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국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손미현을 끌고 와서 인질로 삼았다.최연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여진국, 정말 외숙모를 이용해서 나를 협박할 수 있을 것 같아?”“너를 위협할 수 없지만 너의 집에 있는 바보는 위협할 수 있어!”최연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여진국은 자신의 범죄 증거를 최연준이 이미 확보해 경찰에 넘겼다는 사실을 몰랐다. 손미현이 쥐고 있던 증거는 사실 없어도 그만이었다.남양에서 온 사람들이 총을 들고 그와 대치했다.“총을 내려놓으라고 해!”여진국이 소리쳤다.“안 그러면... 이년을 쏴버릴 거야!”“연준아! 연준아!”저 멀리서 한바탕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김성주가 허둥지둥 달려왔는데 최연준이 막자 그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뭐 하는 거야! 다 총을 내려놓으라고 해! 네 외숙모가 아직 이 사람 손에 있잖아!”최연준은 냉랭한 기색으로 그를 한번 보았다.그가 사람을 시켜 김성주를 데려오게 했다.이런 일은 반드시 본인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한다.“여보...”손미현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혼절할 뻔했는데 김성주를 보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여보, 빨리 나를 살려줘. 나... 안 돼...”“내 아내를 놓아주세요!”김성주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제발. 미현이를 놔주면 돈을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연준아! 제발 미현이를 살려줘. 임신하고 있잖아! 내 아들, 내 아들...”김성주는 땅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안고 울었고 하마터면 최연준에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뭐라고?”여진국은 충격을 받았다. 그제야 손미현의 다리 사이 피가 어디서 난 것인지를 알아차렸다.‘임신한 거였어?’“이게 무슨 일이야!”그는 손미현의 머리채를 세게 잡아당겼다.“이 바보의 자식을 임신했어? 나랑 잤을 때도 이 바보를 시중들었어?”김성주도 놀라 멍하니 손미현을 바라보았다.“여보, 저 사람... 뭐라는 거야?”손미현은 흙덩어리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얼굴에 핏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외삼촌.”최
이게 바로 그녀가 그에게 주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여진국...”손미현이 이를 꽉 깨물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쌤통이야! 당신은 내 감정을 가지고 놀았고 내 돈을 사기 친 것도 모자라 내 딸에게까지 몹쓸 짓을 했어. 허, 하늘도 절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대가 끊어지게 만들 거라고. 방금... 당신이 날 걷어찬 바람에 이 아이 더는 지킬 수 없게 되었어. 당신 아이를 죽인 건 당신이야, 당신이라고!”여진국이 포효하며 총을 들었다. 그가 총을 쏘려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더니 총알이 여진국의 손목을 정확히 조준했다. 여진국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졌고 시뻘건 피가 사방에 튀었다.손미현은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겼다. 그런데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바람에 그만 급류에 휩쓸려가고 말았다...난투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경찰이 재빠르게 현장을 통제했다.최연준과 김성주는 경호원과 함께 무사히 그곳을 떠났다.가는 길 내내 김성주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삼촌.”최연준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를 불렀다. 그런데 김성주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빛이 생기를 잃었고 입을 살짝 벌린 채 가끔 몸을 파르르 떨곤 했다.“삼촌, 이러지 말아요.”김성주의 모습에 최연준은 너무도 속상했다. 위로하려고 김성주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김성주가 화들짝 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마치 죽음이 임박한 동물의 처참한 울부짖음 같았다.“삼촌, 무서워하지 말아요.”최연준이 다급하게 위로했다.“저예요, 연준이. 제가 계속 옆에 있을게요...”김성주는 슬픔에 겨워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왜, 대체 왜!”“삼촌...”“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김성주는 자신의 가슴팍을 가차 없이 두드렸다. 최연준이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김성주가 다치지 않게 손을 꼭 잡아주는 것뿐이었다.“연준아...”김성주는 입을 벌린 채 엉엉 울었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내가 정말 그렇게 바보야?”최연
