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도 자식도 없는 게 장사 바닥이에요. 이런 상황에 지금 저와 가족 간의 정을 운운하는 건 금기를 어기는 거나 마찬가지예요.”손미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연준이 한참 어린 손아랫사람이긴 하지만 엄청난 카리스마에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살짝 밀려왔다.“연준아...”손미현은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네 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너도 잘 알잖아. 그냥 애야, 애. 애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겠어? 오늘 너에게 주문을 넘겨줬지만 내일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달라고 할지도 몰라. 허, 네 삼촌이 달라는데 안 줄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연준이 네 체면만 깎이잖아.”“그런가요?”최연준이 웃을 듯 말 듯 했다.“외숙모는 제 체면을 생각해서 이러시는 거군요?”“그럼, 당연하지.”“우리 삼촌이 그 정도로 지능이 낮다고 생각해요?”“그건...”손미현은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때 김성주에게 진심이라면서 죽어도 결혼하겠다고 한 건 그녀였으니 말이다.“허, 외숙모.”최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싸늘하게 비웃었다.“우리 삼촌이 반응이 느리긴 하지만 바보도 아니고 이랬다저랬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에요. 외숙모 아무래도 생각을 잘못하신 거 같아요.”손미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그를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그러니까 넌 주문을 나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 이거지?”최연준은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손미현은 같이 죽자는 식으로 덤벼들었다.“경고하는데 퇴로를 남겨두는 게 좋을 거야. 날 건드렸다간...”“어쩔 건데요?”최연준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허, 유정이 백화점에서 서연이를 난처하게 할 때 퇴로를 생각해 봤어요?”“오빠, 그건 다 오해야.”김유정이 억지소리를 꾸며댔다.“내가 임신을 해본 것도 아니고 튼살이 뭔지 당연히 모르지. 난 그저 신기해서 그런 것뿐이야... 여자의 배에 그렇게 흉측한 게 생길 줄은 정말 몰랐
손미현은 정신을 차리고 목청을 가다듬은 후 다가가 천천히 말했다.“연준아, 가족끼리 얼굴을 붉혀서야 하겠어? 아무튼 이 주문은 남에게 줄 수는 없는 거잖아. 너 평소에도 무척이나 바쁠 텐데 우리 손 잡는 건 어때? 수익은 5대 5로 하고. 네가 절대 밑지는 일은 없을 거야.”최연준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보며 웃었다.“이건 꽤 괜찮은 방법인 것 같네요.”손미현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안색도 다시 환해졌다.“하지만 5대 5는 동의할 수 없어요.”최연준이 싸늘하게 말했다. 손미현은 잠깐 생각하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익 배당 얘기까지 나왔다는 건 호전의 조짐이 보인다는 뜻이다.“허, 그럼 연준이 너는...”“외숙모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손을 잡는 형식은 아니에요. 이 프로젝트는 담당자가 따로 있으니 담당자가 시키는 일만 하면 돼요.”“뭐라고?”손미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러니까.”최연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면 와서 시키는 일을 해요. 다른 건 논의할 필요도 없어요.”...손미현과 김유정이 비틀거리며 별장 대문을 걸어 나왔다.더운 날씨였지만 두 사람의 낯빛은 백지장처럼 새하얬고 식은땀까지 뻘뻘 흘렸다.최연준은 그들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 주문에 대해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았고 참여하고 싶다면 자세까지 낮추라고 했다.손미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입술을 어찌나 꽉 깨물었는지 피가 다 날 지경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엄마, 인제 어떡해요?”김유정이 조급하게 물었다.“집에 돌아가서 그 바보에게 이 일을 해결하라고 할까요?”“소용없어.”손미현은 최연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최연준은 김자옥과 그야말로 판박이였다. 마음을 굳게 먹으면 가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다. 김성주가 아니라 김씨 가문 영감이 나선다고 해도 최연준은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그... 그럼 그냥 이렇게 받아들여야 한다고요?”김유정이
