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 도착하면 오성에서 전용기가 우리를 데리러 올 거야.”그는 계속해서 말했다.“나는 오성에서 업무가 있으니 너는 당분간 나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어. 하지만 오성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훨씬 쉬워져. 그곳에서도 네가 신분이 없긴 하지만 최씨 가문에서 지낼 수 있어...”“서연 언니를 귀찮게 하는 건 아니겠죠?”“정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애들이나 좀 봐줘.”서지현은 웃으며 담요를 몸에 덮고 곧 잠이 들었다.나석진은 잠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손은 저절로 그녀의 밤색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며칠 동안 샤워를 하지 않아 머리가 엉켰고 얼굴도 어딘가 모르게 먼지를 묻혀 상태가 안 좋았다.갑판에서 서지현을 봤을 때 그녀의 눈에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고 작고 약한 길고양이 같았던 것을 떠올렸다.그러나 이 고양이는 결국 그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강서연은 산후조리를 마치고 최연준과 함께 오성으로 돌아왔다.최군형은 모두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먼저 증조할아버지 최재연으로부터 금괴 다섯 상자를 물려받았다.뒤이어 돌잔치가 있었는데 최씨 가문과 친분을 쌓고 싶은 각 대가족들이 잇달아 진귀한 보물을 보내 서로 돈 자랑을 펼쳤다.그다음에는 최씨 가문의 각 친척들인데 하나둘씩 관상쟁이처럼 갓 만월이 된 아기의 얼굴에서 대부대귀, 홍복제천을 볼 수 있었다.드디어 배경원과 모이는 날이 왔다.강서연과 최연준은 이른 아침 아들을 품에 안고 황급히 최씨 빌라에서 탈출했다.요즈음 그들 두 사람은 너무 접대를 많이 해서 얼굴이 굳어졌고 숨 쉴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연회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왔는데 배경원과 육경섭이 먼저 두 개의 큰 돈봉투를 주자 최연준에게 멸시를 당했다.“속물이야.”“둘을 용서해 주세요.”임유정이 웃으며 금귀걸이 금목걸이 금팔찌를 흔들었다.“보세요. 기념일에 저에게 준 것도 이것뿐이에요.”육경섭이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었다.그의 눈에는 금이 가장 값어치가 있고 돈봉투가 가장 눈에 띈다. 금빛 찬란하고 새빨갛
“걱정하지 마요, 연준 씨.”신석훈이 웃으며 말했다.“모의고사가 아니에요!”최연준과 강서연이 서로를 바라보며 몰래 웃고 있었는데 그다음 말은 둘의 표정을 굳게 했다.“군형이가 크면 또 최신 모의고사가 있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 주는 건 학습 계획이에요!”“뭐라고 했어요?”최연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내 아들이 이제 돌잔치를 했는데 지금부터 학습 계획을 짠다고요?”“응, 맞아.”최연희가 큰 선물 포장을 뜯더니 먼저 예쁜 카운트다운 카드를 꺼냈다.강서연은 깜짝 놀라 물었다.“뭐예요?”원목 재질의 카드인데 사방에 작은 로켓 문양이 장식되어 있어 하늘을 나는 것을 상징한다.가운데 큰 글자 몇 개가 눈에 띄었다.수능 시간 카운트다운.“이거는...”“연준 씨, 서연 씨!”신석훈이 마른기침을 두 번 하고 늙은 교수님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지금부터 계산하면 군형이 수능까지 6,570일이나 남았어요. 이 학습계획은 저와 연희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군형이를 위해 만든 거예요.”강서연은 어쩔 바를 몰라 했고 품에 안긴 아기는 보석 같은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친고모를 바라보고 있었다.“오빠, 이 학습 계획은 정말 훌륭해!”최연희는 자신만만했다.“내 조카가 출발선에서 지게 하지 않을 거야!”“맞아요!”신석훈이 계속 말했다.“제가 유아 행동심리학을 연구한 적이 있는데 사실 사람은 영유아기에 말을 할 줄 모르지만 이미 언어 의식과 주변 환경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군형이는 언어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키워나가야 해요... 형님, 이 단어들을 매일 읽어주면 유치원에 입학하자마자 토익 800점이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악보는 모두 세계적인 명곡이어서 유치원 졸업 후 피아노 10급을 쟁취합시다! 이 기보도 우리가 열심히 뽑은 것이어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프로 바둑 2단을 따냅시다! 마지막으로 수능때... 명문대를 갑시다!”“잠깐만요.”배경원이 그들의 말을 끊었다.그는 차마 최연준 세