김유정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횡설수설했고 휴대 전화를 들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진작 드레스까지 준비했다. 디자이너의 한정판 고가 드레스라 지금까지 아까워서 입지 않았다. 드디어 그 가치를 발휘할 기회가 생겼다.이튿날 제작 발표회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김유정은 집을 나서기 전에 요즘 아파트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여진국도 찾아오지 않았고 집안의 도우미와 운전기사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아파트에 그녀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는데 마치 무인도에 버려진 것만 같았다.김유정은 대문을 내선 후 심호흡을 크게 했다. 길거리에는 평소처럼 사람이 거닐었고 이 세상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단지 여진국에게 버림받은 거겠지...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역시 남자를 믿어선 안 돼.’하지만 여진국이 이미 투자했기에 김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을 맡았으니 반드시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이참에 예전에 그녀를 업신여겼던 사람들을 전부 자신의 발아래로 짓밟아버리겠다고 다짐했다.김유정은 웃으며 휴대 전화를 꺼내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무심결에 앨범을 뒤졌는데 영상 하나를 발견했다.곽보미는 영상 속의 이 혼혈인을 무척이나 눈여겨보았다. 그날 촬영 현장에서 곽보미는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찍으면서 어떻게 찍어도 다 예쁘다고 칭찬했었다.그때 김유정도 과연 진짜 그러한지 궁금하여 가장 까다로운 각도를 골라 이 영상을 찍었다. 그런데 영상을 보던 김유정이 눈살을 찌푸렸다.‘이름이 뭐였더라? 서지현?’“허, 네까짓 게 감히 나한테 덤벼?”그녀는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멈췄다.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그때 콜택시가 도착했다. 김유정은 정신을 차리고 차에 올라탄 후 제작 발표회 현장으로 향했다.제작 발표회의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유럽 영화계의 선배들이 자리를 빛내주러 왔다.곽보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기자들 앞에서 열심히 홍보
그런데 주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유정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다행히 주아가 민첩하게 뒤로 두 걸음 물러난 덕에 맞지 않았고 되레 김유정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히스테릭한 비명을 질렀다.기자들은 그 모습을 놓칠세라 카메라 셔터를 끊임없이 눌렀고 라이트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이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곽보미가 비서에게 눈짓하자 대형 스크린에 미웨이 엔터테인먼트의 장부 내용과 여진국이 갖고 있던 1억 유로의 출처, 그리고 여진국이 체포됐다는 내용이 그대로 나타났다.“기자 여러분, 발표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곽보미는 엄숙하면서도 침착하게 말했다.“김유정 씨가 영화에 투자하고 합류하면서 이번 새 영화의 여자주인공이 될 거라는 소문이 계속 돌았어요. 오늘 이 소문의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김유정 씨가 투자와 함께 들어온 건 맞아요. 하지만 그 1억 유로는 사실 범법자를 도와 돈세탁을 하는 것이었어요. 저 곽보미는 도덕성이 있는 사람이기에 불법 자금을 그대로 상납하여 경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도록 하겠습니다.”김유정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어두운 지옥에 빠진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곧바로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고 김유정은 구속 수사를 받게 되었다.그사이 김씨 가문에서는 최고의 변호사 군단과 홍보팀을 동원하여 이 일로 인한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였다.다행히 김중 그룹의 주가는 내려가지 않았다. 되레 여진국을 잡는 과정에 공을 세웠다고 주가가 꽤 올랐다.한차례 폭풍이 휘몰아치고 난 뒤 드디어 잠잠해졌다. 심한 충격을 받은 김성주는 예전보다 말수가 확 줄었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김씨 가문 영감은 최연준과 강서연에게 환경이 바뀌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른다면서 강서연이 아이를 낳은 후에 김성주를 데리고 오성으로 돌아가라고 했다.윤찬은 김성주의 모든 병력을 복사한 자료를 챙기고 남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누나, 매형, 걱정하지 말아요.”