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서지현이 취해서 말했다.“나 할 말이 있어요...”“무슨 일이 있으면 내일 이야기하자.”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너 지금 술을 많이 마셔서 먼저 돌아가서 푹 자야 해.”“안 돼요! 내일이면 늦어요. 내일 떠나잖아요!”서지현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술이 들어가면 용기가 생긴다는 말은 틀림없다.평소의 서지현이라면 절대로 그에게 이렇게 가까이 가지 못한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술기운에 그의 가슴에 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방으로 밀어 넣고 작은 발로 문을 걸어 잠갔다.나석진은 그녀에게 멀리 떠밀렸고 몸도 균형을 잃었다.두 사람은 큰 침대 위에 뒤엉켜 있었다...특히 이 자세 때문에 나석진은 깜짝 놀랐다.여자가 위에 있다...이 각도에서 그 아름다운 혼혈의 얼굴은 더욱 화려하고 다채로워 보인다.공기는 순식간에 굳어 시간마저 멈췄고 침묵의 공간에서는 평소와 다른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서지현이 웃자 꽃이 피어난 것 같다.“지... 지현아.”“아저씨.”그녀의 목소리는 솜사탕 같았다.“잠깐만 말하지 마세요. 아저씨가 말하면 꿈이 깰 수 있어요...”“무슨 소리야?”“쉿!”그녀는 작은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꿈속에서만 나는 내 마음을 말할 수 있어요. 내가... 아저씨라고 부르지만 정말 그렇게 늙지 않았어요... 그리고 또 잘생겼어요! 아저씨는 돌아가면 나를 기억할 거예요? 나는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서지현이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힘껏 눌렀다.“아저씨를 여기에 놓을게요!”나석진은 그 부드러운 것을 만지자 온몸이 감전된 것 같았다.이성은 그에게 얼른 손을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지만 몸은 그녀가 자기 손을 잡게 내버려두고 미련이 남았다.“아저씨...”서지현은 천천히 몸을 숙여 그의 코끝을 스쳤고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나는 아저씨를 좋아해요.”이 몇 마디의 말이 나석진의 마음을 두드렸다.서지현은 웃고 있었지만 큰
다음 날 아침 서지현이 힘들게 눈을 떴고 머리가 텅 비어 깨질 듯이 아팠다.정신을 차리고 간밤의 일을 간단하게 되새겨보았다. 강서연에게서 나온 뒤로는 기분이 좀 가라앉아 술을 사고 싶었지만 나이가 되지 않아 살 수 없었고 그러다가 옛 이웃과 마주쳤다.친절한 집시 아저씨가 그녀에게 맥주를 주었고 그녀는 길가에 앉아서 마셨다.그다음엔...어떻게 호텔로 돌아왔지?기억 속에는 카드키를 긁은 것 같다.하지만...그녀는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떴다.이 방의 인테리어는 그녀의 방과는 다르다!이 베개에서 나는 은은한 향은 나석진이 자주 사용하는 그 애프터셰이브의 냄새다!그리고 그녀는... 나석진의 침대에 누워있다!“앗!”서지현은 비명을 질렀다!망했다, 이제 다 끝났다! 어제 분명히 꿈속에서 나석진과 잤다. 꿈속에서는 어떤 금기도 없고 자유라고 생각하여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다 하였다!근데... 그건 꿈이 아니었다!서지현은 후회막심하여 머리를 힘껏 쥐었다.그녀는 도둑처럼 이리저리 보는데 나석진은 방에 없는 것 같았다.그럼 이번 기회에 얼른...서지현이 입술을 깨물며 침대에서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나석진은 잠옷과 슬리퍼 차림으로 들어왔고 허니 레몬워터 한 잔을 들고 있었다.서지현은 그를 보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나석진은 그녀의 술을 깨우고 어젯밤 일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려고 왔다.그러나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우스워서 갑자기 장난스러운 생각이 들었다.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물컵을 침대 머리맡에 놓고는 침대에 앉았다.“깼어?”서지현은 주눅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는데 거의 보이지 않았다.“이거 마셔. 숙취 해소제야.”서지현은 물컵을 한 번 보고 또 그를 한 번 보고는 작은 손으로 이불을 비비며 속으로 긴장했다.어젯밤에도... 이 잠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주단 재질의 옷깃을 열어젖히고 섹시한 가슴살을 드러냈다.서지현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그녀가 어떻게 그
