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곽보미가 나서서 호통쳤다.“두 사람 약 잘못 먹었어요?”나석진과 유찬혁은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며 뭐라 얘기하려다가 다시 눈짓을 주고받고는 꾹 참았다. 이런 상황에 누가 먼저 입을 열었다간 괜히 불똥이 더 튈 게 뻔했다.“됐어요. 여기서 그만 싸워요.”곽보미는 두 사람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면서 손을 흔들었다.“얼른 가요, 얼른.”“알았어요.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나석진이 한발 먼저 그녀 옆에 섰다. 그 모습에 유찬혁은 잠깐 멈칫했다.‘난 왜 하필 이럴 때 반응이 이렇게 늦은 거야?’“보미야, 내가 데려다줄게.”유찬혁이 웃으며 말했다.“경찰서에서 밤새 고생하느라 아침도 못 먹었잖아. 일단 아침부터 먹으러 가자... 학교 앞에 있던 그 죽집 어때? 네가 예전에 좋아했잖아.”나석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유치하긴. 지금 두 사람의 추억으로 날 이기겠다, 이거지?’“변호사님은 아무래도 먼저 사무실로 가서 에이스 변호사의 이미지부터 회복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쨌거나 변호사 바닥이 그리 큰 것도 아니고 어젯밤의 위대한 공적이 한순간에 쫙 퍼져나가면 어떡해요?”“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유찬혁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변호사 업계는 연예계와 달라서 이깟 작은 일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아요. 허, 다들 바쁘고 또 머리를 써야 돈을 벌거든요. 누구처럼 얼굴만 믿는 게 아니라.”“네, 그렇군요.”나석진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바쁘신 분이니 보미 씨는 제가 데려다줄게요. 보미 씨와 먼저 호텔에 가서 뭐 좀 먹으면서... 대본에 관한 것도 상의 좀 하고요.”“아 참!”곽보미도 그제야 문득 떠올랐다.“보충해야 할 신이 있다고 얘기했었죠? 하지만 어떤 앵글로 할지, 어떻게 편집할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요...”“그럼 천천히 생각해요.”나석진이 우쭐거리며 웃었다.“어차피 오늘 스케줄도 없어서 종일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석진 씨, 아무리 그래도...”유찬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석진은 곽보미의
가슴이 움찔한 최연준은 바로 최연희를 뒤따라갔다.강서연은 임신한 터라 빨리 뛸 수 없어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병원 건물 앞에 멈춰 선 최연준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이 건물에는 정신과밖에 없었다. 그리고 심리 상담실이 있었는데 평소 오성의 유명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마음속의 답답한 말들을 꺼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한다.강서연은 깊은 수심에 잠겼다. 최연희가 정신과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게 진학 시험 때문이 아니라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메시지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진학 시험은 줄곧 신석훈이 책임져왔다. 평소 최연희도 수험생 스트레스는 별로 받지 않아 성적도 늘 상위권을 유지하였기에 공부 때문은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그 메시지밖에 없다.강서연은 바로 최연준에게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 속에서 뭔가를 알아낸 듯했다.“여보.”강서연이 그를 덥석 잡았다.“지금 쳐들어가면 안 돼요.”최연준이 발걸음을 멈췄다.‘그래. 흥분한 바람에 머리도 잘 안 돌아가네.’지금 이때 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최연희는 더욱 꼭꼭 숨길 것이고 그에게 한마디도 솔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지난번 최연희는 신석훈네 병원의 정신과를 다녔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가 생겼는데도 가장 먼저 신석훈을 찾지 않았다는 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연준 씨.”강서연의 목소리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한마디 한마디 귀에 또박또박 박혔다.“아가씨 문제는 분명 인지석과 관련 있어요. 문제의 해결은 반드시 저지른 장본인이 해야 해요. 인지석만 찾아낸다면 모든 걸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인지석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몇 달 동안 감감무소식이었고 찾으러 보낸 사람들도 그에 관한 어떤 소식도 알아내지 못했다. 유일한 단서라고는 인지석이 변장술에 능하다는 것이다. 밖에서 다니면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강서연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경수 아저씨에게 조금 더 신경 써달라고
분위기가 갑자기 무르익었고 주변의 공기마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주아의 귀여운 얼굴이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색다르게 보였다.유찬혁의 얼굴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주아가 가까이 다가가면 자꾸 옆으로 피한 바람에 몸이 기울다 못해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주... 주아 씨.”유찬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제발 진정 좀 하면 안 돼요? 진정해요...”주아는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고 시무룩한 얼굴로 술을 마시며 툴툴거렸다.“정말 재미없네요.”유찬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뭘 그렇게 긴장해요?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요?”주아가 피식 웃었다.오늘 그녀는 몸에 붙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어두운 레드 톤에 수놓아진 큼지막한 금색 꽃이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옷깃에 풀어놓은 단추 사이로 하얗고 기다란 목이 드러났고 가끔 쇄골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고혹적이었다.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유찬혁의 모습만 보면 주아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방금 그건 다른 새 작품의 한 신인데 어때요? 