가기 전 윤찬이 웃으며 말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러니까... 만일이라고 하잖아요, 만일.”강서연이 최연준을 보며 말했다.“만약 만나면 어떡할 거예요?”최연준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무슨 일이든 만약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여자가 한 가설에 빠지게 되면 머릿속에 사랑과 원한에 관한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는데 아마 곽보미도 이런 막장은 만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이라는 질문을 회피해도 결과는 아주 심각할 것이다.최연준이 피식 웃었다. 인제 이런 질문에는 육경섭보다 경험이 훨씬 더 많았다. 고작 이런 쉬운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을 리가 있겠는가?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그럴듯하게 물었다.“만약 만난다면? 그럼 난 그 사람과 어디서 만났는데?”“그러니까...”강서연이 두 눈을 깜빡였다.“그냥 우연히 아무 곳에서 만났어요.”“당신 남편이 아무 곳에나 갈 사람이야?”“그럼... 그럼 길에서 만났다고 해요.”“당신 남편은 항상 차를 몰고 다녀서 길에서 막 한가롭게 돌아다니지 않아.”강서연이 웃음을 터트렸다.“두 사람 차가 서로 부딪쳤어요.”그녀는 최연준의 함정에 이미 빠졌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점점 주제를 벗어났다.최연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그 사람이 내 차를 박았어?”강서연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자 최연준도 바로 정색했다.“그럼 경찰에 신고해야지. 대체 운전면허를 어떻게 땄기에 길에서 그런 식으로 운전하는 거냐고 따질 거야.”강서연은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 그 사람 과실이 100%니까 내 차도 물어줘야 해.”“여보?”“그리고 변호사도 부를 거야. 만약 돈을 물어주지 않는다면 소송까지 가야지. 집이 망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 거야.”“아니, 그게 아니라요.”강서연은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대체 어쩌다가 이 화제로 넘어온 거지?’최연준의 입가에 우쭐거리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런데 강서연이 고개를 들자마자 딱 걸리고 말았다.“옆으로 새지 말고요. 그냥 그런 여자를 만나면 어
하나는 강서연의 출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성주의 병세에 관해 연구하기 위해서였다.“아빠, 어때요?”강서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윤정재가 수심에 찬 얼굴로 고개를 내젓자 최연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최선을 다해서 치료해 보도록 할게.”윤정재가 그들을 보며 말했다.“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런 병은 짧은 시간 내에 치료할 수 없어. 그리고 약물 치료만 하는 것도 부족해. 다른 재활 훈련도 병행해야 해.”“네.”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장인어른.”윤문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실 어릴 적에 성주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네 엄마가 날 찾아왔었어. 그때는 우리 아버지가 성주 병을 봐줬었거든. 우리 할아버지도 함께 도왔지만 치료하지는 못했고 그저 성주의 증상이 더 악화하지 않게만 할 뿐이었어. 정상인으로 회복하는 건 아마 매우 어려울 거야.”“악화하지 않는 것만 해도 아주 다행인 거야.”윤정재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뇌를 다친 건 의학계에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최연준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비록 속상하긴 했지만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면 삼촌이 김씨 가문에서 태어난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가 평생 누린 부귀영화는 일반인은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김성주가 아무리 지적장애를 가졌다고 해도 풍요롭게, 그리고 무사하게 평생 살 수 있다.“장인어른, 장모님, 이번에는 맨체스터에 오래 머무르세요.”최연준이 가볍게 웃었다.“옆에 작은 별장이 있는데 처남이 왔을 때 거기서 지냈어요. 두 분 서연이와 함께 지내고 싶으시면 도우미더러 청소 좀 하라고 할게요.”“그럴 필요 없어.”윤문희가 자애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우린 호텔에 묵으면 돼.”“뭐?”유정재가 바로 두 눈을 부릅떴다.“서연이 출산 때문에 온 거 아니었어? 호텔에 왜 묵어? 딸 집에 왔는데 당연히 딸과 함께 지내야지.”“함께 지내긴 뭘 함께 지내요?”윤문희가 그에게 눈치를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 강서연은 최연준의 품에 살포시 기댔다. 그의 냄새만 맡으면 마음이 저도 모르게 안정되었고 의지하고 싶어졌다.그날 밤 강서연은 아주 꿀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눈을 떠보니 최연준이 옆에 없었다.