여진국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손미현을 끌고 와서 인질로 삼았다.최연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여진국, 정말 외숙모를 이용해서 나를 협박할 수 있을 것 같아?”“너를 위협할 수 없지만 너의 집에 있는 바보는 위협할 수 있어!”최연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여진국은 자신의 범죄 증거를 최연준이 이미 확보해 경찰에 넘겼다는 사실을 몰랐다. 손미현이 쥐고 있던 증거는 사실 없어도 그만이었다.남양에서 온 사람들이 총을 들고 그와 대치했다.“총을 내려놓으라고 해!”여진국이 소리쳤다.“안 그러면... 이년을 쏴버릴 거야!”“연준아! 연준아!”저 멀리서 한바탕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김성주가 허둥지둥 달려왔는데 최연준이 막자 그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뭐 하는 거야! 다 총을 내려놓으라고 해! 네 외숙모가 아직 이 사람 손에 있잖아!”최연준은 냉랭한 기색으로 그를 한번 보았다.그가 사람을 시켜 김성주를 데려오게 했다.이런 일은 반드시 본인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한다.“여보...”손미현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혼절할 뻔했는데 김성주를 보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여보, 빨리 나를 살려줘. 나... 안 돼...”“내 아내를 놓아주세요!”김성주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제발. 미현이를 놔주면 돈을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연준아! 제발 미현이를 살려줘. 임신하고 있잖아! 내 아들, 내 아들...”김성주는 땅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안고 울었고 하마터면 최연준에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뭐라고?”여진국은 충격을 받았다. 그제야 손미현의 다리 사이 피가 어디서 난 것인지를 알아차렸다.‘임신한 거였어?’“이게 무슨 일이야!”그는 손미현의 머리채를 세게 잡아당겼다.“이 바보의 자식을 임신했어? 나랑 잤을 때도 이 바보를 시중들었어?”김성주도 놀라 멍하니 손미현을 바라보았다.“여보, 저 사람... 뭐라는 거야?”손미현은 흙덩어리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얼굴에 핏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외삼촌.”최
이게 바로 그녀가 그에게 주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여진국...”손미현이 이를 꽉 깨물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쌤통이야! 당신은 내 감정을 가지고 놀았고 내 돈을 사기 친 것도 모자라 내 딸에게까지 몹쓸 짓을 했어. 허, 하늘도 절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대가 끊어지게 만들 거라고. 방금... 당신이 날 걷어찬 바람에 이 아이 더는 지킬 수 없게 되었어. 당신 아이를 죽인 건 당신이야, 당신이라고!”여진국이 포효하며 총을 들었다. 그가 총을 쏘려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더니 총알이 여진국의 손목을 정확히 조준했다. 여진국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졌고 시뻘건 피가 사방에 튀었다.손미현은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겼다. 그런데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바람에 그만 급류에 휩쓸려가고 말았다...난투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경찰이 재빠르게 현장을 통제했다.최연준과 김성주는 경호원과 함께 무사히 그곳을 떠났다.가는 길 내내 김성주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삼촌.”최연준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를 불렀다. 그런데 김성주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빛이 생기를 잃었고 입을 살짝 벌린 채 가끔 몸을 파르르 떨곤 했다.“삼촌, 이러지 말아요.”김성주의 모습에 최연준은 너무도 속상했다. 위로하려고 김성주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김성주가 화들짝 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마치 죽음이 임박한 동물의 처참한 울부짖음 같았다.“삼촌, 무서워하지 말아요.”최연준이 다급하게 위로했다.“저예요, 연준이. 제가 계속 옆에 있을게요...”김성주는 슬픔에 겨워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왜, 대체 왜!”“삼촌...”“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김성주는 자신의 가슴팍을 가차 없이 두드렸다. 최연준이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김성주가 다치지 않게 손을 꼭 잡아주는 것뿐이었다.“연준아...”김성주는 입을 벌린 채 엉엉 울었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내가 정말 그렇게 바보야?”최연
