 여인은 일개의 디자이너일 뿐인데!”“내가 듣기로는 사실 이 감독님께서 처음에 마음에 들어 했던 여 주인공이 소희 씨였대요. 심지어 직접 전화까지 해서 여러 번이나 부탁했는데 소희가 결국 승낙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또……”소동이 말하다 갑자기 뜸을 들였다.이에 마민영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또 뭐라고 했는데?”“또 소희 씨가 여 주인공 역을 거절했기에 그 배역이 민영 씨한테로 간 거라고. 이 감독님은 속으로 소희 씨를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여 주인공 역을 맡은 민영 씨보다 소희 씨를 더 챙겨주는 거죠.”소동이 눈썹을 찌푸리며 분개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내가 그때 듣고 나서 얼마나 화가 났는데요. 심지어 그들과 한바탕 싸우기까지 했다니까요.”마민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색마저 파래졌다.“내가 지금 바로 감독님을 찾아가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물어볼 거야!”“절대 가면 안 돼요!”
소희는 얼굴색 한번 변하지 않고 신속히 손을 뻗어 뱀의 세치를 잡았다. 그러고는 청자켓으로 꽁꽁 싸맨 후 마민영에게 건네주었다.“가질래요? 안 가질 거면 점심에 뱀 탕 끓여 먹고.”마민영은 놀라서 무의식적으로 뒤로 움츠러들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희를 향해 소리쳤다.“저리 치워!”뱀은 마민영이 소희를 놀라게 하려고 조수더러 애완동물 시장에 가서 사 오라고 한 애완용 뱀이다. 그런데 소희가 맨 손으로 뱀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소희가 잠시 생각하더니 옆에 있는 조수에게 청재킷을 던졌다.“너희들의 물건은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하세요.”“꺅!”“꺄아아아악!”무의식적으로 청재킷을 받은 조수는 놀라서 펄쩍펄쩍 뛰며 옷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안에 있던 뱀도 천천히 기어 나왔다.이에 마민영이 비명을 지르며 신속히 의자에 뛰여 올랐고, 조수가 바로 달려가 마민영을 보호했다. 두 사람은 놀란 나머지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비명소리는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그리고 그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소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뱀으로 나를 놀라게 할 생각을 하다니.’‘내가 먹은 뱀고기가 얼만데.’두 사람의 비명소리에 밖에 있던 스태프들이 급히 달려와서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그러자 마민영이 벌벌 떨면서 말했다.“뱀, 뱀이 있어! 빨리 내보내!”옷 위에 몸을 돌돌 감고 앉아있는 검은 꽃뱀을 본 스태프가 의아해하며 중얼거렸다.“여기에 어떻게 뱀이 있을 수 있지?”“일단 내보내고 중얼거려!”“네, 네! 괜찮아요, 민영 씨. 겁먹지 말아요. 지금 바로 내보낼게요.”마민영이 화를 내며 큰 소리로 외치자 직원이 바로 막대기를 찾아와 뱀을 들고나갔고, 마민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에 소희가 마민영을 향해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영 씨 뱀을 무서워하네요? 난 또 저 뱀이 민영 씨가 입었던 옷 속에 있어 당연히 민영 씨가 기르던 애완동물인 줄 알았는데. 저런 뱀은 얼룩무늬 뱀이라고, 사람 냄새를 엄청
소동은 순간 난처해져 얼굴색마저 빨개졌다.하지만 이 감독의 독설은 끝날 줄 몰랐다.“실력이 남보다 못하면 자신의 실력을 향상하는 데에 전념을 해야지, 이런 잔꾀를 부린다고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소동이 고개를 숙인 채 목이 메어 대답했다.“잘못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그래, 민영 씨 어떻게 됐는지 한번 가 봐.”“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이 감독의 사무실에서 나온 후, 소동의 얼굴색은 순간 어두워졌다. 심지어 두 눈에서는 음험하고 악랄한 빛이 돌았다.소희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소동은 학교에서 남학생들의 추앙을 받고 다니는 퀸카였고,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부잣집 아가씨였다. 그야말로 고민거리 없이 누리고 싶은 걸 실컷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는데, 소희가 나타난 후부터 그녀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북극에서 표절로 인해 해고되고, 작업실을 차렸는데 줄곧 대박 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심지어 지금은 모든 체면을 버리고 제작진 패션 디자이너로 들어왔는데 욕이나 먹고.‘이게 다 소희 때문이야!’‘소희만 있으면, 난 영원히 출세하지 못할 거야!’‘소희는 틀림없이 나의 천적일 거야!’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 소동은 안색이 어두워져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반드시 소희를 짓밟아 버리겠다고 윽별렀다.마민영이 깨어난 후 여전히 겁에 질려있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바로 의사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뱀이 나를 찾아와 복수하면 어떻게 해요? 그 뱀이 아들과 손자들을 전부 불러오면 어떻게 해요?”의사가 마민영의 어처구니없는 물음에 잠시 멍해있더니 조감독을 향해 말했다.“차라리 큰 병원으로 이송해 신경과에 가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누굴 정신병환자 취급하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정신병환자 아니야?”마민영이 많이 놀라긴 했으나 멍청한 건 아니니 당연히 의사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이에 조감독이 바삐 앞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민영 씨, 어떻
