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의 친구들과 똑같이 아버지의 사랑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권리를 요요에게서 박탈한 것 같아 죄책감뿐인 청아는 소리 없이 요요의 작은 머리통을 어루만지기만 했다.그렇게 한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수신번호를 확인한 청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긴장해져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져버렸다.번호를 저장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닳도록 외워둔 번호라 받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휴대폰은 청아가 받을 때까지 계속 진동할 거라는 기세로 조용해질 줄 몰랐다.이에 청아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시고는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휴대폰 맞은편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조용하게 들려왔다."여보세요?"청아가 다시 소리를 내어 묻자 맞은편의 장시원이 그제야 한번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입을 열었다.[언제 결혼한 거야?]장시원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정서도 알아낼 수 없었다.그리고 청아가 한참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장시원의 말투가 더욱 차가워졌다.[M국에 가자마자 남자친구를 사귄 거야?]청아가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대답했다."네."[출국하자마자 진정한 사랑을 만났어?]장시원의 말투에 묻은 조롱의 뜻은 너무 뻔했다. 청아는 M국에 도착한 후 함께 집을 맡아 살았던 룸메와 룸메 남자친구의 일이 생각나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친구 한 명 없는 타향의 땅에서 서로 의지한 거죠, 뭐."장시원이 듣더니 잠깐 멍해졌다. 그러다 다시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왜 헤어진 건데?]장시원의 물음에 청아는 다시 침묵을 선택했다.이에 장시원의 숨소리가 갑자기 한 번 거칠어지더니 말투가 얼음장마냥 차가워졌다.[그 자식이 너를 버렸어? 두 사람이 낳은 아이조차도 싫다던? 우청아, 넌 어떻게 아직도 그대로인 거야? 목 위에 달린 건 장식품이야?]청아는 여전히 입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러는 청아의 태도에 화가 제대로 치밀어 오른 장시원은 계속 인정사정없이
이튿날,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한 청아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자신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그리고 그 남자를 알아본 청아는 깜짝 놀라 잔뜩 긴장하여 물었다."시원 씨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장시원이 듣더니 고개를 들어 여전히 아무런 정서를 읽어낼 수 없는 표정으로 청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어머님이 이곳에 입원하셨다고 들어서 와 본거야, 뭘 그렇게 긴장해하고 있어?"이에 허홍연도 바삐 입을 열었다."청아야, 시원 군이 좋은 마음으로 날 보러 온 건데, 어떻게 그런 태도로 말할 수 있어?"그러나 청아는 왠지 장시원이 나타난 목적이 그렇게 단순한 거 같지 않아 여전히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저희 어머니 보러 와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그쪽도 많이 바쁜 사람이니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괜찮아."장시원은 여전히 침착하고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너무 덤덤하여 허홍연도 아무런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정도였다.침대 옆 상 위에는 과일바구니와 생화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보아하니 장시원이 가져온 것인 거 같았다.병실은 2인용으로 다른 병상에도 한 소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두 가족은 한 병실에 오래 머물며 평소에 이야기도 자주 나누고 해서 사이가 좋은 축이었다. 그래서 소녀가 내내 호기심에 가득 차 몰래 장시원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장시원과 같은 인물은 어디에 있든 눈이 부시는 존재였으니.청아는 더 이상 장시원을 쫓아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 허홍연에게 물었다."엄마, 제가 가서 아침을 사 올게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난 죽 한 그릇이면 돼.""네."청아가 대답하고는 깔끔하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허홍연이 바삐 장시원에게 물었다."시원 군은 아침 먹었는가? 먹지 않았으면 청아더러 사 오라고 하면 되는데."허홍연의 말에 청아는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 장시원을 바라보았다.마침 장시원도 고개를 들어 청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는 아침밥 사러 갔어요!"하 의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허홍연의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 후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회복이 빠르네요, 이제 3~5일만 더 있으면 퇴원해도 될 것 같아요."