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이 커다란 두 눈을 굴리더니 누가 올지 단번에 알아챘다.“외숙모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고요?”최연준이 가볍게 웃었다.“당신은 어떻게 생각해?”강서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하긴, 이혼하고 애까지 데리고 김씨 가문에 시집온 손미현이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었더라면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최연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럼 난 좀 더 잘게요. 여기 일은 전부 슈퍼맨 최연준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 사모님.”최연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모든 게 최연준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강서연이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초인종 소리가 울렸고 잠시 후 집사가 다가와 알렸다.“도련님, 미현 사모님과 유정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고개를 든 최연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손미현과 김유정은 1층 거실에서 최연준을 기다렸다. 계단을 내려가던 최연준의 눈에 다급함과 초조함, 그리고 불안감이 뒤섞인 두 모녀의 표정이 보였다. 게다가 빈손으로 오지 않고 선물까지 챙겨왔는데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명품 한정판 가방이었다.김유정의 얼굴에 아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딱 봐도 한 번도 써보지 못한 티가 팍팍 났다. 이번에 손미현이 마음먹고 돈을 꽤 쓴 모양이다.최연준은 자신만만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표정은 냉랭했지만 갖춰야 할 예의는 갖췄다.“외숙모, 유정아.”“아이고... 연준아.”손미현이 반갑게 인사했다.“외숙모가 참 오랜만에 너희들을 보러 왔지? 아 참, 서연이는? 이번 달에 산부인과 다녀와야 하는 거 아니야? 유정이 시간 되니까 유정이와 함께 가면 되겠네.”“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가면 돼요.”최연준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한없이 냉랭했다.“그나저나 두 사람은 무슨 일로 우리 집까지 찾아왔어요?”손미현은 강서연을 위해 준비한 작은 성의라면서 선물을 건넸다. 하지만 최연준은 무덤덤하게 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최연준의 싸늘한 모습에 집
“부모도 자식도 없는 게 장사 바닥이에요. 이런 상황에 지금 저와 가족 간의 정을 운운하는 건 금기를 어기는 거나 마찬가지예요.”손미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연준이 한참 어린 손아랫사람이긴 하지만 엄청난 카리스마에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살짝 밀려왔다.“연준아...”손미현은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네 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너도 잘 알잖아. 그냥 애야, 애. 애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겠어? 오늘 너에게 주문을 넘겨줬지만 내일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달라고 할지도 몰라. 허, 네 삼촌이 달라는데 안 줄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연준이 네 체면만 깎이잖아.”“그런가요?”최연준이 웃을 듯 말 듯 했다.“외숙모는 제 체면을 생각해서 이러시는 거군요?”“그럼, 당연하지.”“우리 삼촌이 그 정도로 지능이 낮다고 생각해요?”“그건...”손미현은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때 김성주에게 진심이라면서 죽어도 결혼하겠다고 한 건 그녀였으니 말이다.“허, 외숙모.”최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싸늘하게 비웃었다.“우리 삼촌이 반응이 느리긴 하지만 바보도 아니고 이랬다저랬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에요. 외숙모 아무래도 생각을 잘못하신 거 같아요.”손미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그를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그러니까 넌 주문을 나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 이거지?”최연준은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손미현은 같이 죽자는 식으로 덤벼들었다.“경고하는데 퇴로를 남겨두는 게 좋을 거야. 날 건드렸다간...”“어쩔 건데요?”최연준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허, 유정이 백화점에서 서연이를 난처하게 할 때 퇴로를 생각해 봤어요?”“오빠, 그건 다 오해야.”김유정이 억지소리를 꾸며댔다.“내가 임신을 해본 것도 아니고 튼살이 뭔지 당연히 모르지. 난 그저 신기해서 그런 것뿐이야... 여자의 배에 그렇게 흉측한 게 생길 줄은 정말 몰랐
손미현은 정신을 차리고 목청을 가다듬은 후 다가가 천천히 말했다.“연준아, 가족끼리 얼굴을 붉혀서야 하겠어? 아무튼 이 주문은 남에게 줄 수는 없는 거잖아. 너 평소에도 무척이나 바쁠 텐데 우리 손 잡는 건 어때? 수익은 5대 5로 하고. 네가 절대 밑지는 일은 없을 거야.”최연준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보며 웃었다.“이건 꽤 괜찮은 방법인 것 같네요.”손미현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안색도 다시 환해졌다.“하지만 5대 5는 동의할 수 없어요.”최연준이 싸늘하게 말했다. 손미현은 잠깐 생각하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익 배당 얘기까지 나왔다는 건 호전의 조짐이 보인다는 뜻이다.“허, 그럼 연준이 너는...”“외숙모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손을 잡는 형식은 아니에요. 이 프로젝트는 담당자가 따로 있으니 담당자가 시키는 일만 하면 돼요.”“뭐라고?”손미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러니까.”최연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면 와서 시키는 일을 해요. 다른 건 논의할 필요도 없어요.”...손미현과 김유정이 비틀거리며 별장 대문을 걸어 나왔다.더운 날씨였지만 두 사람의 낯빛은 백지장처럼 새하얬고 식은땀까지 뻘뻘 흘렸다.최연준은 그들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 주문에 대해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았고 참여하고 싶다면 자세까지 낮추라고 했다.손미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입술을 어찌나 꽉 깨물었는지 피가 다 날 지경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엄마, 인제 어떡해요?”김유정이 조급하게 물었다.“집에 돌아가서 그 바보에게 이 일을 해결하라고 할까요?”“소용없어.”손미현은 최연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최연준은 김자옥과 그야말로 판박이였다. 마음을 굳게 먹으면 가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다. 김성주가 아니라 김씨 가문 영감이 나선다고 해도 최연준은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그... 그럼 그냥 이렇게 받아들여야 한다고요?”김유정이
