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그 중간의 감정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이 한창 대치하고 있는데 소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수신 번호를 확인한 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조여들었다.임구택도 수신 번호를 보았다. 그러고는 교활한 빛이 스쳐 지나간 눈빛으로 소희에게 말했다."받아."그는 소희가 전화를 받아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물러서기는커녕 거의 소희의 얼굴과 붙어 있을 정도로 가깝게 기대어 있었다.이에 소희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평정심을 찾은 후 고개를 살짝 돌려 전화를 받았다."심명?""소희야, 저녁에 밥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오주 쪽에 또 일이 생겨서 지금 바로 가봐야 해."소희가 듣더니 잠깐 멍해졌다."지금 바로 가야 하는 거야?"소희의 목소리가 약간 쉬어있었고 심명은 즉시 이상함을 알아차렸다."소희야, 너 어디야?"임구택의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숙여 소희의 귓불을 물었다.소희는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억지로 짓누르고 한 손으로 임구택의 어깨를 밀면서 아무 일도 없는 척 대답했다."나 아래층에 있어."아래층에 있다는 말에 심명은 소희가 요요랑 있는 줄 알고 다시 아쉬워하며 말했다."나 아마 그곳에 며칠은 머물러야 할 거야. 그러니 내가 없어도 네 몸을 잘 챙기고."소희는 남자의 키스에 온몸이 뻣뻣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몸부림치지도 못하고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어제저녁에 성연희와 통화를 한 후 소희는 심명을 찾아가 제대로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더는 만나지 않고 현재의 관계를 끝내거나, 아니면 같이 있기로 결정하고 심명을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거나.그러나 일은 항상 계획을 벗어났다.지금 이렇게 임구택과 얽히고 있었으니 심명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그래서 심명이 떠난다는 소리에 그녀는 이유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임구택이 자극해 내는 전율을 무시하고 말했다."알았어. 조심해서 갔다 와."심명의 말투가 여전히 다정
월요일, 소희가 제작진으로 출근했다.그리고 그 한 주는 엄청 순탄했다. 일도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었고.그날 임씨 가문으로 가는 길에 이성을 잃을 뻔했던 것만 제외하고 임구택도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하지만 이현을 볼 때마다 소희는 자신도 모르게 임구택을 생각하게 되었다. 소유욕 때문에 그런 포악하고 편집스러운 말을 한 게 아닌지 궁금하기도 해서.이현과 여민의 관계는 여전히 엄청 좋았다. 그리고 여민은 여전히 일부러 소희 앞에서 임구택을 언급했고, 이현도 마치 사랑에 빠진 여자처럼 행복한 모습을 드러냈고.하루하루가 예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소희를 놀라게 했던 건 류 조감독의 그녀에 대한 태도가 다시 좋아졌다는 것이다.전에 분명 그가 소희를 배우로 만들어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한 것 때문에 소희가 눈치 없다며 고의로 사람을 찾아 그녀를 괴롭혔었는데, 왠지 이번 주부터 태도가 확 바뀌어 다시 그전처럼 소희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립스틱 선물, 꽃 선물, 애프터눈 티. 소희가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류 조감독의 태도는 여전했다.그래서 결국 제작진 전체가 류 조감독이 소희에게 구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이날도 류 조감독의 조수가 소희에게 장미꽃 한 움큼을 선물했고, 소희는 바로 꽃을 던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류 조감독에게 전하세요, 다시 꽃을 보냈다간 바로 성추행죄로 신고하겠다고."이에 조수가 얼른 꽃을 들고 돌아갔다.하지만 30분도 안 되어 류 조감독이 직접 꽃을 들고 와서는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 소희 씨 만약 장미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일에는 백합으로 사줄게."소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류 조감독님, 대체 뭘 하고 싶은 겁니까? 솔직히 말하세요!"그러자 류 조감독이 바로 대답했다."나 소희 씨를 좋아해, 그래서 구애하고 있는 거고. 설마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어? 소희 씨, 전에 내가 잘못했어. 나의 틀린 방식에 사과할게. 하지만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야. 네가 처음 제작
