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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요

작가: 사흘부탁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0-29 13:46:46
정헌은 말을 한 다음, 자신이 정말 짐승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태경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그는 눈을 들며 담담하게 평가했다.

“그럼 네 안목도 좋은 편이네.”

‘강 비서는 얼굴도 예쁘지, 몸매도 나쁘지 않지, 거기에 학력도 있고 성격도 좋지. 아주 많은 장점이 있는 사람이야, 요리 솜씨도 괜찮고.’

태경은 남자가 사랑과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 정상이라고 느꼈다.

그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럼 난 기사에게 강 비서를 부탁할게.”

정헌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태경은 정말 감정이 없나 봐.’

예전에 학교 다닐 때, 태경은 그야말로 무정한 사람이었다. 연애편지는 받지도 보지도 않고, 여자들이 자신을 위해 질투하고 싸워도,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직 태경이 신경 쓰는 사람만이 그의 관심을 조금 얻을 수 있었다.

정헌도 심심해서 물었다.

“너희 둘 도대체 왜 결혼했니? 넌 강 비서를 좋아하지 않잖아.”

태경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감정 때문에 결혼할 필요 없으니까.”

그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 사랑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감정이 없으면 번거로움도 없으니까.

정헌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래.”

...

집에 돌아온 사랑은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깊이 잠들지 못했다. 수많은 악몽에 시달려 한밤중에 놀라 깨어났다.

스탠드를 켜고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4시. 날이 밝기 직전이었다.

‘태경은 병원에 갔겠지. 강세영이 또 입원했으니까. 며칠 전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비아냥대던 사람이 그렇게 허약하다니, 정말 말도 안 돼.’

사랑은 예전에 아내가 복수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자신도 복수를 배워,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 언젠가 자신도 여주인공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던 소녀에서 점차 무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여신으로 변신하길 꿈꾸곤 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잔혹했다.

무엇이든 알아볼 수 있지만, 유독 사람의 마음만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는 축하 공연이 열렸다.

태경은 학생 대표로 무대에 올라 발언을 했다. 그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었으며, 양복을 입은 모습은 더욱 빛나 보였다.

연설고도 없이 당당하게 강단에 선 그는, 유머러스한 연설로 아래 학생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는 그야말로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높고 먼 존재였다.

선생님은 사랑에게 꽃다발을 들고 올라가 태경에게 주라고 시켰다.

긴장으로 손을 떨던 사랑은 꽃을 꼭 끌어안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겨우 두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멈춰 섰다.

그 순간, 태경은 그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랑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이유를 깨달았다.

태경은 그녀가 아니라, 바로 뒤에 있던 소녀를 보고 있었다.

세영이었다. 세영은 태경의 교복을 입고 있었고, 그의 목도리를 두른 채 깡충깡충 뛰며 손을 흔들었다.

태경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 부드러운 기색이 드러났다. 그는 사랑과 세영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던 순간, 세영은 발목을 삐끗해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랑은 그녀가 넘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선생님이 준비한 꽃을 전하려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태경아...”

하지만 그 순간의 소년은 이미 지금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사랑을 보지도 않은 채 그녀를 밀어냈다.

사랑은 똑바로 서지 못하고 계단에서 넘어졌다.

다행히 계단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녀는 얼른 품에 안고 있던 꽃을 지켰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태경이 약간 화가 난 얼굴로 세영을 안고 일으키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단호하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 거야?”

세영은 태경의 팔을 껴안으며 일부러 넘어진 사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네가 너무 멋있으니까, 좀 가까이서 보고 싶었을 뿐이야.”

“발목 안 아파?”

“뽀뽀해 주면 안 아플 것 같아.”

부드러운 불빛은 태경의 차가운 기운을 수식했고, 그는 가볍게 웃었다.

“장난꾸러기가 다름없어.”

비록 말을 그렇게 했지만, 태경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세영에게 뽀뽀를 했다.

사랑은 발목을 다쳐 혼자 절뚝거리며 의무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꽃다발은 그녀처럼 구석에서 점차 썩어졌다.

짧은 추억에서 빠져나온 사랑은 이불로 얼굴을 덮으며 다시 잠들었다.

...

태경은 점심때 집에 돌아왔는데, 마침 사랑은 약을 먹고 있었다.

