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민영 씨라는 분이 바로 이 감독이 이번에 새로 뽑은 여 주인공이야?”“음.”“케이슬에는 뭐 하러 갔는데?”“마민영이 의상에 대해 같이 상의해보고 싶다고 해서.”“그럼 그 여인은 왜 강제로 약을 먹은 건데?”“몰라. 내가 케이슬에 도착했을 때 마민영은 이미 납치되어 밖으로 끌려가고 있었어.”임구택이 소희의 상처를 한번 쳐다보고는 물었다.“경비원을 부르면 안 돼? 왜 굳이 네가 달려드는 건데? 무술을 잠깐 배웠다고 아주 구세주라도 된 것 같아?”임구택에게 혼나고 있는 소희의 예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그들의 차가 바로 입구에 세워져 있어 경비원을 부르기엔 너무 늦었어.”“그 사람이 네가 이토록 필사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아니.”소희가 임구택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마민영이 오늘 나를 불러낸 것도 다른 꿍꿍이가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난 마민영이 그대로 죽게 놔둘 수가 없었어.”“죽는다고? 네가 어떻게 그 여인이 반드시 죽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데?”임구택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분노가 숨어 있었다.“그리고 난? 넌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있어?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난 어떡하라고? 2년 전에 나 이미 한번 죽을 뻔했어, 알아?”임구택의 말에 소희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당연히 몰랐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하지만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고분고분 그에게 혼나지도 않았을 테니까.임구택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냉혈인간이라고 욕해도 좋아, 그 여인의 죽음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까. 하지만 넌 안 된다. 너의 목숨은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해.”소희는 순간 손끝이 저리고 가슴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난 괜찮아. 날 믿어.”“자신이 제일 신경 쓰는 사람 앞에서는 그 누구도 냉정해질 수 없어.”소희가 입술을 오므린 채 고개를 숙였다. 갈수록 임구택의 진심 어린 고백에 직시할 수 없는 것 같았다.임구택이 다시
사건의 경과는 마민영이 깨어나야 알 수 있는 거니까, 조사가 끝난 후 소희는 바로 풀려났다.그러다 경찰서를 나오니 명우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차에 올라탄 후 소희가 바로 명우를 향해 말했다.“미안해요, 명우 씨, 저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옆에 있던 암구택이 듣더니 냉소하며 말했다.“예전에 명우가 너를 도와 너의 신분을 나한테 속였을 때 이미 너의 부하가 된 거 아니었어? 부하한테 뭐 미안할 게 있어?”소희가 잠깐 멍해있더니 갑자기 예전의 일을 생각나 명우한테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임구택을 향해 물었다.“후에 당신 명우 씨를 징벌하지 않았지?”“아니요!”명우가 임구택 먼저 대답했다.“대표님께서 선처해 주시고, 다행히도 중벌은 내려주지 않았습니다.”다만 그를 서북의 유전으로 1년 동안 파견 보냈을 뿐. 하지만 그건 충분히 가벼운 징벌이었다.소희는 당연히 ‘중벌’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정말 미안해요.”그런데 이번엔 임구택이 명우 먼저 대답했다.“별말씀을요, 부인. 정말 그럴 필요 없다니까요.”임구택의 뜬금없는 호칭에 소희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고, 이에 임구택이 바로 또 비웃으며 물었다.“당신이 제일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나 아니야?”“뭘? 명우 씨더러 우리의 이혼 절차를 밟지 말라고 한 걸 미안해하라고?”소희가 되물었다.이에 임구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렇게 따지면 그는 오히려 명우에게 감사해야 했다.그리고 임구택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모습에 명우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 또 암구택한테 발견될까 봐 다시 정색하여 열심히 운전했다.암구택이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정에 가자.”이에 소희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경원으로 돌아갈래.”오늘은 소희가 다쳤으니, 임구택의 소희의 요구에 따라줄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시간도 많는데 급해할 것도 없고.그렇게 차는 경원주택단지에 들어섰고, 소희는 명우에게 감사를 표하고 차에서 내리려
