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가 전화를 끊고 빠른 걸음으로 청아에게 다가갔다."너 왜 왔어?""아주머니의 연락을 받고 왔지, 너와 요요가 경찰서로 끌려왔다 해서. 너 괜찮아? 요요는?"청아의 물음에 소희가 착잡한 눈빛으로 뒤에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장시원을 쳐다보았다."요요 저쪽에 있어."그리고 소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든 청아는 장시원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놀라 뒤로 물러섰다.장시원이 청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청아!"그러다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숙여 품속의 요요를 쳐다보았다. 순간 장시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요요가 너의 아이였어?"이때 마침 청아를 알아본 요요가 기뻐하며 소리쳤다."엄마!"하마터면 요요를 놓칠 뻔한 장시원의 얼굴색이 다시 한번 변했다.‘내가 왜 여태껏 그걸 생각 못한 거지?’‘요요의 이목구비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는데.’‘소희가 여러 번 나에게 요요가 친구의 아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소희의 성격으로는 친구가 몇 명 없잖아.’‘왜 그게 청아일 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까?’‘아마도 청아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그런데 떠난 지 3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이미 아이까지 낳았다니.’크게 놀란 건 청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요요를 안을 생각도 못하고 당황하여 소희를 쳐다보았다.이에 소희가 조용하게 고개를 흔들며 청아에게 눈짓을 했다, 장시원이 요요의 신분을 모른다고.청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평정심을 되찾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오래간만이네요, 장시원 씨."장시원의 눈동자에는 침통의 빛이 가득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청아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날의 추억들이 밀물마냥 밀려와 펼쳐졌다.장난 같았던 두 사람의 첫 만남, 그를 한바탕 때려 상처를 입힌 후 어정에서 함께 보냈던 하루하루들, 앨범과 성 모형이 담긴 상자를 안고 불쌍하게 울며 자신에겐 더는 집이 없다고 하소연하던 그날......모든 추억이 눈에 선해 그는 한순간도
‘아니면 속은 건가?’‘그래, 확실히 멍청한 부분이 있긴 했지.’‘하지만 결국 나에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는 거네? 안 그랬으면 그 당시 돈을 위해 나를 직접 허연의 침대에까지 보내지 않았을 거니까.’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장시원의 얼굴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그리고 그러는 장시원을 곁눈질로 보고 있던 임구택이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야유하는 표정을 지었다.그가 소희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을 때 제일 기뻐했던 장시원이 드디어 그와 같은 처지에 처하게 되었으니.역시 곧 있으면 자신과 똑같게 될 거라는 임구택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뒤좌석에 앉은 청아는 불안하여 내내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소희가 그녀에게 사건의 경과를 대충 말해주었다.요요도 깜찍하게 흉내를 내며 말했다."소희 이모 엄청 멋있었어요! 아저씨도 엄청 대단했고요! 이렇게 나쁜 사람을 걷어찼어요."짤막한 다리를 휘두르며 청아에게 장시원의 대단함을 과시하는 요요의 귀여운 모습에 소희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하지만 차 안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 소희는 결국 웃지도 못하고 요요를 품에 안았다."무서웠어?""아니요!"요요의 깜찍한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도 섞여있었다."아까 그 사람들 나쁜 사람이에요! 요요는 두렵지 않아요!""그래? 요요 참 용감하네."장시원은 요요의 앳되고 귀여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속이 착잡했다. 그는 줄곧 요요를 자신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아이로 여기고 예뻐했는데, 우청아와 다른 남자가 낳은 아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쓸쓸하면서도 아팠다.경찰서가 동네와 멀지 않아 임구택의 차는 곧 경원주택단지에 도착했다.청아가 먼저 요요를 안고 차에서 내렸고 뒤따라 내린 장시원이 소희에게 말했다."얼른 올라가. 난 볼 일이 있어 가봐야 할 것 같아."장시원의 차가운 소리에 청아의 눈빛이 세게 한 번 떨렸다. 그러다 한참 후 장시원을 향해 말했다."오늘 일은 정말 감사했어요.""천만에."하지만 장시원은 소외감이 가득한 말투로 한마디를 내뱉고
장시원은 자동차 페달을 끝까지 밟은 채 시내에서 질주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임구택의 차가 바짝 따르고 있었다.하지만 신호등에 걸리는 바람에 임구택은 결국 장시원의 차를 놓치게 되었고, 케이슬에 도착했을 땐 장시원은 이미 술을 두 병 가져다 놓고 마시고 있었다.침울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던 장시원이 고개를 들어 임구택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왜 따라왔어? 초라해진 내 모습 구경하려고?"임구택이 그의 맞은편에 앉아 스스로에게 술 한 잔을 따르며 담담하게 물었다."청아 씨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청아 씨가 결혼하든 아이를 낳든 너와 상관이 없는 일인데 네가 왜 초라해져?"임구택의 물음에 장시원이 잠깐 멍해있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만 들이마셨다.‘내가 우청아를 좋아한다고?’‘아니, 난 우청아를 미워해야 하는 게 맞아.’임구택이 장시원에게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날 탓하는 거 아니지?""널 왜 탓해?""사실 나 요요가 청아 씨의 아이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소희가 말하지 못하게 해서 여직 너에게 말하지 않았던 거야."장시원이 듣더니 냉소했다."그래서 네 뜻은, 네 마음속에서 소희가 나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야?""당연하지.""예전에 네가 소희 때문에 힘들어했을 때 내가 네 곁에 같이 있어줬다는 걸 잊지 마."장시원의 이를 악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에 임구택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내가 왔잖아."장시원이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임구택을 대꾸하지도 않았다.이에 임구택이 덤덤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만약 정말 청아 씨를 좋아하는 거라면 가서 고백해. 이렇게 혼자 울적하게 술을 마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거 아니야.""그 말은 그대로 너에게 돌려주고 싶네."장시원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네가 틀렸어. 내가 왜 이혼도 하고 아이도 낳은 여자한테 고백해?""그래, 그럼 고백하지 마. 어차피 며칠만 더 지나면 청아 씨 어머니께서 퇴원할 거고, 그때가 되면 청
