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의 친구들과 똑같이 아버지의 사랑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권리를 요요에게서 박탈한 것 같아 죄책감뿐인 청아는 소리 없이 요요의 작은 머리통을 어루만지기만 했다.그렇게 한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수신번호를 확인한 청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긴장해져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져버렸다.번호를 저장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닳도록 외워둔 번호라 받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휴대폰은 청아가 받을 때까지 계속 진동할 거라는 기세로 조용해질 줄 몰랐다.이에 청아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시고는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휴대폰 맞은편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조용하게 들려왔다."여보세요?"청아가 다시 소리를 내어 묻자 맞은편의 장시원이 그제야 한번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입을 열었다.[언제 결혼한 거야?]장시원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정서도 알아낼 수 없었다.그리고 청아가 한참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장시원의 말투가 더욱 차가워졌다.[M국에 가자마자 남자친구를 사귄 거야?]청아가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대답했다."네."[출국하자마자 진정한 사랑을 만났어?]장시원의 말투에 묻은 조롱의 뜻은 너무 뻔했다. 청아는 M국에 도착한 후 함께 집을 맡아 살았던 룸메와 룸메 남자친구의 일이 생각나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친구 한 명 없는 타향의 땅에서 서로 의지한 거죠, 뭐."장시원이 듣더니 잠깐 멍해졌다. 그러다 다시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왜 헤어진 건데?]장시원의 물음에 청아는 다시 침묵을 선택했다.이에 장시원의 숨소리가 갑자기 한 번 거칠어지더니 말투가 얼음장마냥 차가워졌다.[그 자식이 너를 버렸어? 두 사람이 낳은 아이조차도 싫다던? 우청아, 넌 어떻게 아직도 그대로인 거야? 목 위에 달린 건 장식품이야?]청아는 여전히 입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러는 청아의 태도에 화가 제대로 치밀어 오른 장시원은 계속 인정사정없이
이튿날,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한 청아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자신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그리고 그 남자를 알아본 청아는 깜짝 놀라 잔뜩 긴장하여 물었다."시원 씨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장시원이 듣더니 고개를 들어 여전히 아무런 정서를 읽어낼 수 없는 표정으로 청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어머님이 이곳에 입원하셨다고 들어서 와 본거야, 뭘 그렇게 긴장해하고 있어?"이에 허홍연도 바삐 입을 열었다."청아야, 시원 군이 좋은 마음으로 날 보러 온 건데, 어떻게 그런 태도로 말할 수 있어?"그러나 청아는 왠지 장시원이 나타난 목적이 그렇게 단순한 거 같지 않아 여전히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저희 어머니 보러 와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그쪽도 많이 바쁜 사람이니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괜찮아."장시원은 여전히 침착하고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너무 덤덤하여 허홍연도 아무런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정도였다.침대 옆 상 위에는 과일바구니와 생화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보아하니 장시원이 가져온 것인 거 같았다.병실은 2인용으로 다른 병상에도 한 소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두 가족은 한 병실에 오래 머물며 평소에 이야기도 자주 나누고 해서 사이가 좋은 축이었다. 그래서 소녀가 내내 호기심에 가득 차 몰래 장시원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장시원과 같은 인물은 어디에 있든 눈이 부시는 존재였으니.청아는 더 이상 장시원을 쫓아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 허홍연에게 물었다."엄마, 제가 가서 아침을 사 올게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난 죽 한 그릇이면 돼.""네."청아가 대답하고는 깔끔하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허홍연이 바삐 장시원에게 물었다."시원 군은 아침 먹었는가? 