오케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그게...”유찬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거짓말 아니에요. 이것 봐요, 아직 촬영 때 입던 옷도 갈아입지 않았잖아요. 이따가 다른 신도 촬영하러 가야 해요.”“그래요.”유찬혁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랄게요.”주아가 사랑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사실 그녀도 유찬혁의 마음속에 아직 곽보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성설연에게 속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뿐이다.평소 예리하던 변호사도 사랑 앞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감정은 절대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되고 일단 건드리게 되면 푹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주아는 어깨를 들먹였다. 유찬혁에게 호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보다는 일이 더 좋았다. 그리고 그녀가 남자를 고르는 기준은 돈이 많고 얼굴도 잘생긴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없어
“나...”유찬혁은 입술을 적시며 멋쩍게 웃었다.“여긴 술집이야. 너 같은 학생들이 올 수 있는 데가 아니라고. 아까 널 본 것 같아서 따라온 거야... 너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 오빠는 아마 오성 전체를 다 뒤집을걸?”“나 이젠 성인이야...”최연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학업 스트레스도 많은데 나도 스트레스 좀 풀면 안 돼? 누가 학생은 술집에 가면 안 된다고 했어?”“알았어, 알았어.”유찬혁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그럼 너무 늦게까지 놀진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알았어. 안 그래도 지금 가려던 참이었어.”최연희는 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골목 건너편의 큰길로 폴짝폴짝 뛰어갔다.유찬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말투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애써 밝은 척하는 모습이긴 했지만... 아무튼 뭔가 달랐다.그는 자신이 괜한 생각을 했길 바라며 아무래도 신석훈에게 얘기하는 게 낫겠다고 여겼다. 다들 신석훈이 최연희의 남자친구가 되길 바라니까.하여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대리운전을 부른 후 신석훈에게 문자를 보냈다.그 시각 술집과 멀지 않은 어느 한 거리에서 최연희는 책가방을 꽉 껴안은 채 눈앞의 사람을 보며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네... 네가 하라는 거 모두 다 했어. 그러니까 이젠 그 물건 돌려줘.”“다 했다고?”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붉은 석양이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고 병적에 가까울 정도로 몸이 말라 있었다. 하지만 모자 밑에 드러난 눈빛에는 음험함과 잔인함이 섞여 있었다.최연희가 당황해하며 대답했다.“다... 다 했어. 정말이야. 네가 하라는 거 다...”그런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그녀의 책가방을 확 빼앗아 갔다. 화들짝 놀란 최연희가 소리를 지르며 다시 빼앗으려 했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책가방 안의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난잡한 책 사이에 약이 담긴 작고 투명한 약봉지가 있었다.“허, 여기에
인지석은 최연희의 예민한 신경을 계속 자극했다. 그 바람에 최연희는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지석아, 내가 이렇게 빌게...”최연희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제발 나 좀 놔줘. 이런 일 나 진짜 못해... 술집 사람들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마약으로 그 사람들을 해쳐야 하는 건데? 이 일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을 테니까 나 좀 놔줘, 응? 제발... 돈 줄게. 오성을 떠나서 편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줄 테니까 다른 데 가서 잘 살아...”최연희는 너무 세게 운 나머지 숨이 가빠왔고 말도 횡설수설했다.큰 길이긴 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간혹 사람들이 지나갈 때 최연희가 도움을 청하려 하면 인지석은 그녀를 꽉 끌어안고 모자를 들면서 행인들에게 미소로 사과하곤 했다.최연희가 더욱 세게 발버둥 칠수록 인지석은 그녀를 더욱 쉽게 해결했다.“연희야, 그만하고 인제 집에 가자.”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행인들도 부러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최연희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대체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셈이야? 그 가방을 내가 사주겠다고 했잖아.”“이거 놔!”행인들의 눈에는 그저 사랑싸움하는 커플이었다. 커플의 싸움에 끼어들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절망에 빠진 최연희는 목 놓아 울부짖었고 인지석을 벗어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인지석은 병적인 쾌감이 밀려왔다.“그 약을 술집에 갖다 놓기 싫으면 다른 일을 해, 그럼.”최연희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인지석이 싸늘하게 웃었다.“나와 함께 강서연과 최연준을 망가뜨리자.”...윤정재와 윤문희는 강서연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양에서 바로 달려왔다. 아침에 출발하여 해 질 녘에 에덴에 도착했다.문을 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본 순간 최연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뚱냥이도 함께 데리고 왔다...야옹!뚱냥이는 저번보다 살이 더 찐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일을 잘하라고!”최재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그러면 서연이도 더 잘해줄 거야.”‘네?’최연준은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너 왜 그래? 왜 자꾸만 그렇게 멍하니 있어?”최재원은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최연준을 째려보았다. 