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석은 최연희의 예민한 신경을 계속 자극했다. 그 바람에 최연희는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지석아, 내가 이렇게 빌게...”최연희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제발 나 좀 놔줘. 이런 일 나 진짜 못해... 술집 사람들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마약으로 그 사람들을 해쳐야 하는 건데? 이 일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을 테니까 나 좀 놔줘, 응? 제발... 돈 줄게. 오성을 떠나서 편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줄 테니까 다른 데 가서 잘 살아...”최연희는 너무 세게 운 나머지 숨이 가빠왔고 말도 횡설수설했다.큰 길이긴 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간혹 사람들이 지나갈 때 최연희가 도움을 청하려 하면 인지석은 그녀를 꽉 끌어안고 모자를 들면서 행인들에게 미소로 사과하곤 했다.최연희가 더욱 세게 발버둥 칠수록 인지석은 그녀를 더욱 쉽게 해결했다.“연희야, 그만하고 인제 집에 가자.”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행인들도 부러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최연희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대체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셈이야? 그 가방을 내가 사주겠다고 했잖아.”“이거 놔!”행인들의 눈에는 그저 사랑싸움하는 커플이었다. 커플의 싸움에 끼어들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절망에 빠진 최연희는 목 놓아 울부짖었고 인지석을 벗어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인지석은 병적인 쾌감이 밀려왔다.“그 약을 술집에 갖다 놓기 싫으면 다른 일을 해, 그럼.”최연희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인지석이 싸늘하게 웃었다.“나와 함께 강서연과 최연준을 망가뜨리자.”...윤정재와 윤문희는 강서연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양에서 바로 달려왔다. 아침에 출발하여 해 질 녘에 에덴에 도착했다.문을 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본 순간 최연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뚱냥이도 함께 데리고 왔다...야옹!뚱냥이는 저번보다 살이 더 찐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일을 잘하라고!”최재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그러면 서연이도 더 잘해줄 거야.”‘네?’최연준은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너 왜 그래? 왜 자꾸만 그렇게 멍하니 있어?”최재원은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최연준을 째려보았다. 자신이 직접 배양한 후계자가 이젠 잘생긴 얼굴 말고는 머리가 텅텅 비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할아버지.”최연준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네 와이프가 힘들지 않게 네가 일을 많이 하라고. 우리 서연이는 경위가 없는 사람은 아니야. 매달 너에게 용돈을 준다며? 네가 열심히 일하면 서연이도 알아서 용돈을 올려줄 거야.”말문이 막힌 최연준은 강서연을 멍하니 쳐다보았고 강서연은 배꼽 빠져라 웃었다.‘결국에는 와이프를 위해 일만 하라는 거잖아요. 알았어요...’어차피 평생의 근로 계약을 체결했으니 복종하는 수밖에.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최연준은 강서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입가에 새어 나온 미소가 어찌나 달콤한지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었다.날이 점점 저물어갔다. 그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윤정재는 떠나기 전 남양에서 가져온 영양제와 약을 최연준에게 건네면서 블랙 카드 한 장도 몰래 건넸다.최연준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네 장모에게 절대 들켜선 안 돼.”윤정재는 한껏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무튼... 나도 그리 여유로운 건 아니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이것만으로도 최연준은 충분히 감동했다. 어쨌거나 한도가 없는 블랙 카드이니 말이다. 모든 금액을 윤정재가 부담하니 이젠 담배도 마음껏 피울 수 있게 되었다...‘역시 중요한 순간에는 장인어른밖에 없다니까.’최연준은 흥분한 나머지 목청 높여 인사했다.“고맙습니다, 장인어른.”“아이고, 놀라라...”화들짝 놀란 윤정재는 하마터면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최연준이 피식 웃었다.‘거참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요.’강서연은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예리한 관찰력을 지닌 윤문희는 윤정재 옆으로 다가가더니 손목의 어느 한 혈 자리를 꽉 눌렀다...“으악!”윤정재는 이미지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카드 몇 장이나 더 있어요?”“세 장.”“전부 다 내놓아요.”윤문희의 한마디에 윤정재는 숨겼던 비상금을 전부 꺼냈다. 그러고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까 그 블랙 카드를 다시 최연준에게 건넸다.“장모님, 이건...”최연준은 망설이며 차마 받질 못했다. 괜히 받았다가 더 혼나는 건 아닌지...“괜찮아. 이건 내가 주는 거니까 받아도 돼.”윤문희는 최연준과 강서연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번갈아 보았다.“내 딸도 허락할 거야. 그렇지?”강서연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엄마가 사위를 예뻐해서 주는 건데 당연히 문제없죠.”“그래. 그러니까 받아.”최연준은 그제야 시름 놓고 카드를 받고는 히죽 웃었다.윤정재는 뚱냥이를 안은 채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뚱냥이도 그를 동정하는지 연신 야옹 하고 울었다.‘내 팔자 왜 이래? 따르는 주인마다 하나같이 다 거지야. 이래서 맛있는 걸 얻어먹을 수나 있겠어? 어휴...’