강서연은 눈을 들어 그의 온화하고 담담한 눈빛과 마주쳤다.그는 어릴 때부터 힘들게 살아와서 아들이 다시는 자신이 받은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나는 군형이가 평안하고 즐겁게 자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강서연이 부드럽게 말했다.“나는 큰 꿈이 없어서 아들에게도 강요하지 않아요. 당신도 나랑 같은 생각이죠?”최연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같다고?말도 안 되는 소리!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강서연을 차지했고 앞으로도 더 오래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마음속으로...최연준은 못된 웃음을 지었다.“여보, 당신이 틀렸어!”“네?”“나는 당신과 반대로 생각해. 이 학습 계획이 너무 좋은데! 남자아이는 많이 겪어서 경험을 쌓아야 돼.”강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군형이가 공부의 어려움도 극복하지 못하면 장차 생활의 어려움을 겪어야 해.”최연준은 일리 있게 말했다.“당신도 아들이 게으른 부잣집 도련님이 되기를 바라지 않겠지?”강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그것도 맞는 말인데...”“그래서 군형이의 일정을 꽉 채워줘야 해!”그러면 강서연 옆에서 떨어질 것이다.“여보. 어린이 교육은 반드시 서둘러야 해. 다음 달부터 가장 훌륭한 키즈쌤을 집으로 모셔 와서 수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어!”최군형은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빤히 자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잘못 환생했는가? 이 사람이 내 아버지라고?...서지현은 오성에 도착한 후 줄곧 강서연과 함께 에덴에서 살았다.박경실은 이 예쁘고 부지런한 여자아이가 마음에 들었고 두 사람은 집안일을 함께 하고 강서연이 최군형을 돌보는 것을 도왔고 호흡이 척척 맞았다.그리고 최군혁이 서지현을 특히 좋아하는 듯하여 때로는 요람 옆에서 서지현이 그를 놀리면 통통한 손을 흔들며 야옹야옹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서지현이 만든 작은 옷은 부드럽고 얇으며 실밥이 꼼꼼하게 들어가 있어 틈까지도 완벽하게 처리되어 있다.강서연은 때때로 감탄한다.“네 솜씨가 이렇게 좋으니 정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곳을 찾아야겠어!”서지
나석진이 오성에 돌아온 이후로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요 며칠 각 언론사의 인터뷰가 스케줄을 꽉 채웠고 작품들도 줄을 서서 그를 찾았다. 매니저 박철은 대본을 수없이 받았고 그중 몇 개의 대작은 확실히 보는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석진 씨, 이것 좀 보세요... 이 정 감독은 곽보미에 뒤지지 않는 문예영화를 찍었고 오스카상까지 받았어요! 이것도 있어요. 전에 다른 장르 전쟁영화를 찍고 싶지 않았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이 영화는 여러 대선배들과 합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입소문이 날 거예요. 이런 사극, 정극을 찍는 것이 오히려 석진 씨에게 이익이 되기도 하고요. 어때요? 말 좀 해보세요. 도대체 뭘 찍고 싶은 거예요?”다른 배우들은 모두 머리가 깨도록 자원을 빼앗고 있는데 나석진은 가만히 앉아있어도 하늘이 도와 최고의 자원이 집으로 들어온다.그러나 나석진은 아무 기분이 없었다.그는 대본을 한 번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안 찍어요.”박철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뭐라고요?”나석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흔들었다.“찍고 싶지 않아요!”“석진 씨...”박철은 하마터면 팔을 휘둘러 그를 한 대 때리고 싶을 뻔했다.그는 연예계에서 손꼽히는 메니저로서 많은 일류 스타를 데리고 나왔는데 나석진이 막 데뷔했을 때부터 그가 있었다.강력한 가족 배경에 그의 뛰어난 재능이 더해져 그의 배우의 길을 막힘없이 걸어갈 수 있었다.그러나 이 도련님은 욕을 할 수도 없고 때릴 수도 없어 박철을 매우 골치 아프게 한다.결국 박철은 팔을 휘둘러 주먹으로 자신을 세게 내리쳤다.나석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러세요?”“내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해서요.”박철은 몹시 화가 났다.“나는 연예인 하나도 관리하지 못하고 이렇게 좋은 자원을 낭비해야 한다니요!”나석진은 아연실색하여 미안한 듯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대본들을 나누면 많은 사람들이 감사할 거예요!”“석진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예
