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가 갑자기 무르익었고 주변의 공기마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주아의 귀여운 얼굴이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색다르게 보였다.유찬혁의 얼굴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주아가 가까이 다가가면 자꾸 옆으로 피한 바람에 몸이 기울다 못해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주... 주아 씨.”유찬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제발 진정 좀 하면 안 돼요? 진정해요...”주아는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고 시무룩한 얼굴로 술을 마시며 툴툴거렸다.“정말 재미없네요.”유찬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뭘 그렇게 긴장해요?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요?”주아가 피식 웃었다.오늘 그녀는 몸에 붙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어두운 레드 톤에 수놓아진 큼지막한 금색 꽃이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옷깃에 풀어놓은 단추 사이로 하얗고 기다란 목이 드러났고 가끔 쇄골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고혹적이었다.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유찬혁의 모습만 보면 주아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방금 그건 다른 새 작품의 한 신인데 어때요? 오케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그게...”유찬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거짓말 아니에요. 이것 봐요, 아직 촬영 때 입던 옷도 갈아입지 않았잖아요. 이따가 다른 신도 촬영하러 가야 해요.”“그래요.”유찬혁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랄게요.”주아가 사랑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사실 그녀도 유찬혁의 마음속에 아직 곽보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성설연에게 속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뿐이다.평소 예리하던 변호사도 사랑 앞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감정은 절대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되고 일단 건드리게 되면 푹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주아는 어깨를 들먹였다. 유찬혁에게 호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보다는 일이 더 좋았다. 그리고 그녀가 남자를 고르는 기준은 돈이 많고 얼굴도 잘생긴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없어
“나...”유찬혁은 입술을 적시며 멋쩍게 웃었다.“여긴 술집이야. 너 같은 학생들이 올 수 있는 데가 아니라고. 아까 널 본 것 같아서 따라온 거야... 너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 오빠는 아마 오성 전체를 다 뒤집을걸?”“나 이젠 성인이야...”최연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학업 스트레스도 많은데 나도 스트레스 좀 풀면 안 돼? 누가 학생은 술집에 가면 안 된다고 했어?”“알았어, 알았어.”유찬혁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그럼 너무 늦게까지 놀진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알았어. 안 그래도 지금 가려던 참이었어.”최연희는 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골목 건너편의 큰길로 폴짝폴짝 뛰어갔다.유찬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말투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애써 밝은 척하는 모습이긴 했지만... 아무튼 뭔가 달랐다.그는 자신이 괜한 생각을 했길 바라며 아무래도 신석훈에게 얘기하는 게 낫겠다고 여겼다. 다들 신석훈이 최연희의 남자친구가 되길 바라니까.하여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대리운전을 부른 후 신석훈에게 문자를 보냈다.그 시각 술집과 멀지 않은 어느 한 거리에서 최연희는 책가방을 꽉 껴안은 채 눈앞의 사람을 보며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네... 네가 하라는 거 모두 다 했어. 그러니까 이젠 그 물건 돌려줘.”“다 했다고?”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붉은 석양이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고 병적에 가까울 정도로 몸이 말라 있었다. 하지만 모자 밑에 드러난 눈빛에는 음험함과 잔인함이 섞여 있었다.최연희가 당황해하며 대답했다.“다... 다 했어. 정말이야. 네가 하라는 거 다...”그런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그녀의 책가방을 확 빼앗아 갔다. 화들짝 놀란 최연희가 소리를 지르며 다시 빼앗으려 했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책가방 안의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난잡한 책 사이에 약이 담긴 작고 투명한 약봉지가 있었다.“허, 여기에
인지석은 최연희의 예민한 신경을 계속 자극했다. 그 바람에 최연희는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지석아, 내가 이렇게 빌게...”최연희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제발 나 좀 놔줘. 이런 일 나 진짜 못해... 술집 사람들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마약으로 그 사람들을 해쳐야 하는 건데? 이 일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을 테니까 나 좀 놔줘, 응? 제발... 돈 줄게. 오성을 떠나서 편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줄 테니까 다른 데 가서 잘 살아...”최연희는 너무 세게 운 나머지 숨이 가빠왔고 말도 횡설수설했다.큰 길이긴 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간혹 사람들이 지나갈 때 최연희가 도움을 청하려 하면 인지석은 그녀를 꽉 끌어안고 모자를 들면서 행인들에게 미소로 사과하곤 했다.최연희가 더욱 세게 발버둥 칠수록 인지석은 그녀를 더욱 쉽게 해결했다.“연희야, 그만하고 인제 집에 가자.”