또래의 친구들과 똑같이 아버지의 사랑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권리를 요요에게서 박탈한 것 같아 죄책감뿐인 청아는 소리 없이 요요의 작은 머리통을 어루만지기만 했다.그렇게 한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수신번호를 확인한 청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긴장해져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져버렸다.번호를 저장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닳도록 외워둔 번호라 받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휴대폰은 청아가 받을 때까지 계속 진동할 거라는 기세로 조용해질 줄 몰랐다.이에 청아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시고는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휴대폰 맞은편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조용하게 들려왔다."여보세요?"청아가 다시 소리를 내어 묻자 맞은편의 장시원이 그제야 한번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입을 열었다.[언제 결혼한 거야?]장시원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정서도 알아낼 수 없었다.그리고 청아가 한참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장시원의 말투가 더욱 차가워졌다.[M국에 가자마자 남자친구를 사귄 거야?]청아가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대답했다."네."[출국하자마자 진정한 사랑을 만났어?]장시원의 말투에 묻은 조롱의 뜻은 너무 뻔했다. 청아는 M국에 도착한 후 함께 집을 맡아 살았던 룸메와 룸메 남자친구의 일이 생각나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친구 한 명 없는 타향의 땅에서 서로 의지한 거죠, 뭐."장시원이 듣더니 잠깐 멍해졌다. 그러다 다시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왜 헤어진 건데?]장시원의 물음에 청아는 다시 침묵을 선택했다.이에 장시원의 숨소리가 갑자기 한 번 거칠어지더니 말투가 얼음장마냥 차가워졌다.[그 자식이 너를 버렸어? 두 사람이 낳은 아이조차도 싫다던? 우청아, 넌 어떻게 아직도 그대로인 거야? 목 위에 달린 건 장식품이야?]청아는 여전히 입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러는 청아의 태도에 화가 제대로 치밀어 오른 장시원은 계속 인정사정없이
이튿날,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한 청아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자신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그리고 그 남자를 알아본 청아는 깜짝 놀라 잔뜩 긴장하여 물었다."시원 씨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장시원이 듣더니 고개를 들어 여전히 아무런 정서를 읽어낼 수 없는 표정으로 청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어머님이 이곳에 입원하셨다고 들어서 와 본거야, 뭘 그렇게 긴장해하고 있어?"이에 허홍연도 바삐 입을 열었다."청아야, 시원 군이 좋은 마음으로 날 보러 온 건데, 어떻게 그런 태도로 말할 수 있어?"그러나 청아는 왠지 장시원이 나타난 목적이 그렇게 단순한 거 같지 않아 여전히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저희 어머니 보러 와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그쪽도 많이 바쁜 사람이니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괜찮아."장시원은 여전히 침착하고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너무 덤덤하여 허홍연도 아무런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정도였다.침대 옆 상 위에는 과일바구니와 생화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보아하니 장시원이 가져온 것인 거 같았다.병실은 2인용으로 다른 병상에도 한 소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두 가족은 한 병실에 오래 머물며 평소에 이야기도 자주 나누고 해서 사이가 좋은 축이었다. 그래서 소녀가 내내 호기심에 가득 차 몰래 장시원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장시원과 같은 인물은 어디에 있든 눈이 부시는 존재였으니.청아는 더 이상 장시원을 쫓아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 허홍연에게 물었다."엄마, 제가 가서 아침을 사 올게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난 죽 한 그릇이면 돼.""네."청아가 대답하고는 깔끔하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허홍연이 바삐 장시원에게 물었다."시원 군은 아침 먹었는가? 먹지 않았으면 청아더러 사 오라고 하면 되는데."허홍연의 말에 청아는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 장시원을 바라보았다.마침 장시원도 고개를 들어 청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는 아침밥 사러 갔어요!"하 의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허홍연의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 후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회복이 빠르네요, 이제 3~5일만 더 있으면 퇴원해도 될 것 같아요."허홍연이 듣더니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고마워요, 하 선생!""천만에요."하 의사가 몸을 일으키고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이따 청아 씨에게 밥 다 먹고 난 후 저한테 한 번 들르라고 전해 주세요. 새로 바꾼 약의 복용 방법도 다르거든요.""그래요!"