문을 여는 소리에 그녀는 즉시 탁자 위의 약병을 서랍에 쑤셔 넣었다.

태경은 밤새 잠을 못 잔 듯, 여전히 어젯밤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핏발이 서려 약간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사랑은 일어서서 약을 뒤로 숨기려 했다.

“오늘 회사에 안 나갔어요?”

태경은 소매의 단추를 풀며 대답했다.

“이따가 갈 거야.”

사랑은 태경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고, 더욱 조마조마했다. 탁자 위에는 아직 두 병의 약이 남아 있었다.

“먼저 샤워하지 않을래요?”

태경은 결벽증이 있었기에, 밤새 샤워를 하지 않았으니 틀림없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 너무 예리했다.

남자는 담담하게 물었다.

“뭘 숨기고 있어?”

사랑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태경은 고개를 들었고, 약간 피곤해 보여서인지, 안색이 많이 부드러웠다.

“비켜봐.”

사랑은 안절부절못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강세영 씨는 괜찮아요?”

태경은 셔츠 단추를 풀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비켜.”

사랑은 진정을 하려고 노력했고, 평소 업무를 처리하는 것처럼 침착하게 태경을 상대했다.

“아, 약 먹고 있었는데, 태경 씨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요.”

“그것뿐이야?”

“네.”

태경은 사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약 좀 꺼내 봐.”

사랑은 약병을 건네주었다.

“비타민제예요.”

태경을 그렇게 오래 따라다니면서, 사랑도 지금 무척 신중했다.

그때 복통 후, 혹시라도 태경이 보면 의심받을까 봐 병원에서 처방 받은 약을 모두 비타민 약병에 넣었다.

태경은 병뚜껑을 열며 안을 가볍게 훑어보고는 약병을 돌려줬다.

사랑은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녀는 태경을 위해 옷장에서 갈아입을 옷을 찾아냈다.

“먼저 씻으러 가요.”

태경은 옷을 받았다.

“역시 강 비서밖에 없어.”

사랑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 하하...”

태경은 욕실에 들어가기 전, 여전히 어젯밤의 일 때문에 마음이 걸렸다.

“어젯밤에 왜 노출이 그렇게 심한 치마를 입은 거야?”

사랑은 얼굴을 숙이며, 엄청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쁘게 입으라고 해서요. 난 그 치마가 아주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예뻐.”

태경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사랑의 턱을 잡으며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르는 말을 했다.

“그러나 강 비서, 앞으로 그렇게 입고 사람 꼬시고 다니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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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26화 나만의 장미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사랑을 기쁘게 할 수 있었던 순간은 하나도 없었다.유일하게 따뜻했던 기억이 있다면, 아마도 아무 걱정 없이 살았던 열여섯 살의 한때일 것이다.가장 생기가 넘치던 그해 여름, 남청연의 병원비 외에는 다른 슬픈 일이 없었다. 사랑은 매일 몰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었다.회사 아래층 벤치에 오랫동안 앉아 있던 사랑은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그녀는 지루한 눈빛으로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봤다. 대부분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다.맞은편 공원에서는 어린아이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고, 대학생들은 꽃을 팔고 있었다. 사랑은 그들이 들고 있는 장미꽃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본가의 정원에도 장미가 가득 심어져 있지. 하지만 나를 위한 단 한 송이도 없었어.’사랑은 피곤한 몸을 일으켜 외투로 자신을 꽁꽁 감쌌다. 그녀는 스카프로 얼굴까지 감싸며 추위에 맞섰다.꽃을 파는 대학생 앞으로 다가간 사랑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한 송이에 얼마야?”요즘은 발렌타인데이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도 아니라서 꽃을 파는 장사가 그리 쉽지 않았다.대학생들은 오늘 아직 한 송이도 팔지 못했는데, 모처럼 자발적으로 꽃을 사려는 고객을 만났다.“아 언니, 한 송이에 1,000원이에요. 1,000원 주시면, 제가 두 송이 드릴게요.”“아니야, 한 송이만 줘, 고마워.”사랑은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건넸다.장미를 받자, 뿌리에 있는 가시가 손을 찔렀다. 아픔을 느끼지 못했는지, 사랑은 장미를 쥐고 찬바람을 쐬고 있었다.‘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게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은 아니잖아. 나도 자신을 위해 나만의 장미를 살 수 있고.’...사랑은 장미를 산 다음, 다빈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서 밥 먹자고 했다.다빈은 지금 집안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인데, 매일 쇼핑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없었다. 그녀는 황급히 사랑이 보낸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사랑은 이미 음식을 주문했고, 다빈에게 와인 한 병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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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챕터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100화 내가 같이 자주길 원해?