뚱냥이와 함께 멀어져가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강서연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아빠는 최연준이 강서연에게 잘해주는 것처럼 엄마에게 잘해줬다. 강서연은 진심으로 기뻤다.“여보, 밖이 추우니까 문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지 마.”최연준은 그녀에게 얇은 카디건을 걸쳐주며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다그쳤다.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집 전화가 울렸다.방한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도련님, 사모님, 요즘 우리 애들이 연희 아가씨를 따라다니고 있는데 확실히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고 어떤 수상한 사람을 만난다고 하네요...”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이내 다시 물었다.“혹시 인지석인가요?”방한서가 잠깐
강서연은 최연준을 끌어안고 가슴팍에 살포시 기댔다. 그의 힘이 넘치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따뜻해졌다.“당신이 연희 아가씨 책가방에 도청 장치를 넣은 걸 아가씨는 알고 있어요?”“몰라.”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게 해서도 안 돼.”“여보...”강서연이 달콤하게 웃었다.“우리 정말 잘 통한다니까요. 어쩜 똑같은 생각을 했을까요?”“응?”강서연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웃기만 하다가 가방에서 USB 같은 작은 물건을 꺼내 컴퓨터에 꽂았다. 그 모습에 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이게 뭐야?”“도청 장치와 비슷한 거예요.”강서연이 고개를 돌렸다.“남양 군대 쪽 특유의 통신 장비인데 휴대 전화의 내용을 조사할 수 있어요. 이 장비는 오래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까 일단 기다려봐요. 곧 소식이 들릴 거예요. 음... 오늘 밤은 아니고 내일 아침이면 소식이 있을 거예요.”최연준의 관심은 마지막 한마디에 있는 게 아니라 남양 군대라는 소리에 멈칫했다.윤씨 가문이 남양에서의 지위가 엄청나다고 하던데 진짜로 군부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렇다면 윤씨네 공주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건 남양 군부대를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건가?최연준은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예전에 낡은 집에서 결혼할 때는 그저 연약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비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여왕이었다. 최연준이 정말로 여왕의 남자가 되었다.“여보, 내가 얘기하고 있잖아요. 들었어요?”“응, 그래...”최연준은 정신을 가다듬고 씩 웃었다.“들었어.”“할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당신 요즘 쩍하면 정신을 딴 데 팔더라고요.”“내가 그랬어?”최연준은 허리를 곧게 펴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아 참, 여보. 이건 언제 준비했어?”“석진 오빠가 가져다줬어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물론 나도 좋은 자원으로 바꿨죠.”“무슨 좋은 걸 줬는데?”“보미 씨의 다음 작품요. 보미 씨가 누굴 선택하든 우리
“이... 이게 다 뭐야?”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최연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그윽한 두 눈에 싸늘함이 스쳐 지나갔다.사진마다 최연희가 노출이 심한 나시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배경은 기괴한 술집과 클럽이었다.게다가 몸을 비틀면서 과장된 포즈를 취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부위를 일부러 드러내려는 것 같았다. 주변에 많은 남자들이 있었고 전부 다 눈 뜨고 쳐다볼 수 없는 그런 사진들이었다.사진을 점점 뒤로 넘기는 최연준의 두 눈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여보, 이건 절대 연희 아가씨가 아닐 거예요...”강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지금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데 돈을 벌기 위해 여자들 사진을 가져다가 악의적으로 편집하는 사람이 많아요.”최연준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도 AI 기술로 얼굴을 바꿀 뿐만 아니라 표정도 똑같이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 중에도 주연상을 탄 남녀 배우의 신작이라고 제목을 달긴 했지만 사실은 기술로 얼굴을 바꾼 영상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연예계에도 적지 않은 연예인들이 이러한 피해를 보고 소송까지 진행했었다.“여보, 이 사진들 전부 인지석이 연희 아가씨에게 보낸 거예요.”강서연이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그들이 조사했던 번호와 같은 번호였다.교활한 인지석은 매번 다른 번호로 최연희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그가 방심한 건지, 아니면 너무 자신감이 넘친 탓인지 여러 개 번호의 마지막 숫자가 다 이어진 숫자였다.최연준은 주먹을 꽉 쥐었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통신 기록에 사진만 있는 게 아니라 최연희와 인지석이 주고받은 메시지도 있었다.「연희야, 넌 내 옆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그 의사가 널 구해주려고 그러는 것 같아? 아니야. 허, 지금 수능 준비하고 있지? 네 실력으로는 절대 못 붙어. 문제를 아무리 풀어도 소용없다고. 수능에서 떨어지면 그 의사도 다시는 널 쳐다보지 않을 거야.」「너에게는 최씨 가문 딸이라는 타이틀밖에 없어. 이것마저 없다