아침 먹고 소희는 출근하는 길에 청아를 먼저 장씨 그룹으로 데려다 주었다.가는 길에 청아가 소희를 한번 쳐다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어 물었다.“어젯밤에 언제 돌아왔어?”“11시 다 되어서. 의견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좀 늦게 끝났거든.”어제 저녁 그 모습으로 청아 앞에 나타났다간 청아가 걱정할 게 분명했기에, 소희는 청아 집으로 들르지 않고 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었다.그리고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왔는데 밥도 못 먹고 잠들었을 소희가 마음에 걸렸는지 청아는 자책하는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나 어제 분명 야식까지 만들어 놨는데, 너무 졸려서 먼저 잠들어 버렸어.”“앞으로 내가 늦게 돌아오게 되면 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응, 알았어.”소희의 당부에 청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대폰의 뉴스를 뒤져보기 시작했다.오늘의 실검 뉴스는 ‘케이슬 흉기 난동 사건’으로 어제 밤 케이슬 대문 앞에서 마음씨 착한 한 여인이 여러 명에게 납치당한 무고한 사람을 구했다는 내용이 게재되어 있었고, 그 밑에는 사진도 한 장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은 길가던 모 행인이 급히 휴대폰으로 찍은 것인지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았고, 또 일이 터진 게 마침 어두워진 후의 저녁때라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티즌들의 태도는 여느 때보다 더 들끓어 있었다. 그리고 어제 그 현장에 있었다는 한 네티즌의 진술에 의하면 착한 여 시민은 싸움 실력은 한발로 사람을 걷어차 날려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심지어 7~8명에 달하는 강도들이 분명 다 손에 칼을 들고 있었지만 결국 착한 여 시민한테 죽도록 얻어맞아 콧물을 질질 짜며 도망쳤다고.그래서 지금 댓글은 전부 사진 속 착한 여 시민에 대한 칭찬으로 자자했고, 착한 여 시민의 사진을 찾는 네티즌들도 엄청 많았다.뉴스 속 사진을 한창 들여다보던 청아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소희에게 물었다.“너 어제 어디에 있었어?”“케이슬.”“그럼 이거 봤어?”청아가 뉴스
청아는 침을 한번 삼키고 고개를 숙여 장시원이 풍기고 있는 압박감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들었어요. 저 오늘 저녁에 일이 있어 안 될 것 같아요. 미안해요.”[그럼 내일은요? 내일은 쉬는 날이죠?]“내일에도 일이 있어요.”청아가 자신을 거절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하온은 멋쩍게 한번 웃고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그럼 청아 씨 이제 시간이 될 때 만나요.]“하 선생님, 저 하 선생님에게 적합한 짝이 아니에요, 연애할 생각도 없고요. 그러니까 더 이상 저한테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하온의 포기할 줄 모르는 태도에 청아가 눈썹을 한번 찌푸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했다.이에 하온이 잠시 멍해져 있다가 한참 후에야 다시 웃으며 말했다.[너무 일찍 그렇게 단정 짓지 마요. 만약 어느 날 청아 씨가 갑자기 연애하고 싶어지고, 마침 내가 또 청아 씨를 쫓고 있으면, 그건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 아닌가요?]정수리를 찌르고 있는 장시원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눈치챈 청아는 난감한 표정을 드러내며 다시 하온을 거절하려는데 휴대폰 맞은편의 하온이 청아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어서 출근해요, 다른 건 이제 만나서 다시 얘기하고. 끊을 게요.]그렇게 청아가 거절하기도 전에 하온은 이미 전화를 끊어버렸고, 꺼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청아는 순간 마음속이 착잡해졌다.그런데 이때, 장시원이 갑자기 손을 내밀어 청아의 턱을 잡았다.조금전까지만 해도 농락의 뜻이 섞여 있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얼음판 마냥 차가워져 있었다.“전에 그렇게 그 사람이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맹세하더니, 지금 뭐하는 거지?”허홍연이 퇴원하던 날 장시원은 이미 둘 사이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눈치챘었다.‘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그쪽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상관이 없다?”청아의 고집스러운 눈빛에 장시원은 갑자기 어처구니없는 농담을 들은 사람 마냥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차갑게 청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여
이 감독의 표정에 소희는 죄책감이 들어 바삐 사과했다.“죄송합니다, 감독님. 이현 씨의 일도 그렇고, 마민영 씨의 일도 그렇고, 전부 저와 관련이 있는 것 같네요.”“아니야, 소희 씨. 그런 말 하지 마. 나 오히려 소희 씨한테 감사해야 해.”소희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던 이 감독은 오히려 웃으며 소희를 위로했다.“소희 씨 어제 제때에 나타나 민영 씨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민영 씨는 정말 큰일이 났을 거야. 그런 상황에서 운이 좋으면 그동안 우리의 노력은 헛수고로 되고, 나는 다시 여주인공을 뽑아야 할 거고, 재수 없으면 이번 작품 그대로 중단해야 했을 거야.”“마민영 씨 아무 일도 없어요, 요 이틀 사이에 다시 돌아와 촬영을 계속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감독님께서는 될수록 일이 더 커지지 않게 바깥의 기자들과 잘 말해서 돌려보내세요.”“그래, 더 이상 말썽을 일으켜서는 안 돼.”젊은 나이에 맞지 않게 남들이 쉽게 생각지 못하는 점들까지 단번에 콕 집어 내는 소희의 능력에 이 감독이 탄복하는 눈빛을 드러내며 말했다.“마민영 씨가 성질도 더럽고 눈에 뵈는 것도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소희 씨 그동안 많이 수고했어.”“아닙니다. 