허홍연이 듣더니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고마워요, 하 선생!""천만에요."하 의사가 몸을 일으키고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이따 청아 씨에게 밥 다 먹고 난 후 저한테 한 번 들르라고 전해 주세요. 새로 바꾼 약의 복용 방법도 다르거든요.""그래요!"조용하게 옆에 앉아있던 장시원이 음미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는 1호 병상으로 간 하 의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방금 하 의사의 눈빛에는 분명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경각심이 묻어 있었다.‘저 사람도 청아를 좋아하는 건가?’한 여인을 좋아해야만 그녀 주변의 남성들에게 경각심을 품게 되는 거니까.장시원이 순간 차가운 웃음을 들어냈다.‘이제 막 귀국한 지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남자들의 관심을 사는 실력이 또 늘었네?’하 의사가 다른 환자의 상태도 다 체크한 후 허홍연의 병상을 지나치면서 또 허홍연에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문어귀에 도착하자마자 마침 아침밥을 사들고 돌아온 청아와 마주치게 되었다.하 의사의 잘생긴 얼굴에는 즉시 온화한 웃음이 드러났다."얼마나 맛있는 걸 샀기에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죠?"청아는 허홍연이 장시원한테 너무 많은 일을 얘기할까 봐 걱정되어 황급히 돌아왔던 것이다."좋은 아침에요, 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께서 죽을 드시고 싶다 하셔서 죽과 만두를 사 왔거든요. 참, 저희 엄마께서 이전에 엄청 좋아하셨던 떡도 사 왔는데, 드셔도 괜찮을까요?"하 의사가 떡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네, 드셔도 괜찮아요.""와, 다행이네요."청아가 듣더니 양쪽의 보조개까지 드러낸 채 웃으며 대답했다."우청아."그런데 이때, 병실에서 미적지근한 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를 듣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청아가 듣더니 고개를 들어 화가 묻은 어투로 대답했다."그렇게 저를 증오하시는데 저한테서 멀리 떨어지시죠."이에 장시원이 오히려 냉소를 지었다."아니. 한 사람을 증오한다고 해서 반드시 멀어져야 하는 건 아니야. 더욱 가까이로 다가가 그 사람을 나의 손아귀에 넣고 괴롭히면서 발버둥 치는 걸 구경하는 게 더 짜릿하고 재미있거든."청아가 어처구니없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그 어떤 남자한테도 접근하지 마, 하 의사도 포함해서."장시원의 차갑고 간결한 명령에 청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모습에 장시원이 냉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널 좋아한다는 걸 내가 모를 거 같았어? 2년 전의 일, 나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그러니 아무 일도 없는 사람마냥 태연자약하게 딴 남자와 연애할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마."장시원이 스스럼없이 안전유지 범위를 쳐들어오는 탓에 청아는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괜한 걱정이네요. 전 연애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저한테 복수하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괜찮아요, 제가 무얼 잘못했는지 일깨워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니까.""너 예전에도 분명 연애하지 않을 거라고 했으면서 결국 출국하자마자 남자친구를 찾고 아이도 낳았잖아."말하고 있는 장시원의 어투에는 조롱과 노여움이 묻어 있었다."그러니 이번엔 고분고분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나의 성질이 영원히 그렇게 좋은 건 아니니까."이에 청아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왠지 낯설게만 느껴지는 남자의 포악한 얼굴을 쳐다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장시원의 조롱은 계속되었다."나에게 빚진 게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나 잘 생각해 봐. 매번 말로만 하지 말고, 아무런 성의도 느껴지지 않으니까."말을 마친 후 장시원은 얼굴색이 창백해진 청아를 차갑게 한 번 흘겨보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그리고 장시원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청아는
하 의사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청아 씨, 매번 그렇게 서먹서먹한 말투로 말하지 않아도 돼요.""서먹한 게 아니라 존중하는 겁니다, 저희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주신 게 고마워서요."하 의사가 듣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농담했다."존중? 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청아 씨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담방이라도 손주 돌보러 집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하 의사의 농담에 청아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뜬 채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뜻이 아니잖아요.""봐요. 웃으니까 얼마나 예뻐요."