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가 듣더니 고개를 들어 화가 묻은 어투로 대답했다."그렇게 저를 증오하시는데 저한테서 멀리 떨어지시죠."이에 장시원이 오히려 냉소를 지었다."아니. 한 사람을 증오한다고 해서 반드시 멀어져야 하는 건 아니야. 더욱 가까이로 다가가 그 사람을 나의 손아귀에 넣고 괴롭히면서 발버둥 치는 걸 구경하는 게 더 짜릿하고 재미있거든."청아가 어처구니없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그 어떤 남자한테도 접근하지 마, 하 의사도 포함해서."장시원의 차갑고 간결한 명령에 청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모습에 장시원이 냉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널 좋아한다는 걸 내가 모를 거 같았어? 2년 전의 일, 나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그러니 아무 일도 없는 사람마냥 태연자약하게 딴 남자와 연애할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마."장시원이 스스럼없이 안전유지 범위를 쳐들어오는 탓에 청아는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괜한 걱정이네요. 전 연애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저한테 복수하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괜찮아요, 제가 무얼 잘못했는지 일깨워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니까.""너 예전에도 분명 연애하지 않을 거라고 했으면서 결국 출국하자마자 남자친구를 찾고 아이도 낳았잖아."말하고 있는 장시원의 어투에는 조롱과 노여움이 묻어 있었다."그러니 이번엔 고분고분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나의 성질이 영원히 그렇게 좋은 건 아니니까."이에 청아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왠지 낯설게만 느껴지는 남자의 포악한 얼굴을 쳐다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장시원의 조롱은 계속되었다."나에게 빚진 게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나 잘 생각해 봐. 매번 말로만 하지 말고, 아무런 성의도 느껴지지 않으니까."말을 마친 후 장시원은 얼굴색이 창백해진 청아를 차갑게 한 번 흘겨보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그리고 장시원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청아는
하 의사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청아 씨, 매번 그렇게 서먹서먹한 말투로 말하지 않아도 돼요.""서먹한 게 아니라 존중하는 겁니다, 저희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주신 게 고마워서요."하 의사가 듣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농담했다."존중? 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청아 씨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담방이라도 손주 돌보러 집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하 의사의 농담에 청아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뜬 채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뜻이 아니잖아요.""봐요. 웃으니까 얼마나 예뻐요."하 의사가 따듯한 햇빛마냥 눈부신 웃음을 드러내며 청아에게 약 처방 한 장을 건네주었다."오늘부터 이모님의 약을 이것들로 바꿨어요. 어떤 건 하루에 두 번 드셔야 하고, 어떤 건 세 번 드셔야 해요. 다 여기에 상세하게 적어두었으니 이대로 가서 약을 받으면 돼요.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나에게 물어보고요.""네, 고마워요. 그럼 저 이만 약 받으러 가볼게요."청아가 웃으며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있던 하 의사가 청아를 다시 불렀다."청아 씨.""네?""오늘 이모님 보러 온 그 남자분... 청아 씨 남자친구예요?"청아가 듣더니 동공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알겠어요. 가봐요."하 의사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웃음을 드러냈고, 청아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다음날과외를 마치고 차에 올라타서야 소희는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임구택이라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하지만 소희는 뒤에 그대로 앉은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완전히 임구택을 운전기사로 취급하고 있었다.임구택도 굳이 소희에게 조수석으로 옮기라고 강요하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소희는 당연히 임구택이 가는 길이 같아 겸사겸사 경원주택단지까지 바래다주는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가는 길이 아니었다.