소동 씨가 온 후로 저 마민영 씨랑 별로 만나지도 못했는 걸요.”“소동 씨는…….”소동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 감독이 갑자기 착잡한 표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업무에 대해 소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소희를 돌려보냈다.그렇게 이 감독의 사무실에서 나와 소희가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고 있는데 조수 미나가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와서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소희 씨! 마, 마민영이 왔어요!”“마민영 씨가 왔다고?”소희가 듣더니 살짝 놀라서 물었다.매일 밥 먹듯이 지각하던 마민영이 그렇게 큰 일을 겪은 후 오히려 아침 일찍 출근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하지만 소희는 바로 또 놀란 표정을 거두고 담담하게 물었다.“마민영 씨가 출근한 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
솔직히 소희는 이렇게 갑자기 돌변하여 애교까지 부리는 마민영보다는 예전의 그 가탈스럽고 성질이 더러운 마민영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섬뜩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으니까.‘정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여인이야.’“소희야, 내가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표할까?”마민영은 전혀 소희를 놓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애교를 부리며 물었다.이에 소희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기, 마민영 씨, 이 손부터 먼저 놔줄래요?"마민영은 그제야 쑥스럽게 웃으며 소희를 놔주었다. 그러고는 진심이 담긴 두 눈으로 초롱초롱하게 소희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말해봐, 소희야. 돈? 아니면 집? 네가 말하기만 하면 내가 다 들어줄게.”“아니요,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어제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어도 난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구했을 거니까 이러지 않아도 돼요.”소희의 덤덤한 대답에는 사양의 뜻이 묻어 있었지만 마민영의 눈빛이 거절당한 사람 치고는 엄청 밝았다.“너에게 있어서는 다 똑같겠지만, 나한테 있어서는 나를 구한 사람이 바로 너야. 네가 아니었다면 난 정말 큰일이 났을 거야.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주위에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던 스태프들은 마민영과 소희의 대화에 낮은 소리로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논 소리를 들은 소희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마민영을 향해 말했다.“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그래!”마민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소희만 보면 물고 늘어지려 했던 그녀의 눈에는 지금 온통 소희뿐이었다. 심지어 소희의 한마디에 바로 고분고분 뒤를 따라 소희의 사무실로 들어가기까지 하고.그렇게 두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간 후,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스태프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마민영이 또 소희를 괴롭히려고 아침 일찍 달려와 이정남과 싸운 줄 알았는데, 소희가 오자마자 소희를 껴안고 감사의 인사를 표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소동도 포함되어
소희가 갑자기 농담이 섞인 말투로 덤덤하게 웃으며 물었다.“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사람 찾아 날 혼낼 거예요?”소희의 실력을 뻔히 알면서도 사람을 보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으니 마민영은 당연히 그렇게 할 리가 없었다.그래서 고개를 한번 젓고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찾은 사람들은 너와 비하면 잽도 안 돼.”그렇게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민영의 조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민영 씨, 이 감독님께서 민영 씨가 출근한 걸 알고 오늘부터 촬영 시작할 수 있는지 묻는데요?”“내가 지금 소희와 이야기 나누고 있는 거 안 보여? 가서 이 감독한테 말해, 내가 지금 몸에 상처가 다 낫지 않았으니까 이틀 동안은 푹 쉬어야 한다고.”마민영의 화가 잔뜩 묻은 어투에 겁을 먹은 조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이때 소희가 덤덤하게 마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많이 불편한 거 아니시면 이 감독님의 요구에 협조해 줘요, 그래야만 우리도 정상적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거든요.”“그래, 네 말 대로 할 게!”