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나석진은 문 앞에 서 있는 서지현을 보고 너무도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도련님.”연미복 차림의 영국 집사가 예의 바르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저희 도련님께서 앞으로 써니 아가씨를 이곳에 묵게 하면서 써니 아가씨의 안전을 석진 도련님께 맡긴다고 하셨습니다.”나석진은 한참 동안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아침잠이 덜 깬 채 비몽사몽인 상태로 강서연의 전화를 받았다. 서지현이 강서연의 집에서 살면 안전하지 않다는 둥, 곧 큰일을 할 게 있으니 서지현을 잘 지켜야 한다는 둥 이런 소리를 잠결에 들은 것 같았다...그때까지만 해도 나석진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하여 강서연이 서지현을 그에게로 보내겠다고 할 때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진짜로 눈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잠깐만요!”영국 집사를 잡으려던 나석진은 제대로 잡지 못해 하마터면 서지현과 부딪칠 뻔했다.서지현은 캐리어를 끈 채 쭈뼛쭈뼛하며 서 있었다. 나석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표정과 달리 손은 이미 그녀의 가방을 들어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호텔 직원에게 방 하나를 더 잡으라고 했다.“방 카드야.”나석진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이 방에서 지내.”서지현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매일 청소하러 오는 사람이 있고 아래층에 뷔페가 있으니까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도 돼. 방 카드만 종업원에게 보여주면 돼.”“네.”“부족한 게 있으면 나에게 말하고.”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에 나석진은 기침을 두 번 하고는 다시 강조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너 아직 신분이 없어서 내 이름으로 방을 잡은 거거든. 혹시라도 네가 프런트에 전화해서 주문할 때 네 주민등록증이라도 검사할까 봐 그래. 그러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나에게 말해. 내가 프런트에 연락해서 가져다주라고 하는 게 더 편해.”“네, 알았어요.”서지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아저씨... 저 그게 필요한데...”나석진이 눈살을 찌푸렸다.“뭔데?”“그러
“음... 닮지는 않았어요.”서지현이 진지하게 말했다.“아저씨, 목걸이는 참 예쁜 물건이에요.”“뭐야? 내가 안 예쁘다는 소리야?”나석진은 인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비록 예쁘다는 말이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한국 연예계에서 공인한 미남인 건 사실이었다. 국민 첫사랑이라는 타이틀이 괜히 생겨난 건 아니었다.“아니, 그게 아니라요.”서지현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럼 무슨 말이야? 목걸이가 예쁜 물건이라며.”“아저씨가 안 예쁘다는 게 아니라.”서지현이 웃으며 말했다.“물건이 아니라는 말이에요.”“서지현!”한국어가 서툰 혼혈인이라기에는 한국어를 너무 잘했다....새 영화가 준비 단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지만 곽보미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강서연은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채 절망적인 눈빛으로 커피숍에 앉아있는 곽보미를 본 순간 미안함이 밀려왔다.“서연 씨, 그냥 사람 바꾸면 안 돼요?”곽보미가 울상을 지었다.“이 김유정은 대체 뭐예요? 대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건 그렇다 쳐도 희로애락 표정이 다 똑같아요. 나 그냥 천재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할게요. 내가 무슨 천재예요? 이런 사람 하나 가르치지도 못하는데.”강서연은 참다못해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 성설연도 그녀를 이 정도까지는 미치게 하지 않았다.“보미 씨, 조금만 더 참아요.”강서연은 곽보미가 가장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김유정은 진짜 배우가 되고 싶어 해요.”“뭐라고요?”곽보미는 강서연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4컷의 사진을 한 장에 담은 사진이었는데 전부 김유정의 얼굴이었다.강서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똑같은 사진을 네 장이나 보여줘요?”“허. 똑같은 거 아니에요.”곽보미가 냉랭하게 웃었다.“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이 연기한 네 가지 다른 장면이에요.”강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분명 다 같은 표정인데?’“주아 씨였더라면 네 개의 다른 표정을 연기하는 건 물론이고 신마다 아주 조금씩 다른 표정을 여
