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30분쯤 기다렸을까? 고유정은 시간을 확인한 뒤 리모컨을 내려놓고 2층으로 올라갔다.고유나의 방 앞에 선 고유정이 문을 두드렸다.“유나야, 나 들어가도 돼?”약 때문에 이미 정신을 잃었을 게 분명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유정은 유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괜히 함부로 들어갔다가 고유나가 아직 깨어있으면 제멋대로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며 또 난리를 칠 게 분명하니까.“유나야?”고유정이 한 번 더 고유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유나가 이미 정신을 잃었음을 확인한 뒤에야
“물론이죠.”윤슬의 반응에 고유정 또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감사합니다. 그럼 녹음 파일은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아니에요. 잠깐 나올 수 있을까요?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죠. 고유정 씨한테 묻고 싶은 것도 있고요.”“알겠습니다.”윤슬의 말에 고유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시간을 확인한 윤슬이 말을 이어갔다.“오후 1시, 한식당 수라간에서 만나죠.”통화를 마친 윤슬은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기사님, 한식당 수라간으로 가주세요. 감사합니다.”“네, 알겠습니다.”잠시 후 한식당에 도착한 윤슬은 구석 즈음에 자리를 잡
갑자기 알게 된 사실에 고유정은 당황하기 시작했다.윤슬이 왜 진짜 고유정인지, 윤슬과 고씨 일가 사이에 도대체 어떤 원한이 있는지 모르는 고유정에게 윤슬의 진짜 신분은 충격 그 자체였다.윤슬이 진짜 고유정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가짜 고유정일 뿐인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윤슬이 그녀에게 고유정 연기를 맡긴 건 분명 스스로도 자신이 윤슬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일 터, 만약 윤슬이 알게 된다면 아마 이 연극도 그만두라고 할지도 모른다.적어도 그녀라면 멀쩡히 본인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기 흉내를 내라고 하지 않을 테
고유정의 설명에도 윤슬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정말 괜찮은 거 맞죠?”“네. 이제 어지러운 건 많이 나아졌어요. 저 혼자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고유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윤슬도 자연스레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고맙습니다.”고유정 또한 윤슬의 어깨에 감았던 팔을 스르륵 풀었다.“악!”그런데 이때 윤슬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던 고유정의 눈이 커다래졌다. 고유정의 반지에 윤슬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끼인 채 떨어나왔던 것이다.깜짝 놀란 듯한
그런데 오늘 딸이 먼저 다가와주니 그 동안 들인 노력이 성과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속 한켠이 따뜻해졌다.“갑자기 이러는 거 아니에요. 사실... 가족들이랑 다시 만났을 때 반갑고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놀라운 마음이 더 컸어요. 이렇게 촌스러운 제가 재벌 2세였다는 게 믿겨지지도 않았고요. 그리고 유나도 절... 싫어하는 눈치고. 그래서 왠지 더 주눅이 들어서... 엄마도 절 그렇게 생각할까 봐 차마 다가가지 못한 거였어요.”채연희의 어깨에 기댄 고유정의 말에 채연희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럴 리가. 딸 싫어하는
“이렇게 빨리?”“네.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요. 별로 힘 안 들이고 바로 손에 넣을 수 있었어요.”윤슬이 끄덕이고 수화기 저편의 부시혁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도와주는 사람이라면... 아마 가짜 고유정을 말하는 거겠지.가짜 고유정은 윤슬과 성준영이 고씨 일가에 심은 스파이, 지금 고유나는 두문불출하고 있으니 윤슬이 직접 고도식의 집으로 쳐들어가지 않은 이상 녹취 파일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가짜 고유정뿐이었다.“그래. 일단 먼저 경찰서로 가. 난 그 사건에 참여한 두 사람 전부 경찰서로 보낼 테니까.