나석진은 억지로 감정을 참으면서도 겉으로 예의를 유지했다.그러나 그가 아무리 화제를 돌려도 기자들은 끈질기게 캐물었고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그의 면전에서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했다.나석진이 박철을 보자 박철은 그에게 눈짓을 하여 잠시 참으라고 하였다.“여러분 기자님들!”박철이 웃으며 앞으로 나와서 나석진을 뒤로 막았다.“오늘 질문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여기는 레드카펫이어서 여러분들께서도 뒤의 인터뷰를 지체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지금 질문에 대답하기를 꺼리는데, 그러면 나석진 씨께서 정말 약혼녀가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까?”“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저의 프라이빗입니다!”나석진은 가던 길을 멈추고 눈빛이 날카로웠다.“질문에 대답하지 않겠습니다!”“대답 안 하는 걸 보니 찔리나 보네요.”이제는 성질이 좋은 박철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이 기자분은 참으로 이상하네요? 우리 석진 씨께서 사적인 일까지 다 말해줄 필요가 있을까요?”“나석진 씨의 사적인 일은 팬들의 공적인 일입니다!”말하는 기자는 당당했다.“만약 나석진 씨께서 팬들에게 해명을 하지 않는다면 팬들의 마음을 다치게 할 것입니다.”“뭐라고요? 못 들었어요. 다시 말해봐요.”박철은 매니저가 되기 전에도 잘나갔고 흑도와 백도에도 모두 세력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밑의 연예인들을 이렇게 오랫동안 지켜올 수 없었을 것이다.평소에는 예의 바른 체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지금은 누군가가 나석진을 겨냥하고 있으니 그는 반드시 앞장서서 싸울 것이다!“석진 씨, 물러서세요!”박철이 목을 뒤로 젖혔다.“내가 처리할게요!”“매니저님께서 물러서는 게 좋겠어요.”박철이 싸우기도 전에 나적진은 두 손가락으로 그를 뒤로 밀쳤다.나석진은 기세가 등등하고 깊은 눈 밑에는 한기가 서렸다.“제가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우선, 제 팬들은 매우 이성적이고 교양있는 분들입니다. 사소한 개인적인 일로 저를 쫓아다니지 않고 제 연기와 작품에만 집중해 줍니다! 저에게
그녀는 늘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심지어 한밤중에도 일어나서 때때로 손을 뻗어 아들의 숨소리를 살핀다.최군혁도 유난히 강서연에게 달라붙어 잠시도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울음을 터트려서 그녀는 쉴 틈이 전혀 없었다.“엄마가 되는 건 쉽지 않아요!”박경실이 웃으며 말했다.“군형이는 착한 아이예요. 인터넷에 무슨 단어가 있더라... 천사 아기라고 하죠!”강서연이 웃었다.“아주머니께서도 인터넷을 하세요?”“당연하죠! 나이는 많아도 유행은 따라가야죠! 오늘 오후에는 내내 페이스북을 했어요.”강서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쩐지 오후 내내 그녀를 보지 못했다.“나는 늙어서 눈이 어두워 어떤 글자는 잘 보이지도 않아 지현 씨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네? 지현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요?”강서연이 어리둥절했다.“어떻게 된 일이냐면요...”박경실이 설명했다.“지현 씨가 점심때 급하게 나를 찾아와서 몇십 개의 계정을 만들어서 게시물을 올려달라고 했어요!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니까요! 한국어를 쓸 줄 모르고 글도 잘 읽지 못해서 한참이나 가르쳐 줬어요!”강서연은 듣고도 알쏭달쏭하였고 박경실이 핸드폰을 보여주자 비로소 일의 자초지종을 알게 됐다.그 게시물들은 같은 영상 아래에 있었고 계정은 달랐지만 모두 서지현의 말투였다.그리고 그 영상은 바로 나석진이 인터뷰한 것이었다....나석진과 박철은 사무실에서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박철은 이미 여러 관계를 통해 그 영상을 내렸지만 이따금씩 올라오는 몇 개의 게시물들을 보면서 여전히 웃음이 나왔다.특히 눈에 띄는 게 몇 개 게시물이 있었다.“저는 나석진 씨의 친구입니다. 저는 나석진 씨께서 절대로 약혼자가 없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저는 내막을 알고 있습니다. 나석진 씨는 여자친구가 없고 한 번도 팬들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진실하고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옆에 있는 여자아이는 약혼녀가 아닙니다. 나석