김유정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횡설수설했고 휴대 전화를 들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진작 드레스까지 준비했다. 디자이너의 한정판 고가 드레스라 지금까지 아까워서 입지 않았다. 드디어 그 가치를 발휘할 기회가 생겼다.이튿날 제작 발표회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김유정은 집을 나서기 전에 요즘 아파트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여진국도 찾아오지 않았고 집안의 도우미와 운전기사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아파트에 그녀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는데 마치 무인도에 버려진 것만 같았다.김유정은 대문을 내선 후 심호흡을 크게 했다. 길거리에는 평소처럼 사람이 거닐었고 이 세상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단지 여진국에게 버림받은 거겠지...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역시 남자를 믿어선 안 돼.’하지만 여진국이 이미 투자했기에 김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을 맡았으니 반드시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이참에 예전에 그녀를 업신여겼던 사람들을 전부 자신의 발아래로 짓밟아버리겠다고 다짐했다.김유정은 웃으며 휴대 전화를 꺼내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무심결에 앨범을 뒤졌는데 영상 하나를 발견했다.곽보미는 영상 속의 이 혼혈인을 무척이나 눈여겨보았다. 그날 촬영 현장에서 곽보미는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찍으면서 어떻게 찍어도 다 예쁘다고 칭찬했었다.그때 김유정도 과연 진짜 그러한지 궁금하여 가장 까다로운 각도를 골라 이 영상을 찍었다. 그런데 영상을 보던 김유정이 눈살을 찌푸렸다.‘이름이 뭐였더라? 서지현?’“허, 네까짓 게 감히 나한테 덤벼?”그녀는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멈췄다.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그때 콜택시가 도착했다. 김유정은 정신을 차리고 차에 올라탄 후 제작 발표회 현장으로 향했다.제작 발표회의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유럽 영화계의 선배들이 자리를 빛내주러 왔다.곽보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기자들 앞에서 열심히 홍보
그런데 주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유정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다행히 주아가 민첩하게 뒤로 두 걸음 물러난 덕에 맞지 않았고 되레 김유정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히스테릭한 비명을 질렀다.기자들은 그 모습을 놓칠세라 카메라 셔터를 끊임없이 눌렀고 라이트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이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곽보미가 비서에게 눈짓하자 대형 스크린에 미웨이 엔터테인먼트의 장부 내용과 여진국이 갖고 있던 1억 유로의 출처, 그리고 여진국이 체포됐다는 내용이 그대로 나타났다.“기자 여러분, 발표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곽보미는 엄숙하면서도 침착하게 말했다.“김유정 씨가 영화에 투자하고 합류하면서 이번 새 영화의 여자주인공이 될 거라는 소문이 계속 돌았어요. 오늘 이 소문의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김유정 씨가 투자와 함께 들어온 건 맞아요. 하지만 그 1억 유로는 사실 범법자를 도와 돈세탁을 하는 것이었어요. 저 곽보미는 도덕성이 있는 사람이기에 불법 자금을 그대로 상납하여 경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도록 하겠습니다.”김유정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어두운 지옥에 빠진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곧바로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고 김유정은 구속 수사를 받게 되었다.그사이 김씨 가문에서는 최고의 변호사 군단과 홍보팀을 동원하여 이 일로 인한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였다.다행히 김중 그룹의 주가는 내려가지 않았다. 되레 여진국을 잡는 과정에 공을 세웠다고 주가가 꽤 올랐다.한차례 폭풍이 휘몰아치고 난 뒤 드디어 잠잠해졌다. 심한 충격을 받은 김성주는 예전보다 말수가 확 줄었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김씨 가문 영감은 최연준과 강서연에게 환경이 바뀌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른다면서 강서연이 아이를 낳은 후에 김성주를 데리고 오성으로 돌아가라고 했다.윤찬은 김성주의 모든 병력을 복사한 자료를 챙기고 남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누나, 매형, 걱정하지 말아요.”가기 전 윤찬이 웃으며 말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러니까... 