그런데 아래층에서 빵 굽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강서연은 불룩 나온 배를 이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최연준이 한창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는데 몇몇 집사들은 그저 옆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주방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여보, 깼어?”최연준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강서연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강서연은 문득 그들이 강주에 있을 때 어느 하루 생리통이 너무 심하여 휴가 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최연준이 밥을 차려주겠다며 자발적으로 나섰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 결과... 주방은 아수라장이 돼버렸고 열심히 차렸다는 아침도 검게 탄 계란후라이와 우유를 잔뜩 부은 시리얼뿐이었다.강서연은 옅은 미소와 함께 주방으로 걸어갔다.그나마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주방이 난잡하긴 했지만 그래도 요리 솜씨는 눈에 띄게 향상했다.최연준은 그녀에게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한 아침상을 준비했다. 빨간색의 토마토, 노란색의 옥수수, 초록색의 상추, 보라색의 자색고구마 빵이었다.강서연은 최연준을 끌어안고 영어로 칭찬했다.“우리 남편 최고!”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에 집사들은 서로 쳐다보며 웃더니 준비한 아침을 식탁에 가져다 놓았다. 전쟁터가 돼버린 주방을 청소하는 건 그들의 몫이었다.최연준은 호박죽을 한 그릇 떠서 강서연에게 천천히 떠먹여 주었다.“여보.”강서연이 입을 닦고 말했다.“오늘 주말인데 다른 스케줄 있어요?”“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싶어?”“네... 엄마 아빠 뵈러 가려고요.”최연준은 웃으며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윤정재와 윤문희는 김중 그룹 산하의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석진과 이웃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마 서지현도 만났을 것이다.강서연은 자색고구마 빵을 먹으며 생각에
서지현이 경찰서에 앉아있었다.협소하고 숨 막히는 방에 CCTV가 가득했다. 서지현은 CCTV 뒤에 수많은 눈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앞에 앉아있는 두 경찰은 얼음장같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서지현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지만 자신의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 겁에 질리면 더욱 희망이 없으니까.“써니?”한 백인 경찰이 벌써 이 질문만 몇 번이나 던졌는지 모른다.“성이 뭐야?”서지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우리 말 못 알아들어?”다른 한 경찰의 눈빛이 날카롭기에 그지없었다.“번역이라도 찾아줄까?”서지현의 허리는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찌나 무서운지 속눈썹마저 파르르 떨렸다.경찰은 형식적인 질문을 다시 한번 던졌다.“영국에는 어떻게 왔어?”“평소 수입은 어디서 난 거지?”“남부 길거리에 총격 사건이 몇 건 있었는데 사건 발생 시간에 어디 있었어?”“체포될 때 김중 호텔이 있던데 거긴 어떻게 들어갔어?”서지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두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사실 그녀는 가장 나쁜 결과까지 진작 생각했었다. 영국에서 추방된다면 다른 곳에서 살면 된다. 어차피 어딜 가든 다 불법체류자니까.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며 길거리의 쥐처럼 숨어다니면서 평생 노숙자로 사는 삶 따위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걱정되는 건 아저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경찰이 김중 호텔 얘기를 꺼냈다. 서지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저씨가 그녀를 호텔에 묵게 했다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서지현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녀는 그리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떤 나머지 손과 발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서지현이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아저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무슨 말은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은 하지 말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