임산부가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는가? 과실을 찾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김유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가볍게 웃었다.“맞아요, 엄마. 아직 앞길이 구만리잖아요. 강서연이 쭉 잘 풀릴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너 어찌할 생각이야?”손미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유정아, 지금은 절대 걔랑 등을 돌려선 안 돼. 알았어? 먼저 고분고분한 척했다가 강서연과 최연준이 경계심을 늦춘 다음에...”“알았어요. 저 다 알아요.”김유정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엄마는 늘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게 문제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처음부터 강서연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의 날들이 아마 더 힘들어질 것이다....며칠 후, 강서연은 김중 그룹의 맨 꼭대기 층 회의실에 제시간에 도착했다.오늘은 패션 프로젝트의 정례회의 날이자 그녀가 프로젝트 팀원들과 만나는 날이다.앞으로 몇 달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생각만 하면 강서연은 온몸에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배를 만지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배 속의 아이도 엄마의 기쁜 마음을 느꼈는지 발을 내밀며 응원을 보냈다.“걱정하지 마. 엄마가 너무 힘들게 일하지는 않을게.”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얌전하게 잘 있어. 몇 달 후에 엄마가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다음에 그때 만나자, 응?”“사모님, 계속 밖에 서 있을 거예요?”이효연이 뒤에서 다가와 히죽 웃었다.“회의 곧 시작해요. 얼른 들어가요.”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만만하게 회의실로 들어갔다.이곳은 김중 그룹에서 가장 큰 회의실이었는데 아주 성대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각 측 대표들이 참석했고 몇몇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도 함께 자리했다.이효연은 자료를 강서연에게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소개했다.“이쪽은 패션 브랜드의 대표들이고 저쪽은 우리 사람들입니다... 사모님은 가운데 자리에 앉으시면 돼요. 테이블에 명찰이 있는데 사모님의 직함은 이사입니다...”강서연이 고개를 들었다.‘가운데?’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김유정은 순간 흠칫했다. 강서연과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지금까지 봤던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아니라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얼굴에 지어진 미소도 복잡미묘했다.이 모습은... 최연준과 어딘가 닮아있었다.김유정은 정신을 가다듬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허, 언니를 부르지 않으면 누굴 불렀겠어요? 저한테 새언니가 몇이나 된다고.”“행정부 매니저가 됐다면서요?”강서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묻자 김유정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행정부는 아주 중요한 부서예요. 그런 부서의 매니저라면 회사의 제도와 규정을 잘 따라야죠. 여긴 회사지, 집이 아니에요.”강서연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날 부르는 호칭이 너무 버릇없는 거 아닌가요?”“당신...”김유정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강서연의 말이 구구절절 일리가 있으니 말이다. 다만 강서연이 호칭을 문제 삼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회사에서 김자옥을 고모라고 불러도 김자옥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사람들의 시선이 김유정에게 쏠렸고 뭔가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뒤에 서 있던 이효연이 심드렁한 얼굴로 비웃었다.“매니저님, 갑자기 호칭을 뭐라 할지 모르겠다면 저희처럼 사모님이라고 불러요.”김유정은 그녀를 째려보기만 할 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그런데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좀 아닌 것 같아요.”이효연이 차갑게 웃었다.“직급으로 따진다면 매니저님은 사모님을 이사님이라고 불러야 해요.”강서연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한참 후에야 불만이 가득한 ‘이사님’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이사님.”김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회의를 시작하셔야죠.”“그래요?”강서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계를 내려다보았다.“그런데 세팅이 채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시작해요?”김유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회의실 세팅은 이미 다 마쳤는데요?”강서연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명찰에 머물렀다.김유정은 이
