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두 사회자도 웬만한 돌발 상황은 다 겪어본 베테랑들이었다.비록 지금 이 상황이 예상 밖이긴 했지만 그래도 바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웃으며 최연준이 건네는 편지를 받았다.그건 실명으로 고발한 편지였는데 고발인은 바로 방금 영상 속에 나왔던 몇몇 젊은 감독들이었다.남자 사회자는 차분한 말투로 고발 편지를 읽었다. 녹화 현장 전체가 삽시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화들짝 놀란 오승준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시퍼렇게 멍이 든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십여 초 후 침묵이 사라지고 현장이 발칵 뒤집혔다.“오 감독이 상을 저렇게 받은 거였어?”“허,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아주 딱 맞았네. 오 감독의 실력이 아주 형편없는데 어떻게 저런 좋은 작품을 찍을 수 있었겠어?”“그러니까 말이야. 저런 사람이 어떻게 국제상을 받았나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다 표절한 거였구나!”“저런 사람이 감독이라니, 감독이라는 직업에 먹칠한 거나 다름없어.”“다시는 작품 활동 못 하게 금지령을 내려야 해.”사람들은 너도나도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 시각 오승준은 수천 마리의 벌들이 귀에서 윙윙거리는 것 같았다. 당황한 나머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심장이 터져 나올 듯이 쿵쾅거렸고 호흡마저 가빠졌다.“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그는 여전히 발뺌하고 싶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욕설에 묻히고 말았다. 게다가 아까 호되게 두들겨 맞아 온몸의 뼈가 다 아팠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강서연은 옆에 앉아서 그를 싸늘하게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젠장. 예전부터 파렴치한 인간인 줄은 알았는데 작품마저 다 표절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정말 비열하기 짝이 없는 놈이야!”곽보미가 책상을 ‘탁’치며 성을 냈다.“저런 놈을 내가 촬영 기술이 좋다고 공개적으로 칭찬까지 했으니, 내가 정말 눈이 멀었네, 멀었어.”오승준은 지금 뭇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비난을 받다 못해 고개도 들 수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
유찬혁이 히죽 웃었다.“연준 형, 장인어른 걱정을 점점 더하는 것 같은데요?”유찬혁을 노려보는 최연준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유찬혁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최연준은 늘 말은 거칠게 해도 마음만은 따뜻했다.인제 보니 최연준과 윤정재가 비슷한 면이 조금 있는 것 같다. 가족은 서로 닮아간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보다.“아 참, 형, 장인어른만 신경 써서는 안 돼요. 형네 전 장인어른 회사에 일이 터졌어요.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그의 말에 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뭔 소리야 저게?’유찬혁이 웃으며 말했다.“강명원이 형의 전 장인어른이잖아요.”그가 웃으며 고개를 든 순간 최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콜록콜록.”유찬혁은 황급히 설명했다.“강명원의 회사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요. 지금 부도 위기에 처한 것 같아요.”“그래?”최연준이 싸늘하게 웃었다.그가 강주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강명원의 회사는 나름 잘 나갔었다.‘그때 그 능구렁이 같은 강명원이 서연에게 주식도 주려고 했었잖아? 왜 고작 2년 사이에 부도 위기에 처한 거야?’“뭔가 다른 원인이 있겠지.”최연준의 눈빛은 마치 모든 걸 꿰뚫어 본 듯 그윽했다.“가장 주요한 원인은 경영할 줄 모르기 때문이죠.”유찬혁이 덤덤하게 말했다.“항상 오만하고 시건방을 떨어서 회사 사람들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적이 많아지면 당연히 무너지게 되죠. 그런데 제가 장부를 봤는데...”최연준의 두 눈이 반짝였다.“뭔가 알아냈어?”“공적인 장부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강명원의 개인 계좌에 매달 엄청난 금액의 돈이 입금되고 있더라고요.”“어디서 입금된 건데?”“남양요.”‘남양?’최연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잠시 후, 그는 반신반의하며 유찬혁에게 물었다.“설마... 윤정재 회장님이 서연이 어머니에게 주는 돈이야?”유찬혁은 순간 멈칫했다. 최연준의 눈치가 이리도 빠를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행히 공을
강명원은 지금 급전이 필요했다. 윤문희를 보살핀다는 명분이 있어야만 남양에서 입금할 것이다.강명원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까지 해온 이 행각이 위험한 건 사실이다.남양의 윤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하나같이 용맹스럽고 사나운 가문이다. 그들은 그깟 돈은 신경 쓰지 않겠지만 자신이 속았다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만약 강명원이 그들을 이십 년 넘게 속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결과가 어떨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었다.강명원은 눈살을 찌푸리고 집안에서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얼마 전에 감옥에 있는 오승준의 면회를 하러 갔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오승준은 마치 미라처럼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심지어 걸을 때도 교도관의 부축을 받아야만 걸을 수 있었다.그리고 정신 상태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실성한 것처럼 딴소리했고 앞니도 두 개나 빠져 있었다.그런 그의 모습이 역겨워 강명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오승준이 갑자기 얼버무리며 말했다.“형님... 서연이 이젠 예전의 서연이가 아니에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에요. 걔 뒤에... 어둠의 세력이 있고... 남양도 있고 최연준도 있어요.”강명원은 넋이 나간 얼굴로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오승준은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었는데 그 웃음이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형님도 너무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허허... 형님네 사위 감옥에 다녀온 사람이 아니라 바로 최연준이에요. 최연준이 언젠가는 와서 복수할 테니까 기다려요...”교도관은 오승준을 다시 데려갔다.그 생각을 하던 강명원은 다른 꿍꿍이가 떠올랐다. 그에게 있어서 강서연이 최연준과 함께한 건 오히려 더 잘된 일이었다.‘최연준이 서연이를 엄청 신경 쓰나 본데? 서연이 약점만 내 손에 넣는다면 최연준도 어쩔 수 없이 나설 거야. 최연준의 말 한마디면 강진 그룹은 기사회생할 수 있어.’강명원은 잇몸까지 드러내고 교활하면서도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나저나 어디 가서 약점을 찾지?’