    사랑은 순간 멍해졌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아슬아슬해졌다. 다행히 간호사가 와서 그녀의 링거를 빼주어 그 어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태경은 차를 몰고 나와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걸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과 은은한 압박감에 사랑은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졌다. 태경은 품 안의 그녀가 며칠 새에 더 야위어 버린 것을 증명하는 가느다란 허리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이러니 이렇게 자주 아프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고 옷자락을 정성스럽게 감싸 주었다. 그는 사랑의 차가운 손을 잡았는데,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태경의 손은 따뜻했고, 사랑의 차가운 엄지손가락은 그의 온기 덕분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차갑기만 하던 그의 표정에 어딘가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태경은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문득 입을 열었다. “요즘 밥 잘 안 먹었어?” 사랑은 그의 질문에 잠시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먹었어요.”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일정이 불규칙했기에 가끔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살 빠졌어.” “정말요?” 사랑은 거울을 볼 때마다 비슷한 얼굴이어서 전혀 느끼지 못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좀 더 먹고 면역력을 길러. 자꾸 아프지 않게.” 사랑은 입을 열어 자신이 자주 아픈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말하려다 멈췄다. “네.”결국 그저 짧게 답했지만, 그녀의 속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태경 씨가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건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태경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사랑도 자신이 병에 걸려 태경에게 번거로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픈 상태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9화 앞으로 자주 웃어

    사랑은 집에서 고열로 정신이 혼미해져 땀을 흘렸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을 푹 덮고 있으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힘이 없어서 병원에 갈 여력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119에 연락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혼자서 버텨왔다. 아프면 참고, 또 참고, 정말 못 참을 때만 도움을 요청했다. 병에 걸리는 건 물론 괴롭지만, 사랑에게는 이미 익숙한 감각이었다. 과거, 학비를 벌기 위해 고열에도 불구하고 아르바이트를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깊은 밤, 편의점에서 잠깐 엎드려 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N시는 C시처럼 큰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아서, 겨울에는 늘 음습하고 차가운 비가 내렸다. 차가운 공기는 사랑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후반부에 잠에서 깬 사랑은 기침을 하며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119를 눌러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사랑은 혼자 병원으로 가서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며 링거를 맞았다. ...태경은 가능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다. 급히 나서느라 짐도 챙기지 않았다. 두 시간 후, 그는 N시의 공항에 도착했다. 비서는 이미 사람을 보내 준비해 두었다. “대표님, 오늘 밤 호텔에서 머무르실 건가요, 아니면 저택으로 가실 건가요?” 태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 키를 줘.” 비서는 질문을 더 하지 않고 키를 건넸다. 태경은 사랑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사랑이 일부러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잠시 잠들었고, 핸드폰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태경은 차를 골목 입구에 세우고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8화 감기 걸린 거야?

    쓸쓸히 내리는 눈과 바람이 도시 전체를 덮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밝히며, 바깥세상이 조금은 덜 허전해 보이게 했다. 태경은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허리는 잘록하고 어깨는 넓으며 다리도 길어, 빛 아래 서 있는 태경의 모습은 특히나 더 돋보였다. 핸드폰 벨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마지막 몇 초가 지나 통화가 연결되었다. 사랑은 소파에서 거의 잠이 들 뻔했는데, 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태경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 짜증이 점차 사라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나야.” 사랑은 그제야 화면 속 이름을 확인했다. 태경은 다시 말했다. “아까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뭐야?” 사랑은 태경이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 그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여전히 새해 특집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은 하품을 하며, 대충 핑계를 지어 말했다. [대표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사실 태경이가 사랑의 전화를 끊기 전, 그녀가 원한 것은 그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지금의 사랑은 가벼운 잠을 한 번 자고 나니, 조금은 덜 외로웠다. 태경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의 손목에 선명하게 드러난 혈관이 더욱 돋보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럼 며칠에 돌아올 생각이야?” 사랑은 아직 항공권을 예매하지 않았다. N시에 며칠 더 머물고 싶었고, 태경의 차갑고 쓸쓸한 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있고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3일에 돌아와.” 태경이 그녀 대신 결정을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7화 여기가 숙모의 집 아니야?