먹지 않았으면 청아더러 사 오라고 하면 되는데."허홍연의 말에 청아는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 장시원을 바라보았다.마침 장시원도 고개를 들어 청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는 아침밥 사러 갔어요!"하 의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허홍연의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 후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회복이 빠르네요, 이제 3~5일만 더 있으면 퇴원해도 될 것 같아요."허홍연이 듣더니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고마워요, 하 선생!""천만에요."하 의사가 몸을 일으키고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이따 청아 씨에게 밥 다 먹고 난 후 저한테 한 번 들르라고 전해 주세요. 새로 바꾼 약의 복용 방법도 다르거든요.""그래요!"조용하게 옆에 앉아있던 장시원이 음미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는 1호 병상으로 간 하 의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방금 하 의사의 눈빛에는 분명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경각심이 묻어 있었다.‘저 사람도 청아를 좋아하는 건가?’한 여인을 좋아해야만 그녀 주변의 남성들에게 경각심을 품게 되는 거니까.장시원이 순간 차가운 웃음을 들어냈다.‘이제 막 귀국한 지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남자들의 관심을 사는 실력이 또 늘었네?’하 의사가 다른 환자의 상태도 다 체크한 후 허홍연의 병상을 지나치면서 또 허홍연에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문어귀에 도착하자마자 마침 아침밥을 사들고 돌아온 청아와 마주치게 되었다.하 의사의 잘생긴 얼굴에는 즉시 온화한 웃음이 드러났다."얼마나 맛있는 걸 샀기에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죠?"청아는 허홍연이 장시원한테 너무 많은 일을 얘기할까 봐 걱정되어 황급히 돌아왔던 것이다."좋은 아침에요, 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께서 죽을 드시고 싶다 하셔서 죽과 만두를 사 왔거든요. 참, 저희 엄마께서 이전에 엄청 좋아하셨던 떡도 사 왔는데, 드셔도 괜찮을까요?"하 의사가 떡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네, 드셔도 괜찮아요.""와, 다행이네요."청아가 듣더니 양쪽의 보조개까지 드러낸 채 웃으며 대답했다."우청아."그런데 이때, 병실에서 미적지근한 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를 듣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청아가 듣더니 고개를 들어 화가 묻은 어투로 대답했다."그렇게 저를 증오하시는데 저한테서 멀리 떨어지시죠."이에 장시원이 오히려 냉소를 지었다."아니. 한 사람을 증오한다고 해서 반드시 멀어져야 하는 건 아니야. 더욱 가까이로 다가가 그 사람을 나의 손아귀에 넣고 괴롭히면서 발버둥 치는 걸 구경하는 게 더 짜릿하고 재미있거든."청아가 어처구니없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그 어떤 남자한테도 접근하지 마, 하 의사도 포함해서."장시원의 차갑고 간결한 명령에 청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모습에 장시원이 냉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널 좋아한다는 걸 내가 모를 거 같았어? 2년 전의 일, 나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그러니 아무 일도 없는 사람마냥 태연자약하게 딴 남자와 연애할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마."장시원이 스스럼없이 안전유지 범위를 쳐들어오는 탓에 청아는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괜한 걱정이네요. 전 연애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저한테 복수하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괜찮아요, 제가 무얼 잘못했는지 일깨워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니까.""너 예전에도 분명 연애하지 않을 거라고 했으면서 결국 출국하자마자 남자친구를 찾고 아이도 낳았잖아."말하고 있는 장시원의 어투에는 조롱과 노여움이 묻어 있었다."그러니 이번엔 고분고분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나의 성질이 영원히 그렇게 좋은 건 아니니까."이에 청아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왠지 낯설게만 느껴지는 남자의 포악한 얼굴을 쳐다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장시원의 조롱은 계속되었다."나에게 빚진 게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나 잘 생각해 봐. 매번 말로만 하지 말고, 아무런 성의도 느껴지지 않으니까."말을 마친 후 장시원은 얼굴색이 창백해진 청아를 차갑게 한 번 흘겨보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그리고 장시원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청아는
