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엽은 힘껏 임설영의 목을 졸랐다.“네가 얼마나 죽어 마땅한 짓을 한 줄 알아? 감히 효연이를 찾아가? 임설영, 네가 죽고 싶어 환장했지?”임설영은 나엽의 서늘한 눈동자에 깜짝 놀랐다.목이 묶여 숨을 쉴 수 없었던 그녀는 힘껏 손을 뻗어 나엽의 손을 떼어내려 애썼다.“오빠, 이거 놔요... 나 진짜 죽을 것 같아요.”나엽의 입가에는 음산한 미소가 번졌다.그는 당장이라도 여자의 목을 부러뜨릴 듯 힘껏 졸랐다.숨을 쉴 수 없고 가슴이 답답한 느낌은 아주 괴로웠다. 가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그녀는 두 눈이 하얗게 변하더니 더욱 힘껏 나엽의 손을 떼어냈다.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고 그녀는 정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마치 사신이 앞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어머나!”남숙자는 부엌에서 나와 이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그녀는 손에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달려와 힘껏 나엽을 잡아당겼다.“이놈아, 왜 또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해? 이거 놔. 이러다 진짜 죽겠어. 그러면 넌 감옥살이 해야 한다고! 게다가 뱃속의 아이는 네 핏줄이야...”남숙자는 임설영의 생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가 신경 쓰는 건 오직 나엽이 살인죄를 얻게 되는 것이고, 또 임설영 뱃속의 아이였다!남숙자의 힘으로 나엽의 손이 느슨해졌고, 임설영은 기회를 잡아 힘껏 나엽을 밀어냈다.그녀는 재빨리 남숙자의 뒤에 숨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오늘 미친 사람처럼 자신을 죽이려던 나엽을 보며 용서를 빌었다.“나엽 오빠, 내가 잘못했어요. 효연 언니를 찾아가는 게 아니었어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제발,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줘요. 뱃속의 아기를 봐서라도...”나엽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는 섬뜩한 눈빛으로 임설영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남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비켜요!”남숙자는 당연히 비키지 않고 타일렀다.“나엽아, 오늘 설영이가 효연이를 찾아간 일은 나도 몰랐어. 알았다면 절대 못 가게 말렸지! 이건
남숙자가 말했다.“맞아.”그녀는 다시 망설이면서 나엽을 바라보았다.“아무리 친자식이 아니라고 의심되어도 몇 달 기다렸다가 아이가 조금만 더 컸을 때 검사하면 아이한테도 영향이 없을 것 같은데.”“의심하는 것이 아니에요.”나엽은 처음부터 만취된 그 날 저녁, 임설영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임설영이 정자를 바꿔치기했다는 사실을 듣고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비정상적인 수단을 통해 임신한 아이가 아닌가, 혹은 정말 자신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지금은 임설영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상황에 더욱 확신하여 말할 수 있었다.“설영이 배 속에 있는 아이, 백 프로 제 것이 아닙니다! 효연의 아이야말로...”나엽은 하마터면 안효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올 뻔했지만 그래도 다시 삼키기로 했다.그는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남숙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엄마, 다시 한번 말하는데 설영이 절대로 제 아이 임신할 일이 없습니다. 만약 저 아이가 엄마 손자라고 생각되신다면 알아서 챙기시든가요!”말을 끝낸 나엽은 임설영을 뿌리쳤고 임설영은 그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다에 떨어지게 되었다.“설영아!”남숙자는 재빨리 임설영을 바다에서 건져냈다.“어때? 배가 많이 아파?”나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이곳을 떠났다.이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임설영은 남숙자를 째려보더니 힘껏 밀쳐냈다.“이제 와서 손주를 관심하는 거예요? 아까 아드님이 저를 막 대할 때에는 어디서 뭐하셨어요?”임설영은 말하면서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남숙자를 발로 걷어찼다.고통스러움에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임설영이 괴로워하면서 움츠려 앉는 모습을 보았다.“아파...”임설영은 창백한 얼굴로 너무도 아픈 나머지 남숙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사모님, 저 배가 너무 아파요.”이 시각, 나엽은 온몸이 젖은 채로 병원으로 돌아갔고 안효연은 이미 깨어있는 상태였다.“효연아.”나엽은 다가오더니 병실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비를