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행인들도 부러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최연희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대체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셈이야? 그 가방을 내가 사주겠다고 했잖아.”“이거 놔!”행인들의 눈에는 그저 사랑싸움하는 커플이었다. 커플의 싸움에 끼어들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절망에 빠진 최연희는 목 놓아 울부짖었고 인지석을 벗어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인지석은 병적인 쾌감이 밀려왔다.“그 약을 술집에 갖다 놓기 싫으면 다른 일을 해, 그럼.”최연희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인지석이 싸늘하게 웃었다.“나와 함께 강서연과 최연준을 망가뜨리자.”...윤정재와 윤문희는 강서연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양에서 바로 달려왔다. 아침에 출발하여 해 질 녘에 에덴에 도착했다.문을 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본 순간 최연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뚱냥이도 함께 데리고 왔다...야옹!뚱냥이는 저번보다 살이 더 찐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일을 잘하라고!”최재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그러면 서연이도 더 잘해줄 거야.”‘네?’최연준은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너 왜 그래? 왜 자꾸만 그렇게 멍하니 있어?”최재원은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최연준을 째려보았다. 자신이 직접 배양한 후계자가 이젠 잘생긴 얼굴 말고는 머리가 텅텅 비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할아버지.”최연준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네 와이프가 힘들지 않게 네가 일을 많이 하라고. 우리 서연이는 경위가 없는 사람은 아니야. 매달 너에게 용돈을 준다며? 네가 열심히 일하면 서연이도 알아서 용돈을 올려줄 거야.”말문이 막힌 최연준은 강서연을 멍하니 쳐다보았고 강서연은 배꼽 빠져라 웃었다.‘결국에는 와이프를 위해 일만 하라는 거잖아요. 알았어요...’어차피 평생의 근로 계약을 체결했으니 복종하는 수밖에.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최연준은 강서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입가에 새어 나온 미소가 어찌나 달콤한지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었다.날이 점점 저물어갔다. 그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윤정재는 떠나기 전 남양에서 가져온 영양제와 약을 최연준에게 건네면서 블랙 카드 한 장도 몰래 건넸다.최연준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네 장모에게 절대 들켜선 안 돼.”윤정재는 한껏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무튼... 나도 그리 여유로운 건 아니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이것만으로도 최연준은 충분히 감동했다. 어쨌거나 한도가 없는 블랙 카드이니 말이다. 모든 금액을 윤정재가 부담하니 이젠 담배도 마음껏 피울 수 있게 되었다...‘역시 중요한 순간에는 장인어른밖에 없다니까.’최연준은 흥분한 나머지 목청 높여 인사했다.“고맙습니다, 장인어른.”“아이고, 놀라라...”화들짝 놀란 윤정재는 하마터면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최연준이 피식 웃었다.‘거참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요.’강서연은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예리한 관찰력을 지닌 윤문희는 윤정재 옆으로 다가가더니 손목의 어느 한 혈 자리를 꽉 눌렀다...“으악!”윤정재는 이미지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카드 몇 장이나 더 있어요?”“세 장.”“전부 다 내놓아요.”윤문희의 한마디에 윤정재는 숨겼던 비상금을 전부 꺼냈다. 그러고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까 그 블랙 카드를 다시 최연준에게 건넸다.“장모님, 이건...”최연준은 망설이며 차마 받질 못했다. 괜히 받았다가 더 혼나는 건 아닌지...“괜찮아. 이건 내가 주는 거니까 받아도 돼.”윤문희는 최연준과 강서연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번갈아 보았다.“내 딸도 허락할 거야. 그렇지?”강서연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엄마가 사위를 예뻐해서 주는 건데 당연히 문제없죠.”“그래. 그러니까 받아.”최연준은 그제야 시름 놓고 카드를 받고는 히죽 웃었다.윤정재는 뚱냥이를 안은 채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뚱냥이도 그를 동정하는지 연신 야옹 하고 울었다.‘내 팔자 왜 이래? 따르는 주인마다 하나같이 다 거지야. 이래서 맛있는 걸 얻어먹을 수나 있겠어? 어휴...’뚱냥이와 함께 멀어져가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강서연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아빠는 최연준이 강서연에게 잘해주는 것처럼 엄마에게 잘해줬다. 강서연은 진심으로 기뻤다.“여보, 밖이 추우니까 문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지 마.”최연준은 그녀에게 얇은 카디건을 걸쳐주며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다그쳤다.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집 전화가 울렸다.방한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도련님, 사모님, 요즘 우리 애들이 연희 아가씨를 따라다니고 있는데 확실히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고 어떤 수상한 사람을 만난다고 하네요...”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이내 다시 물었다.“혹시 인지석인가요?”방한서가 잠깐