조용하게 옆에 앉아있던 장시원이 음미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는 1호 병상으로 간 하 의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방금 하 의사의 눈빛에는 분명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경각심이 묻어 있었다.‘저 사람도 청아를 좋아하는 건가?’한 여인을 좋아해야만 그녀 주변의 남성들에게 경각심을 품게 되는 거니까.장시원이 순간 차가운 웃음을 들어냈다.‘이제 막 귀국한 지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남자들의 관심을 사는 실력이 또 늘었네?’하 의사가 다른 환자의 상태도 다 체크한 후 허홍연의 병상을 지나치면서 또 허홍연에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문어귀에 도착하자마자 마침 아침밥을 사들고 돌아온 청아와 마주치게 되었다.하 의사의 잘생긴 얼굴에는 즉시 온화한 웃음이 드러났다."얼마나 맛있는 걸 샀기에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죠?"청아는 허홍연이 장시원한테 너무 많은 일을 얘기할까 봐 걱정되어 황급히 돌아왔던 것이다."좋은 아침에요, 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께서 죽을 드시고 싶다 하셔서 죽과 만두를 사 왔거든요. 참, 저희 엄마께서 이전에 엄청 좋아하셨던 떡도 사 왔는데, 드셔도 괜찮을까요?"하 의사가 떡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네, 드셔도 괜찮아요.""와, 다행이네요."청아가 듣더니 양쪽의 보조개까지 드러낸 채 웃으며 대답했다."우청아."그런데 이때, 병실에서 미적지근한 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를 듣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청아가 듣더니 고개를 들어 화가 묻은 어투로 대답했다."그렇게 저를 증오하시는데 저한테서 멀리 떨어지시죠."이에 장시원이 오히려 냉소를 지었다."아니. 한 사람을 증오한다고 해서 반드시 멀어져야 하는 건 아니야. 더욱 가까이로 다가가 그 사람을 나의 손아귀에 넣고 괴롭히면서 발버둥 치는 걸 구경하는 게 더 짜릿하고 재미있거든."청아가 어처구니없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그 어떤 남자한테도 접근하지 마, 하 의사도 포함해서."장시원의 차갑고 간결한 명령에 청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모습에 장시원이 냉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널 좋아한다는 걸 내가 모를 거 같았어? 2년 전의 일, 나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그러니 아무 일도 없는 사람마냥 태연자약하게 딴 남자와 연애할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마."장시원이 스스럼없이 안전유지 범위를 쳐들어오는 탓에 청아는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괜한 걱정이네요. 전 연애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저한테 복수하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괜찮아요, 제가 무얼 잘못했는지 일깨워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니까.""너 예전에도 분명 연애하지 않을 거라고 했으면서 결국 출국하자마자 남자친구를 찾고 아이도 낳았잖아."말하고 있는 장시원의 어투에는 조롱과 노여움이 묻어 있었다."그러니 이번엔 고분고분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나의 성질이 영원히 그렇게 좋은 건 아니니까."이에 청아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왠지 낯설게만 느껴지는 남자의 포악한 얼굴을 쳐다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장시원의 조롱은 계속되었다."나에게 빚진 게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나 잘 생각해 봐. 매번 말로만 하지 말고, 아무런 성의도 느껴지지 않으니까."말을 마친 후 장시원은 얼굴색이 창백해진 청아를 차갑게 한 번 흘겨보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그리고 장시원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청아는
하 의사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청아 씨, 매번 그렇게 서먹서먹한 말투로 말하지 않아도 돼요.""서먹한 게 아니라 존중하는 겁니다, 저희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주신 게 고마워서요."하 의사가 듣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농담했다."존중? 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청아 씨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담방이라도 손주 돌보러 집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하 의사의 농담에 청아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뜬 채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뜻이 아니잖아요.""봐요. 웃으니까 얼마나 예뻐요."하 의사가 따듯한 햇빛마냥 눈부신 웃음을 드러내며 청아에게 약 처방 한 장을 건네주었다."오늘부터 이모님의 약을 이것들로 바꿨어요. 어떤 건 하루에 두 번 드셔야 하고, 어떤 건 세 번 드셔야 해요. 다 여기에 상세하게 적어두었으니 이대로 가서 약을 받으면 돼요.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나에게 물어보고요.""네, 고마워요. 그럼 저 이만 약 받으러 가볼게요."청아가 웃으며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있던 하 의사가 청아를 다시 불렀다."청아 씨.""네?""오늘 이모님 보러 온 그 남자분... 청아 씨 남자친구예요?"청아가 듣더니 동공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알겠어요. 가봐요."하 의사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웃음을 드러냈고, 청아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다음날과외를 마치고 차에 올라타서야 소희는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임구택이라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하지만 소희는 뒤에 그대로 앉은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완전히 임구택을 운전기사로 취급하고 있었다.임구택도 굳이 소희에게 조수석으로 옮기라고 강요하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소희는 당연히 임구택이 가는 길이 같아 겸사겸사 경원주택단지까지 바래다주는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가는 길이 아니었다.그래서 그제야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