    태경의 아버지 심지환은 평소 바쁜 사람으로, 높은 직책과 권한을 가지고 있어 쉽게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설날이 되어서야 겨우 저녁 8시쯤 집에 돌아왔다. 심씨 가문은 설날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늘 북적였다. 어린 자녀들도 장로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반드시 집으로 와 명절을 보냈다. 집 안은 새로 장식한 창문지와 함께,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후원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아들을 본 심지환은 저녁 식사 후 태경을 서재로 불렀다. “네 작은아버지가 그러더군. 요즘 네가 일 처리를 너무 가혹하게 한다고.” “작은아버지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일을 할 때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라고 하더군.” 태경은 집안 어른들이 늘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에 한 치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뽑지 않는 이상 다시 자라날 풀이라면, 태경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혹하고 단호한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태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심지환은 아들이 자신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심지환도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다만 심지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인연을 쌓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 아들은 그런 충고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 태경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환 보기엔, 태경의 결혼 또한 그랬다. 회사 일도 그렇듯이, 결혼마저도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했다. 심지환은 며느리에 대해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기에 그저 조용한 아가씨라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며느리는 가정 형편은 다소 아쉽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올해는 왜 새아가가 안 보이는 거지?” “N시로 내려갔습니다.” “둘이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6화 태경 씨를 원망하지 않아요

    사랑은 태경이가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잠이 오지 않자 베란다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맞은편 이웃집은 이미 새로운 ‘입춘첩’을 붙여두었고, 문 앞에는 새로 장만한 복조리가 걸려 있었다. 사랑은 내일 자신도 명절을 맞아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 장식 스티커와 입춘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는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고, 늦게 잠든 데 비해 일찍 눈이 떠졌다. 오랜만의 한가로운 시간에 사랑은 근처 시장에 가서 여러 가지 창문 장식과 입춘첩을 사 왔다. 찹쌀풀을 만들어 대문과 창문에 하나하나 붙여 두었다. 붉은 색으로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면서 조금은 명절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바로 섣달이었다. 사랑은 또 슈퍼마켓에 가서 식재료와 자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꿀떡을 사 왔다. 비록 혼자 맞는 명절이지만, 최소한 스스로 초라해 보이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슈퍼마켓에서 돌아온 사랑은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묘지는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사랑은 매년 찾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겨우 방학 때만 와서 성묘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묘비 앞에 올려두었다. 두 노인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며, 사랑은 손을 들어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머니를 제외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사랑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분들이었다. 사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약 강남복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내가 없었으면,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를 아껴주었던 가족이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성묘를 마친 사랑은 눈이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5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송년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긴 연휴에 들어갔다. 법정 휴가보다 3일을 더 쉬게 되어, 10일까지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사랑은 간단히 짐을 꾸리고 N시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미리 예매해 두었다. 설 연휴라 비행기 표가 평소보다 구하기 어려웠고, 가격도 성수기 요금 수준으로 올라갔다. 출발 날짜가 임박해지자 사랑은 병원에 들렀다. 매주 주말이면 병실에 들러 여전히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비록 어머니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은 가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없는 위로를 전했다. 사랑은 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렇게 강제로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젠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기다릴 수 있었다. 설령 의사선생님은 포기하라고 해도 사랑도 그럴 수 없었다. 설령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그녀는 놓지 않고 싶었다. 오늘 사랑도 어머니의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희망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습니다.”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환자의 생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깨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어머니 남청연은 한때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한 사람이라 이미 생의 의지를 버렸을지도 몰랐다. 사랑은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견뎌내며 약간 창백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깨어나실 거라고 믿어요.” ‘엄마는 절대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아직 아버지의 죗값을 지켜보지 못하니까.’ ‘엄마가 이렇게 잠든 채로 나를 놓고 떠날 리 없을 거야!’ 사랑은 항상 상상했다. 어머니가 깨어나고, 모든 일이 끝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N시의 마을로 가서 조용히 살아가는 모습을. 의사는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4화 결혼기념일