그러다 돌아오는 길에 룸 밖에서 여민과 마주치게 되었다.손에 술 한 병을 들고 있던 여민이 소희를 보더니 술병을 들었다."78년산 강제야. 소희, 함께 한잔해!"하지만 소희는 맑고 고요한 두 눈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여민이 웃으며 문을 밀고 그 옆에 서서는 소희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소희가 룸으로 들어서자 여민이 바로 손에 든 술병을 들고 여러 사람을 향해 말했다."소희 씨가 술을 쏜대요. 다들 어서 소희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해야죠."소희가 순간 고개를 돌려 여민을 바라보았다.여민이 득의양양하게 그녀를 향해 눈썹을 올렸다.다들 놀라서 소희를 쳐다보았다."78년산의 강제라니. 소희 씨, 통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설마 갑자기 부자가 됐어?""소희 씨, 몰라봤네. 이렇게 돈이 많은 부자였다니!""소희야 고마워. 내가 한 잔 따라줄게. 이렇게 비싼 술은 나도 처음이야!"소희가 얼굴색 한 번 바꾸지 않고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으로 여러분과 함께 밥 먹는 거니까요. 다들 재밌게 놀기 바랍니다."이때 이 감독이 일어서서 말렸다."소희 씨, 이 술 너무 비싼 거 아니야? 다 같은 팀의 식구들인데, 이렇게 허비할 필요 없어.""괜찮습니다. 다들 마음껏 즐기면 됩니다."소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이에 여민이 기뻐하며 웨이터를 불러와 술을 따게 하고는 모든 사람의 술잔에 따랐다.이정남이 소희를 노려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너 미쳤어? 수백만 원짜리 술을 그렇게 막 사도 돼? 오늘 네가 쏘는 것도 아닌데 왜 나서는 거야?"그러자 소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진 게 아니에요."이정남이 듣더니 잠깐 멍해졌다. 그러다 곧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여민이 일부러 그런 거야?"마침 이현과 여민이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을 본 소희의 얼굴에 순간 한기가 올랐다.‘주범은 여민이 아니야.’‘멍청이, 전에 그렇게 이용당하고도 정신 못 차리다니.
웨이터가 명세서를 소희에게 건네자 이 감독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명세서를 빼앗으려 했다."그냥 내가 계산할게!""아닙니다."그런데 소희가 웃으며 명세서를 가지고 가서는 휴대폰을 꺼내 계산할 준비를 했다.이에 이정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돈이 충분해?""네."이때 옆에 있던 이현과 여민이 눈길을 마주쳤고, 여민이 바로 콧방귀를 뀌었다."속이 깊긴 깊네, 다들 보는 앞에서 난폭하게 화를 내며 추태를 부리지 않다니."그러다 또 실망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재밌는 연극은 물 건너갔네. 진짜로 계산할 돈이 있었으니."이현은 의외로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필경 소희가 임구택과 그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임구택이 소희를 박대할 리가 없었으니까.그녀는 고개를 돌려 류 조감독에게 눈짓을 했고, 류 조감독이 접수하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 소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대범하고도 자상하게 말했다.."소희가 갓 졸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술을 쏠 돈이 있겠어? 이 술은 내가 소희를 대신해 지불할게."말하면서 그는 휴대폰을 꺼내 진짜 계산하려고 했다. 사실 그는 소희가 말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전혀 막을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그래서 몸을 돌려 떠보듯이 소희를 향해 말했다."소희야, 내가 대신 낸다?"그러자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감사합니다, 류 조감독님."류 조감독의 미소가 순간 살짝 굳어졌다.그가 소희를 대신해 지불할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왠지 소희의 태도가 수상했다.이때 다른 사람들도 잇달아 웃으며 말했다."류 조감독님, 정말 통이 크시네요."이미 한 말이 있으니 류 조감독은 번복할 수가 없어 명세서를 들고 꾸물거리며 620만 원을 지불했다.돈이 카드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그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이 감독이 류 조감독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담하듯 말했다."류 조감독, 이렇게 대범한 모습은 처음 보네."