안효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나엽을 쳐다보았다.나엽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더니 맹세하면서 말했다.“정말이야, 여보. 난 정말 설영이를 건드린 적이 없어.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그 누구의 아이라고 해도 절대 나랑은 아무런 연관이 없어.”“풉!”안효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더니 나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난 믿어.”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늘 나엽을 믿고 있었다.저녁 내내 비가 그치지 않았고, 다음 날 해가 밝아지자 하늘은 거짓말같이 맑아졌다.안효연은 3일 동안 입원한 뒤 나엽과 함께 퇴원하여 안 씨 가문으로 돌아갔다.임설영은 유산할 뻔했지만 그래도 아이를 지켜내고 말았다.남숙자는 병원에서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면서 곤란한 상황을 피할 수가 없었다.안효연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자신을 위해 귤을 까주는 나엽을 바라보았다.“임설영 아이 유산되지 않았대.”“응.”나엽은 담담하게 대답할 뿐 계속해서 귤에 붙은 하얀 실까지 벗겨 안효연에게 한 조각먹여주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마치 남 일처럼 말했다.“유산되지 않았든 유산되었든, 낳을지 말지는 알아서 하겠지. 나랑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나엽은 또 깨끗이 정리한 귤 한 조각을 안효연에게 먹여주면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 있게 말했다.“나중에 친자확인서 하나로 나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 거야.”안효연은 피식 웃더니 물었다.“임설영이 임신한 아이가 당신 것이 아닌데 왜 어머니한테 잘 설명하지 않았어?”“설명했는데도 안 믿어.”나엽은 말하면서도 계속 안효연에게 귤을 먹여주었고 온화하게 웃더니 또 말했다.“엄마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어. 자신의 귀한 손주라고 생각되면 임설영을 알아서 돌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지 뭐.”“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임설영한테서 고생을 해봐야 이 며느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아시게 될 거야. 그래야 나를 더 잘 아껴주겠지.”안효연이 또 물었다.“내가 임신한 사실을 어머니한테 알려줄 거야?”나엽은 고개를 흔들었다.“아직
감정하나 없는 대답 끝에 윤성아는 문서를 건네려는 비서인 줄 알고 문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사무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윤성아는 계속하여 이마를 짚으면서 말했다.“놓고 가세요, 이따 확인할 테니.”“성아야.”한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눈을 떠 확인해보니 양준회였다.“어떻게 오셨어요?”양준회는 마치 친오빠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밥은 제때 챙겨 먹고 있는지 궁금해서. 딱 보니 제때 안 챙겨 먹었네.”윤성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상황이 너무 엉망이어서 먹을 시간도 없어요.”“그래, 엉망이긴 하지. 근데 소영아, 이번 일은 한연 그룹뿐만 아니라 태운 그룹에도 책임이 있는 거잖아. 네 능력도 믿어보고,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도 믿어봐. 그러니까 밥은 꼭 챙겨 먹고.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고 하잖아. 밥을 안 먹고 무슨 힘으로 해결하겠어?”양준회는 밖에서 윤성아와 함께 밥을 먹고 싶었지만, 그녀는 피곤했는지 거절을 하고 말았다.“됐어요.”윤성아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있는 처리해야 되는 문서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이따 비서님께 먹을 것 좀 사 오라고 해서 대충 몇 입 먹으면 돼요.”하지만 양준회는 그래도 대충은 없다면서 윤성아와 밖에서 밥을 먹으려고 고집을 부렸다.“나랑 태운 그룹이 있으니 안심해도 된대도. 이번 사건은 완벽하게 해결될 거야.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지금 해야 될 것은 밥을 꼭꼭 챙겨 먹는 것뿐이야.”양준회는 잘생긴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짓더니 윙크를 날렸다.“이것 또한 나나가 나한테 부탁한 미션이기도 해!”할 말을 잃은 윤성아는 어쩔 수 없이 양준회와 함께 밖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하지만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자리에 앉자마자 꾸벅 잠들다 앞에 놓여있던 찻잔을 건드려 옷을 적시고 말았다.양준회는 옷을 닦는 윤성아에게 휴지를 건네면서 관심스레 물었다.“괜찮아?”“괜찮아요.”