임산부가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는가? 과실을 찾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김유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가볍게 웃었다.“맞아요, 엄마. 아직 앞길이 구만리잖아요. 강서연이 쭉 잘 풀릴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너 어찌할 생각이야?”손미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유정아, 지금은 절대 걔랑 등을 돌려선 안 돼. 알았어? 먼저 고분고분한 척했다가 강서연과 최연준이 경계심을 늦춘 다음에...”“알았어요. 저 다 알아요.”김유정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엄마는 늘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게 문제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처음부터 강서연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의 날들이 아마 더 힘들어질 것이다....며칠 후, 강서연은 김중 그룹의 맨 꼭대기 층 회의실에 제시간에 도착했다.오늘은 패션 프로젝트의 정례회의 날이자 그녀가 프로젝트 팀원들과 만나는 날이다.앞으로 몇 달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생각만 하면 강서연은 온몸에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배를 만지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배 속의 아이도 엄마의 기쁜 마음을 느꼈는지 발을 내밀며 응원을 보냈다.“걱정하지 마. 엄마가 너무 힘들게 일하지는 않을게.”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얌전하게 잘 있어. 몇 달 후에 엄마가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다음에 그때 만나자, 응?”“사모님, 계속 밖에 서 있을 거예요?”이효연이 뒤에서 다가와 히죽 웃었다.“회의 곧 시작해요. 얼른 들어가요.”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만만하게 회의실로 들어갔다.이곳은 김중 그룹에서 가장 큰 회의실이었는데 아주 성대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각 측 대표들이 참석했고 몇몇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도 함께 자리했다.이효연은 자료를 강서연에게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소개했다.“이쪽은 패션 브랜드의 대표들이고 저쪽은 우리 사람들입니다... 사모님은 가운데 자리에 앉으시면 돼요. 테이블에 명찰이 있는데 사모님의 직함은 이사입니다...”강서연이 고개를 들었다.‘가운데?’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김유정은 순간 흠칫했다. 강서연과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지금까지 봤던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아니라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얼굴에 지어진 미소도 복잡미묘했다.이 모습은... 최연준과 어딘가 닮아있었다.김유정은 정신을 가다듬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허, 언니를 부르지 않으면 누굴 불렀겠어요? 저한테 새언니가 몇이나 된다고.”“행정부 매니저가 됐다면서요?”강서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묻자 김유정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행정부는 아주 중요한 부서예요. 그런 부서의 매니저라면 회사의 제도와 규정을 잘 따라야죠. 여긴 회사지, 집이 아니에요.”강서연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날 부르는 호칭이 너무 버릇없는 거 아닌가요?”“당신...”김유정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강서연의 말이 구구절절 일리가 있으니 말이다. 다만 강서연이 호칭을 문제 삼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회사에서 김자옥을 고모라고 불러도 김자옥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사람들의 시선이 김유정에게 쏠렸고 뭔가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뒤에 서 있던 이효연이 심드렁한 얼굴로 비웃었다.“매니저님, 갑자기 호칭을 뭐라 할지 모르겠다면 저희처럼 사모님이라고 불러요.”김유정은 그녀를 째려보기만 할 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그런데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좀 아닌 것 같아요.”이효연이 차갑게 웃었다.“직급으로 따진다면 매니저님은 사모님을 이사님이라고 불러야 해요.”강서연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한참 후에야 불만이 가득한 ‘이사님’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이사님.”김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회의를 시작하셔야죠.”“그래요?”강서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계를 내려다보았다.“그런데 세팅이 채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시작해요?”김유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회의실 세팅은 이미 다 마쳤는데요?”강서연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명찰에 머물렀다.김유정은 이