하 의사가 따듯한 햇빛마냥 눈부신 웃음을 드러내며 청아에게 약 처방 한 장을 건네주었다."오늘부터 이모님의 약을 이것들로 바꿨어요. 어떤 건 하루에 두 번 드셔야 하고, 어떤 건 세 번 드셔야 해요. 다 여기에 상세하게 적어두었으니 이대로 가서 약을 받으면 돼요.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나에게 물어보고요.""네, 고마워요. 그럼 저 이만 약 받으러 가볼게요."청아가 웃으며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있던 하 의사가 청아를 다시 불렀다."청아 씨.""네?""오늘 이모님 보러 온 그 남자분... 청아 씨 남자친구예요?"청아가 듣더니 동공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알겠어요. 가봐요."하 의사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웃음을 드러냈고, 청아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다음날과외를 마치고 차에 올라타서야 소희는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임구택이라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하지만 소희는 뒤에 그대로 앉은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완전히 임구택을 운전기사로 취급하고 있었다.임구택도 굳이 소희에게 조수석으로 옮기라고 강요하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소희는 당연히 임구택이 가는 길이 같아 겸사겸사 경원주택단지까지 바래다주는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가는 길이 아니었다.그래서 그제야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임구택의 뜬금없는 고백에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진 소희는 눈시울까지 붉어져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임구택이 다시 소희의 입술에 뽀뽀를 한번 하고는 야유하듯 입을 열었다."진정해. 당신은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심장이 빨리 뛰는 것도 단지 분개해서라고 어서 당신 자신을 설득해.""임구택!"소희가 화난 나머지 얼굴색까지 어두워졌고, 임구택은 그제야 목적을 달성한 사람마냥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소희는 번조한 마음에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뒤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어떻게 임구택처럼 이런 뻔뻔스러운 남자가 있을 수 있는 거지?’……조백림이 지은 생태원은 임구택과 장시원을 포함한 몇몇 친구가 같이 주주가 되는 형식으로 투자하여 만든 곳으로 강성 신안구의 부운진에 위치해 있었다. 게다가 주위에 산과 물도 있는 제일 좋은 지리위치에 자리한 그곳은 부지면적이 몇 천평으로 관광지구, 경마장, 골프장, 유원지, 호텔 등이 완벽하게 포함되어 있어 국내 제1의 생태낙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부운진은 강성 시내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어 중도에 임구택은 소희와 함께 식당을 찾아 밥도 먹었다. 그리고 생태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후 3시 반이었다.오늘 분명 오픈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도착한 관광객들이 엄청 많았다.임구택은 VIP 통로로 들어가 호텔 방향으로 곧장 직진했다.그리고 두 사람이 호텔에 들어서니 프런트 직원이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소희를 한 번 훑어보고는 VIP 전용 방카드를 임구택에게 건네주었다.소희가 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방 하나밖에 없어?"이에 임구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오늘 입주한 손님이 많아 백림이 우리에게 방 하나만 남겼어. 못 믿겠으면 직원한테 물어봐."프런트 직원의 예의 바른 미소에 소희는 순간 자신의 물음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눈치챘다."가자."임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타러 갔다.호텔은
임구택이 전화를 끊은 후 소희가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자 임구택이 소희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그녀를 품에 안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옥상에 수영장이 있는데, 저녁에 같이 별 보러 가자."임구택의 경박한 말투에 화가 난 소희는 다리를 번쩍 들어 임구택을 걷어찼다.임구택도 눈치 빨라 즉시 뒤로 물러섰지만 결국 동작이 더 빠른 소희한테 맞았다. 그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이를 악물고 소희를 바라보았다."당신 너무 한 거 아니야? 자칫했다간 당신 남은 생은 후회하면서 보내야 한다고.""나한테 남자라고는 당신밖에 없을 것 같아?"소희가 냉소하며 임구택을 밀치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1층 로비 다방에는 조백림과 그의 약혼녀 유정, 장시원, 장명원, 오진수,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 등이 모여 앉아있었다.다방에 도착한 소희는 단번에 오진수의 여자친구 곁에 앉은 여인을 알아보았다. 앞서 조백림의 약혼식에도 참석했었던, 장시원을 애모했던 여인이었다.이때, 장시원이 소희와 함께 나타난 임구택을 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소원이 이루어졌어?"소희 앞에서 감히 지나친 농담을 할 담이 없었던 임구택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네 앞가림이나 잘해."