그 아래에는 적지 않은 댓글이 달렸는데 모두 서지현이 집착이 심하다고 비웃었다.그러나 나석진의 손은 화면에 머물러 있었고 손가락은 천천히 하나하나의 글자를 스쳐 지나갔다.마치 그녀의 밤색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듯하다.그 계정의 이름은 써니다...나석진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석진 씨.”박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분간 정말 영화를 찍고 싶지 않다면 남양으로 돌아가서 한동안 머무는 거를 제안해요. 가문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세요!”“왜 그래요?”“그게...”박철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듣기로 남양의 그 여친왕이 또 석진 씨 소식을 묻고 있다고 해요!”...강서연은 아들을 재우고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웠다.최연준은 욕실에서 나와 그녀 옆에 앉아 큰 손으로 어깨뼈의 위치를 살살 주물러 줬다.“맞아요, 바로 이거에요...”강서연이 작은 소리로 외쳤다.“더 세게요!”최연준은 어안이 벙벙하여 웃었다.“내가 힘이 너무 세서 당신을 아프게 할까 봐서 그래.”“아니에요! 난 당신이 힘을 줬으면 좋겠어요... 후, 정말 좋아요...”그 소리는 부드러워 남자는 통제할 수 없었다. 만약 그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해준다면...그럼 얼마나 좋을까!최연준은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음흉한 미소를 드러냈다.그러면서 그녀 옆으로 더 다가갔다.“여보.”강서연의 목소리가 말랑말랑했다.“아들이 두 달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죠... 도대체 언제쯤 어른이 돼서 내가 안아주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집사와 도우미가 있다고 하지만 최군형은 강서연 옆에 있는 것만 좋아하고 한시도 떨어져 있지 못한다.게다가 이 녀석은 너무 잘 먹어서 체중이 쑥쑥 올라가고 팔다리에 살이 많이 붙었다.강서연이 하루 종일 아들을 안고 있으면 온몸이 산산조각 난 것 같고 특히 두 어깨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최연준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이제 남
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천천히 말해봐, 엄마 왜 그래?"“엄마가 두 달째 계속 몸이 안 좋은데,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윤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아버지는 누나가 방금 출산했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누나, 한 번 오면 안 돼요?”강서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공포감이 입을 크게 벌린 괴물처럼 그녀를 집어삼키는 느낌이 들었다.최연준은 그녀를 품에 안고 핸드폰을 건네와서 윤찬에게 남양으로 간다고 전했다.“여보...”이 순간 강서연은 머리가 텅 비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괴로운 날들을 생각했는데 그 괴로운 날들의 그림자가 영영 지워지지 않을 줄은 몰랐다.“걱정하지 마.”최연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장인어른께서 명의라 장모님을 잘 보살필 거야. 처남이 나이가 어려 긴장해서 그래.”강서연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최연준은 그녀를 안고 마음이 아팠다.그는 지금 어떤 위로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가능한 한 빨리 그녀를 데리고 남양에 가서 한 번 봐야 안심할 수 있었다....이틀 뒤 강서연과 최연준은 최군형을 데리고 공항에 도착했다.강서연은 많은 죄책감이 들었다. 오성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또 떠나야 하니 할아버지가 화낼까 봐 겁이 났다.그러자 최재원이 눈살을 찌푸렸다.“할아버지를 뭐로 보고? 사부인이 아픈 데 당연히 가야지! 내 증손자를 데리고 가면 보고 기뻐해서 병이 나을 수도 있잖아!”강서연은 영감님의 이해심에 감사했다.최재원은 또한 그의 전용기를 그들에게 양보했다.그의 전용기는 최씨 가문에서 가장 안전하고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다. 조종사는 20여 년의 비행 경험이 있어 매우 안전하다.VIP룸에는 강서연이 어린 최군형을 품에 안고 최연준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할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시는데 나는 할아버지 앞에서 효도도 못하고 당신까지 데려가야 한다니...”“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최연준이 웃으며 말했다.“지금은 장모님을 보살피는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