하 의사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청아 씨, 매번 그렇게 서먹서먹한 말투로 말하지 않아도 돼요.""서먹한 게 아니라 존중하는 겁니다, 저희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주신 게 고마워서요."하 의사가 듣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농담했다."존중? 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청아 씨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담방이라도 손주 돌보러 집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하 의사의 농담에 청아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뜬 채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뜻이 아니잖아요.""봐요. 웃으니까 얼마나 예뻐요."하 의사가 따듯한 햇빛마냥 눈부신 웃음을 드러내며 청아에게 약 처방 한 장을 건네주었다."오늘부터 이모님의 약을 이것들로 바꿨어요. 어떤 건 하루에 두 번 드셔야 하고, 어떤 건 세 번 드셔야 해요. 다 여기에 상세하게 적어두었으니 이대로 가서 약을 받으면 돼요.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나에게 물어보고요.""네, 고마워요. 그럼 저 이만 약 받으러 가볼게요."청아가 웃으며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있던 하 의사가 청아를 다시 불렀다."청아 씨.""네?""오늘 이모님 보러 온 그 남자분... 청아 씨 남자친구예요?"청아가 듣더니 동공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알겠어요. 가봐요."하 의사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웃음을 드러냈고, 청아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다음날과외를 마치고 차에 올라타서야 소희는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임구택이라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하지만 소희는 뒤에 그대로 앉은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완전히 임구택을 운전기사로 취급하고 있었다.임구택도 굳이 소희에게 조수석으로 옮기라고 강요하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소희는 당연히 임구택이 가는 길이 같아 겸사겸사 경원주택단지까지 바래다주는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가는 길이 아니었다.그래서 그제야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임구택의 뜬금없는 고백에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진 소희는 눈시울까지 붉어져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임구택이 다시 소희의 입술에 뽀뽀를 한번 하고는 야유하듯 입을 열었다."진정해. 당신은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심장이 빨리 뛰는 것도 단지 분개해서라고 어서 당신 자신을 설득해.""임구택!"소희가 화난 나머지 얼굴색까지 어두워졌고, 임구택은 그제야 목적을 달성한 사람마냥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소희는 번조한 마음에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뒤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어떻게 임구택처럼 이런 뻔뻔스러운 남자가 있을 수 있는 거지?’……조백림이 지은 생태원은 임구택과 장시원을 포함한 몇몇 친구가 같이 주주가 되는 형식으로 투자하여 만든 곳으로 강성 신안구의 부운진에 위치해 있었다. 게다가 주위에 산과 물도 있는 제일 좋은 지리위치에 자리한 그곳은 부지면적이 몇 천평으로 관광지구, 경마장, 골프장, 유원지, 호텔 등이 완벽하게 포함되어 있어 국내 제1의 생태낙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부운진은 강성 시내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어 중도에 임구택은 소희와 함께 식당을 찾아 밥도 먹었다. 그리고 생태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후 3시 반이었다.오늘 분명 오픈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도착한 관광객들이 엄청 많았다.임구택은 VIP 통로로 들어가 호텔 방향으로 곧장 직진했다.그리고 두 사람이 호텔에 들어서니 프런트 직원이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소희를 한 번 훑어보고는 VIP 전용 방카드를 임구택에게 건네주었다.소희가 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방 하나밖에 없어?"이에 임구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오늘 입주한 손님이 많아 백림이 우리에게 방 하나만 남겼어. 못 믿겠으면 직원한테 물어봐."프런트 직원의 예의 바른 미소에 소희는 순간 자신의 물음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눈치챘다."가자."임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타러 갔다.호텔은