소희가 장명원과 인사를 나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미연이는 함께 오지 않은 거예요?""네, 시합 준비하느라 요즘 엄청 바빠요. 얼굴 못 본 지도 꽤 됐어요."투정을 부리는 장명원의 대답에 소희가 웃으며 물었다."약혼 날짜는 정했어요?""마침 소희 씨에게도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번 달 말이에요, 그때 제가 직접 청첩장을 가져다 줄게요.""그래요."소희와 장명원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황정아가 다가와 웃으며 입을 열었다."소희 씨, 오랜만이에요. 어쩜 점점 예뻐지고 있어요?"아부가 잔뜩 묻은 황정아의 인사에 소희는 덤덤하게 웃기만 했다.그리고 황정아가 바로 옆에 있던 여인을 소희에게 소개했다."내 친구 우민율이에요."소희의 표정이 더욱 덤덤해졌다."안녕하세요."검은색 탱크톱 드레스 차림
차에 오른 후 소희가 임구택을 향해 말했다."이렇게까지 날 당신 곁에 가둘 필요는 없잖아.""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그러니 나로서는 당연히 같이 있을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이용하여 당신을 꼬셔야지."임구택이 소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그렇게 나와 붙어있고 싶지 않으면 날 사랑한다고 해."저녁노을이 임구택의 까만 눈동자에 비치면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소희는 심지어 그의 빛나고 있는 눈동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었다.한참 후, 소희가 갑자기 웃었다."그 인내심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네?""두고 봐.""그래."......관광버스는 천천히 원시림으로 들어갔다.삼림 속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나무 아래 관목숲은 가지런하게 전지 되어 있어 관광객들은 언제든지 차에서 내려 깨끗한 잔디밭을 밟으며 삼림 속에서 산책할 수 있었다.높게 자란 나무들이 여름의 무더위를 가려버린 덕분에 삼림 속의 공기는 촉촉하고 신선하여 초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봐봐, 꽃사슴들이야!""기린도 있어!""와, 여기 야생마도 있네!"갑자기 뒤쪽에서 여자들의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에 소희도 숲 속을 들여다보았다.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꽃사슴들이 무리를 지어 삼림 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꽃사슴들은 버스와 사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호기심에 발길을 멈추고 그들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숲 속에는 육식 맹수는 없었고 오직 초식 동물들뿐이었다.귓가에는 온통 새들의 울음소리였고, 친근한 동물들까지 주위를 맴돌고 있어 진정으로 원시림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황정아는 기사더러 차를 멈추게 하고 다람쥐 쫓으러 갔다. 그런데 이때 알파카 한 마리가 그녀의 뒤쪽에 나타나 머리를 내밀어 그녀의 손에 있는 간식을 먹으려 했다. 이에 크게 놀란 황정아는 손에 있던 간식들을 버리고 도망을 쳤고, 그 모습에 다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임구택이 소희에게 물었다."내려서 걸을래?"소
우정숙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의 대답이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서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제가 임유진에게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에요. 그러니 유진이를 탓하지 마세요. 아직 어리고 철이 없을 뿐, 전부 제 문제예요.”우정숙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래서 우리 유진이가 혼자만 짝사랑하고 있었던 거군요?”서인은 굳게 다문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고, 우정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꽤 부담됐겠어요. 대신 사과할게요.”서인의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아니에요.” 우정숙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앞으로 유진이가 여기에 오지 않도록 했으면 해요. 시간이 지나면 유진이도 점점 식어갈 테고, 더 이상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겠죠.”서인의 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방법을 생각해 보죠.”“좋아요. 믿을게요.”우정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떠났다. 서인은 2층 베란다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구은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에도 말했던 맞선 이야기요. 언제 진행할 건가요?”구은태는 뜻밖이라는 듯 놀라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드디어 마음을 정한 거야?]서인은 담담하게 말했다.“집에는 당분간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상대방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만나볼 수 있어요.”구은태는 한순간 고민하더니 물었다.[그러면 언제쯤 집으로 돌아올 거야?] “아직 정해진 게 없어요.”구은태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서인이 결혼을 전제로 여자를 만날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기 때문이다.전화를 끊자마자, 구은태는 곧바로 서선영을 찾아가 맞선 일정을 조율했다.다음 날, 서선영이 서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지난번 만났던 진수아 어때? 사실 걔가 너를 마음에 무척 들어서 했어.]그리고 덧붙였다.[수아
