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포도처럼 커다란 두 눈이 순식간에 빛을 잃더니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서연 언니... 저 여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아요.”...6월의 맨체스터 날씨는 비가 많이 내려 습했다. 여름이 가까워졌지만 기온이 높지 않았고 밤공기가 여전히 쌀쌀했다.최연준은 얇은 카디건을 가져와 창가에 서 있는 강서연에게 걸쳐주고는 뒤에서 살포시 끌어안았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강서연이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그를 돌아보았다.“연준 씨, 지현이 말이... 다 사실일까요?”최연준의 눈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강서연은 오늘 손미현이 찾아온 일과 서지현이 납치당한 날에 겪었던 일을 최연준에게 말했다.“그날 지현이가 눈이 가려져 있었지만 소리를 정확하게 들었대요. 손미현이 한국어를 한 게 아주 인상 깊었대요.”최연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손미현과 여진국이 그렇고 그런 사이이고 김성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까맣게 속고 있다는 말인데...이 일이 드러나게 되면 김성주는 돈과 사람 모두 잃게 되고 누구보다도 큰 상처를 받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김씨 가문 전체가 피해를 볼지도 모른다.“연준 씨...”최연준의 감정 기복을 느낀 강서연은 작은 손으로 그를 껴안고 가슴팍에 기댔다.“아직은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강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삼촌과 외숙모가 그래도 부부로 오랜 시간 함께 지냈는데 아무런 정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그리고 외숙모가 그럴 만한 배짱도 없다고 생각하고요...”“그럴 리가 없다고?”최연준이 냉랭하게 웃었다.“허, 그 여자 그동안 우리 삼촌을 이용하여 돈을 많이 뜯어냈어. 우리 삼촌 이름을 걸고 사업도 많이 말아먹었고... 인제 드디어 그 이유가 뭔지 알았어. 여진국에게 줬던 거야. 김씨 가문의 돈을 훔쳐서 애인을 먹여 살린 거지.”강서연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연준 씨, 일단 진정해요.”그녀가 최연준을 보며 말을 이었다.“지현이가 그러는데 여
이튿날 나석진은 문 앞에 서 있는 서지현을 보고 너무도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도련님.”연미복 차림의 영국 집사가 예의 바르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저희 도련님께서 앞으로 써니 아가씨를 이곳에 묵게 하면서 써니 아가씨의 안전을 석진 도련님께 맡긴다고 하셨습니다.”나석진은 한참 동안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아침잠이 덜 깬 채 비몽사몽인 상태로 강서연의 전화를 받았다. 서지현이 강서연의 집에서 살면 안전하지 않다는 둥, 곧 큰일을 할 게 있으니 서지현을 잘 지켜야 한다는 둥 이런 소리를 잠결에 들은 것 같았다...그때까지만 해도 나석진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하여 강서연이 서지현을 그에게로 보내겠다고 할 때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진짜로 눈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잠깐만요!”영국 집사를 잡으려던 나석진은 제대로 잡지 못해 하마터면 서지현과 부딪칠 뻔했다.서지현은 캐리어를 끈 채 쭈뼛쭈뼛하며 서 있었다. 나석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표정과 달리 손은 이미 그녀의 가방을 들어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호텔 직원에게 방 하나를 더 잡으라고 했다.“방 카드야.”나석진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이 방에서 지내.”서지현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매일 청소하러 오는 사람이 있고 아래층에 뷔페가 있으니까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도 돼. 방 카드만 종업원에게 보여주면 돼.”“네.”“부족한 게 있으면 나에게 말하고.”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에 나석진은 기침을 두 번 하고는 다시 강조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너 아직 신분이 없어서 내 이름으로 방을 잡은 거거든. 혹시라도 네가 프런트에 전화해서 주문할 때 네 주민등록증이라도 검사할까 봐 그래. 그러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나에게 말해. 내가 프런트에 연락해서 가져다주라고 하는 게 더 편해.”“네, 알았어요.”서지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아저씨... 저 그게 필요한데...”나석진이 눈살을 찌푸렸다.“뭔데?”“그러
