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요!”간호사도 웃으며 말했다.“도련님, 사모님, 갓난아이는 다 이래요. 머리 부분이 뾰족한 건 산도에서 나올 때 짓눌려서 그런 거니까 곧 회복될 거예요. 그리고 다른 부분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세요? 전 엄청 예쁜데요? 조산사로 수년간 일했지만 이렇게 예쁜 아이는 정말 드물어요.”강서연과 최연준은 서로 마주 보며 웃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 더 보니 아까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았다.아이는 두 눈을 꼭 감고 손가락을 빨고 있었는데 통통한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아주 귀여웠다.“이 아이 양미간이 넓어서 딱 봐도 부귀하고 복이 많은 상이야.”윤정재의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최 서방, 서연아, 아이의 이름은 지었어?”두 사람은 순간 멍해졌다. 이 문제에 대해 정말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서연아.”윤문희가 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이름을 짓는 건 집안 어르신의 의견을 묻는 게 어떨까? 그러니까 내 말은 먼저 최 서방 할아버지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네...”“묻긴 뭘 물어.”김자옥이 손을 내저었다.“아이는 우리 서연이가 힘들게 고생하면서 낳은 건데 엄마가 돼서 아이 이름 하나 짓지 못해?”“자옥아!”윤문희가 눈살을 찌푸렸다.“걱정하지 마. 서연이는 우리 집에서 그런 규정 지키지 않아도 돼.”김자옥이 절친의 팔짱을 끼고 말했다.“이름을 짓는 것뿐만 아니라 윤씨 성을 따른다고 해도 난 불만 없어. 하하... 그렇지, 아들?”최연준은 이 상황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을 그도 동의했다. 강서연이 목숨 걸고 낳은 아이기에 무슨 이름을 짓든 다 괜찮았다.“하지만...”속이 깊은 강서연은 고개를 들고 최연준을 쳐다보았다.“연준 씨, 할아버지께 이름을 부탁해요.”“뭐?”“이 아이는 당신 아들이잖아요. 최씨 가문의 규정에 따라야죠.”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당신 집안에 족보가 있는 거 알아요. 당신 세대는 ‘연’ 자 돌림이고 다음
강서연은 아직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유가 나오질 않아서 너무도 힘들었다.의사는 아이를 강서연에게 안겨주었다. 아이가 젖을 빠는 건 본능이라면서 빨다 보면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러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모유는 여전히 나오질 않았다.갓난아이는 힘이 너무 약했다. 모유가 나오질 않자 응애응애 울기 시작했고 강서연은 마음이 조급해졌다.“아니면...”최연준이 입술을 적셨다.“내가 우리 아들 좀 도와줄까?”“뭐라고요?”강서연이 순간 멈칫했다.병실에 그들 세 식구 말고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최연준은 아들을 아기 침대에 눕힌 후 강서연 앞에 앉아 옷을 벗겼다. 그러자 강서연이 소스라치게 놀랐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우리 아들은 힘이 약하지만 난 힘이 세.”“연준 씨...”강서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귀밑까지 빨개졌다. 부끄럽긴 하지만 그 방법이 통할 것도 같았다. 어쨌거나 아이가 계속 울게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여보,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알지?”최연준은 본심에 어긋나는 말을 내뱉었다.“난 그저 우리 아들이 배를 곯을까 봐...”물론 오랫동안 그녀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한 탓에 말할 수 없는 엉큼한 생각을 한 건 사실이다...강서연은 옷을 벗고 고개를 숙였다.“알았으니까 얼른 해요...”최연준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가 강서연에게 다가가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곧이어 김자옥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있었다.이상한 자세의 최연준을 보자마자 김자옥은 순간 멍해졌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쑥스러움에 고개를 돌린 강서연과 달리 최연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우리 아들이 젖을 못 먹어서 내가...”김자옥이 새로 산 에르메스 버킨백이 드디어 유용하게 쓰일 때가 온 것 같다. 그녀는 가방으로 최연준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최연준!”김자옥이 그를 무섭게 째려보았다.“유축기가 있다는 것