서인은 새로 도착한 테이블을 보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얼굴이 어두워졌다.“이거 내가 산 거 아닌데. 다시 가져가세요.”배송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손님, 임유진 씨가 이미 결제하셔서 반품이 어려워요.”서인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말했다.“그러면 테이블은 놔두고, 돈은 돌려주세요. 대신 내가 결제할게요.”그러나 직원은 여전히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죄송해요, 이미 결제된 금액은 환불이 불가능해요.”서인의 얼굴에 짙은 불만이 떠올랐다. 하지만 배송 직원들에게 화를 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후원에 놔두세요.”직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오현빈이 직원들을 데리고 후원으로 갔다. 서인이 따라갔을 때, 테이블은 이미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최고급 황화리 원목으로 제작된 수제 테이블. 정교한 수공예로 깎아낸 꽃무늬 장식은 유명 장인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 테이블 하나만으로도 뒷마당의 분위기가 훨씬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변했다.서인은 문득 떠올랐다. 며칠 전, 유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던 말.“이 뒷마당엔 개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밖에 없어요. 뭔가 값비싼 거라도 하나 놔둬야 하는 거 아닌가요?”유진은 일부러 이 테이블을 주문한 걸까?한편, 한쪽에는 부서진 낡은 탁자가 여전히 버려진 채 남아 있었다. 현빈이 그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이건 이제 버려야겠네요!”그러나 서인은 한 번 흘깃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했다.“놔둬.”그 말에 현빈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현빈이 다른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서인은 부서진 탁자를 완전히 분해하고 있었다.그는 그 나무판자를 가져다가 애옹이와 야옹이의 집 사이에 덧대고 있었다. 애옹이는 아직 어려서 나무 지붕에서 야옹이 쪽으로 뛰어내릴 때마다 자주 미끄러졌다.하지만 이제는 그사이에 작은 다리가 생겼으니, 더 이상 떨어질 일은 없을 터였다.현빈은 벽에 나무판자를 못질하는 서인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우리 형님
임유민은 더욱 흥미로워하며 물었다.“구은정 아저씨는 어떻게 반응했어?”“그, 그게...”임유진은 문득 마지막 순간, 유진이 반사적으로 서인의 옷깃을 붙잡았던 기억이 떠올랐다.어두운 밤, 희미한 빛 속에서 본 그의 표정 다시금 얼굴이 새빨개졌다. 유진은 황급히 그 순간의 기억을 밀어내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서인의 반응을 떠올려 보려 했다.하지만 그때 상황이 너무나 급작스러웠다. 서로 예상하지 못했던 흐름에 유진은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도망쳐 나왔고,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서인의 얼굴이 어땠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하지만 확실한 건 서인이 자신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아주 잠깐 저항했던 것 같기도 하다.그러나 유진이 술김에 더욱 과감하게 나서자, 결국 서인도 서서히 받아들이며 주도권을 잡았던 듯했다.둘은 꽤 오랫동안 서로를 탐하며 키스했다. 그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자, 유진은 또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다행히 어두운 테라스에서는 티가 잘 나지 않았다. 유민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는 신이 난 듯 말했다.“오! 잘했네! 이렇게 빨리 진전이 있을 줄이야!”유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확실한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하게 말하지 마.”유민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응원했다.“힘내! 몇 번 더 키스하면 확실해질 거야.”“야!”유진은 유민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감정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하지만 과연 그런 기회가 다시 올까?’그날 밤, 서인은 뒷마당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문과 오현빈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를 했다. 누군가 서인을 불렀지만, 그는 대충 응답만 하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향했다.문을 열자마자, 서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애옹이가 언제 들어왔는지, 자신의 침대 한가운데서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서인은 고양이를 싫어했다. 언제나 무심하고 냉정하게 대했지만, 이상하게도 애옹이는 그를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심지어 매번 서인의