소희가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통일된 복장을 입은 일군들이 옆집을 드나들면서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가구까지 들고 나오는 걸로 봐서는 집을 새로 인테리어 할 기세인 것 같았다.그러다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소희를 보더니 바로 다가와서는 물었다.“옆집에 사시는 분인가요?”“네, 무슨 일이시죠?”“아, 별일은 아니고요, 저희 직원들이 일하는 과정에서 아가씨에게 방해가 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저에게 말해 주세요, 저희가 반드시 고치겠습니다.”남자의 태도가 너무 상냥하니, 소희는 당연히 흠잡을 곳이 없었다.“괜찮습니다, 그냥 제가 쉴 때 소리를 조금만 낮춰주시면 됩니다.”“아무렴요, 저희는 온전히 아가씨의 출근 시간에 따라 공사를 진행할 겁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최대한 공사를 중단하거나 소리가 나지 않는 잔일을 진행할 예정이니 절대 아가씨의 휴식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겁니다.”“감사합니다.”남자의 친절한 서비스 태도에 소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이에 상대방도 웃는 얼굴로 소희를 향해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일군들을 철수시켰다.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일군들은 칼같이 소희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공사를 시작했고, 소희가 퇴근하면 또 바로 철수했다. 오다가다 인사 몇 번 한 것 외엔 정말로 약속대로 소희의 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심지어 인테리어용 재료 포장지들도 다 가져가고, 복도까지 깨끗하게 청소해 놓았다.*목요일소희가 퇴근하고 집으로 향하는데 마민영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소희 씨, 나 며칠 후 연회에 참가하는 신을 찍을 때 예복을 입어야 하거든? 하지만 난 다른 사람이 입었던 걸 입고 싶지 않아. 그래서 소희 씨가 나를 위해 예복 한 벌 새로 골라줬으면 하는데, 나한테로 와.]대본의 내용에 의하면 며칠 후 별장 주인네 딸이 연회를 주최하게 되고, 마민영이 맡은 여 주인공도 초대받아 그 연회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대본의 설정대로라면 예복 한 벌 없는 여 주인공이 직접 예복을 만들게 되고.소희가 눈동자를 한번
일곱 명의 킬러들은 소희를 살려둘 생각이 없는 사람마냥 인정사정없이 소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땅에 넘어진 마민영은 사람을 불러오려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무력하게 땅에 엎드려 일곱 킬러와 싸우고 있는 소희를 바라보았다.소희는 순식간에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자신의 등을 찌르려는 사람의 손목을 잡고 힘껏 비틀었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의 손목이 부러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비수도 땅에 떨어졌고, 반응하기도 전에 소희에게 발로 차여 날아갔다.소희가 먼저 상대방을 건드려 싸움 나기까지 불과 몇 분밖에 안 되었지만 상대 쪽에 이미 반쯤 쓰러졌고, 케이슬의 경비원들이 그제야 급히 달려왔다.남은 몇 명이 일이 들통난 걸 보고 다시 마민영을 잡으려 했으나 이미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그냥 다친 동료를 데리고 신속히 문밖에 주차된 승합차에 올라 달아났다.헐레벌떡 도착한 경비원은 소희에 의해 제압된 두 사람을 붙잡고 급히 경찰에 신고했다.소희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마민영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땅에 주저앉아 있는 마민영은 겁에 질렸는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소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소희와 눈을 마주친 순간 눈물이 끊어진 구슬마냥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이에 소희가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의자를 가져와 마민영을 의자에 앉혔다.마민영은 여전히 몸을 떨고 있는 채 얼굴색이 창백해져서는 아무 말을 못 했다.그러자 그들을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추측하기 시작했다.“이 아가씨의 상태로 봐서는 뭔가를 억지로 먹은 거 같은데?”“불쌍하기도 해라. 이 아가씨가 제때에 발견하고 구해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네.”“누구한테 물이 있으면 이 아가씨한테 줘요, 물을 마시면 많이 나아질 것 같은데.”……한 무리의 사람들이 호의를 베풀며 마민영을 챙겨줬지만 마민영은 줄곧 소희만 바라보았다.그녀는 확실히 강제적으로 무언가를
