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이 경찰서에 앉아있었다.협소하고 숨 막히는 방에 CCTV가 가득했다. 서지현은 CCTV 뒤에 수많은 눈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앞에 앉아있는 두 경찰은 얼음장같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서지현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지만 자신의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 겁에 질리면 더욱 희망이 없으니까.“써니?”한 백인 경찰이 벌써 이 질문만 몇 번이나 던졌는지 모른다.“성이 뭐야?”서지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우리 말 못 알아들어?”다른 한 경찰의 눈빛이 날카롭기에 그지없었다.“번역이라도 찾아줄까?”서지현의 허리는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찌나 무서운지 속눈썹마저 파르르 떨렸다.경찰은 형식적인 질문을 다시 한번 던졌다.“영국에는 어떻게 왔어?”“평소 수입은 어디서 난 거지?”“남부 길거리에 총격 사건이 몇 건 있었는데 사건 발생 시간에 어디 있었어?”“체포될 때 김중 호텔이 있던데 거긴 어떻게 들어갔어?”서지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두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사실 그녀는 가장 나쁜 결과까지 진작 생각했었다. 영국에서 추방된다면 다른 곳에서 살면 된다. 어차피 어딜 가든 다 불법체류자니까.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며 길거리의 쥐처럼 숨어다니면서 평생 노숙자로 사는 삶 따위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걱정되는 건 아저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경찰이 김중 호텔 얘기를 꺼냈다. 서지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저씨가 그녀를 호텔에 묵게 했다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서지현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녀는 그리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떤 나머지 손과 발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서지현이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아저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무슨 말은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은 하지 말아야
윌이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마 추방될 때까지 못 만날 겁니다.”그러자 나석진이 흥분하며 소리를 질렀다.“왜요?”“규정에 따라 불법체류자는 심문을 받고 절차를 거친 후에 담당자가 국경선까지 압송하는데 국경을 나가는 걸 직접 확인까지 하거든요. 그리고 이 과정이 아주 엄격해서 만날 방법이 없어요.”나석진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윌이 그를 보며 말했다.“석진 씨, 심문 시간은 일반적으로 5일을 초과하지 않아요... 마지막 날에 경찰서 문 앞에서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나석진은 바람 빠진 고무공처럼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말을 마친 윌은 별장을 나섰다.강서연과 최연준은 나석진의 양옆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이 입을 열려던 그때 나석진이 갑자기 또 벌떡 일어난 바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나석진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어휴...”강서연이 나석진을 부르려 하자 최연준이 말렸다.“그냥 가게 내버려둬.”“오빠가 어디 가는지 알아요?”“당연히 경찰서로 가겠지.”최연준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예전에 강서연이 회사 기밀을 누출했다는 누명을 썼을 때 최연준은 영국에 있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최연준도 미친 듯이 강주로 날아와 경찰서에서 그녀를 기다렸었기에 지금 나석진의 기분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서연아.”최연준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야.”강서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배가 불편해지더니 뭔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만 같았다...연신 심호흡하자 코끝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진통이 점점 명확해졌다.“여보, 왜 그래?”최연준이 바짝 긴장했다.“나...”강서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진통이 시작된 것 같아요...”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래에서 뭔가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최연준은 재빨리 그녀를 안고 운전기사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병원에 도
의사는 강서연 모자가 무사하도록 책임질 테니까 최연준더러 뒤로 조금 물러나라고 했다.최연준은 분만실에서 이리저리 거닐며 안절부절못했다.강서연은 그가 걱정할까 봐 입술을 꽉 깨물고 최대한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서 의사의 지시에 따라 힘을 주었다.무통 주사의 약효가 퍼진 건지, 아니면 진통에 적응된 건지 강서연은 아까처럼 그리 아프지 않았다.“잘하고 있어요, 사모님...”조산사가 옆에서 도와주었다.“지금 심호흡하고 힘주세요!”“계속 힘주세요!”“사모님, 아이의 머리가 보여요.”최연준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쿵쾅거렸다.“잘하고 있어요, 사모님. 계속 이렇게 힘주세요.”“조금만 더 버텨요. 곧 나옵니다.”강서연은 온몸이 마비되었고 누군가 자신의 몸을 두 쪽으로 마구 찢어놓는 것만 같았다. 이젠 힘을 주는 건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고 그녀도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응애응애.”우렁찬 울음소리가 분만실에 울려 퍼졌다. 힘들었던 전투가 드디어 끝이 났다.강서연은 거의 탈진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분만실 침대에 기댔다.