방금 전까지만 해도 언짢아하고 있던 마민영이 소희의 말에 바로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러는 마민영의 모습을 처음 보는 조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제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이에 마민영이 또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조수를 무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소희가 한 말 못 들었어? 이 감독에게 어서 알리러 가지 않고 거기에 서서 뭐하는 거야?”“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조수가 놀라 바삐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그러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뒤에 있던 마민영이 다시 조수를 불렀다.“잠깐! 나 할 말이 있으니까 가서 다른 조수들을 전부 불러와.”“네!”조수가 바삐 밖으로 나가 마민영의 기타 조수와 소동을 전부 방으로 불러들였다.그리고 마민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네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다
“무슨 요구? 얼마든지 말해!”“이번 작품의 진도가 이미 충분히 지체되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이 감독님과 다른 스태프들이 매일 하염없이 민영 씨만 기다리게 하지 말고 앞으로 조금만 더 일찍 출근해주시면 안 될까요?”그녀 자신만을 위한 요구가 아니라 전체 제작진을 위한 요구이다.그리고 분명 매일 출근하는 걸 제일 거부했던 마민영이었는데, 소희의 말에 의외로 통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것도 요구라고 제기한 거야? 그래, 내일부터는 매일 일찍 올게.”그러면서 마민영이 또 고개를 돌려 조수에게 분부했다.“내일부터 아침 6시로 알람을 맞춰 둬, 7시에 바로 촬영장에 도착할 수 있게.”“그렇게 일찍 도착할 필요는 없고요, 8시에 도착해도 충분해요.”“그래! 네 말대로 할 게!”소희가 뭘 말하든 마민영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이상하게 돌변한 마민영을 감당할 수가 없는 소희는 바로 손을 흔들었다.“어서 가봐요, 이 감독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오키!”여전히 고분고분한 태도.마민영은 바로 조수들을 데리고 소희의 사무실을 떠났다.하지만 맨 뒤에 있던 소동은 일부러 마민영이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가 고개를 돌려 소희를 아래위로 훑으며 냉소했다.“언니는 참 재주도 좋아.”“더 이상 날 언니라고 부르지 마, 우리 사이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너 자신도 잘 알고 있잖아. 어서 일하러나 가봐, 또 마민영 씨한테 욕 먹지 말고,”“너!”소희의 차갑고 인정사정없는 대답에 소동의 얼굴색이 순간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소동은 바로 또 웃음을 드러냈다.“비웃고 싶으면 실컷 비웃어 봐. 어차피 난 이 직무를 잃고 작업실의 문을 닫게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돌아가 아빠와 엄마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엄마가 지금 너를 엄청 증오하고 있어 한 푼도 너에게 남겨주지 않을 거야.”먹은 나이에 맞지 않게 철이 들기는커녕 여전히 유치하기만 한 소동에 대해 소희는 더 이상 줄 인내심도 없었다.그래서 한숨을 깊게
유진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비 내리는 거리에서 방향도 없이 걸었다. 손에는 여전히 서인을 위해 산 셔츠가 들려 있었다. 서인에게 전해주지도 못한 채, 유진은 그것을 잊어버린 듯 꼭 쥐고 있었다.언제부터인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굵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순식간에 흠뻑 적셔 버렸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유진의 몸을 더욱 식혀 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차가움이 오히려 유진을 속 시원하게 만들었다.[분명 포기하고 싶었는데.][하지만 여전히 널 붙잡고 싶어.][이렇게까지 부딪혔는데도, 왜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오랫동안 널 사랑했는데...][그냥 친구가 되는 건 너무 가혹해.][네가 다른 사람과 손을 잡는 걸 보고 싶지 않아.]길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빗소리와 어우러져 더욱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서인은 늘 유진을 철없는 어린아이 취급했지만,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유진은 그렇게 순진한 소녀가 아니었다. 이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도, 한순간의 설렘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 뼛속까지 스며든 깊은 사랑이었다.하지만 결국, 유진의 마음은 공허한 바람 속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서인은 단 한 번도 유진에게 흔들리지 않았다.유진의 사랑은, 서인에게 있어서 오로지 부담일 뿐이었고, 그것이 그녀의 사랑 결말이었다.유진은 계속해서 떠올렸다.흥성에서의 그 며칠. 유진은 서인을 당연한 듯 의지했고, 장난도 마음껏 쳤다. 그리고 그는 묵묵히 그녀를 받아 주었다. 그게 마치 자신도 특별하다고 착각하게 했다.그래서, 이문 오빠의 생일날 밤 유진은 서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 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유진은 선을 넘었기에, 서인은 화가 났고 결국 유진을 밀어내 버렸다. 그러니 유진은 후회해야 할까, 아니면 슬퍼해야 할까?그저 알 수 없이 눈물만 흘렀고, 빗물과 섞여, 감정을 숨길 수도 없었다.[날 차갑게 외면할 때, 넌 또 누구의 마음을 데우고 있는