잡혀온 사람 중 한 명이 확실히 어깨에 칼을 맞긴 했지만 상처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 지는 아직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그리고 임구택에게 연락을 한 경찰이 임구택의 분부에 반드시 소희를 잘 돌보겠다고 맹세했다.임구택이 통화를 하는 사이에 명우는 이미 차를 몰고 나왔고, 얼굴색이 얼음장마냥 차가원진 임구택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명우더러 남병로의 경찰서로 가라고 했다.이에 명우가 가장 빠른 속도로 경찰서로 질주했다.경찰서에 도착한 후, 임구택은 바로 심문실로 들어갔고, 안에 앉아 있는 소희를 한눈에 알아보았다.소희도 임구택을 알아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임구택이 성큼성큼 다가가 소희의 어깨를 잡고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긴장된 눈빛으로 물었다.“어디 다치지는 않았어?”소희는 단지 팔에만 상처가 한 곳 나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깊지 않았던 상처는 이미 피가 말라있었고.그러나 그 상처를 보자마자 임구택의 얼굴색은 순간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살의가 묻은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경찰에게 물었다.“이 사람을 다치게 한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갑자기 경찰서로 쳐들어온 임구택을 뭐 하러 왔냐고 묻기도 전에 임구택이 또 차갑고 포악한 눈빛으로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는 모습에 경찰들은 놀라서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이에 소희가 그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아주 작은 상처일 뿐이야, 그러니까 진정해. 상대방의 상처가 나보다 훨씬 더 심각해.”“칼까지 들고 싸웠는데,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이때 대장이 들어와서 공손하게 임구택을 향해 말했다.“임 선생님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먼 걸음 하게 해서 미안하네요.”대장의 인사에 임구택이 바로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사람과 싸운 놈들은요?”이에 대장이 바삐 말했다.“싸운 게 아니라 소희 씨가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나선 거거든요! 덕분에 마민영 씨가 살았고요.”임구택이 듣더니 고개를 돌려 소희를 쳐다보았다.이에 소희가 눈썹을 한번 올렸다. 비록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
“마민영 씨라는 분이 바로 이 감독이 이번에 새로 뽑은 여 주인공이야?”“음.”“케이슬에는 뭐 하러 갔는데?”“마민영이 의상에 대해 같이 상의해보고 싶다고 해서.”“그럼 그 여인은 왜 강제로 약을 먹은 건데?”“몰라. 내가 케이슬에 도착했을 때 마민영은 이미 납치되어 밖으로 끌려가고 있었어.”임구택이 소희의 상처를 한번 쳐다보고는 물었다.“경비원을 부르면 안 돼? 왜 굳이 네가 달려드는 건데? 무술을 잠깐 배웠다고 아주 구세주라도 된 것 같아?”임구택에게 혼나고 있는 소희의 예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그들의 차가 바로 입구에 세워져 있어 경비원을 부르기엔 너무 늦었어.”“그 사람이 네가 이토록 필사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아니.”소희가 임구택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마민영이 오늘 나를 불러낸 것도 다른 꿍꿍이가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난 마민영이 그대로 죽게 놔둘 수가 없었어.”“죽는다고? 네가 어떻게 그 여인이 반드시 죽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데?”임구택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분노가 숨어 있었다.“그리고 난? 넌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있어?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난 어떡하라고? 2년 전에 나 이미 한번 죽을 뻔했어, 알아?”임구택의 말에 소희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당연히 몰랐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하지만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고분고분 그에게 혼나지도 않았을 테니까.임구택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냉혈인간이라고 욕해도 좋아, 그 여인의 죽음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까. 하지만 넌 안 된다. 너의 목숨은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해.”소희는 순간 손끝이 저리고 가슴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난 괜찮아. 날 믿어.”“자신이 제일 신경 쓰는 사람 앞에서는 그 누구도 냉정해질 수 없어.”소희가 입술을 오므린 채 고개를 숙였다. 갈수록 임구택의 진심 어린 고백에 직시할 수 없는 것 같았다.임구택이 다시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