“음... 닮지는 않았어요.”서지현이 진지하게 말했다.“아저씨, 목걸이는 참 예쁜 물건이에요.”“뭐야? 내가 안 예쁘다는 소리야?”나석진은 인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비록 예쁘다는 말이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한국 연예계에서 공인한 미남인 건 사실이었다. 국민 첫사랑이라는 타이틀이 괜히 생겨난 건 아니었다.“아니, 그게 아니라요.”서지현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럼 무슨 말이야? 목걸이가 예쁜 물건이라며.”“아저씨가 안 예쁘다는 게 아니라.”서지현이 웃으며 말했다.“물건이 아니라는 말이에요.”“서지현!”한국어가 서툰 혼혈인이라기에는 한국어를 너무 잘했다....새 영화가 준비 단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지만 곽보미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강서연은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채 절망적인 눈빛으로 커피숍에 앉아있는 곽보미를 본 순간 미안함이 밀려왔다.“서연 씨, 그냥 사람 바꾸면 안 돼요?”곽보미가 울상을 지었다.“이 김유정은 대체 뭐예요? 대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건 그렇다 쳐도 희로애락 표정이 다 똑같아요. 나 그냥 천재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할게요. 내가 무슨 천재예요? 이런 사람 하나 가르치지도 못하는데.”강서연은 참다못해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 성설연도 그녀를 이 정도까지는 미치게 하지 않았다.“보미 씨, 조금만 더 참아요.”강서연은 곽보미가 가장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김유정은 진짜 배우가 되고 싶어 해요.”“뭐라고요?”곽보미는 강서연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4컷의 사진을 한 장에 담은 사진이었는데 전부 김유정의 얼굴이었다.강서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똑같은 사진을 네 장이나 보여줘요?”“허. 똑같은 거 아니에요.”곽보미가 냉랭하게 웃었다.“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이 연기한 네 가지 다른 장면이에요.”강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분명 다 같은 표정인데?’“주아 씨였더라면 네 개의 다른 표정을 연기하는 건 물론이고 신마다 아주 조금씩 다른 표정을 여
“당신은...”최연준은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웃었다.“아들을 무사히 낳기만 하면 돼.”“네.”강서연도 따라서 히죽 웃었다.“우리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 골치 아픈 일들이 전부 다 해결됐으면 좋겠어요.”“꼭 그렇게 될 거야. 여보, 겉으로 절대 티를 내선 안 돼, 알겠지? 보미 씨에게도 귀띔해 줘. 잠시만 김유정을 참고 견디라고.”“나 다 알아요.”강서연은 또 문득 뭔가 떠올랐다.“아 참, 여보. 손미현이 그 남자와 거래한 계좌를 반드시 알아내야 해요. 그게 가장 중요한 증거예요.”최연준은 그녀를 다정하게 쳐다보더니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알았어, 여보.”...손미현은 요 며칠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자꾸만 밀려왔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녀가 김유정에게 물었다.“유정아, 엄마 마음이 너무 불안해. 왜 이러지?”팩을 붙이느라 여념이 없었던 김유정은 손미현의 말에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손미현이 바로 짜증을 냈다.“내가 지금 말을 하고 있잖아. 왜 무시해? 아직 유명한 연예인이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잘난 척하는 거야? 네가 오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다 누구 덕인데!”“아이고, 그만 좀 해요. 다 엄마 덕이에요. 됐죠?”김유정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이 불안한 건 뭔가 안 좋은 일이 터지려고 그러나 보죠.”“꺼져!”손미현은 가뜩이나 기분이 별로인데 이런 말까지 들으니 더욱 화가 나 슬리퍼를 들고 김유정을 때리려 했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그녀의 얼굴을 다치게 할 뻔했다.김유정은 엄마가 억지를 부린다면서 한참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갔다.손미현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대체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나타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우며 가끔 헛구역질도 났다...‘그래! 그날 강서연의 집에 다녀오고 나서부터야.’손미현은 잠깐 움찔하다가 머릿속에 문득 서지현의 갈색 곱슬머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 도우미의 얼굴이 한 번 보면 잊히