“지금 묻고 있잖아요.”강서연의 말투가 거세졌다.“누가 회의장을 이렇게 세팅했냐고요!”김유정은 재미난 구경을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전 모릅니다.”“모르면 매니저님이 직접 내 명찰을 정확한 자리에 가져다 놓아요.”강서연의 목소리가 힘차고 쩌렁쩌렁했으며 또 아주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자리에 있던 영국인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도 단번에 알아챘다.김유정은 이 상황이 창피했지만 여전히 억지를 부렸다.“이사님, 회의 시간이 이미 다 지났어요. 계속 이깟 작은 일을 물고 늘어질 건가요? 영국 사람들은 시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렇게 질질 끄시면 이사님이 손을 잡기 싫어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맞아요. 영국 사람들은 시간을 중요시하고 그 사람들만의 규정이 있죠.”강서연이 싸늘하게 웃었다.“하지만 여긴 김중 그룹이고 내가 책임진 프로젝트예요. 내가 진행하는 회의에서 내가 정한 규정이 바로 지켜야 할 규정이에요!”표준적인 영어에 발음도 아주 정확했다. 목소리가 그리 높진 않았지만 현장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했다.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조금 전까지 짜증 내던 대표들도 다시 묵묵히 자리로 돌아갔다.김유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매니저님.”이효연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경멸 섞인 눈빛을 보냈다.“사모님이 시키신 대로 안 하고 뭐 해요? 얼른 명찰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아요.”김유정은 화들짝 놀란 나머지 온몸이 굳으면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매니저님은 부하 직원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이런 중요한 회의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했어요. 아무래도 매니저 자리는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이... 이사님.”“내일부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필요 없어요.”강서연이 차갑게 웃었다.김유정은 창피하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녀가 따지기도 전에 강서연이 손을 흔들자 문밖에 있던 경호원들이 바로 들어와 김유정을 끌어냈다.“언니, 언니
김유정은 한동안 잠잠하다가 또 타깃을 곽보미에게로 옮겼다.이제 더는 강서연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 곽보미를 귀찮게 구는 바람에 곽보미는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그날은 주말이었다. 마침 햇볕도 따스하여 강서연은 정원의 의자에 기댄 채 햇볕 쪼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초인종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집사가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곽보미가 헝클어진 머리와 다크서클이 짙은 모습으로 뛰어 들어왔다.“으악. 서연 씨, 나 좀 살려줘요. 제발 그 여우 같은 여자를 처리해 주면 안 돼요? 제발요.”강서연이 피식 웃더니 곽보미를 끌어당겨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요 며칠 김유정이 곽보미에게 보낸 문자와 메일을 보았다.몸과 마음이 힐링 되는 문구 말고도 사진도 수두룩했다. 섹시한 사진, 민낯 사진, 투명 메이크업 사진, 진한 메이크업 사진, 일상 사진 등을 여러 각도로 찍어서 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공포스러운 건 어젯밤 한밤중에 보낸 얼굴 사진이었다.“이젠 내가 매일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겠어요?”곽보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여주인공 자리를 달라고 맨날 보채요. 이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죠?”강서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차단하면 되잖아요.”“차단 안 해봤을 줄 알아요?”곽보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내가 차단할 때마다 사무실로 찾아온다니까요. 이러니 내가 연수나 할 수 있겠어요? 수업도 제대로 못 듣고 편집도 못 해요.”강서연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안아주었다.따지고 보면 이 일은 강서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강서연이 김유정의 일자리를 자르지 않았더라면 김유정도 맨날 곽보미를 찾아가서 귀찮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더는 못 버티겠어요.”곽보미가 의자를 세게 내리쳤다.천재 감독 곽보미는 그동안 수많은 장면을 연출했었다.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침착함을 잃는 법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김유