유진은 애써 참으려 했지만, 결국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한없이 낮추며 간신히 말했다.“지난번엔 내 잘못이었어요. 내가 순간적으로 충동적이었어요.”그러나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삼켰다.“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진은 간절하게 속삭였다.“더는 사장님이 부담스러워할 말도 하지 않을게요. 다시는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않을게요. 사장님을 곤란하게 하지도 않을 거예요.”“사장님이 싫어하는 건 절대 안 할게요. 정말이에요.”눈물이 쏟아지는 걸 막지도 못한 채, 그녀는 마지막으로 애원했다.“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를 쫓아내려고 다른 여자를 이용하지 마요.”유진은 불안했다, 서인이 갑자기 진수아와 사귀게 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단 하나의 가능성만이 떠올랐다.‘지난번, 이문 오빠 생일날 내가 키스해서 화가 났던 걸까?’‘그때부터 모든 게 변해버린 걸까?’서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유진이 울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그는 속이 답답해지는 걸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임유진, 왜 아직도 모르겠어?”“너와 나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어.”“아무리 붙잡아도, 아무리 애써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그는 마치 자신에게도 되뇌는 듯,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사랑 같은 건 몰라.”“그냥 적당한 사람이면 돼. 그래서 진수아와 사귀는 거야.”유진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그럼 우리 둘은요? 우리는 맞지 않는 거예요?”서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단호하게 답했다.“맞지 않아.”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차가운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산산이 부수어버렸다. 눈앞이 흐려지고, 심장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유진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도, 서인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더는 매달리지 마.’‘이건 사랑이 아니야. 그저 나 혼자만 미쳐 있는 거야.’유진은 조용히 뒷걸음질 쳤고, 눈물이 연신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의 시야 속에서 서인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졌다
오현빈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누굴 찾으시죠?”진수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사장님을 찾아왔어요.”그 순간, 서인이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평소처럼 검은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소박한 차림이었지만, 다부진 체격과 날카로운 이목구비 덕분에 여전히 눈에 띄는 분위기를 풍겼다.임유진은 진수아가 서인을 바라볼 때, 그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살짝 수줍은 기색까지 보였다.그러나 서인은 유진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오직 수아에게만 시선을 두고 무덤덤하게 말했다.“위층에서 이야기하죠.”수아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서인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진은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가슴 한쪽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이에 현빈이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아마도 형님의 친구겠지.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거겠고.”그러나 오직 유진만이 알고 있었다. 수아는 서인과 맞선을 본 상대라는 걸.시간이 길어졌고, 유진은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자꾸만 위층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심지어 올라가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엿듣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한 시간쯤 지나, 수아가 2층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수아의 얼굴은 처음보다 더욱 밝아 보였다. 수아는 현빈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며 가게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다.그러다, 우연히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아, 여기서 일하고 있었네요?”수아는 놀랍다는 듯 말했고 유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사장님을 구은정이라고 부르네?’그 순간, 수아도 무언가 떠올랐다. 과거 설날 맞선 자리에서, 유진과 유민이 자신을 골탕 먹였던 일을. 그녀는 경계의 눈빛을 띠며 물었다.“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어요?”현빈이 대신 대답했다.“꽤 오래됐어요.”수아는 현빈이 유진을 보호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러고는 손을 까닥이며 말했다.“나 과일 주스 한 잔 가져와 줘요. 생과일로 직접 짠 걸로요.”그러나