임구택이 전화를 끊은 후 소희가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자 임구택이 소희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그녀를 품에 안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옥상에 수영장이 있는데, 저녁에 같이 별 보러 가자."임구택의 경박한 말투에 화가 난 소희는 다리를 번쩍 들어 임구택을 걷어찼다.임구택도 눈치 빨라 즉시 뒤로 물러섰지만 결국 동작이 더 빠른 소희한테 맞았다. 그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이를 악물고 소희를 바라보았다."당신 너무 한 거 아니야? 자칫했다간 당신 남은 생은 후회하면서 보내야 한다고.""나한테 남자라고는 당신밖에 없을 것 같아?"소희가 냉소하며 임구택을 밀치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1층 로비 다방에는 조백림과 그의 약혼녀 유정, 장시원, 장명원, 오진수,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 등이 모여 앉아있었다.다방에 도착한 소희는 단번에 오진수의 여자친구 곁에 앉은 여인을 알아보았다. 앞서 조백림의 약혼식에도 참석했었던, 장시원을 애모했던 여인이었다.이때, 장시원이 소희와 함께 나타난 임구택을 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소원이 이루어졌어?"소희 앞에서 감히 지나친 농담을 할 담이 없었던 임구택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네 앞가림이나 잘해."소희가 장명원과 인사를 나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미연이는 함께 오지 않은 거예요?""네, 시합 준비하느라 요즘 엄청 바빠요. 얼굴 못 본 지도 꽤 됐어요."투정을 부리는 장명원의 대답에 소희가 웃으며 물었다."약혼 날짜는 정했어요?""마침 소희 씨에게도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번 달 말이에요, 그때 제가 직접 청첩장을 가져다 줄게요.""그래요."소희와 장명원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황정아가 다가와 웃으며 입을 열었다."소희 씨, 오랜만이에요. 어쩜 점점 예뻐지고 있어요?"아부가 잔뜩 묻은 황정아의 인사에 소희는 덤덤하게 웃기만 했다.그리고 황정아가 바로 옆에 있던 여인을 소희에게 소개했다."내 친구 우민율이에요."소희의 표정이 더욱 덤덤해졌다."안녕하세요."검은색 탱크톱 드레스 차림
차에 오른 후 소희가 임구택을 향해 말했다."이렇게까지 날 당신 곁에 가둘 필요는 없잖아.""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그러니 나로서는 당연히 같이 있을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이용하여 당신을 꼬셔야지."임구택이 소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그렇게 나와 붙어있고 싶지 않으면 날 사랑한다고 해."저녁노을이 임구택의 까만 눈동자에 비치면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소희는 심지어 그의 빛나고 있는 눈동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었다.한참 후, 소희가 갑자기 웃었다."그 인내심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네?""두고 봐.""그래."......관광버스는 천천히 원시림으로 들어갔다.삼림 속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나무 아래 관목숲은 가지런하게 전지 되어 있어 관광객들은 언제든지 차에서 내려 깨끗한 잔디밭을 밟으며 삼림 속에서 산책할 수 있었다.높게 자란 나무들이 여름의 무더위를 가려버린 덕분에 삼림 속의 공기는 촉촉하고 신선하여 초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봐봐, 꽃사슴들이야!""기린도 있어!""와, 여기 야생마도 있네!"갑자기 뒤쪽에서 여자들의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에 소희도 숲 속을 들여다보았다.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꽃사슴들이 무리를 지어 삼림 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꽃사슴들은 버스와 사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호기심에 발길을 멈추고 그들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숲 속에는 육식 맹수는 없었고 오직 초식 동물들뿐이었다.귓가에는 온통 새들의 울음소리였고, 친근한 동물들까지 주위를 맴돌고 있어 진정으로 원시림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황정아는 기사더러 차를 멈추게 하고 다람쥐 쫓으러 갔다. 그런데 이때 알파카 한 마리가 그녀의 뒤쪽에 나타나 머리를 내밀어 그녀의 손에 있는 간식을 먹으려 했다. 이에 크게 놀란 황정아는 손에 있던 간식들을 버리고 도망을 쳤고, 그 모습에 다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임구택이 소희에게 물었다."내려서 걸을래?"소