최연준은 가슴이 벅차올라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 굳은 채로 서 있었다.“축하드립니다, 도련님.”의사가 아이를 안고 그에게 보여주었다.“남자아이이고 몸무게는 8.8파운드예요.”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 8.8파운드면 거의 4㎏에 가깝다. 어쩐지 울음소리가 아주 힘이 넘치더라니 통통한 남자아이라서 그런 거였구나.의사는 아이를 강서연에게도 보여준 후 목욕하러 데려갔다.조산사는 강서연에게 마지막 뒷정리를 해주었고 최연준은 조각상처럼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아들이 생긴 그 벅찬 기분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흥분 다음에 밀려온 건 속상함이었다.통통한 아들을 낳느라고 강서연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예전에 누군가에게서 여자는 목숨 걸고 아이를 낳는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말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조금 전 강서연이 분만실에서 겪은 과정을
우는 것보다도 더 구차한 그의 웃음에 강서연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왜냐하면...”최연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아파하니까 나도 아파.”강서연은 웃으며 두 글자를 내뱉었다.“바보.”최연준은 땀에 흠뻑 젖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분만실 밖에서 기다리던 다른 가족들은 속이 다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윤정재는 분만실 문턱에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을까 하여 문 앞에 엎드리고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윤문희도 안절부절못하긴 마찬가지였다. 분만의 고통을 그녀도 경험했었다. 지금 딸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으니 한시도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 윤문희는 자신의 모든 것으로 두 모자의 건강을 기꺼이 바꾸겠다고 묵묵히 기도했다.김자옥도 조마조마한 마음에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이쪽을 신경 써야 할 뿐만 아니라 영상 통화도 켜고 있었는데 휴대 전화 너머로 최문혁과 은미연, 그리고 최연희가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이들이 감전된 것처럼 벌떡 일어나 분만실 문 앞을 둘러쌌다.잠시 후 간호사가 목욕을 마친 아이를 안고 나와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 순간 복도 전체가 떠들썩해졌다.그들은 저마다 아이를 안고 싶었지만 감히 안질 못했다. 그 모습에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아이 아빠가 아직 분만실에 있어요. 산모님의 몸이 아직 약해서 안는 건 무리고 이따가 아이 아빠가 나오면 먼저 안게 하는 건 어떨까요?”그러자 사람들이 일제히 동의했다.“네네, 아이 아빠가 먼저 안게 해요.”그때 의사 몇 명이 강서연을 VIP 병실로 옮겼고 최연준도 따라나섰다. 가족들이 병실에 모여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연준아, 얼른.”김자옥이 환하게 웃었다.“얼른 와서 아들 안아야지.”최연준은 허리를 곧게 펴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아들이 태어나서 한번 힐끗 본 후에 간호사가 목욕시키러 데려갔다. 이젠 몸도 깨끗해졌고
“맞아요!”간호사도 웃으며 말했다.“도련님, 사모님, 갓난아이는 다 이래요. 머리 부분이 뾰족한 건 산도에서 나올 때 짓눌려서 그런 거니까 곧 회복될 거예요. 그리고 다른 부분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세요? 전 엄청 예쁜데요? 조산사로 수년간 일했지만 이렇게 예쁜 아이는 정말 드물어요.”강서연과 최연준은 서로 마주 보며 웃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 더 보니 아까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았다.아이는 두 눈을 꼭 감고 손가락을 빨고 있었는데 통통한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아주 귀여웠다.“이 아이 양미간이 넓어서 딱 봐도 부귀하고 복이 많은 상이야.”윤정재의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최 서방, 서연아, 아이의 이름은 지었어?”두 사람은 순간 멍해졌다. 이 문제에 대해 정말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서연아.”윤문희가 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이름을 짓는 건 집안 어르신의 의견을 묻는 게 어떨까? 그러니까 내 말은 먼저 최 서방 할아버지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네...”“묻긴 뭘 물어.”김자옥이 손을 내저었다.“아이는 우리 서연이가 힘들게 고생하면서 낳은 건데 엄마가 돼서 아이 이름 하나 짓지 못해?”“자옥아!”윤문희가 눈살을 찌푸렸다.“걱정하지 마. 서연이는 우리 집에서 그런 규정 지키지 않아도 돼.”김자옥이 절친의 팔짱을 끼고 말했다.“이름을 짓는 것뿐만 아니라 윤씨 성을 따른다고 해도 난 불만 없어. 하하... 그렇지, 아들?”최연준은 이 상황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을 그도 동의했다. 강서연이 목숨 걸고 낳은 아이기에 무슨 이름을 짓든 다 괜찮았다.“하지만...”속이 깊은 강서연은 고개를 들고 최연준을 쳐다보았다.“연준 씨, 할아버지께 이름을 부탁해요.”“뭐?”“이 아이는 당신 아들이잖아요. 최씨 가문의 규정에 따라야죠.”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당신 집안에 족보가 있는 거 알아요. 당신 세대는 ‘연’ 자 돌림이고 다음