오현빈이 다가와 말했다.“애옹이 데려왔어요. 그리고 형님, 같이 술 한잔하러 가시죠?”“너희들끼리 마셔.”서인은 무심하게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현빈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다들 보고 있어요. 유진이가 왜 매번 주말마다 여기 오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쇼핑도, 놀러 가는 것도 마다하고 굳이 여기 와서 서빙하겠다고 하는 이유가 뭘까요?”서인은 여전히 묵묵히 담배를 피우며 대답하지 않았다. 현빈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형님도 아시겠지만, 유진이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요. 이렇게 오랫동안 묵묵히 기다려온 사람이 또 있을까요?”“이제는 형님도 뭔가 답을 줘야 하지 않겠어요?”서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가 내뿜는 연기 속에서 복잡한 심경이 스며 나오는 듯했다.그러다, 서서히 고개를 들고 차갑게 말했다.“걔가 날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걔를 받아줘야 해?”그러고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덧붙였다.“어떻게든 결론은 내릴 거야.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술이나 마셔.”현빈은 서인의 말에 뭔가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형님 제발 신중하게 생각하세요.”그러나 서인의 태도는 단호했다.“사랑과 현실은 다르다.”그의 목소리는 낮고도 차가웠다.“내가 원하는 게 유진이를 평생 이 샤부샤부 가게에서 살게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인은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나는 이미 충분히 생각했어.”현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서인은 담배를 힘껏 비벼 끄고 불을 껐다. 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차단됐지만, 달빛이 여전히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는 짜증스럽게 속으로 중얼거렸다.‘비 온다면서 왜 이렇게 달이 밝은 거야?’뒤척이기를 반복하다 결국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엇인가 손에 닿는 느낌이 들어 서인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창밖에서 커다란 천둥이 울려
우정숙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의 대답이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서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제가 임유진에게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에요. 그러니 유진이를 탓하지 마세요. 아직 어리고 철이 없을 뿐, 전부 제 문제예요.”우정숙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래서 우리 유진이가 혼자만 짝사랑하고 있었던 거군요?”서인은 굳게 다문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고, 우정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꽤 부담됐겠어요. 대신 사과할게요.”서인의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아니에요.” 우정숙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앞으로 유진이가 여기에 오지 않도록 했으면 해요. 시간이 지나면 유진이도 점점 식어갈 테고, 더 이상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겠죠.”서인의 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방법을 생각해 보죠.”“좋아요. 믿을게요.”우정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떠났다. 서인은 2층 베란다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구은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에도 말했던 맞선 이야기요. 언제 진행할 건가요?”구은태는 뜻밖이라는 듯 놀라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드디어 마음을 정한 거야?]서인은 담담하게 말했다.“집에는 당분간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상대방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만나볼 수 있어요.”구은태는 한순간 고민하더니 물었다.[그러면 언제쯤 집으로 돌아올 거야?] “아직 정해진 게 없어요.”구은태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서인이 결혼을 전제로 여자를 만날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기 때문이다.전화를 끊자마자, 구은태는 곧바로 서선영을 찾아가 맞선 일정을 조율했다.다음 날, 서선영이 서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지난번 만났던 진수아 어때? 사실 걔가 너를 마음에 무척 들어서 했어.]그리고 덧붙였다.[수아