강서연은 곽보미의 어깨를 잡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최연준은 경찰을 따라 지하 1층으로 향했고, 두 사람은 천천히 뒤를 따라갔는데 발에 족쇄가 채워진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경찰이 한숨을 쉬며 최연준을 보며 말했다.“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임산부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서연을 돌아봤다.“여기서 기다려, 내가 금방 나올게.”곽보미는 안색이 어둡고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그 계단을 내려가니 지하 1층의 음침하고 좁은 공간이 나왔다.경찰이 문을 열자 안에는 흰 천을 덮고 누워있는 남자였는데 음침한 불빛이 비쳐 등골이 서늘해졌다.곽보미는 문에 기대어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최연준 씨.”경찰이 손으로 가리켰다.“신원을 확인해 주세요.”최연준은 억지로 정신을 버티며 천천히 그 사람에게 다가갔고 손을 살짝 떨면서 그 사람의 얼굴에 덮인 흰 천을 걷어 올렸다.유찬혁이 아니다!그의 심장은 뭔가에 세게 맞은 것처럼 갑자기 심하게 뛰었고 손발에 힘이 빠져 등 뒤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다시 환생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아니에요.”경찰은 끄덕이며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그럼 제 친구는...”“최연준 씨, 걱정하지 마세요.”경찰이 공손하게 말했다.“경력을 총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수색하겠습니다.”곽보미은 담벼락에 기대어 주저앉아 크게 숨을 헐떡이더니 삽시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최연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말했다.“먼저 돌아가서 쉬고 있으세요. 찬혁이는 무사할 거예요.”“지금까지 왜 아무런 소식이 없을까요!”곽보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시간을 끌수록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최연준은 한숨을 쉬고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유찬혁의 능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으로 그는 핸드폰과 여권을 모두 빼앗긴다 해도 어떻게든 그들에게 소식을 전할 방
유찬혁은 감히 크게 움직이지 못하여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보았는데 몸에는 옷을 갈아입지 않았고 흰 셔츠에는 피와 땀으로 흥건하여 볼품이 없었다.상처를 싸맸는데 수법은 매우 허술했다.유찬혁은 고개를 들어 소녀를 보고 잠깐 침묵하다가 물었다.“당신이 저를 구했어요?”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웃었는데 마치 유럽 교회 벽화에 그려진 천사 같았다.“제가 구해줬다고 하면 은혜를 갚을 건가요?”유찬혁은 열이 나서 머리가 아직 좀 띵해 잠시 멈칫했다.그는 텅 빈 머릿속에서 다시 일어난 일을 정리했다.곽보미를 찾으러 맨체스터에 왔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불법 택시에 올라탔다. 그는 몇 번 와본 적이 없어 맨체스터의 길을 잘 몰랐고 차가 골목으로 들어가자 운전기사는 험악한 모습을 드러내며 한패를 불렀다.그 뒤로...그는 칼에 찔렸다.그러다 의식을 잃었고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여기요.”소녀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녀는 유찬혁에게 약 두 알과 물 한 컵을 건네며 빨리 삼키라고 했다.“해열제와 소염제예요.”소녀는 설명했다.“제가 비싼 것을 살 수 없어 이거는 가장 싼 것이에요.”약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 유찬혁은 가볍게 웃었다.그는 약을 먹고 소녀를 보며 물었다.“이름이 뭐예요?”“써니.”써니는 햇빛이라는 뜻이다.이런 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미소도 이렇게 깨끗하니 써니에 어울린다.“당신 이름이 뭐예요?”소녀는 그에게 다가와서 물었다.“외국인인데... 어디서 왔어요?”“제 이름은 유찬혁이고 영어 이름은 없어요. 오성에서 왔는데 혹시 그곳을 들어보셨어요?”유찬혁이 웃으며 대답했다.“오성 출신이에요?”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영어는 순식간에 정통 한국어로 바뀌었고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한 줄로 드러났다.“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더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잖아요. 영어를 그렇게 오래 쓸 필요도 없고요!”“써니 씨는...”“저는 반 영국인이에요.”써니는 미소를 지었다.유찬혁은 고개를 끄덕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