“당신은...”최연준은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웃었다.“아들을 무사히 낳기만 하면 돼.”“네.”강서연도 따라서 히죽 웃었다.“우리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 골치 아픈 일들이 전부 다 해결됐으면 좋겠어요.”“꼭 그렇게 될 거야. 여보, 겉으로 절대 티를 내선 안 돼, 알겠지? 보미 씨에게도 귀띔해 줘. 잠시만 김유정을 참고 견디라고.”“나 다 알아요.”강서연은 또 문득 뭔가 떠올랐다.“아 참, 여보. 손미현이 그 남자와 거래한 계좌를 반드시 알아내야 해요. 그게 가장 중요한 증거예요.”최연준은 그녀를 다정하게 쳐다보더니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알았어, 여보.”...손미현은 요 며칠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자꾸만 밀려왔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녀가 김유정에게 물었다.“유정아, 엄마 마음이 너무 불안해. 왜 이러지?”팩을 붙이느라 여념이 없었던 김유정은 손미현의 말에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손미현이 바로 짜증을 냈다.“내가 지금 말을 하고 있잖아. 왜 무시해? 아직 유명한 연예인이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잘난 척하는 거야? 네가 오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다 누구 덕인데!”“아이고, 그만 좀 해요. 다 엄마 덕이에요. 됐죠?”김유정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이 불안한 건 뭔가 안 좋은 일이 터지려고 그러나 보죠.”“꺼져!”손미현은 가뜩이나 기분이 별로인데 이런 말까지 들으니 더욱 화가 나 슬리퍼를 들고 김유정을 때리려 했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그녀의 얼굴을 다치게 할 뻔했다.김유정은 엄마가 억지를 부린다면서 한참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갔다.손미현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대체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나타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우며 가끔 헛구역질도 났다...‘그래! 그날 강서연의 집에 다녀오고 나서부터야.’손미현은 잠깐 움찔하다가 머릿속에 문득 서지현의 갈색 곱슬머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 도우미의 얼굴이 한 번 보면 잊히
손미현은 집에 있는 차도 운전하지 않고 길거리까지 걸어 나가서 택시를 탔다. 가는 길 내내 그녀는 마음이 초조했고 여진국네 집 근처에 도착해서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택시는 여진국의 집 밑까지 들어가지 않고 길모퉁이에 멈췄다. 두 사람은 그동안 늘 이렇게 움직였다.사람들의 눈과 귀를 피해 차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 동안 걸었다. 그런데 오늘 조용한 골목길을 돌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순간 움찔한 손미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골목길을 달렸다.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자꾸만 바짝 따라오는 것 같았다.그녀가 돌아보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다시 앞으로 가면 발걸음 소리가 뒤에서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손미현은 잠깐 멈췄다가 눈알을 굴리더니 다른 골목으로 돌아서 여진국의 아파트로 황급히 들어갔다.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야릇한 광경에 그녀는 혈압이 마구 치솟았다.여진국이 두 백인 여자와 소파 위에서 마구 뒹굴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손미현이 그에게 사준 튀르키예 양털 카펫을 깔고 있었다.“으악! 이 X놈, X새끼야!”손미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옆에 있던 꽃병을 냅다 던졌다. 한창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라 그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중 한 백인 여자가 머리를 맞았는데 피부가 째지면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다른 한 여자는 겁에 질린 나머지 옷도 입지 못하고 미친 듯이 뛰쳐나갔다.여진국은 손미현의 목을 잡고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곧이어 방안에서 히스테릭한 울음소리, 싸우는 소리,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족히 30분 넘게 이어지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여진국은 부하에게 들어와서 방을 정리하라고 했다. 손미현은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퉁퉁 부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여진국의 얼굴에도 할퀸 핏자국이 여러 개 생겼다.손미현이 던진 꽃병에 맞아 머리를 다친 백인 여자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