서인은 새로 도착한 테이블을 보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얼굴이 어두워졌다.“이거 내가 산 거 아닌데. 다시 가져가세요.”배송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손님, 임유진 씨가 이미 결제하셔서 반품이 어려워요.”서인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말했다.“그러면 테이블은 놔두고, 돈은 돌려주세요. 대신 내가 결제할게요.”그러나 직원은 여전히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죄송해요, 이미 결제된 금액은 환불이 불가능해요.”서인의 얼굴에 짙은 불만이 떠올랐다. 하지만 배송 직원들에게 화를 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후원에 놔두세요.”직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오현빈이 직원들을 데리고 후원으로 갔다. 서인이 따라갔을 때, 테이블은 이미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최고급 황화리 원목으로 제작된 수제 테이블. 정교한 수공예로 깎아낸 꽃무늬 장식은 유명 장인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 테이블 하나만으로도 뒷마당의 분위기가 훨씬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변했다.서인은 문득 떠올랐다. 며칠 전, 유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던 말.“이 뒷마당엔 개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밖에 없어요. 뭔가 값비싼 거라도 하나 놔둬야 하는 거 아닌가요?”유진은 일부러 이 테이블을 주문한 걸까?한편, 한쪽에는 부서진 낡은 탁자가 여전히 버려진 채 남아 있었다. 현빈이 그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이건 이제 버려야겠네요!”그러나 서인은 한 번 흘깃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했다.“놔둬.”그 말에 현빈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현빈이 다른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서인은 부서진 탁자를 완전히 분해하고 있었다.그는 그 나무판자를 가져다가 애옹이와 야옹이의 집 사이에 덧대고 있었다. 애옹이는 아직 어려서 나무 지붕에서 야옹이 쪽으로 뛰어내릴 때마다 자주 미끄러졌다.하지만 이제는 그사이에 작은 다리가 생겼으니, 더 이상 떨어질 일은 없을 터였다.현빈은 벽에 나무판자를 못질하는 서인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우리 형님
임유민은 더욱 흥미로워하며 물었다.“구은정 아저씨는 어떻게 반응했어?”“그, 그게...”임유진은 문득 마지막 순간, 유진이 반사적으로 서인의 옷깃을 붙잡았던 기억이 떠올랐다.어두운 밤, 희미한 빛 속에서 본 그의 표정 다시금 얼굴이 새빨개졌다. 유진은 황급히 그 순간의 기억을 밀어내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서인의 반응을 떠올려 보려 했다.하지만 그때 상황이 너무나 급작스러웠다. 서로 예상하지 못했던 흐름에 유진은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도망쳐 나왔고,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서인의 얼굴이 어땠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하지만 확실한 건 서인이 자신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아주 잠깐 저항했던 것 같기도 하다.그러나 유진이 술김에 더욱 과감하게 나서자, 결국 서인도 서서히 받아들이며 주도권을 잡았던 듯했다.둘은 꽤 오랫동안 서로를 탐하며 키스했다. 그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자, 유진은 또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다행히 어두운 테라스에서는 티가 잘 나지 않았다. 유민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는 신이 난 듯 말했다.“오! 잘했네! 이렇게 빨리 진전이 있을 줄이야!”유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확실한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하게 말하지 마.”유민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응원했다.“힘내! 몇 번 더 키스하면 확실해질 거야.”“야!”유진은 유민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감정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하지만 과연 그런 기회가 다시 올까?’그날 밤, 서인은 뒷마당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문과 오현빈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를 했다. 누군가 서인을 불렀지만, 그는 대충 응답만 하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향했다.문을 열자마자, 서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애옹이가 언제 들어왔는지, 자신의 침대 한가운데서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서인은 고양이를 싫어했다. 언제나 무심하고 냉정하게 대했지만, 이상하게도 애옹이는 그를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심지어 매번 서인의