강시언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최근에 내가 너의 양부모와 관련된 단서를 따라갔고, 너를 납치했던 사람을 찾아냈어.”“대략 1년 전에 체포되어 지금 감옥에 있어. 내가 사람을 보내 잘 돌봐주게 했지.”아심은 눈빛이 살짝 차가워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시언은 말을 이었다.“그리고 널 샀던 양부모도 지금 형편이 좋지 않아. 아들은 방탕한 삶을 살고,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여자 친구랑 함께 부모를 착취하고 있지.”“돈을 요구하며 부모를 때리고 욕하는 게 다반사야. 그래서 그런 상황이라면 내가 따로 손을 쓸 필요도 없었어.”아심은 담담히 말했다.“나는 그들에게 이미 마음을 비웠어요. 어차피 친부모도 아니었으니까요. 나를 사들였다가 다시 팔아버릴 수도 있는 사람들이죠.”“감정도 없으니 당연히 원망도 없어요.”“원망은 내가 해!”시언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거웠다.“그 사람들이 너를 때리고 욕했던 걸 떠올리면, 지금 받는 벌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져.”아심의 마음은 순간 간질거렸다. 마치 개미가 기어오르는 듯한, 따뜻하면서도 저릿한 감각이 가슴 끝까지 퍼졌다. 그녀는 눈가가 살짝 물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들이 나를 팔았기에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로 그들을 원망하지 않아요.”시언은 팔을 들어 아심의 어깨를 감싸며 눈을 마주쳤다. 시언의 깊고 투명한 눈동자는 점점 더 차갑고도 또렷해졌다.“그날 도경수 할아버지가 네 몸에 있는 태어나는 반점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을 때, 내가 대답하지 않았잖아. 네 생각엔 뭐라고 답해야 할까?”시언은 끝음을 살짝 끌며, 자기 목소리에 특유의 저음과 자극적인 울림을 더했다. 빗소리에 묻힌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강렬히 두드렸다.이에 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있는 그대로 대답하세요. 근데, 그럴 용기 있어요?”“내가 무서워서 못 한다고 생각해?”시언은 낮고 짧게 대꾸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아심의 정교한 턱을 잡아들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오븐 속 닭 날개는 이미 다 구워졌고, 끓던 국도 식어버렸다. 밖에서는 다시 비가 내리는지, 부슬부슬한 빗소리가 고요한 분위기를 더욱 차분하게 만들고 있었다.강시언은 몸을 약간 일으켜 그녀의 옷을 입혀주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뒷정리할 테니, 너는 가서 샤워해. 씻고 나오면 바로 식사할 수 있을 거야.”강아심은 나른하게 눈을 가늘게 뜨며 움직이지 않고 대꾸했다.“내가 샤워 끝낼 때쯤 당신이 음식을 다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해요?”“딱 두 가지 요리랑 국 하나야. 충분하겠어?”시언이 묻자, 아심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점심에 외할아버지가 보내주신 음식이 많이 남아서, 그거 데워서 먹으면 돼요. 음식은 낭비하면 안 되니까.”“그래.”시언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아심을 조리대에서 내려주었지만, 아심은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싸 안고 움직이지 않았다.붉게 물든 눈가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못 걸을 것 같아요.”이에 시언은 낮게 웃으며 아심을 다시 들어 올려 주방에서 주방의 욕실로 데려갔다....두 사람이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되었다. 시언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아심은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얇은 잠옷 차림의 그녀는 헝클어진 긴 머리를 어깨에 흘러내린 채 앉아 있었다. 밖에서 스며드는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아심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흩날렸고, 하얗고 가녀린 어깨가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났다.아심은 비를 바라보며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어두운 조명이 그녀의 부드럽고 가냘픈 라인을 더 강조했고, 그녀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을 주었다.시언은 그녀에게 다가가 같은 자세로 바닥에 앉았다.“야근은 좋은 핑계겠지만, 도도희 아주머니랑 도경수 할아버지가 모를 리 없지. 너, 집에 가기 싫은 거잖아.”아심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시언의 깊고 투명한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에 아심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그 말이 맞아요.