“여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강서연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인지석을 직접 죽이지 않아도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많아요.”“응.”최연준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강서연은 통신 기록을 계속하여 훑어보았다. 최근 것뿐만 아니라 예전 것도 뒤져보았다.최연희가 인지석을 마음에 뒀을 때 두 사람은 매일 연락을 주고받았다. 인지석의 한마디 한마디가 최연희를 정신적으로 통제하면서 자신감을 망가뜨렸고 두려움에 떨게 했다.내용을 훑어보던 강서연은 너무도 화가 나 치가 떨릴 정도였다.최연희와 인지석의 대화 중에 인지석이 최연희에게 마약을 몰래 술집에 가져다 놓으라는 내용도 있었다.“경원이가 그 술집 지분을 갖고 있어.”최연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나중에 술집에서 마약이 발견된다면 배씨 가문도 연루되겠지.”강서연이 화들짝 놀랐다.“이렇게까지 하는 목적이 배씨 가문을 해하기 위해서라고요?”“응.”최연준의 안색이 잔뜩 굳어졌다.인지석은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고 최연희에게 접근했다. 최연희를 정신적으로 통제하면서 남에게 말할 수 없게 만들려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예전에는 최연준이 너무 방심했다. 인지석이 그저 잔디나 깎는 평범한 집사인 줄 알았기에 최연희와 연애를 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여보, 이 번호 좀 봐봐요.”뜻밖에도 인지석의 몇 개 번호와 다른 번호를 강서연이 발견했는데 왠지 모르게 익숙하기도 했다.강서연은 휴대 전화를 꺼내 찾아보았다. 휴대 전화에 최씨 빌라 전체 직원의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었는데 확인 결과 원흥의 번호였다.그녀는 계속 밑으로 내려가며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보았다. 원흥과 최연희의 문자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고 매번 위치만 보냈다. 마지막 문자에서 원흥은 최연희에게 물건을 줄 테니까 늘 만나던 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약속한 날짜가 바로 내일이었다.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강서연과 최연
최연준은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웃었다. 안주인인 그녀의 말을 들어야지, 뭐 어쩌겠는가? 안주인이 되려면 안주인의 포스와 카리스마가 넘쳐야 한다.그는 강서연을 품에 안고 커다란 손으로 등을 토닥였다.“그럼 나와 약속해.”최연준이 나지막이 말했다.“원흥에게 정체가 들켜서 물건도 가질 수 없게 되면 절대 원흥과 목숨 걸고 싸워선 안 돼...”“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잘 지킬게요.”최연준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가서 안전한 곳을 찾아 숨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튿날, 강서연은 밀크티와 딸기 에그 타르트를 만들어서 성수 별장으로 갔다.최연희는 방안에만 있었다. 도우미가 강서연에게 최연희가 요 며칠 기분이 계속 별로인 것 같다고 알려줬다.“신 선생님은 의학 세미나에 참석하러 강주로 가셨고 큰 어르신과 사모님은 해외 시장의 일을 처리하러 출국하셨어요...”“그러니까 요 며칠 연희 아가씨가 계속 혼자 집에 있었단 말이에요.”강서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건 아니에요.”도우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아가씨는 대부분 시간 방에서 공부했고 가끔 사촌 언니와 동생들이 오면 얘기를 나누곤 했어요.”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최씨 가문에는 친척이 많아 최연희와 같은 또래인 사촌 언니와 동생도 많았다. 평소 다들 친하게 지내곤 했다. 하지만 최근에 복잡한 일이 많아 최연희도 별로 놀 기분이 아니었다.강서연이 방문을 두드리자 한참 후에 최연희가 방문을 열었다.전보다 한결 초췌해졌고 눈 밑의 다크서클도 짙어진 게 보는 사람이 다 마음이 아팠다.“언니.”최연희가 억지 미소를 지었다.“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아가씨가 공부 열심히 하나 보러 왔죠.”강서연은 아무 일도 없는 척했다.“수험생 전용 디저트도 가져다주려고 왔어요.”그녀가 들고 있는 음식을 본 최연희의 두 눈이 평소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그저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강서연은 주머니를 상 위에 내려놓고 밀크티와
최연희는 손을 뻗어 받으려고 했다.그러나 손을 반쯤 뻗어 허공에 멈출 때 그녀는 갑자기 눈앞이 희미해졌다.강서연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도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 점점 흐릿해지고 미약해져 결국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져서 의식을 완전히 잃었다.강서연은 그녀가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소파에 눕히고 베개와 담요를 더해줬다.나가기 전에 하인에게 당부했다.“연희 아가씨가 좀 피곤해서 잠이 들었어요. 문 앞에서 잘 지키시고 가끔 들어가서 감기 걸리지 않게 이불을 덮어 주세요.”최연준은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강서연은 자기 남편을 보자마자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연희 아가씨에게 이런 짓을 해서 정말 마음이 안 좋아요!”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수면제만 조금 섞어서 괜찮을 거야.”최연준은 부드럽게 위로했다.“한숨 자고 나서 다시 깨어날 때면 모든 일이 지나갈 거야.”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원흥과 약속한 주소로 재빨리 출발했다.약속한 장소는 사실 최상 빌라의 한 외진 마당이다. 집사 숙소와는 거리가 있어 평소에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다.해가 질 무렵이면 이곳도 다른 곳보다 더 어두워 보인다.최연준은 일찍이 사람을 데리고 사방에 매복해 있었고 강서연은 그 잎사귀 한 점 없는 오동나무 아래 홀로 서 있었다.그녀는 모자를 쓰고 꽁꽁 싸매고 있어서 멀리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정말 최연희와 다를 바가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원흥도 도착했다.강서연은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심장박동수가 빨라졌고 뒤돌아보지 않았다.원흥의 살짝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물건은 여기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죠?”강서연은 잠시 멈칫하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고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조용히 녹음 버튼을 눌렀다.“아이고, 연희 아가씨!”원흥은 인내심이 없었다.“지석 형님께서 다 말해 주지 않았어요?”강서연은 여전히 그를 등지고 힘껏 고개를 저었다.“연희 아가씨.”원흥은 수상쩍게 좌우를 살피다가 한 발짝 앞으