공기마저 멈춰버린 듯한 순간이었다....임유진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지만, 얼굴이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잘 익은 사과처럼.이리저리 뒤척이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자, 결국 유진은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기로 했다.테라스로 나가 보니, 밤하늘은 흐린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고, 달빛조차 비치지 않았다. 별 하나 없이 검게 가라앉은 하늘.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그녀의 마음도 복잡하게 뒤엉켰다.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고, 알 수 없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녀는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 익명으로 SNS 고민 상담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남자가 여자에게 반응하는 건, 그 여자를 좋아해서일까요?]잠시 후,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그렇죠.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만 반응한다고 하더라고요.][제가 남자인데,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여자가 충분히 매력적이면 다 반응해요.][윗댓 의견 반대요. 그럼 동물과 다를 게 뭐예요?][애초에 인간도 동물이잖아요.]...유진은 계속해서 새로 고치며 댓글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읽었다. 어떤 댓글을 보면 마음이 설레다가도, 또 어떤 댓글을 보면 불안해졌다. 혼란스러움과 기대감이 엇갈려 마음이 쉴 새 없이 출렁였다.그때,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해?”임유민이었다. 유진은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급히 껐다. 그러고는 서둘러 휴대폰을 뒤로 감추며 더듬거렸다.“아, 아냐! 아무것도 안 했어!”유민은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뭐야, 뭔가 나쁜 짓이라도 한 거야?”유진은 얼굴이 뜨거워지며 발끈했다.“꼬맹이는 신경 꺼!”그러자 유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부모님 출장 가시면서 누나 나한테 맡기고 가셨거든? 그러니까 누나 문제는 내 문제지. 뭔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조언해 줄 수도 있으니까.”유진은 반박하려다가,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큰 동생을 바라보며 체념
후원에는 벽에 걸린 벽등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온 마당은 은은한 황금빛에 감싸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장미꽃은 조용히 피어 있었고, 애옹이는 작은 집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야옹이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앞발로 날아다니는 벌레를 잡고 있었다.서인은 등나무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고 있었고,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서인은 오늘 많은 술을 마셨다. 기분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중 절반은 유진 대신 술을 받아 마셨기 때문이었다.유진은 조용히 다가가, 서인의 앞에서 몸을 숙였다. 그가 정말 잠든 건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넋을 잃고 말았다.서인의 짙고 선명한 눈썹은 마치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고 선명했다. 책에서 묘사하는 ‘긴 눈썹이 관자놀이까지 이어진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그 눈썹만 봐도, 서인의 차갑고 오만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눈은 길고 날렵했으며,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콧날은 오뚝하고 반듯해, 본래부터 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턱선에는 거칠게 자란 수염이 덮여 있어, 평소보다 다섯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상관없었다.서인이 어떤 모습이든, 유진은 다 좋아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그의 수염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유진은 거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다. 서인의 턱에 닿기 직전 갑자기 서인이 눈을 번쩍 떴다.서인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경계와 서늘한 기운이 번뜩였다. 산길에서 적들의 포위에 둘러싸였을 때처럼, 그의 몸에는 순식간에 살기가 감돌았다.유진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으나 뒤에 있던 탁자에 걸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낡은 탁자는 이미 몇 번이나 수리를 거쳤던 터라, 유진의 몸무게를 버틸 수 없었다.쾅! 순식간에 탁자가 부서졌다. 몸을 지탱할 곳이 사라지자,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그 순간 굵은 손이 유진의 팔을 붙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