강서연은 아직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유가 나오질 않아서 너무도 힘들었다.의사는 아이를 강서연에게 안겨주었다. 아이가 젖을 빠는 건 본능이라면서 빨다 보면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러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모유는 여전히 나오질 않았다.갓난아이는 힘이 너무 약했다. 모유가 나오질 않자 응애응애 울기 시작했고 강서연은 마음이 조급해졌다.“아니면...”최연준이 입술을 적셨다.“내가 우리 아들 좀 도와줄까?”“뭐라고요?”강서연이 순간 멈칫했다.병실에 그들 세 식구 말고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최연준은 아들을 아기 침대에 눕힌 후 강서연 앞에 앉아 옷을 벗겼다. 그러자 강서연이 소스라치게 놀랐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우리 아들은 힘이 약하지만 난 힘이 세.”“연준 씨...”강서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귀밑까지 빨개졌다. 부끄럽긴 하지만 그 방법이 통할 것도 같았다. 어쨌거나 아이가 계속 울게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여보,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알지?”최연준은 본심에 어긋나는 말을 내뱉었다.“난 그저 우리 아들이 배를 곯을까 봐...”물론 오랫동안 그녀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한 탓에 말할 수 없는 엉큼한 생각을 한 건 사실이다...강서연은 옷을 벗고 고개를 숙였다.“알았으니까 얼른 해요...”최연준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가 강서연에게 다가가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곧이어 김자옥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있었다.이상한 자세의 최연준을 보자마자 김자옥은 순간 멍해졌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쑥스러움에 고개를 돌린 강서연과 달리 최연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우리 아들이 젖을 못 먹어서 내가...”김자옥이 새로 산 에르메스 버킨백이 드디어 유용하게 쓰일 때가 온 것 같다. 그녀는 가방으로 최연준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최연준!”김자옥이 그를 무섭게 째려보았다.“유축기가 있다는 것
“여보!”강서연은 국을 마신 후에도 배가 부르지 않아 민망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나 뭐 더 먹고 싶어요.”최연준은 김자옥이 가져온 음식을 차려주었다.“여보, 나 너무 많이 먹죠?”“많이 먹긴.”최연준이 웃으며 말했다.“기내식을 먹겠다는 소리를 안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강서연도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음식들 모두 김자옥이 산후조리 식단 기준에 맞춰 만든 것이라 간이 되어있지 않아서 매우 담백했다. 배가 아무리 고파도 이 음식들을 보면 별로 당기지 않았다.“왜 그래, 여보?”“이거...”강서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걸 싫어했다. 지금 남편이 옆에서 챙겨주고 있고 또 시어머니가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이라 이것저것 요구할 수도 없었다.꼼꼼한 최연준은 문제점을 바로 캐치했다. 음식들을 전부 맛본 후 아무 맛이 없자 다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며 웃었다.“먹기 싫어?”강서연이 억지웃음을 지은 후 숟가락을 들고 먹으려 하자 최연준이 말렸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몰래 꺼냈다.그때 강서연의 두 눈이 반짝였다.“소금을 들고 다녀요?”“아무 맛도 안 나는데 어떻게 먹어?”그러고는 음식에 소금을 넣으려 하자 강서연이 다급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어머님이 안 된다고 하셨어요.”“또 누가 안 된다고 했어?”“그리고... 엄마 아빠도 안 된다고 하셨어요.”강서연의 목소리가 거의 기어들어 갈 지경이었다.윤정재와 윤문희도 그녀에게 산모는 음식을 담백하게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만약 염분을 많이 섭취하게 되면 모유의 질이 나빠져 아이에게도 해롭다고 했다.“다들 안 된대요.”강서연이 그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최연준의 깊은 두 눈에 다정함이 스쳤다.“내가 된다고 했어.”“연준 씨...”“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봤는데 살짝 넣는 건 괜찮대.”최연준은 사랑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젓가락으로 소금을 살짝 찍어 음식에 넣었다.아주 미미한 양이라 맛이 별로 달라진 것도 없었지
최연준은 강서연의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이건 이미 약속한 거 아니었어? 어느 생이든 영원히 헤어지지 말고 부부로 살자.”그때 아기 침대에 누워있던 최군형이 두 눈을 뜨고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은 엄마 아빠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었던 최군형은 응애응애 울며 관심받길 바랐다.최연준은 황급히 다가가 아이를 달랬다. 이젠 아주 능숙하게 아이를 달래는 아빠가 되었다. 최군형이 조금 전 모유를 먹었으니 배가 고픈 건 아니겠다는 생각에 기저귀를 만져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뭔가 따끈따끈한 게 만져졌다...그러자 최연준이 환하게 웃었다.“아들이 나에게 준 첫 선물이 아주 크네.”강서연도 히죽 웃어 보이고는 베개 옆에 놓인 가방에서 수제 옷을 꺼내 최연준에게 갈아입히라고 했다.“이거 다 지현이가 만든 거예요.”강서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어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강서연이 아이를 낳은 후에 나석진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다 보러 왔었다.“오늘 벌써 닷새째야.”최연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윌한테서 들었는데 지현이 모든 절차를 다 밟았고 내일이면 국경선으로 압송된대.”“석진 오빠는요?”최연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사실 형님이 지현이와 함께 남양으로 돌아가서 왕실 가족과의 친분을 통하여 신분 하나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 전제는 형님이 그러길 원해야 한다는 거야.”최연준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여보, 두 사람 걱정하지 마. 이런 일은 인연에 달려있어.”...서지현이 드디어 방을 나섰다. 요 며칠 방에 갇혀 심문을 받거나 각종 서류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은 것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 앞에 완전 무장한 경찰이 대여섯 명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이런 장면을 꿈에서도 여러 번 봤었다. 매번 이 꿈을 꿀 때마다 놀라서 깨곤 했지만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했다.윌이 천천히 다가와 서지현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서지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