“널 아끼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건 딱히 나쁠 거 없어.”그런데 임우정의 이 한마디가 최연준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밖에 서 있던 그는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강서연이 하도 빛나는 사람이어서 집에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다는 걸 최연준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연적이 여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최연준은 어두운 얼굴로 아래층으로 성큼성큼 내려가 베란다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비록 그도 곽보미의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다는 걸 믿지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나중에 진짜로 일이 터졌을 때 해결책이 없으면 더욱 골치가 아플 것이다.방한서의 휴대 전화가 한참 동안 울렸다. 그 시각 그는 한창 배경원과 함께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지난 몇 차례 교훈을 통하여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최연준의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멀리 피하면 피할수록 더 좋다는 걸 깨우치고 나서는 배경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얼마 놀지도 못했는데 최연준의 전화에 소스라치게 놀랐다.“너 어디야?”최연준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치자 방한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도련님이 방해하지 말라면서요...’최연준은 휴대 전화를 들고 씩씩거렸다.‘방한서 이 자식 요즘 왜 이래?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오지 말아야 할 때는 나타나서 방해만 하더니, 필요할 때는 또 코빼기도 안 보이네?’그의 성난 목소리를 들은 배경원은 테이블에 엎드려 배꼽 잡고 웃었다.방한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나름 자연스러운 미소를 쥐어짰지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도... 도련님, 무슨 일 있어요?”최연준은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응!”“하실 분부가 무엇입니까?”최연준이 싸늘하게 말했다.“곽보미에 대해서 좀 알아봐. 대체 정체가 뭔지 알아야겠어.”방한서는 또 어안이 벙벙했다.‘곽보미 씨가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렸나? 그냥 요즘 서연 씨와 가깝게 지낼 뿐이잖아.’방한서는 순간 뚱냥이가 왜 보내졌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역시 사랑에 빠진 남자는 지능
그때 학업이 긴장하여 그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학생들은 모두 있는 집 자식들이었다. 학생들은 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힘든 학업을 이어가던 중에 어느 날 큰일이 터졌고 학생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는 화젯거리로 떠올랐다.그 일은 바로 남학생 탈의실의 유찬혁 옷장에 익명의 연애편지가 나타난 것이었다. 결국 졸업할 때까지 그 편지는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배경원이 다 지난 일을 꺼내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최연준은 눈살을 찌푸렸다.“아무튼 졸업 후에 곽보미는 영화 찍기 시작했어요.”배경원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하지만 지금까지도 찬혁이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최연준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다시 말해 그때 그 연애편지는 곽보미가 쓴 것이었다.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진짜로 곽보미가 쓴 거라면 성적 취향에 문제가 없다는 건데... 하지만...’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찬혁이 학교 다닐 때 짝사랑하던 애가 있었잖아.”배경원이 히죽 웃었다.그때 그가 짝사랑하던 상대는 곽보미가 아니라 학교의 유명한 퀸카였다. 피부도 하얗고 얼굴도 예쁘장한 데다가 다리도 쭉 뻗어 바비 인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최연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리가 없었다.그는 심지어 퀸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연준 형과는 참으로 말이 안 통해.’최연준의 의심을 지워주는 게 아니었더라면 절대 그와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형이 까먹었나 본데 곽보미가 학교 다닐 때는 정상이었어. 너무 빼어난 미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청순했었어. 그러니까... 전형적인 우등생, 엄친딸 이런 이미지였어.”“그런데 지금은 왜 저래?”최연준은 어이가 없었다.“아주 서연이 수호천사가 다 됐어.”이건 배경원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들은 곽보미가 아직 유찬혁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때 혼자 몰래 짝사랑하다가 유찬혁이 다
강서연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그를 툭 쳤다.“경원이랑 통화했어.”최연준은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걔 요즘 수정 씨랑 잘 지내는 것 같더라고. 두 사람 맨날 인터넷에서 핫한 가게를 찾아다녀. 이번에 또 한 집 찾았다면서... 우리도 함께 가자고 하던데?”강서연이 두 눈을 깜빡였다.“수정 씨에 대한 마음이 진짜 진심이에요? 설마 그저 한때일 뿐이다가 새로움이 사라지면 버리는 거 아니겠죠?”최연준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경원이 평소에는 건성 건성하고 진지하지 않을 때도 많지만... 이 세상에서 극히 드문 좋은 남자라는 건 내가 확신해.”“경원 씨에 대한 평가가 아주 높네요?”강서연의 두 눈이 반짝였다.“설마 당신 친구들도 다 좋은 남자니까 당신은 더 좋은 남자라고 얘기하려던 거 아니죠?”“아무튼 주위 환경이 중요하잖아.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지도 중요하고.”최연준이 진지하게 말했다.“난 절대 그런 걸로 거짓말 안 해. 내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다 괜찮은 사람이야.”“알았어요. 