영상 속의 셰프는 유창하게 자국어를 구사하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신은 미스터 강의 여자 친구인가요? 참고로 지금 종료해도 보수는 환불되지 않아요.]아심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알고 있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좋아요. 그러면 이만!]셰프의 말을 끝으로 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영상을 종료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강시언에게 물었다.“닭 날개를 굽고 싶으신 거예요?”“너 할 줄 알아?”“이미 양념까지 다 해두셨으니, 오븐에 넣고 온도와 시간을 맞추면 끝이예요.”시언은 접시에 담아둔 닭 날개를 그녀에게 건네자, 아심은 돌아서서 접시를 오븐에 넣으며 물었다.“어떻게 갑자기 요리를 배우고 싶으셨던 거예요?”시언은 다른 재료를 고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별거 아니야. 네가 집에 돌아왔을 때 따뜻한 밥상을 느껴보라고.”그 말에 아심은 순간 멈칫하며 오븐을 멍하니 바라봤다. 몇 초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타이머를 설정했다. 아심은 돌아서며 미소를 지었다.“제가 뭐 도와줄까요?”시언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네가 내가 부른 셰프를 쫓아냈잖아. 네가 안 도우면 생닭을 먹겠다는 뜻인가?”아심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웃었다. 그녀는 소매를 걷으며 도마 위에 놓인 토마토를 보며 물었다.“이건 뭐 만들려고요?”“약간의 토마토를 곁들인 소고기볶음.”아심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아직 걷는 법도 배우지 않았는데 벌써 달리려는 거예요?”시언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지?”아심은 대답 대신 말했다.“그 요리는 오래 걸려요. 배가 고프니까 그냥 토마토는 생으로 먹어요.”시언은 물었다.“생으로? 그냥 먹으라고?”“상쾌하고 맛있어요.”아심은 토마토를 반으로 자른 뒤 한 조각을 손으로 집어 시언의 입가에 내밀며 말했다.“한번 먹어보고 생토마토 맛이 어떤지 확인해 보세요.”아심은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눈가가 붉어진 채 가늘게 올라간 눈꼬리와 흐르는 듯한 시선으로 무의식적인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시언은
아심은 연희가 쏟아내는 말들을 들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기절하지 마, 그러다 네 남편이 걱정하실라.”[아심아, 내가 도경수 할아버지를 몇 년 동안 알아 왔는지 너 알아?]연희는 감탄하며 말했다.[우리가 친구였는데, 이제 넌 도경수 할아버지의 친손녀가 됐잖아!]아심은 연희의 목소리에서 그녀의 놀라움을 느낄 수 있었다.“사실 나도 정말 많이 놀랐어.”[그렇지만 정말 축하할 일이야!]연희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정말 깜짝 놀랄 만 하면서도 기쁜 소식이야!]연희는 평소 양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재아가 도경수의 손녀가 아니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뻤다. 그런데, 아심이 도경수의 손녀라는 사실을 들었을 땐 말 그대로 두 배의 기쁨이었다.어젯밤, 연희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노명성을 끌어안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명성은 그녀가 임신이라도 한 줄 알고 당황했던 적도 있었다.“고마워.”아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연희야, 나도 네가 내 친구라는 게 너무 행복해.”[이제는 친구뿐만 아니라 가족이기도 하잖아!]연희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이번 주말에 도경수 할아버지를 찾아뵈러 갈게. 축하도 드릴 겸.]“언제든지 환영해.”두 사람은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오후에 정아현이 다시 업무 보고를 하러 왔을 때는 이전과 달리 눈에 띄게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내내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결국 입을 열었다.“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저,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그저 사장님이 걱정돼서 그랬던 건데, 앞으로는 다시는 미스터 강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을게요!”아심은 담담히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남자 친구 생겼다면서요? 데이트하러 가요.”이에 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감사드려요, 사장님.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게요!”...아심이 퇴근할 때쯤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회사를 나설 땐 직원들마저 모두 퇴근해 그녀 혼자 남아 있었다.점심으로 받은 음