“지금 묻고 있잖아요.”강서연의 말투가 거세졌다.“누가 회의장을 이렇게 세팅했냐고요!”김유정은 재미난 구경을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전 모릅니다.”“모르면 매니저님이 직접 내 명찰을 정확한 자리에 가져다 놓아요.”강서연의 목소리가 힘차고 쩌렁쩌렁했으며 또 아주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자리에 있던 영국인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도 단번에 알아챘다.김유정은 이 상황이 창피했지만 여전히 억지를 부렸다.“이사님, 회의 시간이 이미 다 지났어요. 계속 이깟 작은 일을 물고 늘어질 건가요? 영국 사람들은 시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렇게 질질 끄시면 이사님이 손을 잡기 싫어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맞아요. 영국 사람들은 시간을 중요시하고 그 사람들만의 규정이 있죠.”강서연이 싸늘하게 웃었다.“하지만 여긴 김중 그룹이고 내가 책임진 프로젝트예요. 내가 진행하는 회의에서 내가 정한 규정이 바로 지켜야 할 규정이에요!”표준적인 영어에 발음도 아주 정확했다. 목소리가 그리 높진 않았지만 현장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했다.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조금 전까지 짜증 내던 대표들도 다시 묵묵히 자리로 돌아갔다.김유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매니저님.”이효연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경멸 섞인 눈빛을 보냈다.“사모님이 시키신 대로 안 하고 뭐 해요? 얼른 명찰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아요.”김유정은 화들짝 놀란 나머지 온몸이 굳으면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매니저님은 부하 직원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이런 중요한 회의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했어요. 아무래도 매니저 자리는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이... 이사님.”“내일부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필요 없어요.”강서연이 차갑게 웃었다.김유정은 창피하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녀가 따지기도 전에 강서연이 손을 흔들자 문밖에 있던 경호원들이 바로 들어와 김유정을 끌어냈다.“언니, 언니
김유정은 한동안 잠잠하다가 또 타깃을 곽보미에게로 옮겼다.이제 더는 강서연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 곽보미를 귀찮게 구는 바람에 곽보미는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그날은 주말이었다. 마침 햇볕도 따스하여 강서연은 정원의 의자에 기댄 채 햇볕 쪼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초인종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집사가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곽보미가 헝클어진 머리와 다크서클이 짙은 모습으로 뛰어 들어왔다.“으악. 서연 씨, 나 좀 살려줘요. 제발 그 여우 같은 여자를 처리해 주면 안 돼요? 제발요.”강서연이 피식 웃더니 곽보미를 끌어당겨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요 며칠 김유정이 곽보미에게 보낸 문자와 메일을 보았다.몸과 마음이 힐링 되는 문구 말고도 사진도 수두룩했다. 섹시한 사진, 민낯 사진, 투명 메이크업 사진, 진한 메이크업 사진, 일상 사진 등을 여러 각도로 찍어서 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공포스러운 건 어젯밤 한밤중에 보낸 얼굴 사진이었다.“이젠 내가 매일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겠어요?”곽보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여주인공 자리를 달라고 맨날 보채요. 이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죠?”강서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차단하면 되잖아요.”“차단 안 해봤을 줄 알아요?”곽보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내가 차단할 때마다 사무실로 찾아온다니까요. 이러니 내가 연수나 할 수 있겠어요? 수업도 제대로 못 듣고 편집도 못 해요.”강서연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안아주었다.따지고 보면 이 일은 강서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강서연이 김유정의 일자리를 자르지 않았더라면 김유정도 맨날 곽보미를 찾아가서 귀찮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더는 못 버티겠어요.”곽보미가 의자를 세게 내리쳤다.천재 감독 곽보미는 그동안 수많은 장면을 연출했었다.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침착함을 잃는 법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김유
강서연은 곽보미의 어깨를 잡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최연준은 경찰을 따라 지하 1층으로 향했고, 두 사람은 천천히 뒤를 따라갔는데 발에 족쇄가 채워진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경찰이 한숨을 쉬며 최연준을 보며 말했다.“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임산부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서연을 돌아봤다.“여기서 기다려, 내가 금방 나올게.”곽보미는 안색이 어둡고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그 계단을 내려가니 지하 1층의 음침하고 좁은 공간이 나왔다.경찰이 문을 열자 안에는 흰 천을 덮고 누워있는 남자였는데 음침한 불빛이 비쳐 등골이 서늘해졌다.곽보미는 문에 기대어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최연준 씨.”경찰이 손으로 가리켰다.“신원을 확인해 주세요.”최연준은 억지로 정신을 버티며 천천히 그 사람에게 다가갔고 손을 살짝 떨면서 그 사람의 얼굴에 덮인 흰 천을 걷어 올렸다.유찬혁이 아니다!그의 심장은 뭔가에 세게 맞은 것처럼 갑자기 심하게 뛰었고 손발에 힘이 빠져 등 뒤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다시 환생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아니에요.”경찰은 끄덕이며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그럼 제 친구는...”“최연준 씨, 걱정하지 마세요.”경찰이 공손하게 말했다.“경력을 총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수색하겠습니다.”곽보미은 담벼락에 기대어 주저앉아 크게 숨을 헐떡이더니 삽시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최연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말했다.“먼저 돌아가서 쉬고 있으세요. 찬혁이는 무사할 거예요.”“지금까지 왜 아무런 소식이 없을까요!”곽보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시간을 끌수록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최연준은 한숨을 쉬고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유찬혁의 능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으로 그는 핸드폰과 여권을 모두 빼앗긴다 해도 어떻게든 그들에게 소식을 전할 방