강서연은 최연준을 끌어안고 가슴팍에 살포시 기댔다. 그의 힘이 넘치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따뜻해졌다.“당신이 연희 아가씨 책가방에 도청 장치를 넣은 걸 아가씨는 알고 있어요?”“몰라.”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게 해서도 안 돼.”“여보...”강서연이 달콤하게 웃었다.“우리 정말 잘 통한다니까요. 어쩜 똑같은 생각을 했을까요?”“응?”강서연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웃기만 하다가 가방에서 USB 같은 작은 물건을 꺼내 컴퓨터에 꽂았다. 그 모습에 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이게 뭐야?”“도청 장치와 비슷한 거예요.”강서연이 고개를 돌렸다.“남양 군대 쪽 특유의 통신 장비인데 휴대 전화의 내용을 조사할 수 있어요. 이 장비는 오래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까 일단 기다려봐요. 곧 소식이 들릴 거예요. 음... 오늘 밤은 아니고 내일 아침이면 소식이 있을 거예요.”최연준의 관심은 마지막 한마디에 있는 게 아니라 남양 군대라는 소리에 멈칫했다.윤씨 가문이 남양에서의 지위가 엄청나다고 하던데 진짜로 군부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렇다면 윤씨네 공주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건 남양 군부대를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건가?최연준은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예전에 낡은 집에서 결혼할 때는 그저 연약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비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여왕이었다. 최연준이 정말로 여왕의 남자가 되었다.“여보, 내가 얘기하고 있잖아요. 들었어요?”“응, 그래...”최연준은 정신을 가다듬고 씩 웃었다.“들었어.”“할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당신 요즘 쩍하면 정신을 딴 데 팔더라고요.”“내가 그랬어?”최연준은 허리를 곧게 펴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아 참, 여보. 이건 언제 준비했어?”“석진 오빠가 가져다줬어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물론 나도 좋은 자원으로 바꿨죠.”“무슨 좋은 걸 줬는데?”“보미 씨의 다음 작품요. 보미 씨가 누굴 선택하든 우리
“이... 이게 다 뭐야?”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최연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그윽한 두 눈에 싸늘함이 스쳐 지나갔다.사진마다 최연희가 노출이 심한 나시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배경은 기괴한 술집과 클럽이었다.게다가 몸을 비틀면서 과장된 포즈를 취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부위를 일부러 드러내려는 것 같았다. 주변에 많은 남자들이 있었고 전부 다 눈 뜨고 쳐다볼 수 없는 그런 사진들이었다.사진을 점점 뒤로 넘기는 최연준의 두 눈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여보, 이건 절대 연희 아가씨가 아닐 거예요...”강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지금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데 돈을 벌기 위해 여자들 사진을 가져다가 악의적으로 편집하는 사람이 많아요.”최연준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도 AI 기술로 얼굴을 바꿀 뿐만 아니라 표정도 똑같이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 중에도 주연상을 탄 남녀 배우의 신작이라고 제목을 달긴 했지만 사실은 기술로 얼굴을 바꾼 영상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연예계에도 적지 않은 연예인들이 이러한 피해를 보고 소송까지 진행했었다.“여보, 이 사진들 전부 인지석이 연희 아가씨에게 보낸 거예요.”강서연이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그들이 조사했던 번호와 같은 번호였다.교활한 인지석은 매번 다른 번호로 최연희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그가 방심한 건지, 아니면 너무 자신감이 넘친 탓인지 여러 개 번호의 마지막 숫자가 다 이어진 숫자였다.최연준은 주먹을 꽉 쥐었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통신 기록에 사진만 있는 게 아니라 최연희와 인지석이 주고받은 메시지도 있었다.「연희야, 넌 내 옆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그 의사가 널 구해주려고 그러는 것 같아? 아니야. 허, 지금 수능 준비하고 있지? 네 실력으로는 절대 못 붙어. 문제를 아무리 풀어도 소용없다고. 수능에서 떨어지면 그 의사도 다시는 널 쳐다보지 않을 거야.」「너에게는 최씨 가문 딸이라는 타이틀밖에 없어. 이것마저 없다
“여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강서연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인지석을 직접 죽이지 않아도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많아요.”“응.”최연준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강서연은 통신 기록을 계속하여 훑어보았다. 최근 것뿐만 아니라 예전 것도 뒤져보았다.최연희가 인지석을 마음에 뒀을 때 두 사람은 매일 연락을 주고받았다. 인지석의 한마디 한마디가 최연희를 정신적으로 통제하면서 자신감을 망가뜨렸고 두려움에 떨게 했다.내용을 훑어보던 강서연은 너무도 화가 나 치가 떨릴 정도였다.최연희와 인지석의 대화 중에 인지석이 최연희에게 마약을 몰래 술집에 가져다 놓으라는 내용도 있었다.“경원이가 그 술집 지분을 갖고 있어.”최연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나중에 술집에서 마약이 발견된다면 배씨 가문도 연루되겠지.”강서연이 화들짝 놀랐다.“이렇게까지 하는 목적이 배씨 가문을 해하기 위해서라고요?”“응.”최연준의 안색이 잔뜩 굳어졌다.인지석은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고 최연희에게 접근했다. 최연희를 정신적으로 통제하면서 남에게 말할 수 없게 만들려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예전에는 최연준이 너무 방심했다. 인지석이 그저 잔디나 깎는 평범한 집사인 줄 알았기에 최연희와 연애를 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여보, 이 번호 좀 봐봐요.”뜻밖에도 인지석의 몇 개 번호와 다른 번호를 강서연이 발견했는데 왠지 모르게 익숙하기도 했다.강서연은 휴대 전화를 꺼내 찾아보았다. 휴대 전화에 최씨 빌라 전체 직원의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었는데 확인 결과 원흥의 번호였다.그녀는 계속 밑으로 내려가며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보았다. 원흥과 최연희의 문자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고 매번 위치만 보냈다. 마지막 문자에서 원흥은 최연희에게 물건을 줄 테니까 늘 만나던 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약속한 날짜가 바로 내일이었다.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강서연과 최연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