식사 중에 강시언이 물었다.“저녁에 또 약속 있어?”아심은 반쯤 내려간 눈길로 잠시 깜빡이며, 약간 죄책감을 느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요즘 정말 바빠요.”“응.” 시언은 짧게 대답한 뒤 더는 묻지 않았다.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지만 각자 차를 타고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아심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고, 그녀는 정말 바빴다.정아현이 업무 보고를 하러 들어왔을 때, 아현은 무심코 아심에게 말했다.“내일 토요일인데, 권수영 여사님께서 댁에서 생일 파티를 연대요. 성대한 파티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꽤 많은 사람을 초대한 것 같아요.”“지승현 사장님도 아마 어머니 생일을 위해 집에 남아 있을 거고요. 어쩌면 권 여사님께서 그 자리에서 며느리를 정하려고 할지도 몰라요.”아현은 슬쩍 아심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내일 생일 파티에 누가 참석하는지 제가 알아볼까요?”아심은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약간 피곤한 듯 말했다.“아현 씨,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와 지승현은 이미 끝났어요. 앞으로도 절대 다시 이어질 일은 없으니까, 지씨 집안 일은 신경 쓰지 마요.”“그리고 지승현 앞에서 내 얘기를 일부러 꺼내지도 마세요.”아현은 눈을 굴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사장님, 그런데 미스터 강이 돌아와서 사장님을 찾으신 건 맞죠?”아심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아현은 머쓱해하며 대답했다.“그날 저녁, 그분이 회사로 오시는 걸 봤거든요.”아심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사장님, 그분과 다시 만나신 건가요?”아현의 질문에 아심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보고서를 읽으며 담담히 말했다.“아니야.”이에 아현은 가볍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안 만나는 게 맞아요. 사장님, 절대 마음 약해지지 마세요. 그 사람이 갑자기 돌아와선 찾아오고, 또 떠나서는 연락도 없는 게 말이 돼요?”“사장님을 뭐로 보고 그러는 건지, 정말 어이가 없네요.”아심의 얼굴은 갑자기
“잠이 안 온다면, 다른 걸 해도 괜찮아.”강시언이 말하자, 강아심은 잠시 침묵하더니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여기 남아 있는 거예요? 대단한 진언님께서 굳이 소파에서 자는 걸 선택하시다니, 대체 왜요?”시언은 차가운 눈을 반쯤 내리며 담담히 대답했다.“비가 와서 못 가.”아심은 문득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시언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넌 뭐라고 생각했는데?”“저는...”아심은 손을 들어 시언의 셔츠 앞자락을 잡으며, 긴 속눈썹을 떨었다. 그의 어깨를 스치며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남으신 이유가, 내일 아침 제가 만든 샌드위치를 드시고 싶어서인 줄 알았어요.”“그 샌드위치, 꽤 맛있더라고.”“그러면 내일도 만들어 드릴게요.”“좋아.”아심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저 이제 피곤해요. 잘게요. 방해하지 마세요.”“자.”시언은 아심을 품 안으로 더 끌어당겼다.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었다. 마치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했고, 천둥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두 사람이 꼭 껴안고 평온한 잠에 들었다.아심은 곧 잠들었지만, 시언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원래 잠들기 전부터 그녀에게 자극받은 상태였고, 지금 아심의 부드럽고 따뜻한 몸이 품 안에 있으니 더더욱 잠이 오지 않았다.얇은 실크 슬립 드레스 하나만 입은 아심은 곡선이 우아하고 매혹적이며, 피부는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그랬기에 시언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제야 약간의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나 막 잠들려는 순간, 아심이 시언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그리고 아심의 손이 시언의 풀어진 셔츠 단추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시언은 즉시 정신이 번쩍 들며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강아심!”하지만 아심은 깊이 잠든 상태라 대답이 없었다.시언은 깊은숨을 내쉬며 아심의 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아심은 무의식적으로 몸부
몇 번째인지 모를 천둥소리가 울리고 난 후, 아심은 시언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시언의 눈동자는 어둠보다 더 깊고 짙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아심의 옆얼굴에 뜨거운 입맞춤을 남겼다.아심은 허리띠를 푸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한 번 깜빡였고, 그러더니 시언의 품에서 일어나 뒤돌아보며 나른하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심은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며 문을 닫고 잠갔다.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린 후, 아심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문에 기대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은 뒤에야 셔츠를 정리하며 욕실로 향했다.거실.시언은 굳게 닫힌 방의 문을 바라보았다. 항상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의 얼굴에 희미한 냉소와 무력감이 떠올랐다.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 손을 씻었다. 그가 다시 거실로 돌아오자, 그의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메시지가 도착했다.시언은 화면을 확인한 뒤, 희미한 조명 속에서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아심이 또다시 시언에게 계좌이체를 한 것이었다.그러자 시언은 화가 나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메시지를 보내며 물었다.[그게 그렇게 만족스러웠어?]잠시 후, 아심이 답장을 보냈다.[부디 돈을 받아줘요. 거래가 끝났으니, 다음번에도 잘 협력할 수 있겠죠?]아심은 막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밖에서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가를 살짝 올렸다. 그러나 시언은 더 이상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다.아심은 그가 화가 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문을 열고 직접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비가 점점 더 거세졌다. 아심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기획서를 읽고, 도도희와 통화를 한 뒤, 피곤함에 이끌려 잠이 들었다.천둥소리는 계속 이어졌지만, 아심은 매우 깊이 잠들었다.한밤중.어느덧 새벽 두 시가 되었다.천둥소리에 잠이 깬 아심은 시간을 확인한 뒤 잠시 고민하다가, 이불을 챙겨 침대에서 내