    사랑은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더 강하게 말하면 태경의 인내심을 자극하게 될까 염려되었다. 태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사랑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체면을 지켰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혼이 나간 듯이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이 ‘특별한 서프라이즈’는 어디까지나 회사 여직원들의 투표로 정해진 것이었다. 태경이 거절해도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는 회사의 절대적 권한을 쥔 사람이니까. 사랑은 당첨된 쪽지를 손에 쥐고서 유럽 여행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삶은 엉망이었고,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태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 이걸 현금으로 바꿀 수 있나요?” 사랑은 얼마의 금액이 될 수 있는지 더 관심이 갔다. 태경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망인 듯 아닌 듯, 이런 식으로 돈을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이라는 눈빛이었다. “업무일에 인사팀에 가서 문의해봐.” 그는 오늘 사랑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살펴보며 눈빛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꽤 쏠쏠한 금액일 거야. 강 비서는 운이 좋네.” 사랑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태경의 거절로 인해 느꼈던 실망이 금세 사라졌다. “오늘 밤 운이 좋은 것 같네요.” 사실 그녀는 태경과 한 곡 추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춤을 잘 추지도 못했지만, 예전에 몰래 배운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태경이 세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춤을 추던 그날 밤, 둘은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다. 태경은 차갑고, 세영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사랑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두 사람의 춤을 흉내 내며 서투르게 따라 해보았다. 그러나 그 춤은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3화 행운

    사랑은 캐시미어 숄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노출된 피부를 잘 가렸기에 주변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호텔의 긴 복도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많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독점 기사를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ZP그룹의 대표 심태경은 연예계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네티즌들은 태경의 연애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사랑은 복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를 불렀지만, 주말 저녁의 도심은 언제나처럼 교통 체증으로 꽉 막혀 있었다. 사랑은 호텔 로비에서 차를 기다리며 조용히 인내심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성지호는 사랑에게 있어 마치 곤란하고 위험한 독사와 같았다. 지호의 날카로운 존재감은 그 순간 사랑의 혈관을 찢어버릴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호는 검은 정장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감춰진 날카로움이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고, 그 곁에는 위압감 넘치는 보디가드들이 항상 지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호가 풍기는 극도의 위압감은 누구도 지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은 지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래부터 엮일 필요가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지호도 나를 몹시 싫어했고, 나도 굳이 성지호에게 다가가서 불쾌함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호는 사랑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설령 본인이 싫어하면서도 사랑에게 다가와 느긋하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랑은 종종 궁금해졌다. ‘성지호에게 정말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까?’‘이 미친놈은 언제나 이런 감정 없는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강사랑, 여기서 뭐하고 있어?”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2화 심 대표님의 여자친구

    강세영은 자신이 꼭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태경도 그녀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태경은 세영의 성격을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편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는 여자였다. 오늘 세영은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고 나타났다. 섬세하게 화장을 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목구비 덕에 미소를 지으면 해사하고 무해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빨간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태경에게 질문했다.“오늘 밤 나랑 회사 여자 연예인들 중 누가 더 예쁜 것 같아?” 태경은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그 미소에서는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듣고 싶은 대답을 원해, 아니면 진짜 의견을 묻는 거야?” 세영은 그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당연히 네 의견이지.” 태경은 혀를 차며 웃었다. “네가 기분 나쁠까 봐.” 세영은 태경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데 익숙해져서 적당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걔들보다 예쁘지 않다는 거야?” 태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세영은 태경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약간 비음과 혀짧은 발음을 섞어서 말했다. 그녀는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에는 순수함과 진지함이 가득했다. “심 대표님, 오늘 밤 나는 당신의 파트너야. 내가 예쁘지 않으면 당신 체면이 떨어질 거라고.” 태경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네가 여기 있는 여자 연예인들보다 예쁜 걸로 하면 돼?” “심태경, 정말 성의 없어.” “네가 오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세상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고.” 세영은 태경의 옆에 서 있을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일말의 긴장감도 없이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오늘 안 왔으면, 누가 네 파트너로 왔을까?”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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