손미현은 집에 있는 차도 운전하지 않고 길거리까지 걸어 나가서 택시를 탔다. 가는 길 내내 그녀는 마음이 초조했고 여진국네 집 근처에 도착해서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택시는 여진국의 집 밑까지 들어가지 않고 길모퉁이에 멈췄다. 두 사람은 그동안 늘 이렇게 움직였다.사람들의 눈과 귀를 피해 차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 동안 걸었다. 그런데 오늘 조용한 골목길을 돌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순간 움찔한 손미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골목길을 달렸다.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자꾸만 바짝 따라오는 것 같았다.그녀가 돌아보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다시 앞으로 가면 발걸음 소리가 뒤에서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손미현은 잠깐 멈췄다가 눈알을 굴리더니 다른 골목으로 돌아서 여진국의 아파트로 황급히 들어갔다.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야릇한 광경에 그녀는 혈압이 마구 치솟았다.여진국이 두 백인 여자와 소파 위에서 마구 뒹굴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손미현이 그에게 사준 튀르키예 양털 카펫을 깔고 있었다.“으악! 이 X놈, X새끼야!”손미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옆에 있던 꽃병을 냅다 던졌다. 한창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라 그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중 한 백인 여자가 머리를 맞았는데 피부가 째지면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다른 한 여자는 겁에 질린 나머지 옷도 입지 못하고 미친 듯이 뛰쳐나갔다.여진국은 손미현의 목을 잡고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곧이어 방안에서 히스테릭한 울음소리, 싸우는 소리,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족히 30분 넘게 이어지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여진국은 부하에게 들어와서 방을 정리하라고 했다. 손미현은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퉁퉁 부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여진국의 얼굴에도 할퀸 핏자국이 여러 개 생겼다.손미현이 던진 꽃병에 맞아 머리를 다친 백인 여자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
두 사람 모두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매번 산부인과에 올 때마다 모든 게 다 정상이었고 의사도 뭐라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왜...강서연은 긴장한 마음에 최연준의 손을 꽉 잡았다.“여보,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죠?”“그건 절대 아닐 거야.”사실 최연준도 떨리긴 마찬가지였다.평소 입으로는 계속 아들을 싫어하는 척했지만 어쨌거나 그의 핏줄이고 그의 목숨이었다.최연준은 정신을 가다듬고 강서연에게 웃어 보이고는 그녀와 함께 의사 진료실로 걸어갔다.강서연의 주치의는 아주 다정하고 자상한 영국 아주머니였는데 경험도 아주 풍부한 산부인과 교수였다.두 사람이 진료실로 들어오자 의사가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이건 사모님의 검사 결과입니다.”강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수치가 전부 정상인데 의사 선생님이 왜 보자고 하셨지?’최연준을 쳐다보는 의사의 눈빛이 어딘가 의미심장했다.“두 분 긴장해 하지 말아요. 사모님과 아이 모두 아무 문제 없어요. 하지만 도련님이 주의해야 할 점이 있어서 이렇게 보자고 한 거예요.”최연준은 귀를 쫑긋하고 의사의 말에 집중했다.의사가 느긋하게 말했다.“사모님 지금 만삭이라 격렬한 운동을 해서는 안 돼요... 도련님,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 옆에 있는 강서연의 얼굴은 이미 귀밑까지 빨개졌다.의사는 계속 진지하고 본업에 충실한 태도로 검사 결과의 수치를 가리키며 설명했다.“사모님의 이 몇 가지 수치가 조금 불안정해요... 지금 태아의 머리가 점점 골반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단계거든요. 만약 지금 격렬한 ‘운동’을 자주 한다면 태아에게도 좋지 않아요. 게다가 사모님 지금 힘이 따르지 못하니까 도련님이 참으셔야 해요. 사모님이 아이를 무사하게 순산하고 몸조리 잘한 다음에 부부 생활을 점차 늘리도록 하는 게 좋아요...”강서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심장이 빨리 뛰어 후다닥 도망쳤다. 최연준은 그녀를 쫓아가기 전에 의사에게 변명했다.“저 아주 살살했는데 왜