자신이 직접 배양한 후계자가 이젠 잘생긴 얼굴 말고는 머리가 텅텅 비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할아버지.”최연준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네 와이프가 힘들지 않게 네가 일을 많이 하라고. 우리 서연이는 경위가 없는 사람은 아니야. 매달 너에게 용돈을 준다며? 네가 열심히 일하면 서연이도 알아서 용돈을 올려줄 거야.”말문이 막힌 최연준은 강서연을 멍하니 쳐다보았고 강서연은 배꼽 빠져라 웃었다.‘결국에는 와이프를 위해 일만 하라는 거잖아요. 알았어요...’어차피 평생의 근로 계약을 체결했으니 복종하는 수밖에.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최연준은 강서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입가에 새어 나온 미소가 어찌나 달콤한지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었다.날이 점점 저물어갔다. 그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윤정재는 떠나기 전 남양에서 가져온 영양제와 약을 최연준에게 건네면서 블랙 카드 한 장도 몰래 건넸다.최연준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네 장모에게 절대 들켜선 안 돼.”윤정재는 한껏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무튼... 나도 그리 여유로운 건 아니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이것만으로도 최연준은 충분히 감동했다. 어쨌거나 한도가 없는 블랙 카드이니 말이다. 모든 금액을 윤정재가 부담하니 이젠 담배도 마음껏 피울 수 있게 되었다...‘역시 중요한 순간에는 장인어른밖에 없다니까.’최연준은 흥분한 나머지 목청 높여 인사했다.“고맙습니다, 장인어른.”“아이고, 놀라라...”화들짝 놀란 윤정재는 하마터면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최연준이 피식 웃었다.‘거참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요.’강서연은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예리한 관찰력을 지닌 윤문희는 윤정재 옆으로 다가가더니 손목의 어느 한 혈 자리를 꽉 눌렀다...“으악!”윤정재는 이미지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카드 몇 장이나 더 있어요?”“세 장.”“전부 다 내놓아요.”윤문희의 한마디에 윤정재는 숨겼던 비상금을 전부 꺼냈다. 그러고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까 그 블랙 카드를 다시 최연준에게 건넸다.“장모님, 이건...”최연준은 망설이며 차마 받질 못했다. 괜히 받았다가 더 혼나는 건 아닌지...“괜찮아. 이건 내가 주는 거니까 받아도 돼.”윤문희는 최연준과 강서연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번갈아 보았다.“내 딸도 허락할 거야. 그렇지?”강서연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엄마가 사위를 예뻐해서 주는 건데 당연히 문제없죠.”“그래. 그러니까 받아.”최연준은 그제야 시름 놓고 카드를 받고는 히죽 웃었다.윤정재는 뚱냥이를 안은 채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뚱냥이도 그를 동정하는지 연신 야옹 하고 울었다.‘내 팔자 왜 이래? 따르는 주인마다 하나같이 다 거지야. 이래서 맛있는 걸 얻어먹을 수나 있겠어? 어휴...’뚱냥이와 함께 멀어져가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강서연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아빠는 최연준이 강서연에게 잘해주는 것처럼 엄마에게 잘해줬다. 강서연은 진심으로 기뻤다.“여보, 밖이 추우니까 문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지 마.”최연준은 그녀에게 얇은 카디건을 걸쳐주며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다그쳤다.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집 전화가 울렸다.방한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도련님, 사모님, 요즘 우리 애들이 연희 아가씨를 따라다니고 있는데 확실히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고 어떤 수상한 사람을 만난다고 하네요...”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이내 다시 물었다.“혹시 인지석인가요?”방한서가 잠깐
강서연은 최연준을 끌어안고 가슴팍에 살포시 기댔다. 그의 힘이 넘치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따뜻해졌다.“당신이 연희 아가씨 책가방에 도청 장치를 넣은 걸 아가씨는 알고 있어요?”“몰라.”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게 해서도 안 돼.”“여보...”강서연이 달콤하게 웃었다.“우리 정말 잘 통한다니까요. 어쩜 똑같은 생각을 했을까요?”“응?”강서연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웃기만 하다가 가방에서 USB 같은 작은 물건을 꺼내 컴퓨터에 꽂았다. 그 모습에 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이게 뭐야?”“도청 장치와 비슷한 거예요.”강서연이 고개를 돌렸다.“남양 군대 쪽 특유의 통신 장비인데 휴대 전화의 내용을 조사할 수 있어요. 이 장비는 오래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까 일단 기다려봐요. 곧 소식이 들릴 거예요. 음... 오늘 밤은 아니고 내일 아침이면 소식이 있을 거예요.”최연준의 관심은 마지막 한마디에 있는 게 아니라 남양 군대라는 소리에 멈칫했다.윤씨 가문이 남양에서의 지위가 엄청나다고 하던데 진짜로 군부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렇다면 윤씨네 공주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건 남양 군부대를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건가?최연준은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예전에 낡은 집에서 결혼할 때는 그저 연약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비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여왕이었다. 최연준이 정말로 여왕의 남자가 되었다.“여보, 내가 얘기하고 있잖아요. 들었어요?”“응, 그래...”최연준은 정신을 가다듬고 씩 웃었다.“들었어.”“할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당신 요즘 쩍하면 정신을 딴 데 팔더라고요.”“내가 그랬어?”최연준은 허리를 곧게 펴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아 참, 여보. 이건 언제 준비했어?”“석진 오빠가 가져다줬어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물론 나도 좋은 자원으로 바꿨죠.”“무슨 좋은 걸 줬는데?”“보미 씨의 다음 작품요. 보미 씨가 누굴 선택하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