그래서 그제야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임구택의 뜬금없는 고백에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진 소희는 눈시울까지 붉어져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임구택이 다시 소희의 입술에 뽀뽀를 한번 하고는 야유하듯 입을 열었다."진정해. 당신은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심장이 빨리 뛰는 것도 단지 분개해서라고 어서 당신 자신을 설득해.""임구택!"소희가 화난 나머지 얼굴색까지 어두워졌고, 임구택은 그제야 목적을 달성한 사람마냥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소희는 번조한 마음에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뒤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어떻게 임구택처럼 이런 뻔뻔스러운 남자가 있을 수 있는 거지?’……조백림이 지은 생태원은 임구택과 장시원을 포함한 몇몇 친구가 같이 주주가 되는 형식으로 투자하여 만든 곳으로 강성 신안구의 부운진에 위치해 있었다. 게다가 주위에 산과 물도 있는 제일 좋은 지리위치에 자리한 그곳은 부지면적이 몇 천평으로 관광지구, 경마장, 골프장, 유원지, 호텔 등이 완벽하게 포함되어 있어 국내 제1의 생태낙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부운진은 강성 시내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어 중도에 임구택은 소희와 함께 식당을 찾아 밥도 먹었다. 그리고 생태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후 3시 반이었다.오늘 분명 오픈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도착한 관광객들이 엄청 많았다.임구택은 VIP 통로로 들어가 호텔 방향으로 곧장 직진했다.그리고 두 사람이 호텔에 들어서니 프런트 직원이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소희를 한 번 훑어보고는 VIP 전용 방카드를 임구택에게 건네주었다.소희가 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방 하나밖에 없어?"이에 임구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오늘 입주한 손님이 많아 백림이 우리에게 방 하나만 남겼어. 못 믿겠으면 직원한테 물어봐."프런트 직원의 예의 바른 미소에 소희는 순간 자신의 물음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눈치챘다."가자."임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타러 갔다.호텔은
임구택이 전화를 끊은 후 소희가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자 임구택이 소희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그녀를 품에 안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옥상에 수영장이 있는데, 저녁에 같이 별 보러 가자."임구택의 경박한 말투에 화가 난 소희는 다리를 번쩍 들어 임구택을 걷어찼다.임구택도 눈치 빨라 즉시 뒤로 물러섰지만 결국 동작이 더 빠른 소희한테 맞았다. 그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이를 악물고 소희를 바라보았다."당신 너무 한 거 아니야? 자칫했다간 당신 남은 생은 후회하면서 보내야 한다고.""나한테 남자라고는 당신밖에 없을 것 같아?"소희가 냉소하며 임구택을 밀치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1층 로비 다방에는 조백림과 그의 약혼녀 유정, 장시원, 장명원, 오진수,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 등이 모여 앉아있었다.다방에 도착한 소희는 단번에 오진수의 여자친구 곁에 앉은 여인을 알아보았다. 앞서 조백림의 약혼식에도 참석했었던, 장시원을 애모했던 여인이었다.이때, 장시원이 소희와 함께 나타난 임구택을 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소원이 이루어졌어?"소희 앞에서 감히 지나친 농담을 할 담이 없었던 임구택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네 앞가림이나 잘해."소희가 장명원과 인사를 나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미연이는 함께 오지 않은 거예요?""네, 시합 준비하느라 요즘 엄청 바빠요. 얼굴 못 본 지도 꽤 됐어요."투정을 부리는 장명원의 대답에 소희가 웃으며 물었다."약혼 날짜는 정했어요?""마침 소희 씨에게도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번 달 말이에요, 그때 제가 직접 청첩장을 가져다 줄게요.""그래요."소희와 장명원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황정아가 다가와 웃으며 입을 열었다."소희 씨, 오랜만이에요. 어쩜 점점 예뻐지고 있어요?"아부가 잔뜩 묻은 황정아의 인사에 소희는 덤덤하게 웃기만 했다.그리고 황정아가 바로 옆에 있던 여인을 소희에게 소개했다."내 친구 우민율이에요."소희의 표정이 더욱 덤덤해졌다."안녕하세요."검은색 탱크톱 드레스 차림