공기마저 멈춰버린 듯한 순간이었다....임유진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지만, 얼굴이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잘 익은 사과처럼.이리저리 뒤척이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자, 결국 유진은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기로 했다.테라스로 나가 보니, 밤하늘은 흐린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고, 달빛조차 비치지 않았다. 별 하나 없이 검게 가라앉은 하늘.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그녀의 마음도 복잡하게 뒤엉켰다.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고, 알 수 없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녀는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 익명으로 SNS 고민 상담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남자가 여자에게 반응하는 건, 그 여자를 좋아해서일까요?]잠시 후,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그렇죠.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만 반응한다고 하더라고요.][제가 남자인데,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여자가 충분히 매력적이면 다 반응해요.][윗댓 의견 반대요. 그럼 동물과 다를 게 뭐예요?][애초에 인간도 동물이잖아요.]...유진은 계속해서 새로 고치며 댓글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읽었다. 어떤 댓글을 보면 마음이 설레다가도, 또 어떤 댓글을 보면 불안해졌다. 혼란스러움과 기대감이 엇갈려 마음이 쉴 새 없이 출렁였다.그때,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해?”임유민이었다. 유진은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급히 껐다. 그러고는 서둘러 휴대폰을 뒤로 감추며 더듬거렸다.“아, 아냐! 아무것도 안 했어!”유민은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뭐야, 뭔가 나쁜 짓이라도 한 거야?”유진은 얼굴이 뜨거워지며 발끈했다.“꼬맹이는 신경 꺼!”그러자 유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부모님 출장 가시면서 누나 나한테 맡기고 가셨거든? 그러니까 누나 문제는 내 문제지. 뭔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조언해 줄 수도 있으니까.”유진은 반박하려다가,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큰 동생을 바라보며 체념
후원에는 벽에 걸린 벽등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온 마당은 은은한 황금빛에 감싸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장미꽃은 조용히 피어 있었고, 애옹이는 작은 집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야옹이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앞발로 날아다니는 벌레를 잡고 있었다.서인은 등나무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고 있었고,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서인은 오늘 많은 술을 마셨다. 기분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중 절반은 유진 대신 술을 받아 마셨기 때문이었다.유진은 조용히 다가가, 서인의 앞에서 몸을 숙였다. 그가 정말 잠든 건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넋을 잃고 말았다.서인의 짙고 선명한 눈썹은 마치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고 선명했다. 책에서 묘사하는 ‘긴 눈썹이 관자놀이까지 이어진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그 눈썹만 봐도, 서인의 차갑고 오만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눈은 길고 날렵했으며,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콧날은 오뚝하고 반듯해, 본래부터 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턱선에는 거칠게 자란 수염이 덮여 있어, 평소보다 다섯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상관없었다.서인이 어떤 모습이든, 유진은 다 좋아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그의 수염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유진은 거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다. 서인의 턱에 닿기 직전 갑자기 서인이 눈을 번쩍 떴다.서인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경계와 서늘한 기운이 번뜩였다. 산길에서 적들의 포위에 둘러싸였을 때처럼, 그의 몸에는 순식간에 살기가 감돌았다.유진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으나 뒤에 있던 탁자에 걸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낡은 탁자는 이미 몇 번이나 수리를 거쳤던 터라, 유진의 몸무게를 버틸 수 없었다.쾅! 순식간에 탁자가 부서졌다. 몸을 지탱할 곳이 사라지자,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그 순간 굵은 손이 유진의 팔을 붙잡