“여보!”강서연은 국을 마신 후에도 배가 부르지 않아 민망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나 뭐 더 먹고 싶어요.”최연준은 김자옥이 가져온 음식을 차려주었다.“여보, 나 너무 많이 먹죠?”“많이 먹긴.”최연준이 웃으며 말했다.“기내식을 먹겠다는 소리를 안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강서연도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음식들 모두 김자옥이 산후조리 식단 기준에 맞춰 만든 것이라 간이 되어있지 않아서 매우 담백했다. 배가 아무리 고파도 이 음식들을 보면 별로 당기지 않았다.“왜 그래, 여보?”“이거...”강서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걸 싫어했다. 지금 남편이 옆에서 챙겨주고 있고 또 시어머니가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이라 이것저것 요구할 수도 없었다.꼼꼼한 최연준은 문제점을 바로 캐치했다. 음식들을 전부 맛본 후 아무 맛이 없자 다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며 웃었다.“먹기 싫어?”강서연이 억지웃음을 지은 후 숟가락을 들고 먹으려 하자 최연준이 말렸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몰래 꺼냈다.그때 강서연의 두 눈이 반짝였다.“소금을 들고 다녀요?”“아무 맛도 안 나는데 어떻게 먹어?”그러고는 음식에 소금을 넣으려 하자 강서연이 다급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어머님이 안 된다고 하셨어요.”“또 누가 안 된다고 했어?”“그리고... 엄마 아빠도 안 된다고 하셨어요.”강서연의 목소리가 거의 기어들어 갈 지경이었다.윤정재와 윤문희도 그녀에게 산모는 음식을 담백하게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만약 염분을 많이 섭취하게 되면 모유의 질이 나빠져 아이에게도 해롭다고 했다.“다들 안 된대요.”강서연이 그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최연준의 깊은 두 눈에 다정함이 스쳤다.“내가 된다고 했어.”“연준 씨...”“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봤는데 살짝 넣는 건 괜찮대.”최연준은 사랑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젓가락으로 소금을 살짝 찍어 음식에 넣었다.아주 미미한 양이라 맛이 별로 달라진 것도 없었지
최연준은 강서연의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이건 이미 약속한 거 아니었어? 어느 생이든 영원히 헤어지지 말고 부부로 살자.”그때 아기 침대에 누워있던 최군형이 두 눈을 뜨고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은 엄마 아빠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었던 최군형은 응애응애 울며 관심받길 바랐다.최연준은 황급히 다가가 아이를 달랬다. 이젠 아주 능숙하게 아이를 달래는 아빠가 되었다. 최군형이 조금 전 모유를 먹었으니 배가 고픈 건 아니겠다는 생각에 기저귀를 만져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뭔가 따끈따끈한 게 만져졌다...그러자 최연준이 환하게 웃었다.“아들이 나에게 준 첫 선물이 아주 크네.”강서연도 히죽 웃어 보이고는 베개 옆에 놓인 가방에서 수제 옷을 꺼내 최연준에게 갈아입히라고 했다.“이거 다 지현이가 만든 거예요.”강서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어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강서연이 아이를 낳은 후에 나석진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다 보러 왔었다.“오늘 벌써 닷새째야.”최연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윌한테서 들었는데 지현이 모든 절차를 다 밟았고 내일이면 국경선으로 압송된대.”“석진 오빠는요?”최연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사실 형님이 지현이와 함께 남양으로 돌아가서 왕실 가족과의 친분을 통하여 신분 하나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 전제는 형님이 그러길 원해야 한다는 거야.”최연준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여보, 두 사람 걱정하지 마. 이런 일은 인연에 달려있어.”...서지현이 드디어 방을 나섰다. 요 며칠 방에 갇혀 심문을 받거나 각종 서류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은 것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 앞에 완전 무장한 경찰이 대여섯 명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이런 장면을 꿈에서도 여러 번 봤었다. 매번 이 꿈을 꿀 때마다 놀라서 깨곤 했지만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했다.윌이 천천히 다가와 서지현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서지