차에 오른 후 소희가 임구택을 향해 말했다."이렇게까지 날 당신 곁에 가둘 필요는 없잖아.""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그러니 나로서는 당연히 같이 있을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이용하여 당신을 꼬셔야지."임구택이 소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그렇게 나와 붙어있고 싶지 않으면 날 사랑한다고 해."저녁노을이 임구택의 까만 눈동자에 비치면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소희는 심지어 그의 빛나고 있는 눈동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었다.한참 후, 소희가 갑자기 웃었다."그 인내심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네?""두고 봐.""그래."......관광버스는 천천히 원시림으로 들어갔다.삼림 속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나무 아래 관목숲은 가지런하게 전지 되어 있어 관광객들은 언제든지 차에서 내려 깨끗한 잔디밭을 밟으며 삼림 속에서 산책할 수 있었다.높게 자란 나무들이 여름의 무더위를 가려버린 덕분에 삼림 속의 공기는 촉촉하고 신선하여 초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봐봐, 꽃사슴들이야!""기린도 있어!""와, 여기 야생마도 있네!"갑자기 뒤쪽에서 여자들의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에 소희도 숲 속을 들여다보았다.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꽃사슴들이 무리를 지어 삼림 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꽃사슴들은 버스와 사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호기심에 발길을 멈추고 그들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숲 속에는 육식 맹수는 없었고 오직 초식 동물들뿐이었다.귓가에는 온통 새들의 울음소리였고, 친근한 동물들까지 주위를 맴돌고 있어 진정으로 원시림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황정아는 기사더러 차를 멈추게 하고 다람쥐 쫓으러 갔다. 그런데 이때 알파카 한 마리가 그녀의 뒤쪽에 나타나 머리를 내밀어 그녀의 손에 있는 간식을 먹으려 했다. 이에 크게 놀란 황정아는 손에 있던 간식들을 버리고 도망을 쳤고, 그 모습에 다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임구택이 소희에게 물었다."내려서 걸을래?"소
차에서 내린 후 유정이 소희한테로 다가가 웃으며 제의했다."저쪽에 뷔페 코너도 있던데, 우리 바비큐 먹으러 가요!""그래요."소희가 듣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임구택도 그제야 소희의 손을 놓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가서 재밌게 놀아, 이따가 찾으러 갈게."소희는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임구택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유정과 함께 떠났다."잘 되고 있는 거 같은데?"내내 멀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장시원이 소희가 떠난 후에야 천천히 걸어와 입을 열었다.이에 임구택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내뱉은 후 덤덤하게 웃으며 되물었다."왜 우청아를 데려오지 않았어?"청아의 이름이 언급되자 장시원은 순간 얼굴색이 어두워져 임구택을 흘겨보았다."우리끼리 이렇게 서로 상처를 주기 있기 없기야?""네가 먼저 시작했잖아."장시원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난 우청아와 잘 될 생각이 없어. 케이스가 다르니까 비교하지 마라.""잘 될 생각이 없는 양반이 병원에는 왜 간 거야?"임구택이 듣더니 믿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물었다.어제 그가 장시원에게 연락했을 때 장시원은 마침 병원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했었고, 임구택은 순간 장시원이 청아 어머니의 병문안을 갔을 거라는 걸 눈치채게 되었다."그냥, 내키지 않아서. 사고를 치고는 도망쳤다가 2년 후에 다시 나타나 아무 일 없는 사람마냥 아주 잘 지내고 있잖아. 세상에 그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어?""내가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우청아한테 잘해.""우청아가 소희의 친구라, 소희가 너한테 화풀이라도 할까 봐?"임구택의 진심 어린 충고에 장시원은 오히려 콧방귀를 뀌었다.이에 임구택이 눈썹을 한 번 올리더니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내뱉으며 말을 이어갔다."마음대로 생각해. 아무튼 내 말을 기억해 두는 게 너에게도 좋다는 것만 기억해 둬."장시원이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웃을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때 조백림이 달려와 두 사람을 불렀다."구택이 형, 시