두 사람 모두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매번 산부인과에 올 때마다 모든 게 다 정상이었고 의사도 뭐라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왜...강서연은 긴장한 마음에 최연준의 손을 꽉 잡았다.“여보,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죠?”“그건 절대 아닐 거야.”사실 최연준도 떨리긴 마찬가지였다.평소 입으로는 계속 아들을 싫어하는 척했지만 어쨌거나 그의 핏줄이고 그의 목숨이었다.최연준은 정신을 가다듬고 강서연에게 웃어 보이고는 그녀와 함께 의사 진료실로 걸어갔다.강서연의 주치의는 아주 다정하고 자상한 영국 아주머니였는데 경험도 아주 풍부한 산부인과 교수였다.두 사람이 진료실로 들어오자 의사가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이건 사모님의 검사 결과입니다.”강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수치가 전부 정상인데 의사 선생님이 왜 보자고 하셨지?’최연준을 쳐다보는 의사의 눈빛이 어딘가 의미심장했다.“두 분 긴장해 하지 말아요. 사모님과 아이 모두 아무 문제 없어요. 하지만 도련님이 주의해야 할 점이 있어서 이렇게 보자고 한 거예요.”최연준은 귀를 쫑긋하고 의사의 말에 집중했다.의사가 느긋하게 말했다.“사모님 지금 만삭이라 격렬한 운동을 해서는 안 돼요... 도련님,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 옆에 있는 강서연의 얼굴은 이미 귀밑까지 빨개졌다.의사는 계속 진지하고 본업에 충실한 태도로 검사 결과의 수치를 가리키며 설명했다.“사모님의 이 몇 가지 수치가 조금 불안정해요... 지금 태아의 머리가 점점 골반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단계거든요. 만약 지금 격렬한 ‘운동’을 자주 한다면 태아에게도 좋지 않아요. 게다가 사모님 지금 힘이 따르지 못하니까 도련님이 참으셔야 해요. 사모님이 아이를 무사하게 순산하고 몸조리 잘한 다음에 부부 생활을 점차 늘리도록 하는 게 좋아요...”강서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심장이 빨리 뛰어 후다닥 도망쳤다. 최연준은 그녀를 쫓아가기 전에 의사에게 변명했다.“저 아주 살살했는데 왜
최연준이 뭐라 하려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강서연도 발견하고는 시선을 움직였다.“외숙모 아니에요?”최연준은 본능적으로 강서연을 품에 끌어안았다.손미현이 혼자 온 듯했는데 걷는 모습조차 어딘가 수상해 보였다. 방향을 보니 산부인과 쪽에서 걸어 나온 것 같았다.“외숙모가 왜 여길 왔을까요?”강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설마 우릴 미행한 건 아니겠죠?”최연준은 경호원들을 전부 다 불러온 후 강서연과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미행이든 아니든 나쁜 꿍꿍이가 있어도 절대 뜻대로 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서연아.”최연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집사에게 말해놓을 테니까 당신도 앞으로 뭘 먹을 때 조심해. 삼촌과 외숙모가 가져온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도 마.”“네, 알고 있어요.”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연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잘 지켜야지.”“네... 그래서요?”“그래서 당신 옆에 딱 붙어 자면서 지키려고.”...곽보미의 새 영화가 마지막 준비 단계에 돌입했다.대본을 여러 번이나 수정했지만 확 와닿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김유정이 촬영할 때 자꾸 성질을 부리고 잘난 척하는 바람에 더욱 심란했다.그날 곽보미는 촬영장에서 집중하여 대본을 수정하고 있었다. 다른 배우들은 촬영 준비를 모두 마쳤지만 김유정만 의자에 기댄 채 네일을 받고 있었는데 네일 아티스트가 무릎까지 꿇고 네일을 해주고 있었다.유찬혁이 도시락을 가져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김유정은 그 모습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유찬혁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다 막혔다.곽보미는 유찬혁을 옆으로 끌어와 웃으며 말했다.“아직 스타도 아닌데 벌써 저렇게 까칠하게 굴고 있어. 불량 식품인 햄버거를 재벌 집 딸이 입에 대기나 하겠어?”유찬혁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고 표정이 확 굳어졌다.“하지만 난 좋아해.”곽보미는 환하게 웃으며 봉지에서 햄버거와 음료수를 꺼냈다.“이 음료수는 안 돼.”유찬혁은 얼음을 넣은