그럼 내가 땡잡은 거네요?”“땡잡은 건 나지.”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 사랑이 어찌나 가득한지 꽁꽁 얼어붙은 얼음마저 녹여버릴 것만 같았다.그는 강서연의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내 아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야.”강서연은 쑥스러운 나머지 고개를 숙이고 히죽 웃었다.최연준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하는 얘기도 듣기 좋았다. 게다가 최근 자주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곤 했다.이건 그녀의 마음을 녹여버리겠다는 건가?지난주 친정에 갔을 때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윤문희는 그녀에게 예뻐졌다고 했다.그녀의 칭찬에 강서연은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윤문희의 미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역시 여자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화장품은 사랑이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진심으로 행복하고 독특한 매력을 뽐내면서 생기가 가득해진다.“왜 그렇게 웃어?”최
구현수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담배꽁초를 바닥에 휙 던지자 양털 카펫에 순식간에 시커먼 구멍이 뚫렸다.양연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망해가는 이 집안에서 양털 카펫은 얼마 남지 않은 비싼 물건이었다.“구현수 이 나쁜 새X!”양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 그에게 달려들려 하자 강명원이 말렸다.“날 왜 막아요?”“이리 와.”강명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양연은 계속 강명원에게 잡혀 살았고 강명원이 두 눈만 부릅뜨면 양연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물러섰다.강명원은 힘들게 바닥에서 일어났고 허리가 죽을 것처럼 아팠다.“구현수.”강명원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네 말이 맞아. 우린 대대로 친분을 이어왔으니 널 보살피는 건 당연한 거야.”구현수는 그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여기서 공짜로 먹고살아도 돼.”강명원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앞으로는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해야 해.”“허!”구현수의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그의 목을 덥석 조였다. 화들짝 놀란 강명원은 미처 손쓸 새가 없었고 하마터면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너... 이거 놔...”“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라고.”구현수는 이를 꽉 깨물었다.“이런 낡아빠진 집에 내가 사는 건 당신의 체면을 세워주는 거야.”강명원의 두 눈에 핏발이 섰고 얼굴도 검붉게 변했으며 죽음의 공포가 점점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정신을 거의 잃으려던 그때 구현수가 갑자기 손을 놓았다.강명원은 쿵 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옆에 있던 양연은 사색이 된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오늘 너무 피곤해요.”구현수는 손을 툭툭 털며 차갑게 웃었다.“어머님, 가서 밥 좀 해주시겠어요? 너무 풍성할 필요는 없어요. 닭고기와 생선 요리만 있으면 돼요.”“구현수 너...”강명원은 심하게 기침하다가 구현수가 나가기 전에 소리를 질렀다.“강서연과 결혼하기 싫어?”구현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뚫어
양연의 울부짖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구현수는 손을 툭툭 털고 강명원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집에서 밥을 주지 않으니, 밖에 나가서 먹어야지.구현수가 나간 후 양연은 한참 동안 바닥에 멍하니 앉아있었고 두 눈에 절망이 가득했다.강명원은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일어나 절뚝거리면서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주머니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구현수는 돈만 밝혔고 휴대 전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지갑 안에 사실 돈이 얼마 없었고 휴대 전화 안에 저장된 것이야말로 최후의 적금이나 다름없었다.그 시각, 양연은 거실에서 처량하게 울었다.강명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통화연결음이 한참이나 울렸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누군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회장님?”“허, 회장님이라고 부르지도 마.”강명원은 그의 말투에 담긴 조롱을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따져 물을 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얘기했다.“지석아, 언제 구현수를 데려갈 거야?”“그게... 아직 도련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어요.”“최지한이 이 일을 진작 잊은 건 아니겠지?”“조급해하지 마세요, 회장님.”인지석은 그를 비꼬았다.“아무튼 회장님의 딸이 지금 도련님의 곁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너...”강명원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인지석, 저 재수탱이를 당장 데려가. 계속 이대로 뒀다간 내가 버티지 못해!”인지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짧디짧은 침묵이었지만 강명원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심지어 인지석의 숨소리에서 냉기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회장님, 회장님은 그저 강진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울 자금이 필요한 거 아닌가요?”인지석이 천천히 말했다.“회장님의 딸 강서연 말고는 회장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그렇긴 하지만...”“하지만 우리가 다 함께 힘을 합쳐야죠.”인지석이 싸늘하게 웃었다.“며칠만 더 버티세요. 얼마 후에 구현수에게 강주로 돌아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