이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고, 갑자기 가게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오현빈을 비롯한 직원들이 술과 안주를 들고 뛰어나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생일 축하해요!”이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멍하니 웃었다.“내 생일이었어?”“자기 생일도 모르다니!”임유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케이크를 그 앞에 내밀었다.“자, 촛불 끄고 소원 빌어요!”이문은 굳은 얼굴로 기계적으로 촛불을 불어 끄자 유진이 곧장 말했다.“소원도 안 빌고 그냥 끄면 어떡해요!”이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긴장해서 깜빡했어!”유진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긴장할 게 뭐 있어요?”그때, 오현빈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묻힌 생크림을 이문의 얼굴에 문질렀다. 이문은 한순간 얼어붙더니, 이내 손을 뻗어 현빈을 쫓기 시작했다.조용하고 따뜻했던 생일 파티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유진은 한가운데에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그녀의 웃음소리는 맑고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서인은 카운터에 기대어 서서 사람들의 장난을 바라보았다.평소의 냉랭한 표정과는 달리, 이날만큼은 희미한 미소가 얼굴에 걸려 있었다. 한 직원이 장난을 치려다 유진에게 다가갔다.그러나 유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긴 팔이 앞으로 뻗어져 나가, 상대의 손을 막아섰다.서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너한테 묻히면, 그대로 돌려줘. 괜히 억울해하지 말고.”유진은 본능적으로 서인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서인의 뒤를 따라 움직이며 사람들의 난장판을 피해 도망쳤다.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거의 서인의 어깨에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유진은 새로운 케이크를 꺼내며 작게 으쓱했다.“다행히도, 저는 항상 대비책을 준비하죠!”유진은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자르고 원래는 서인에게 주려 했지만,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손가락으로 크림을 살짝 묻혀 서인의 얼굴에 바르려 했다. 그러나 서인은 재빠르게 몸을 뒤로 피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검은 눈동자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서인이 보였다. 임유진은 기분이 한껏 좋아져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사장님!”“응.”그러나 서인은 무심한 듯 가볍게 대답했을 뿐,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유진은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가게 안 손님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우선 앞치마를 두르고 일손을 거들기로 했다.주방에서 음식을 나르던 중, 이문이 유진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었다.“이거, 너랑 사장님이 산에서 가져온 산나물로 끓인 버섯 갈비탕이야. 갓 끓였으니까 맛 좀 봐.”유진은 국물에 떠 있는 버섯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깊고 진한 풍미에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와, 너무 맛있어요!”“나도 좀 먹어볼까?”오현빈이 다가와서는 직접 손으로 갈비 하나를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현빈은 음미하듯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향이 진하네. 이게 진짜 자연산 버섯이지!”그는 유진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런데 오늘은 왜 저녁까지 여기 있어?”유진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오빠들이 보고 싶어서요. 마침 오늘 일찍 끝나기도 했고요.”현빈은 히죽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우리 보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어떤 사람 보고 싶었던 거야?”이에 유진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다 알면서 왜 물어요?”현빈은 유진에게 더욱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어제 형님 집에 갔더니, 밤늦도록 방에 불이 켜져 있더라. 아무래도 너 생각하느라 잠 못 잔 거 같은데?”유진의 볼이 붉어지며 눈을 굴렸다.“어떻게 그렇게 단정해요? 혹시 그냥 잠이 안 온 걸 수도 있잖아요.”“딱히 다른 이유가 있겠어?”현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유진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고마워요, 오빠!”“고맙긴, 우린 그저 축하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니까!”유진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결혼식 날은 사흘 동안 파티 열어드릴게요!”현빈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바로 그때, 서인이 주방으로 들어오며 차가운 목