서지현은 유찬혁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모습이 참으로 멋졌다. 특히 금테 안경을 써서 더욱 지적이고 점잖아 보였고 미간 사이에 카리스마도 넘쳐 여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더는 거리에서 중상을 입고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져있었던 그때의 유찬혁이 아니었다. 다친 곳이 다 나았으니 다시 그의 귀한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옆에 예쁘고 재능 있는 여자친구도 있었다.곽보미와 함께 있을 때 유찬혁의 웃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쁨이었다. 그 모습에 서지현도 기뻤고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석진의 표정이...서지현은 웃음을 거두어들이고 숨을 죽인 채 찍소리도 내질 못했다. 요 며칠 아저씨와 함께 지내는 동안 이토록 진지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한참 후 서지현이 조심스럽게 떠보듯 물었다.“아저씨... 왜 절 여기에 데리고 왔어요? 저더러 연예인이 되라고요?”나석진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옆에 앙증맞은 서지현이 서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곽보미가 새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해서 그저 보러 온 것이었다.“아저씨.”서지현은 기분이 쓸쓸해졌지만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보미 언니에게 인사하러 안 가요?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오래 서 있었는데도 우릴 보질 못했어요.”나석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인사?’만약 예전의 성격이었더라면 곽보미와 유찬혁이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가서 갈라놓고 적어도 유찬혁이 좋아하는 꼴은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고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곽보미가 행복한 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저 밀크티 엄청 단가 보네? 찬혁 씨가 사준 것이니까 더 달게 느껴지겠지.’단 걸 입에 대지도 않았던 최연준은 강서연이 만든 쿠키나 케이크는 아주 즐겨 먹었다.나석진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을 축복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아저씨?”서지현은 걱
“왜 그래요?”곽보미가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평소에는 신인을 자주 추천했었잖아요.”나석진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도 말했다시피 그건 평소였다. 만약 오성이었더라면 후배를 추천하고 신인에게 기회를 주었을 테지만 서지현은 예외였다.만약 서지현에게 신분이 생긴다면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과 용모만으로도 단숨에 스타 자리에 앉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인기를 얻게 되면 가려야 할 시비도 많아진다. 특히 연예계처럼 물고 뜯는 바닥은 더욱 그러했다.그녀에게 단단한 배경이 없는 건 둘째 치고 배경이 있다고 해도 몰래 뒤에서 모함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여자 연예인은 인기를 얻게 되면 스캔들이 터지기 쉽다는 것이다...서지현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남자 연예인과 스캔들이 터져 듣기조차 민망한 말이 귀에 들어올 상상만 한다면...나석진의 표정이 삽시간에 싸늘해졌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참, 대체 이런 이상한 느낌은 어디에서 나온 거지?’사실 그도 잘 알지 못했다.“저기요.”곽보미가 나석진을 쿡쿡 찔렀다.“저기요!”“왜요?”나석진은 쌀쌀맞게 그녀를 째려보았다. 유찬혁은 재빨리 다가가 여자친구를 감싸안았고 변호사가 용의자를 쳐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갑자기 왜 그래요?”곽보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니 문득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나석진은 상상력이 풍부한 천재형 선수이다. 유명해진 서지현이 어떤 모습일지 벌써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 모양이다.곽보미는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아직 지현이를 영화에 출연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석진 씨 말대로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신분도 없어서 무턱대고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지현이에게도 안 좋아요.”“누가 카메라 앞에 서는데요?”그때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