만일이라고 하잖아요, 만일.”강서연이 최연준을 보며 말했다.“만약 만나면 어떡할 거예요?”최연준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무슨 일이든 만약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여자가 한 가설에 빠지게 되면 머릿속에 사랑과 원한에 관한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는데 아마 곽보미도 이런 막장은 만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이라는 질문을 회피해도 결과는 아주 심각할 것이다.최연준이 피식 웃었다. 인제 이런 질문에는 육경섭보다 경험이 훨씬 더 많았다. 고작 이런 쉬운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을 리가 있겠는가?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그럴듯하게 물었다.“만약 만난다면? 그럼 난 그 사람과 어디서 만났는데?”“그러니까...”강서연이 두 눈을 깜빡였다.“그냥 우연히 아무 곳에서 만났어요.”“당신 남편이 아무 곳에나 갈 사람이야?”“그럼... 그럼 길에서 만났다고 해요.”“당신 남편은 항상 차를 몰고 다녀서 길에서 막 한가롭게 돌아다니지 않아.”강서연이 웃음을 터트렸다.“두 사람 차가 서로 부딪쳤어요.”그녀는 최연준의 함정에 이미 빠졌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점점 주제를 벗어났다.최연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그 사람이 내 차를 박았어?”강서연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자 최연준도 바로 정색했다.“그럼 경찰에 신고해야지. 대체 운전면허를 어떻게 땄기에 길에서 그런 식으로 운전하는 거냐고 따질 거야.”강서연은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 그 사람 과실이 100%니까 내 차도 물어줘야 해.”“여보?”“그리고 변호사도 부를 거야. 만약 돈을 물어주지 않는다면 소송까지 가야지. 집이 망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 거야.”“아니, 그게 아니라요.”강서연은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대체 어쩌다가 이 화제로 넘어온 거지?’최연준의 입가에 우쭐거리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런데 강서연이 고개를 들자마자 딱 걸리고 말았다.“옆으로 새지 말고요. 그냥 그런 여자를 만나면 어
하나는 강서연의 출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성주의 병세에 관해 연구하기 위해서였다.“아빠, 어때요?”강서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윤정재가 수심에 찬 얼굴로 고개를 내젓자 최연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최선을 다해서 치료해 보도록 할게.”윤정재가 그들을 보며 말했다.“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런 병은 짧은 시간 내에 치료할 수 없어. 그리고 약물 치료만 하는 것도 부족해. 다른 재활 훈련도 병행해야 해.”“네.”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장인어른.”윤문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실 어릴 적에 성주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네 엄마가 날 찾아왔었어. 그때는 우리 아버지가 성주 병을 봐줬었거든. 우리 할아버지도 함께 도왔지만 치료하지는 못했고 그저 성주의 증상이 더 악화하지 않게만 할 뿐이었어. 정상인으로 회복하는 건 아마 매우 어려울 거야.”“악화하지 않는 것만 해도 아주 다행인 거야.”윤정재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뇌를 다친 건 의학계에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최연준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비록 속상하긴 했지만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면 삼촌이 김씨 가문에서 태어난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가 평생 누린 부귀영화는 일반인은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김성주가 아무리 지적장애를 가졌다고 해도 풍요롭게, 그리고 무사하게 평생 살 수 있다.“장인어른, 장모님, 이번에는 맨체스터에 오래 머무르세요.”최연준이 가볍게 웃었다.“옆에 작은 별장이 있는데 처남이 왔을 때 거기서 지냈어요. 두 분 서연이와 함께 지내고 싶으시면 도우미더러 청소 좀 하라고 할게요.”“그럴 필요 없어.”윤문희가 자애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우린 호텔에 묵으면 돼.”“뭐?”유정재가 바로 두 눈을 부릅떴다.“서연이 출산 때문에 온 거 아니었어? 호텔에 왜 묵어? 딸 집에 왔는데 당연히 딸과 함께 지내야지.”“함께 지내긴 뭘 함께 지내요?”윤문희가 그에게 눈치를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