류 조감독이 듣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소희에게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하지만 그녀도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류 조감독은 꺼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화가 나서 누군가를 욕하고 싶을 지경이었다.그래서 연속 이틀 동안 촬영할 때 여민에게 좋은 태도를 보이지 못했고, 마음이 불쾌한 여민은 이현을 찾아가 하소연했다."그 620만 때문에 류 조감독이 지금 나를 미워하고 있다고. 현이야,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이현은 자신이 소희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아이디어를 낸 거였는데, 소희의 반응이 그녀의 예상을 벗어날 줄은 몰랐다.그래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류 조감독이 다시 너를 찾게 되면 말해 줘, 그 620만을 절대 헛되이 쓰지 않도록 하겠다고."이현의 말에 여민의 눈빛이 반짝였다."내가 보기엔 소희는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닌 것 같아. 계속 물어뜯었다간 우리도 다칠 수 있을 것 같아.""아무리 강한 상대도, 무서운 게 있는 법이야."......류 조감독은 소희 앞에서 감히 불쾌한 내색을 드러내지 못하고 여전히 매일 꽃을 보냈다.그리고 그 모습에 제작진 중 세상 물정을 모르는 일부 소녀들이 소희를 엄청 부러워하고 있었다.아무래도 류 조감독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고, 제작진에서 또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희에게 ‘일편단심’이기도 했으니.이정남이 소희의 사무실 문밖에 놓인 한움큼의 분홍색 장미를 보더는 웃었다."정말 껌딱지가 따로 없잖아. 아무리 쫓아내도 들러붙는 게,"소희는 전혀 보지 못한 듯 일에만 전념했다."보지 않으면 돼요."이에 이정남이 차가운 목소리로 또 말했다."그건 그렇지만 역겹잖아!"*이틀 후, 여민이 저녁에 고명계를 따라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마침 임구택도 있었다.여민은 고명계의 곁에 앉아 끊임없이 가장자리에 앉은 남자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고명계를 한번 보고는 또 시종 단아하고 고귀한 모습으로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임구택을 쳐다보았다. 순간 이현이 왜 임구택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술을 몇 잔 마신
한 무리의 여인들이 의견이 분분하여 누군가를 우회적으로 욕하기 시작했고, 남성분들이 몇 마디 듣더니 눈치를 챈 듯 하찮다는 웃음을 지으며 이전의 화제를 계속했다.임구택이 차가운 눈빛으로 여민을 힐끗 쳐다보고는 담배를 꺼냈다. 그러자 옆에서 누군가가 눈치 빠르게 그의 담배에 불을 붙였고, 그가 한 모금 빨고 내뱉은 연기는 허공으로 흩날리며 그의 차가운 눈빛마저 가렸다.다음 날 아침여민이 막 외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택배인 줄 알고 마스크팩을 붙인 채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이 금방 열리자마자 누군가가 힘껏 밀었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 여민은 놀라서 문밖의 네다섯 정도 되는 남자들을 쳐다보았다.맨 앞에 선 여인은 마흔이 넘어 보였고, 얼굴에 살이 너무 쪄있어 두 눈이 실눈처럼 살 사이에 끼워진 게 왠지 사납고 독해 보였다.여인은 음흉하게 여민을 쳐다보더니 바로 다가가 여민의 잠옷 앞깃을 잡고 뺨을 날렸다."염치없는 년, 감히 내 남자를 꼬셔? 꼬시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았나?"여민은 여인이 날린 뺨에 순간 멍해져 얼굴을 가린 채 화를 내며 물었다."당신들 누구야! 어떻게 올라온 거야?"여민이 사는 곳은 고급 주택단지로 낯선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올 수 없었다.‘경비실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주택단지로 들일 수가 있는 거지?’그러자 여인이 이를 악물고 여민을 노려보며 대답했다."우리 남편이 산 집에 내가 왜 못 올라와? 고명계 그 나쁜 놈, 대체 몇 명이나 꼬시고 다닌 거야!"여민이 듣더니 안색이 급변해서는 당황하고 두려워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부러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당신들이 사람 잘못 찾았어. 이 집은 내가 직접 산 거야. 난 네 남편을 몰라.""죽음이 임박했는데도 인정하지 않아?"고 부인이 뒤돌아보며 소리쳤다."장자야, 사진을 보여줘!"그러자 뒤에 있던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와 사진 한 무더기를 탁자 위에 던졌다.그리고 사진을 확인한 여민은 순간 겁에 질렸다. 그 사진들