서지현은 다른 몇몇 밀입국자와 함께 선실의 한 작은 방에 갇혔고 밖에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엄청나게 큰 배라 항해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배도 함께 흔들린 바람에 배를 타본 적이 없었던 서지현은 뱃멀미를 심하게 했다.서지현은 창가 옆에 기대앉았다. 창문 문틈 사이로 짠 내가 섞인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갈색 긴 머리를 헝클어놓았다.그녀가 여러 번이나 헛구역질하자 옆에 있던 밀입국자들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들 제 코가 석 자라 동정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문을 열더니 그들더러 전부 나오라고 했다.서지현은 불편한 몸을 참아가며 밖으로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배는 이미 영국과 멀리 떨어진 공해에 도착했고 앞으로 더 가면 유럽 대륙이었다.밀입국자들 전부 유럽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라 다시 강제 송환하지만 서지현은 달랐다.어릴 적부터 맨체스터에 살았고 송환은 그녀에게 있어서 황당무계한 일일 뿐이었다. 그녀는 어디로 송환되어야 하고 또 어디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그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공해에 민간 배들이 여기저기 다녔는데 배의 주인들은 밀입국자를 돌려보내고 뱃값을 받는 장사를 했다.“얼른 가요!”경찰의 냉랭한 목소리에 서지현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조롱 섞인 경찰의 눈빛과 마주했다.“아가씨, 잘 가요. 앞으로 다시는 영국으로 오지 말아요.”“저...”뱃멀미 때문에 서지현의 얼굴에 핏기라곤 없었고 배가 흔들릴 때마다 자꾸 헛구역질이 났다.“얼른 가자.”집시 할머니도 이 배에 타고 있었는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서지현의 두 눈에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전 어디로 가야 할까요?”“어디서 왔으면 어디로 돌아가야지.”할머니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난 프랑스에서 밀입국했어. 오랫동안 떠나있었으니 이젠 돌아갈 때도 됐지. 써니야, 정말 갈 곳이 없으면 나와 함께 프랑스로 갈래? 어차피 우리 집시들은 정처
“네?”경찰과 서지현은 동시에 어안이 벙벙했다.“아저씨, 안 돼요...”“너 입 다물어!”나석진은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서지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억울함이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더니 코끝이 시큰해졌다.“여기는 공해가 맞죠?”“네...”경찰은 눈살을 찌푸렸다.“공해가 맞습니다.”“여러분은 이 사람을 국경 밖으로 호송하는 거죠?”“맞습니다.”“그러면 영국을 떠나는 한 당신들은 이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간섭 안 하는 거죠?”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어서 경찰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나석진은 앞으로 한발 다가가 서지현의 어깨를 잡았다.서지현의 작은 몸이 그에게 감싸여 있었고 그의 품은 따뜻하고 안전한 느낌이 들어 그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서지현은 제 약혼녀입니다! 저와 같이 떠나야 합니다!”...서지현은 창가에 앉아 있었고 그 아래로는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현기증을 느꼈는데 다른 점은 한 시간 전에 그녀는 배에 앉아 있었고 한 시간 후에 그녀는 헬리콥터 안에 있었다.“피곤하면 잠깐 자고 있어.”옆에 있던 남자가 담요를 던져왔다.“도착하면 부를게.”서지현은 목을 움츠리고 감히 말을 하지 못했고 이 기복이 심한 남자를 몰래 쳐다봤다.방금 전 갑판 위에서 나석진은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품에 안고는 그녀가 그의 약혼녀임을 선언하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또 그녀를 데리고 가버렸다...모든 것이 꿈만 같다.행복감이 꿀처럼 달콤하게 그녀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혼자 몰래 누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서지현은 나석진이 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나한테 화난 건가?’그녀는 그날 밤을 다시 떠올리자 작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아저씨...”그녀는 물컵을 움켜쥐고 불안한 듯 손가락으로 잔을 가볍게 두드렸고 목소리는 모기보다 가늘었다.“사실 내가 기회를 찾아 설명하고 싶었어요. 그날 밤 나는... 나는 술을 너무