“여기는 시장님의 연회 자리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죠.”정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곳에 인신매매범이 있다면, 반드시 체포해야겠지요!”“아니에요, 저는 인신매매범이 아니에요!”영미가 격렬히 몸부림치며 외쳤다.“아이를 납치한 건 제가 아니에요! 그건 정대명이 했어요, 모든 게 그의 짓이라고요! 제발 믿어주세요!”하지만 영미의 몸부림은 허공에 흩어졌고 그녀의 비명은 점점 희미해지다 이내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정대명은 이 광경을 보며 무릎이 풀리고 말았다.지금 정대명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곧 자신도 영미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정대명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간절히 애원했다.“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정말 몰랐어요, 그 여자가 이런 사람이었는지! 저는 그냥 돈 받고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런 일인지 몰랐다고요!”“그 말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정호가 손짓하자, 사람들이 정대명을 데리고 가려 했다.그 순간, 정대명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있던 정승우를 향했다.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승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 눈빛에는 끝없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고 아버지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는 듯했다.그러나 정승우는 정대명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었다.정대명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승우의 그 적대적인 눈빛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찔러버렸다. 정대명은 자신이 정승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분통이 터졌다.몇 대 때리긴 했지만, 아버지한테 감히 원한을 품다니?정대명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뒤엉키며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 잡았다. 죽더라도 누군가를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친아들이었다.정대명은 눈빛을 돌리며 표정을 바꾸더니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좋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호텔 후문에서 촬영된 영상이 대형 스크린에 선명히 비쳤다. 화면 속에는 영미와 정대명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뚜렷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음향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왔다.“제가 이미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을 매수했어요. 당신은 그저 그 아이를 훔쳐내기만 하면 됩니다.”“영미 아가씨, 여자애를 훔쳐서 뭘 하려는 건데? 여자애는 값도 안 나가잖아!”“제가 하라는 대로 해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영미의 얼굴은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온몸의 기운이 빠진 영미는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아니, 저 여자가 최씨 가문의 딸을 훔치려고 했다고?”“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매년 이상한 일이 생긴다지만, 올해는 더하네. 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보배 같은 아이를 훔쳐려했다고?”“말도 안 돼...”영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급히 변명했다.“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최 도련님, 제 말을 들어봐 주세요!”“음성이 이렇게 뚜렷한데, 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강소아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영미를 꿰뚫어 보며 입을 열었다.“설마 저 영상 속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영미 씨, 정말 어리석군요.”최군형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공간을 가득 메웠고 그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우리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그렇게 쉽게 매수될 거라고 믿었습니까?”“뭐라고요?”영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문밖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영미가 매수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경호원들이었다.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가운 눈빛에 영미는 몸이 떨렸다.“당신들... 날 배신한 거예요?”영미는 멍한 얼굴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영미야,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강소아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분들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이야. 이분들이 한 행동은 단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뿐이야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