윤성아는 민망해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이따 회사로 돌아가서 다른 옷으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그녀가 말을 붙혔다.“언제 돌아왔어요?”“어젯밤에.”강주환은 얼굴이 시커멓고 삐진 듯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들어왔지만, 윤성아는 그의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무슨 일 있어요?”강주환은 대답이 없었다. 사실 그는 윤성아가 자신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문제는 윤성아가 강주환이 화가 났는지조차 모르는데, 무슨 설명을 할 생각이나 하겠는가?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윤성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빠르게 씻고 옷만 갈아입고 아침도 거르고 출근했다.오후쯤 되어 윤성아는 양준회를 마주치게 되었고 그가 안부를 물어왔다.“어젯밤, 별일 없었어?”윤성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어젯밤에 왜요?”양준회는 윤성아에게 어제저녁에 있었던 모든 상황을 설명해줬다.“어젯밤에 성아, 너를 회사로 데려다 주려고 했는데, 되게 피곤했는지 차에 타더니 바로 잠들더라고. 그래서 우리 아파트로 데리고 갔지. 잠에 깊이 들어갔고 강주환 씨가 걸어 온 전화를 못 받았어. 계속 울려서 내가 받아주려했는데, 배터리가 다 되어서 전화기가 꺼지더라고.”그는 어젯밤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 변화에 대해서도 다 말했다. 양준회는 윤성아의 옷차림으로 자는 게 불편할 것 같아서 이웃집에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고 윤성아가 입고 있던 젖은 옷을 흰 셔츠로 갈아입혔다.“걱정하지 마.”양준회는 일말의 오해라도 생길까 봐 얼른 윤성아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입고 있는 셔츠는 내 것이긴 하지만 새것이야. 한 번도 입지 않은 새것.”아침에 강주환의 뾰로통한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다 싶더니 그게 다 오해에서 비롯된 질투심이 발작한 것이었음을 윤성아는 그제야 알아챘다. 양준회가 물어왔다.“그래서 어젯밤엔 별문제 없었지? 강주환 씨랑...”“네, 그럼요.”윤성아는 보조개를 그려 미소를 띠고는 강주환을 지키려는 듯이 답했다.“질투도 많고 가끔 짜긴 해도, 그 사람 저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어제 우리 별일 없었잖아
윤성아는 차갑고 매서운 눈빛으로 카메라를 쳐다보고 기자와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에 대한 비방을 게시한 행동에 대해서 저는 법적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윤성아가 모든 것을 얘기한 그때, XC 그룹의 이사 에릭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가 선포한 말을 받들었다. “XC 그룹은 인터넷에서 사실 확인 없이 아무렇게나 윤 대표님께 상처가 되는 글을 적은 당사자를 전력을 다해 찾아내고 변호사 선임해서 법적 절차를 밟을 예정입니다.”안진강와 서연우도 딸을 지지했고 둘은 딸이 어릴 때 다른 아이와 바뀌어 인생이 바뀌었고, 어렵게 안씨 가문에 돌아 온 모든 정황을 얘기했다. 나엽과 안효연도 간담회 현장에 나타났고 나엽은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윤성아와 안효연은 쌍둥이입니다. 둘은 똑 같이 생겼고, 그래서 처제 윤성아와 알게 되였지만, 결코 그런 말도 안 되는 있어서는 안 될 관계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안효연 한 사람입니다!”나엽과 안효연, 둘은 충무로에서 내로라하는 최고 배우인지라 둘의 영향력은 전례 없이 컸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나엽은 매니저와 스캔들도 있었는데, 지금 둘은 또 동시에 일하지 않고 있었다. 기자들이 금방 나엽과 안효연의 스캔들에 관련된 뉴스를 발굴하려고 관심을 이쪽으로 돌렸다. 하긴 한연 그룹 안 대표의 스캔들은 거의 다 해명되었고 한연 그룹의 위기가 잘 넘어가면 이후 한연 그룹의 주식이 폭증하는 상황이 나타날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두 최정상 배우의 뉴스가 더욱 중요했다. 근데 이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기자회견장 문이 누군가에 의해 벌컥 열렸다. 바로 양준회가 오유선을 끌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그는 오유선을 윤성아의 앞으로 데려갔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띠었고 오유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하는 목소리는 가랑비와 같이 부드러웠다. “말해.”오유선은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고 윤성아를 향해 허리 숙여 90도 경례했다. “죄송합니다...”모두 서로 쳐다보며 이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며칠 출장 간 사이에 당신이 이렇게 일 때문에 힘들어서 쓰러질 줄 알았다면 그냥 한연 그룹을 우리 회사에서 인수해 올 걸 그랬어. 