최연준이 뭐라 하려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강서연도 발견하고는 시선을 움직였다.“외숙모 아니에요?”최연준은 본능적으로 강서연을 품에 끌어안았다.손미현이 혼자 온 듯했는데 걷는 모습조차 어딘가 수상해 보였다. 방향을 보니 산부인과 쪽에서 걸어 나온 것 같았다.“외숙모가 왜 여길 왔을까요?”강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설마 우릴 미행한 건 아니겠죠?”최연준은 경호원들을 전부 다 불러온 후 강서연과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미행이든 아니든 나쁜 꿍꿍이가 있어도 절대 뜻대로 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서연아.”최연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집사에게 말해놓을 테니까 당신도 앞으로 뭘 먹을 때 조심해. 삼촌과 외숙모가 가져온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도 마.”“네, 알고 있어요.”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연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잘 지켜야지.”“네... 그래서요?”“그래서 당신 옆에 딱 붙어 자면서 지키려고.”...곽보미의 새 영화가 마지막 준비 단계에 돌입했다.대본을 여러 번이나 수정했지만 확 와닿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김유정이 촬영할 때 자꾸 성질을 부리고 잘난 척하는 바람에 더욱 심란했다.그날 곽보미는 촬영장에서 집중하여 대본을 수정하고 있었다. 다른 배우들은 촬영 준비를 모두 마쳤지만 김유정만 의자에 기댄 채 네일을 받고 있었는데 네일 아티스트가 무릎까지 꿇고 네일을 해주고 있었다.유찬혁이 도시락을 가져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김유정은 그 모습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유찬혁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다 막혔다.곽보미는 유찬혁을 옆으로 끌어와 웃으며 말했다.“아직 스타도 아닌데 벌써 저렇게 까칠하게 굴고 있어. 불량 식품인 햄버거를 재벌 집 딸이 입에 대기나 하겠어?”유찬혁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고 표정이 확 굳어졌다.“하지만 난 좋아해.”곽보미는 환하게 웃으며 봉지에서 햄버거와 음료수를 꺼냈다.“이 음료수는 안 돼.”유찬혁은 얼음을 넣은
서지현은 유찬혁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모습이 참으로 멋졌다. 특히 금테 안경을 써서 더욱 지적이고 점잖아 보였고 미간 사이에 카리스마도 넘쳐 여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더는 거리에서 중상을 입고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져있었던 그때의 유찬혁이 아니었다. 다친 곳이 다 나았으니 다시 그의 귀한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옆에 예쁘고 재능 있는 여자친구도 있었다.곽보미와 함께 있을 때 유찬혁의 웃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쁨이었다. 그 모습에 서지현도 기뻤고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석진의 표정이...서지현은 웃음을 거두어들이고 숨을 죽인 채 찍소리도 내질 못했다. 요 며칠 아저씨와 함께 지내는 동안 이토록 진지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한참 후 서지현이 조심스럽게 떠보듯 물었다.“아저씨... 왜 절 여기에 데리고 왔어요? 저더러 연예인이 되라고요?”나석진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옆에 앙증맞은 서지현이 서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곽보미가 새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해서 그저 보러 온 것이었다.“아저씨.”서지현은 기분이 쓸쓸해졌지만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보미 언니에게 인사하러 안 가요?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오래 서 있었는데도 우릴 보질 못했어요.”나석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인사?’만약 예전의 성격이었더라면 곽보미와 유찬혁이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가서 갈라놓고 적어도 유찬혁이 좋아하는 꼴은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고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곽보미가 행복한 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저 밀크티 엄청 단가 보네? 찬혁 씨가 사준 것이니까 더 달게 느껴지겠지.’단 걸 입에 대지도 않았던 최연준은 강서연이 만든 쿠키나 케이크는 아주 즐겨 먹었다.나석진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을 축복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아저씨?”서지현은 걱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