고 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나 아니야."사실 오늘 아침 누군가가 그녀에게 택배를 보내왔었다. 그 속엔 고명계와 여민이 찍혀있는 사진 그리고 여민의 집주소가 들어 있었고, 그녀가 그 사진들을 보고 나서야 몇 사람을 데리고 여민이 사는 곳으로 쳐들어갔던 것이다.심지어 그중에는 고명계와 여민이 호텔을 드나드는 사진뿐만 아니라 침대에 누워있는 사진도 들어있었다.‘대체 누가 그런 은밀한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온 거지?’장자가 듣더니 갑자기 고 부인의 굵은 허리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뽀뽀를 했다."누가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누님이 제대로 화풀이를 했으면 된 거죠!"고 부인은 그대로 남자의 품에 기대었고 통통한 손은 남자의 셔츠 속으로 파고들었다.그 후 여민은 3일간의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다가 다시 제작팀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촬영하는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아 전부터 여민한테 악감정이 있었던 류 조감독이 기회를 빌려 늘 촬영장에서 여민에게 화를 냈다.예전 같았으면 여민은 무조건 류 조감독에게 대들었겠지만 지금은 조용하게 듣기만 할 뿐 한 마디도하지 않았다.게다가 이현과는 점점 가까워지고, 이전보다 더 이현의 비위를 맞추려 하면서도 조수나 스태프들한테는 엄청 포악했다.이에 많은 사람들이 여민이 자극을 받은 게 아닌가고 의심하고 있었다.......토요일8시 반 정각에 맞춰 소희가 집에서 나오니 임구택은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알맞은 수제양복을 차려 입은 채 몸을 차문에 기대고 낮은 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임구택이 소희를 보더니 차에 타라는 손짓을 하면서 곧바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거절할 기회도 없이.소희는 치밀어 오른 화를 억누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러자 임구택이 전화를 끊고 차에 시동을 걸어 주택단지를 떠났다.몇 십 메터를 사이에 둔 주택단지의 녹화 풀숲에서 갑자기 손에 카메라를 든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은 멀어져 가고 있는 차를 주시하고 있었다.차 안에서, 소희가 조용하게 차창 밖
"하지만 이번엔 달라!"임유민이 고개를 저으며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소희에게 말했다."내가 장담하는데, 이번엔 누나가 틀림없이 짝사랑을 하고 있어."소희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누가 그렇게 보는 눈이 없어? 네 누나를 짝사랑하게 하다니.""임유림 바보, 이번엔 더 이상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임유림을 걱정해주고 있는 임유민의 모습에 소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네 누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강성대에 합격했고, 학교에서도 성적이 줄곧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어. 그런 사람이 바보라고?""성적이 좋다고 사람을 보는 안목도 좋은 법은 없잖아. 임유림은 어릴 때부터 가족들의 사랑만 받고 자라 사람 마음이 얼마나 험악한 지 모른다고."소희가 듣더니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어릴 때부터? 네가 봤어?"임유민이 소희를 한번 흘겨보고는 다시 걱정 어린 말투로 소희를 향해 말했다."우리 엄마 아빤 집에 안 계시고, 둘째 삼촌도 바빠서 그러는데 쌤이 나 대신 임유림을 지켜봐 주면 안 돼? 절대 바보짓 못하게.""이런 일은 외부 사람이 참견하지 않는 게 좋아."소희가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다.그러자 임유민이 바로 당당하게 반박했다."쌤이 왜 외부 사람이야? 쌤은 임유림 둘째 숙모잖아!"임유민의 말에 소희는 하마터면 침에 사레가 들 뻔했다. 그러고는 곧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난 네 둘째 삼촌과 이미 헤어졌어. 그러니 다시는 날 둘째 숙모라고 부르지 마."임유민이 듣더니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우리 둘째 삼촌은 그런 말하지 않았는데.""그럼 내가 지금 정중하게 말해줄게, 우리 이미 헤어졌어.""쌤은 정말 안목이 없어."임유민이 콧방귀를 뀌며 하는 소리에 소희는 임구택이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거라 그녀의 안목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린아이와 따지고 들 일은 아닌 것 같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유민은 소희가 화를 내기라도 할까 봐 더 이상 농담을 하지 않고 다시 진지하게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