장비서가 병실을 나가고 부시혁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윤슬에게 전화를 걸면 좋을까 문자를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그는 결국 문자를 선택했다.“장 비서가 그 두 사람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어. 조금만 더 기다려봐.”한편 경찰서 복도 의자에 앉아있던 윤슬은 핸드백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바로 휴대폰을 확인했다.그리고 문자 내용을 확인한 윤슬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네, 고마워요!”“아니야. 그리고 그 두 사람... 경찰에 보내기 전에 내가 좀 손 봐줬어.”손 봐줬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뭘 어떻게 했는데요.”“도
장 비서가 그녀의 뒤를 따르고 윤슬이 취조실 문을 두드렸다.아직 구속 영장이 내려지지 않은 탓에 윤슬은 신고자로서 용의자를 만날 자격이 있었다.취조실에 들어간 윤슬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오전까지 멀쩡하던 남자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상태. 두 다리는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고 휠체어에 탄 모습이었다. 호텔 직원 유니폼을 입고 있는 직원도 그 꼴이 처참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팔 모두 깁스를 한 상태였으니까.한 사람은 두 다리, 다른 한 사람은 두 팔이 부러졌다. 이게 우연일 리가 없겠지.게다가 오전까지는 멀쩡하던 사람들이
“당연히 그런 일에 관한 거지!‘이 구제불능과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도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는데 부시혁은 이것마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골치 아파.처음에 부시혁이 보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들도 충분히 이상한데.거기서 배운 게 아니면 이 구제불능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어?’윤슬이 말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인 선생님이라는 뜻이었다.‘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불경스럽다니.’“그만 좀 해요, 부
부시혁의 이런 눈빛을 볼 때마다 윤슬은 마음이 굉장히 평안해졌다. 그녀는 부시혁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부씨그룹의 대표 말고 선생님이 되면 틀림없이 학생들에게 엄청 환영받는 선생님이 될 거예요.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은 바로 당신처럼 학생들에게서 잘못을 찾지 않고, 학생들에게 맞추는 선생님이라구요.”부시혁은 윤슬의 머리를 만지며 가볍게 웃었다.“어쩌지? 나는 선생님 되는 건 별로야. 그냥 너만 가르치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선생님이 아니야.”이 말이 너무 웃겨서 윤슬은 자기도
그렇기 때문에 윤슬은 반드시 공부하고 더 공부해서 더욱 강하고 더욱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책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천강그룹 경영에 대한 책임이며 천강그룹의 수백 수천의 직원들에 대한 책임이다.그렇지 않으면 천강그룹이 무너지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생존해야 하는 이런 종업원들 또한 앞길이 막막해진다.그래서 윤슬은 부시혁이 자신을 가르치겠다는 제의에 매우 감격하고 기뻐하며 기대했다.필경 부시혁과 같은 수준의 인물이 자신을 가르치게 되면 자신은 꿈에서도 좋아서 웃음이 나와 마땅하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이 점은 틀림없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그런 학생들과 윤슬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부시혁에게 윤슬만큼은 예외였다.윤슬을 대할 때 부시혁 역시 평소와는 달리 늘 부드러운 남자였다.비록 이 순간 잠시 윤슬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지만 부시혁은 여전히 온화하고 꽤 인내심을 발휘했다.부시혁에게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윤슬은 배운 내용을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해서 부시혁이 자신을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인내심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했다.부시혁이 그다지 훌륭한 인내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잘
부시혁이 말했다.윤슬이 웃으며 말했다.“당신에게 알려준다는 걸 깜빡 잊었네요. 고택에 가져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부시혁이 윤슬이 이마를 살며시 눌렀다. 부시혁에게 윤슬의 이 말은 무엇이든 잊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듯했다. “대체 얼마나 큰 뼈길래, 이모께서 직접 친정이 있는 곳까지 가서 구해오신 거야? 우리도 사고 싶다고,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부시혁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돌리며 호기심을 표시했다.‘혹시 야생동물의 뼈는 아
윤슬이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부시혁을 향해 말했다. 부시혁은 자신이 윤슬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윤슬이 분명 본인의 마음대로 행동할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윤슬을 확실히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과 같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지라도, 윤슬은 부시혁으로 하여금 어떠한 이득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하면 되잖아!”부시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윤슬의 사무용 의자에 앉았다. “이제 됐지?”“됐어요.”윤슬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하지만, 이처럼 윤슬의 허락을 구한다는 것은 부시혁이 윤슬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천강그룹에 대한 존중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부시혁은 회사의 규묘가 작다는 이유로 천강그룹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시혁은 윤슬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윤슬의 말을 듣고는 낮은 웃음을 지었다.“왜 천강그룹이 나한테 가치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당신이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천강그룹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곳이지.” 갑작스러운 부시혁 말에 얼굴이 붉어진 윤슬이 부시
윤슬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를 알아차린 부시혁이 윤슬을 놀렸다. “왜? 난 여기 올라오면 안 돼?”“아니에요.” 윤슬은 다가가서 부시혁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우리 천강그룹에 오면 직원들이 나보다 당신을 더 친절하게 대하는 거 알아요? 오죽하면 내가 당신이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도, 직원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정도예요. 물론 당신이 몰래 올라오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내가 당신을 올라오지 못하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무 소용 없지.”부시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전화 너머에서, 윤슬이가 박희서를 언급하자 육재원의 얼굴은 삽시에 굳어졌다.윤슬이 말한 자신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그 이야기가 바로 박희서에 관한 것이었다니. 육재원은 조금 듣고 싶지 않았다.육재원이 침묵하자, 윤슬은 자신이 박희서를 언급한 것이 육재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을 알고는 한숨을 쉬었다.“재원아, 박 비서가 해외로 연수를 간다는 걸 알고 있었어?”물론 윤슬은 이렇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는 육재원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재원의 예상외 대답은 윤슬을 놀라게 했다.“알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