당신은 집에서 애들을 돌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낫겠어.”강주환은 자신이 말한 방법이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실행하고 싶었다. 만약 한연 그룹을 인수해 온다면 자신의 여자가 더는 몸을 혹사하며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 이렇게 쓰러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여자가 한연 그룹 대표가 아니게 된다면 양준회와 만날 기회도 적어질 것이다. “그러기만 해봐요.”그녀는 나타났다 하면 자신을 화나게 하는 남자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왜 왔어요? 혹시 한연 그룹을 인수하기 위해서 온 거라면 그만 나가요.”윤성아의 냉랭한 태도에 놀란 강주환은 그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한 후로 이 여자가 이렇게 냉담한 태도로 자신을 대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한가지 가능성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당신, 혹시 마음이 변한 거야?”강주환은 냉수마찰을 한 것처럼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순식간에 두려움이 몰려왔다.“설마 당신 정말 양준회에게 마음이 생긴 거야? 그래서 그 자식이랑 같이 있기로 한 거야?”윤성아는 뾰족하게 노려보며 말했다.“당신은 제가 준회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강주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주환은 윤성아가 양준회의 침대에서 잠을 자고 그 남자의 셔츠를 입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 그 일은 계속해서 강주환의 마음에 남아 있었고 언젠가 윤성아가 자신에게 해명해 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호진 그룹에 일이 터지고 급하게 영주시로 돌아가게 되면서 결국 그녀에게서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이번에 회사에서 생긴 일은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출국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윤성아에게는 화난 마음이 남아 있어 그녀에게 전화 한 통 남기지 않고 떠났다. 해외에 있는 며칠 동안 그녀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당시의 자신을 회억하며 강주환은 말을 이었다.“그때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그는 그때 죽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스러운 눈길로 윤성아를 쳐다보며 말했다.“그때쯤에 하성이가 내 곁에 오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나한테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되어 주었어. 그렇게 살아 있었기에 결국엔 네가 나한테 왔잖아.”윤성아는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이때, 그가 새까만 눈동자로 윤성아를 쳐다보며 말했다.“성아야, 그날 밤에는 왜 양준회의 옷을 입고 그 집 침대에서 잔 거야?”그는 여전히 그날 밤의 일에 마음이 쓰였다. 윤성아는 눈을 흘깃했지만, 자세하게 그날의 일에 관해 설명했다.“그날 야근하고 있는데 준회 씨가 찾아와서 같이 저녁을 먹었어요.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저도 모르게 차에서 잠들었어요. 그걸 보고 준회 씨가 힘들어 보인다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거에요.”“옷은 그날 저녁 음식을 먹다가 옷에 튀었는데 그대로 재울 수가 없어서 옆집에 계시던 여성분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더라고요. 옷은 그분이 입혀주신 거예요. 그날 준회 씨 셔츠를 입은 건 맞지만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이었어요.”상황설명을 끝내고 윤성아는 또 한 번 강주환을 째려보았다. “제가 말했잖아요. 준회 씨는 정직하고 바른, 신사 같은 사람이에요.”강주환은 양준회가 신사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강주환은 신사가 아니었다. 자신의 여자 앞에만 서면 그는 고집스럽고 소심한 사람이 되었다. 다른 남자들이 이 여자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강주환은 그저 남자친구에 불과했다. 그것도 아직은 제대로 허락받지 못한 절반 짜리 남자 친구였다. 그는 자신이 윤성아에 대한 요구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잘 달래며 최대한 윤성아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바래야 했다.“성아야, 양준회 사장이랑 거리를 두는 게 어때? 나...”강주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성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안돼요. 강주환 씨, 다시 한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