“여기는 시장님의 연회 자리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죠.”정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곳에 인신매매범이 있다면, 반드시 체포해야겠지요!”“아니에요, 저는 인신매매범이 아니에요!”영미가 격렬히 몸부림치며 외쳤다.“아이를 납치한 건 제가 아니에요! 그건 정대명이 했어요, 모든 게 그의 짓이라고요! 제발 믿어주세요!”하지만 영미의 몸부림은 허공에 흩어졌고 그녀의 비명은 점점 희미해지다 이내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정대명은 이 광경을 보며 무릎이 풀리고 말았다.지금 정대명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곧 자신도 영미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정대명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간절히 애원했다.“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정말 몰랐어요, 그 여자가 이런 사람이었는지! 저는 그냥 돈 받고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런 일인지 몰랐다고요!”“그 말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정호가 손짓하자, 사람들이 정대명을 데리고 가려 했다.그 순간, 정대명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있던 정승우를 향했다.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승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 눈빛에는 끝없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고 아버지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는 듯했다.그러나 정승우는 정대명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었다.정대명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승우의 그 적대적인 눈빛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찔러버렸다. 정대명은 자신이 정승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분통이 터졌다.몇 대 때리긴 했지만, 아버지한테 감히 원한을 품다니?정대명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뒤엉키며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 잡았다. 죽더라도 누군가를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친아들이었다.정대명은 눈빛을 돌리며 표정을 바꾸더니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좋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호텔 후문에서 촬영된 영상이 대형 스크린에 선명히 비쳤다. 화면 속에는 영미와 정대명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뚜렷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음향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왔다.“제가 이미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을 매수했어요. 당신은 그저 그 아이를 훔쳐내기만 하면 됩니다.”“영미 아가씨, 여자애를 훔쳐서 뭘 하려는 건데? 여자애는 값도 안 나가잖아!”“제가 하라는 대로 해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영미의 얼굴은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온몸의 기운이 빠진 영미는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아니, 저 여자가 최씨 가문의 딸을 훔치려고 했다고?”“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매년 이상한 일이 생긴다지만, 올해는 더하네. 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보배 같은 아이를 훔쳐려했다고?”“말도 안 돼...”영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급히 변명했다.“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최 도련님, 제 말을 들어봐 주세요!”“음성이 이렇게 뚜렷한데, 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강소아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영미를 꿰뚫어 보며 입을 열었다.“설마 저 영상 속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영미 씨, 정말 어리석군요.”최군형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공간을 가득 메웠고 그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우리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그렇게 쉽게 매수될 거라고 믿었습니까?”“뭐라고요?”영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문밖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영미가 매수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경호원들이었다.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가운 눈빛에 영미는 몸이 떨렸다.“당신들... 날 배신한 거예요?”영미는 멍한 얼굴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영미야,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강소아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분들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이야. 이분들이 한 행동은 단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뿐이야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