[그럼 내가 방해하지 않을게. 일이 끝나면 꼭 집에 오렴.]도경수가 따뜻한 목소리로 당부하자 아심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뒤, 아심은 도경수의 번호를 저장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일에 몰두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도경수가 했던 한 글자가 맴돌았다.집, 아심에게도 이제 집이 생겼다.잠시 후, 도씨 집안에서 보낸 점심이 도착했다. 5단으로 된 보온 도시락에는 네 가지 반찬과 한 가지 국이 담겨 있었다.모두 어제 아심이 식사 중에 유독 많이 먹었던 요리들이었다. 도경수는 아심의 입맛을 기억한 것이다. 아심은 마음속 깊이 따뜻함이 밀려들었고, 가족이라는 존재가 점점 더 가깝게 느껴졌다.오후에는 도도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저녁에 비가 올 테니 우산을 준비하고, 약속이 끝나면 가능한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전화를 끊고 난 뒤, 아심은 휴대전화를 쥐고 갑자기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하루는 빠르게 지나갔다. 저녁 8시쯤, 아심은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뒤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의 스탠드 조명이 켜져 있었고, 강시언이 소파에 앉아 책을 들고 느긋하게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이에 아심은 그에게 다가가 약간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남의 집에 들어오실 때는 원래 이렇게 허락도 안 구하시나요?”“남의 집?”시언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차갑게 내리는 비가 어우러진 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맑은 옥처럼 울렸다. 아심은 시언의 맞은편 테이블 위에 앉았다.따뜻한 조명 아래, 아심의 아름다운 이목구비에는 약간의 나른함과 여유가 섞여 있었다.“저는 이제 당신의 넘버 세븐이 아니예요.”시언은 손을 들어 아심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고 살짝 당기며 자기 무릎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내 넘버 세븐이 아니더라도, 넌 내 재희야.”이에 아심은 매혹적인 눈빛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왜 재희가 당신의 것이죠?”시언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도도희가 말했다.“집으로 가져올 짐이 있으면 내가 같이 가서 챙길게.”강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제가 혼자 해도 돼요. 짐이 많지 않거든요.”도경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일이 끝나면 꼭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너랑 상의할 일이 있어.”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그러자 양재아가 말을 받으며 웃었다.“아심이 집에 오면 내 옆방에서 지내면 어때? 우리 같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도도희는 잔잔히 웃으며 거절했다.“괜찮아요. 내가 이미 내 옆방을 정리해 두었어요. 재희와 좀 더 가까이 있고 싶거든요.”그 말에 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것도 괜찮네요.”아침 식사가 끝난 뒤, 강시언은 아심을 회사까지 데려다주었고, 도경수는 끝까지 마당 문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재아는 도씨 집안의 운전사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도경수가 시언의 차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차가운 기운이 들었다.‘역시 친자식은 다르구나.’ 재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내가 몇 달 동안 도씨 집안에서 도경수를 모셨는데도, 강아심이 하루 있는 것만 못하네.’“가요, 늦겠어요.”재아는 시선을 거두며 운전사에게 말했다....시언은 앞을 응시한 채 운전하며 물었다.“저녁에 정말 약속이 있는 거야?”아심은 나른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부드러운 햇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떨어져 따뜻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정말이예요.”그러자 시언은 그녀를 힐끔 보며 말없이 운전했고, 아심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저녁에 제가 운전해서 갈 테니 굳이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요.”“그래.” 시언은 담담히 대답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심은 가벼운 질문을 하였다.“강재석 할아버지랑 언제 강성으로 돌아가세요?”시언이 물었다.“왜 그러는데?”“그냥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아심은 잠시 멈추었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강재석 할아버지가 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