“그 토끼도 내 거잖아요? 내 물건으로 내 토끼 먹인 건데, 돈을 받을 수 없죠!”박민란은 단호하게 임유진의 손에 돈을 쥐여주었다.“그리고...”박민란은 다른 바구니에서 화분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화분 속에는 난초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이 난초는 꽤 좋은 품종이에요. 기념 삼아 드릴 테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또 산에 놀러 오세요.”임유진은 난초를 받으며 말했다.“감사해요!”박민란은 손사래를 쳤다.“우리가 오히려 감사해야죠.”서인은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유진과 함께 강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했다. 자동차가 산길을 따라 달렸다. 유진은 창문을 내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환하게 웃었다.“정말 잔뜩 챙겨서 돌아가네요!”서인은 어젯밤 자신이 한숨도 못 자고 뒤척였던 걸 떠올리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정작 그녀는 마냥 즐거운 얼굴이라니. 하지만, 어쨌든 이 여행도 끝났다.강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차가 샤부샤부 가게 앞에 멈추자, 오현빈을 비롯한 직원들이 뛰어나왔다.서인이 차에서 내리고, 유진과 함께 가게로 들어가려던 순간, 서인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어느새 서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버린 듯했다.현빈은 서인과 유진의 맞잡은 손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서인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조금 어색한 듯 유진의 손을 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어서 일하러 가자.”유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며칠 놀았더니 다시 일하러 가기가 싫어지네요.”서인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며칠은 단지 예외일 뿐이야.”서인의 차분한 눈빛을 마주하자, 유진의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품에 안고 있던 난초를 바라보았다.“난 애옹이 보러 갈게요. 난초도 마당에 놓고 와야 하고요.”그렇게 말한 후, 유진은 뒷마당으로 향했다.한편, 현빈과 직원들은 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현빈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서인에게
임유진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서인은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 이불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몸속을 타고 도는 술기운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올라오는 듯했고, 유진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가 술기운을 더욱 자극했다.잠시 후,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찬물로 샤워를 한 뒤, 창가에 서서 한동안 밤바람을 맞았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서인은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그 사이, 유진은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녀는 두 개의 베개 사이에 머리를 묻고, 가느다란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꽤 얌전해 보였다. 그러나 서인이 자리에 눕자마자, 유진이 몸을 뒤척이며 다시 그의 품으로 굴러들어 왔다.‘오늘 밤, 잠은 포기해야겠군.’다음 날 아침, 유진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훤히 떠 있었는데, 침대에는 유진 혼자뿐이었고, 서인은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 내다보니, 서인과 안토니가 산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서인은 검은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아침 햇살이 서인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으며, 평소의 거친 분위기를 감싸 안았다.서인에게서 풍기는 느슨한 여유가 사라지고, 더없이 당당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진은 창틀에 두 팔을 올려 기대며 그를 바라보았다.맑고 영롱한 유진의 눈동자에는 오직 서인만 담겨 있었고,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둘이 가까이 다가오자, 유진이 소리쳤다.“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서인은 고개를 들어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차갑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향할 때, 그 안에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유진 또한 서인을 향해 눈길을 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얇은 아침 안개 너머에서 조용히 마주쳤다.산속의 안개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채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