이번에는 서지현이 어안이 벙벙했다.“무슨... 어떻게 생각하는 거요?”그녀의 마음은 두근거렸고 감히 그의 눈을 보지 못했다.하지만 공간이 제한적이어서 움직일 수 없었고 너무 가까워서 나석진의 코끝이 하마터면 그녀의... 닿을 뻔했다. 그리고 설사 피한다 해도 얼마 피할 수 없었다.남자의 따스한 입김이 그녀의 코끝을 맴돌며 점점 불길로 변해 그녀의 이성을 불태웠다.서지현은 심호흡을 하여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그녀가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신분도 없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그의 옆에 서겠는가?“알면서 일부러 묻는 거야?”나석진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날 밤에 한 말을 정말 다 잊어버렸어? 네가 그날 밤에 한 말이 사실이야?”서지현은 갑자기 목이 메였다.잠시 침묵이 흐르자 그녀는 눈을 들어 나석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는데 전쟁터에 나간 여전사처럼 이를 악물고 죽을힘을 다해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만약 이 사랑이 그에게 속박이고 근심이라면 그녀는 차라리 이 마음을 평생 숨기고 싶다.“하... 아저씨, 설마 진짜라고 생각했어요?”서지현이 웃었다.“내가 그날 밤에 뭐라고 했어요? 다 잊어버렸어요!”나석진의 깊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졌다.“그날 무슨 말을 하더라도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취했잖아요! 하는 말은 다 취중에 하는 말이어서 믿으면 안 돼요!”“아저씨.”서지현은 웃으면서 정중하게 말하는데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찔렀다.“아저씨는 나에게 아저씨일 뿐이에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나석진의 반짝이던 눈빛이 한순간에 사라졌다.원래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착각이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껌벅이며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알겠어.”그는 웃으며 말했는데 몸 옆에 감춰둔 주먹은 힘껏 움켜쥐는 바람에 마디가 하얗게 되었다.“네가 솔직히 말해줬으니 나도 말할게.”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그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나를 보상할 생
“공항에 도착하면 오성에서 전용기가 우리를 데리러 올 거야.”그는 계속해서 말했다.“나는 오성에서 업무가 있으니 너는 당분간 나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어. 하지만 오성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훨씬 쉬워져. 그곳에서도 네가 신분이 없긴 하지만 최씨 가문에서 지낼 수 있어...”“서연 언니를 귀찮게 하는 건 아니겠죠?”“정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애들이나 좀 봐줘.”서지현은 웃으며 담요를 몸에 덮고 곧 잠이 들었다.나석진은 잠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손은 저절로 그녀의 밤색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며칠 동안 샤워를 하지 않아 머리가 엉켰고 얼굴도 어딘가 모르게 먼지를 묻혀 상태가 안 좋았다.갑판에서 서지현을 봤을 때 그녀의 눈에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고 작고 약한 길고양이 같았던 것을 떠올렸다.그러나 이 고양이는 결국 그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강서연은 산후조리를 마치고 최연준과 함께 오성으로 돌아왔다.최군형은 모두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먼저 증조할아버지 최재연으로부터 금괴 다섯 상자를 물려받았다.뒤이어 돌잔치가 있었는데 최씨 가문과 친분을 쌓고 싶은 각 대가족들이 잇달아 진귀한 보물을 보내 서로 돈 자랑을 펼쳤다.그다음에는 최씨 가문의 각 친척들인데 하나둘씩 관상쟁이처럼 갓 만월이 된 아기의 얼굴에서 대부대귀, 홍복제천을 볼 수 있었다.드디어 배경원과 모이는 날이 왔다.강서연과 최연준은 이른 아침 아들을 품에 안고 황급히 최씨 빌라에서 탈출했다.요즈음 그들 두 사람은 너무 접대를 많이 해서 얼굴이 굳어졌고 숨 쉴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연회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왔는데 배경원과 육경섭이 먼저 두 개의 큰 돈봉투를 주자 최연준에게 멸시를 당했다.“속물이야.”“둘을 용서해 주세요.”임유정이 웃으며 금귀걸이 금목걸이 금팔찌를 흔들었다.“보세요. 기념일에 저에게 준 것도 이것뿐이에요.”육경섭이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었다.그의 눈에는 금이 가장 값어치가 있고 돈봉투가 가장 눈에 띈다. 금빛 찬란하고 새빨갛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