남자도 유정을 알아보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별로 반갑지 않아 하는 어투로 물었다."너 왜 여기 있어?"유정이 듣더니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듯 냉소했다."너희들도 올 수 있는데, 나라고는 왜 못 오겠어?""당연히 올 수 있지."남자가 뜻 모를 웃음을 드러내자 곁에 있던 여인이 즉시 그의 팔을 꼭 껴안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성준 씨, 이분이 바로 유정 씨야?"성준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맞아."그러자 여인이 유정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남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뭐야, 자기 나를 속인 거였어? 자기 분명 유정 씨가 아주 못생기고 꾸밀 줄도 모르는 시골 여인이라고 했잖아! 분명 이렇게 예쁜데도?"성준이 듣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예뻐? 왜 나는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거 같지? 표정도 무뚝뚝한 게 무미건조하기만 하고."두 사람이 서로 맞장구를 치며 자신을 폄하하고 있는 모습에 유정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쓰레기 같은 인간들, 당장 꺼져!"유정이 욕설을 퍼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성준이 잠깐 놀라더니 얼굴색이 바로 어두워졌다."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죽어서도 땅이나 낭비할 쓰레기 인간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안 그러면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거니까."예전에는 분명 고분고분 말대꾸 한 번한 적이 없던 유정이 갑자기 자신에게 험한 욕을 퍼붓는 모습에 성준은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나 유정을 노려보며 말했다."역시 널 차버린 게 잘 된 선택이었네. 유정, 너 딱 기다려!"유정이 듣더니 냉소했다."분명 네가 더러워서 나한테 버림을 받은 거잖아.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당장 꺼져!"화가 제대로 치밀어 오른 성준은 옆에 있는 맥주병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술병을 잡기도 전에 갑자기 손등에서 전해오는 통증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왜 그래?"옆에 있던 여인이 보더니 긴장해서 물었다.이때, 소희가 손에 든 꼬챙이로 숯불을 툭툭 건드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꺼져, 다음
소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 말해요."유정이 또 술을 한 모금 크게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때 저 진짜 자아까지 잃어가면서 그를 사랑했어요. 심지어 사고 능력까지 상실한 채 의미 없는 헌신에 혼자 감동하면서.""그렇게 1년 동안 사귀다 그는 우연히 대학 때 좋아했던 첫사랑과 만나게 되었어요. 그 여인은 상냥하고 자상하고 애교도 많고 무고한 척도 하면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척만 하는 저와는 완전히 달랐죠.""그렇게 그 여인 집 등불이 고장 나면 그는 한밤중이라도 달려가 고쳐주었고, 아프다고 전화하면 큰비도 무릅쓰고 약 사주러 가고, 그 여인이 직접 국을 끓였다고 바로 마시러 달려가고, 저와의 약속까지 잊어가면서요.""그가 저에 대해 점점 성의와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저도 진작 알아차렸어요. 하지만 저 여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아 매번 그에게 기회를 주고, 그의 변명을 들어주고 그랬어요. 그러다 그 두 사람이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침실에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해 저한테 들켜서야 우리의 감정이 끝나게 되었어요.""분명 그가 바람을 피워 저를 배신한 건데 오히려 그가 목이 터져라 모든 잘못을 저에게로 돌리더군요. 제가 꾸밀 줄 모르고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고, 너무 고루하다면서.""그 순간 저 너무 충격적이었요. 저 사실 여자여자한 슈트나 하이힐 같은 거 전혀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가 좋아하니까 산 것들이었는데. 그리고 저 혼전 동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을 땐 그렇게 제가 자중할 줄 아는 여자라고 좋아했으면서 순간 저를 고루하고 재미없는 여인이라고 하더군요.""그 당시 저는 그의 배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 매일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면서 죽기보다 못한 나날을 보냈거든요,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바로 사귀게 되었지 뭐예요."유정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또 술을 크게 한 모금 삼켰다."저 정말 하늘 아래 가장 노답인 바보예요."소희가 조용히 다 듣고 나서야 눈살을 찌푸리고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